[南禪軒 독서일기 2025년 8월 14일 목요일]
《『대동야승』 中 조경남 『난중잡록』 趙慶男 亂中雜錄
1597년 11월 의병장 조경남의 왜적 토벌》 [103]
<1597년 정유년 11월 만력 25년, 선조 30년>
○ 11월 4일 내가 섬진에 이르러 높은 데 올라가 멀리 바라보니 왜적이 놓은 불이 산을 태워 곳곳에서 연기가 일어났다. 잠깐 동안 있는데 몇 놈의 왜적이 말을 타고 달려왔다. 내가 별안간 습격하자 왜적은 말을 버리고 도주하므로 그 말을 거두었다. 초저녁에 하동현으로 들어가 숲속에다 군대를 숨기고 박언량과 같이 나아가 성중을 탐색하니, 성중이 고요한데 단지 금오산(金鰲山) 북쪽 한 곳에서 불빛이 밝았다. 박언량이 말하기를, “성중에 도적이 없으니 산 북쪽의 적을 치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므로, 나는 그를 제지하며 말하기를, “그대는 있어도 없는 듯, 찼어도 빈 듯이 한다는 기묘한 병법을 알지 못해서이다. 대낮에 멀리서 본성을 바라보니 살기가 등등하고 밥 짓는 연기가 어지러웠는데 지금은 숨을 싹 감추고 영영 인기척을 끊었으니, 이것은 반드시 교활하고 속임수 잘하는 왜놈이 우리를 속이려는 계책이다. 내일 자세히 망을 보아서 거사함이 옳겠다.” 하였다.
새벽이 되어 성의 서산으로 올라와 정탐하여 보니, 과연 성에 머무른 적이 그 수효가 대단히 많고 인가와 왜군의 군막이 성내에 그물코처럼 연락되어 소ㆍ말ㆍ닭ㆍ개ㆍ거위ㆍ오리 등의 소리가 진동하였다. 박언량이 혀를 내두르며 말하기를, “아마 우리 장군님이 적을 예측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들은 어육(魚肉)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였다. 즉시 군인과 같이 물러와 숲속에 매복하여 소수의 왜적을 도모하려고 했으나 적병이 많이 흩어져 손을 쓸 도리가 없었고, 겸하여 날이 오래되니 양식이 떨어져서 군사를 거느리고 물러 돌아왔다.
○ 8일 화정(花亭)에 이르렀다. 선전관(宣傳官) 김식(金軾)은 정장(鄭將)의 종제인데 피란했다가 처음 돌아와 의병대에 입속하였더니, 내가 적진으로 싸우려 나갔다는 말을 듣고, 군사 40여 명을 거느리고 뒤따라와 나를 보고 크게 기뻐하면서 나와 같이 일하기를 요구하였다. 나는 정장과 김식과 다 같은 재종간이다. 비록 오랫동안 무인지경으로 들어와 곤란과 고생이 막심했지만 다정한 벗의 두터운 바램을 홀로 저버릴 수 없어 적을 토벌함에 성심껏하여 조금이라도 게으른 적이 없었다. 바로 군사를 연합하여 다시 구례로 향하여 노전촌(蘆田村)에 이르렀다.
○ 11월 11일 본현의 자모장(自募將) 강보기(姜甫起)와 합군하여 80여 명을 거느리고 순천으로 향하여 삽령(鍤嶺)에 이르러 앉아 쉬면서 먼저 박언량 등 10여 명에게 정혜사(正惠寺)ㆍ강청(江淸)ㆍ죽전(竹田) 등지로 들어가 염탐하라 하였다. 왜놈의 권농(勸農)(왜놈은 지진리(止珍里)라 부른다) 유수복(劉守福) 등 3명이 왜교(倭橋)에 부역(赴役)할 승군(僧軍)을 일으켜 보낼 양으로 말을 타고 절에 왔다가 박언량 등에게 포박되었다. 내가 휘파람 소리를 듣고 달려서 절에 가니 김식(金軾)이 유수복 등을 보자 불문곡직하고 그들을 죽이려 하였다. 내가 그것을 말리며 말하기를, “이놈들이 왜적에게 가 붙어서 심부름을 하였으니 그 죄는 만 번 죽어 마땅하오. 그러나, ‘위협에 못 이겨 따른 것이니 다스리지 아니 한다.’는 말은 옛사람이 경계하였고, ‘살인을 즐기지 않는다.’는 아성(亞聖)의 교훈도 있소. 비록 난리 속에 있다 하더라도 인명은 지극히 소중한 것이니, 어찌 함부로 다시 살아나지 못할 형벌을 써서야 되겠소. 원수부(元帥府)로 붙잡아 보내어 죄상을 끝까지 심문한 뒤에 그를 죽여도 늦지 않소.” 하였다. 김식(金軾)은 잔인한 사람이라 듣지 아니하고 무부(武夫) 박만귀(朴萬貴)로 하여금 그 일을 관장하게 하였다.
