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이 간지로 소에 해당하는 새해가 시작 된지 한 달 가까이 지난다. 고향걸음은 그믐날 새벽 나서기로 하고 음력설을 이틀 앞두고 집 뒤 반송공원에 올라갔다. 친부모 처부모께서 천수 다하고 세상을 뜨자 고향에 대한 애틋한 마음도 예전만큼 아닌가 보다. 그래도 명절에 형제와 조카들을 한 자리 만나면 반갑다. 조카들이 결혼하니 종손자들이 속속 태어나 작은할아버지 소리도 들어야 한다.
공원에 드니 날씨가 쌀쌀하고 귀성이 시작되어선지 평소보다 뜸한 산책객들이었다. 숲을 거닐면서 어릴 적 설날 풍습을 떠올려 보았다. 관솔불 태워가며 그믐밤을 하얗게 새고 새벽에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떡국을 한 그릇 먹으면서 한 살 더 보탰다. 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께 마루에서 문밖 세배를 올렸다. 부모님께도 마찬가지였다. 작은할아버지 댁과 마을 일가 어른들께도 세배를 다녔다.
세배 다녀와서 정성스레 상을 차려 조상님께 해가 바뀜을 아뢰는 차례를 올렸다. 차례를 마치면 어른들은 음복을 하고 아이들도 상에 올랐던 과일이나 유과를 들었다. 설날 새벽에 떡국을 먹었다만 차례 지내고 메밥에 나물을 섞은 비빔밥으로 온 식구가 아침을 먹었다. 어려서는 새 옷이나 새 신발은 으레 설날에 맞추어 설빔으로 입고신고 했다. 세배하고 받아보는 약간의 용돈도 엄청 큰돈이었다.
마을에선 어른들은 보