유수복 등은 목숨을 살려 달라고 빌며 말하기를, “곤궁하여 왜적에게 부역하였지만 본심은 아닙니다. 우리들에게는 각각 소와 말이 10여 마리씩 있으니 의병에 바쳐서 목숨을 대속받기 원합니다.” 하였다. 나는 지극히 그들이 죽음에 나아감을 민망하게 여기고, 김식한테 말하기를, “군수품을 보충해 쓰는 것도 또한 좋은 일이니, 마땅히 그들의 말을 들어 피차의 이익이 되게 하는 것이 무방하겠소.” 하니, 김식이 말하기를, “소와 말이 비록 만 마리라 하더라도 지금 왜적 가운데 있사온데 누가 그것을 잘 가져오겠소.” 하므로, 나는 쾌히 대답하여 말하기를, “내가 담당하여 끌고 오겠소.” 하고, 그 자리에서 절의 중에게 명하기를, “너희들은 형세가 급박하여 민패를 받았으니 한편으로 생각하면 가련하다. 숨어 있어도 소용 없으니 모두 와 내 명령을 들어라.” 하자, 중들이 말을 듣고 달려 나와 울면서 배알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지금 수복 등 세 사람이 바야흐로 사형을 당하게 되었는데 소와 말이 많이 있다 하여 그것을 바칠 터이니 생명을 살려 달라고 한다. 너희들 가운데 이 사람과 서로 절친한 자가 있으면 군인을 인솔하고 들어가 소와 말을 끌어오라.” 하니, 한 중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바로 저와 절친합니다. 제가 명령에 따라 하겠습니다.” 하였다. 나는 박언량 등 8명을 중과 함께 내려보냈다.
이때에 순천 광양 외촌에 주둔한 왜적이 우리나라 사람과 이쪽저쪽에 나뉘어 막을 치고 있었다. 중은 박언량 등을 인솔하고 인가(人家)에 몰래 들어가서 우마 27두를 몰고 돌아왔다. 그런데 박만귀는 김식의 밀부(密符)로서 벌써 세 사람을 절 아래에서 베어 죽였다. 나는 김식과 같이 일할 수 없음을 알고 한참 동안 통탄하였다.
다음날 나와서 노전(蘆田)으로 돌아와 소를 잡아 군사를 먹이고, 박언량 등을 모두 김식에게 넘겨주고 단지 5ㆍ6명과 같이 우마를 몰고 돌아와 정장(鄭將)을 만나니, 정장도 역시 사람을 함부로 죽이는 것을 잘못으로 여기고, 또 나한테 말하기를, “우리 군대의 공은 전적으로 그대가 일을 먼저 시작함에 있는데, 그대는 공을 헤아리지 아니하니 무엇으로써 그것을 보상하겠소?” 하였다. 정장과 양덕해가 자리에 있다가 말하기를, “아무개는 중추(中秋)로부터 왜적 토벌에 마음을 다하느라고 가사를 돌보지 아니하였고, 얼마 안 되는 가을 곡식도 거둬들이지 못하여 노모와 처자가 앞으로 굶주림을 면치 못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후부터 싸워서 얻은 우마를 그에게 주어 의사(義士)의 많은 식구의 생명을 유지시켜 주기 바랍니다.” 하니, 정장이 흔연히 그것을 허락하고 또 즉각 표창하도록 원수부에 보고하려 하므로 나는 모두 굳이 사양하고 따르지 않았다.
○ 이광악(李光岳)과 원신(元愼)이 본도에 이르러 불탄 나머지를 수습하며, 부(府)의 주포촌(周浦村)에 유진(留鎭)하였다.
○ 24일 나는 왜적을 함양 음리(陰里)까지 추격하여 17ㆍ8명을 사살하고 데려온 사람과 짐승이 20여 구(口)나 되었다. 이때에는 내가 평소에 데리고 다니던 왜놈과 싸워온 경험이 있는 자 10여 명을 구례에 있을 때 김식에게 전부 이속시켰기 때문에 내 수하에는 한 사람의 병사도 없었다. 산음(山陰)과 사천(泗川)의 왜적이 함양ㆍ운봉을 분탕질하고 찾아다니며 살생 노략질한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맨주먹을 흔들어 봤자 어찌할 수 없어 미칠 듯이 분격한 마음이 다시 일어나 마음을 스스로 억제할 수 없었다. 그래서 감히 단신으로 몇 명의 하인을 데리고 출발하여 운봉으로 향하니, 양ㆍ박 두 선비도 또한 의기가 솟아서 위험을 무릎쓰고 나를 따랐다.
길을 떠나 함양 산내(山內)에 이르니, 어떤 사람이 훌쩍 날듯이 뒤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앉아서 기다리니 그는 바로 고향 친구 안선달(安先達) 사제(嗣悌)였는데 부모가 모두 오차산(於差山) 싸움에서 죽었기 때문에 항상 왜적을 죽여서 조금이라고 원통함을 풀고자 하였으나 맨손뿐이라 계책을 쓸 도리가 없었는데, 내가 왜적과 싸우려 나간다는 말을 듣고 뒤따라 찾아온 것이다. 그래서 피차에 기뻐하고, 그와 같이 동행하여 당벌촌(唐伐村)에 이르니, 온 마을이 텅 비어서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어둘녘에 한 사람이 와서 알리기를, “왜적 50여 명이 오늘 낮에 두류암(頭流菴)으로 들어와 이내 흩어져 산을 뒤지고 있습니다.” 하였다.
다음날 나는 인원을 나누어 적의 정세를 탐지하기 위해 망을 보게 하였더니, 저녁때에 정탐한 사람이 알리기를, “왜적은 두 패로 나누어 한 패는 마천곡(馬川谷)으로 들어가고, 한 패는 음리(陰里)로 향하였습니다.” 하였다. 이날 밤에 이동하여 등구현(登丘縣)에서 잤다. 함양의 남면 산내에 창고가 있다. 산음 사람 배의중(裴義重)은 날래고 건장함이 남보다 뛰어났는데, 병란을 피하여 이곳에 와 있다가 향도가 되기를 자원하므로 나는 기꺼이 허락하였다. 이튿날 출발하니 근처 사람이 모두 괴이히 여겨 말하기를, “저 사람들이 몇 개의 활을 가지고 50여 명의 적을 당할 수 있겠는가? 어찌 경솔하게 적과 싸우러 나간단 말인가? 운운.” 하였다.
음리(陰里) 건너편의 냇가에 얼음이 살짝 얼어붙어 군사가 건너갈 수 없었다. 앉아서 망을 보니, 왜적 20여 명이 음리로부터 사람과 짐승을 몰고 군막을 불사르고 내려가고 있었다. 나는 군사를 시켜 고함을 치게 하면서 계속 이어서 그들을 추격하여 탄구지(炭九之)에 이르니, 개울은 좁고 산은 험준한데, 우리와 놈들과의 거리가 서로 가까워서 개울을 사이에 두고 교전하였다. 적은 대부분 총을 소지하여 그칠 사이 없이 연달아 쏘아대므로, 나와 안선달ㆍ박군이 돌을 의지하고 마구 쏘아 연달아 6명의 왜적을 맞추니, 적은 사람과 가축을 버리고 엄천촌(淹川村)을 향하여 달아나고, 나는 사람을 시켜 물을 건너가 거두어 오게 하였다. 돌아오다 등구현 앞에 당도하니, 포성이 가까이 들리고, 고함치는 소리가 진동하므로 급히 달려가 망을 보니 본현의 원 남간(南侃)이 내가 왜적을 토벌한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스스로 편치 못하여 아병(牙兵)과 산장이 수십 명을 산내로 보내어 성세(聲勢)를 돕게 하였는데, 적병 30여 명이 마천곡(馬川谷)으로부터 나와 의탄(義灘)에서 서로 만나 방금 접전을 하고 있었다. 나는 군사를 이끌고 달려가 합세하여 크게 싸웠다. 날이 저물자 우리와 놈들이 각각 동서로 후퇴하였다. 황현촌(黃峴村)에서 자려고 하였으나 적의 야습을 염려하여 물러나 백장사(白丈寺)로 올라갔다. 그러나 화살이 다 떨어진 고군(孤軍)이 머물러 있어 봐야 무익하므로 새벽이 되기를 기다려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에 적은 수백 명의 군사를 합하여 곧 황현에 이르러 수색하며 약탈하고 불 지르며 우리 편 사람을 보면 반드시 의병이 떠난 곳을 물었다. 드디어 운봉을 지나 몰래 남원의 동촌(東村)ㆍ번암(蟠岩)ㆍ견천(肩川)으로 들어가서 장수(長水)에 이르렀다. 병사 방어사(防禦使)와 원수부의 별장(別將) 조신옥(趙信玉)ㆍ홍대방(洪大邦) 등이 왜적이 온다는 경보를 듣고서 군사를 인솔하고 운봉에 이르렀다가 왜적이 간 곳을 놓치고 바로 진으로 돌아왔다.
○ 진주와 사천 등 여러 곳에 주둔하였던 왜적이 길을 나누어 침범해 오는데, 1대는 1백 50여 명으로 함양을 경유하여 장수로 향하고, 또 1대는 2백여 명으로 안음ㆍ거창을 향하여 수색하며 살육하였다.
○ 경리 양호(楊鎬)와 제독 마귀가 대군을 거느리고 영남으로 내려갔다. 이때에 원수 권율은 명을 받들고 서울에서 돌아와 이곳에 이르러 수행하였다. 양호가 우리 임금이 같이 일할 수 있는가의 여부를 알고자 하여 어느 날 청하여 말하기를, “제가 대군을 거느리고 남쪽에서 도산(島山)의 적을 토벌하려 하옵는데, 국왕께서는 의당 같이 가 주십시오.” 하니, 임금께서는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곧 응락하였다. 이튿날, 명군이 진을 이동하여 남하하는데, 경리는 주상과 같이 말고삐를 나란히 하여 성을 나와 강가에 이르자 말을 채찍질하여 달리는데 형세가 바람과 번개 같았다. 임금께서도 빨리 달려 뒤지지 아니하였다. 부교(浮橋)를 건너서 준령(峻嶺)으로 올라가는데 벼랑 꼭대기에는 길이 없어서 말발굽이 미끄러지는데도 능히 말고삐를 당겨 위태롭지 아니하고 옥용(玉容)이 편안하여 여유마저 보이니, 경리는 돌아보고 입을 크게 벌렸다. 이어 말에서 내려앉자 경리는 의자에서 일어나 위로하여 말하기를, “왕께서는 같이 일을 할 만하옵니다.” 하였다. 이때에 백관과 호위들이 모두 임금 계신 곳을 잃어버리고 한 사람도 행진하여 따라온 자가 없었는데, 오직 선전관(宣傳官) 유승서(柳承緖)만은 말 뒤에 있다가 임금이 말에서 내리려 하자 앞으로 나가서 고삐를 붙들어 드렸다. 한순간의 위급한 찰나에도 능히 체모를 잃지 아니하시니 저 큰 숲에서 열풍(烈風)과 뇌우(雷雨)를 만나고도 혼미하지 않았던 순(舜)임금과 무엇이 다르랴. 며칠 후에 경리는 바야흐로 군대를 정돈하여 남정(南征)하는데 임금께서 같이 동행하기를 청하였으나 경리(經理)는 허락하지 않았다.
[한국고전종합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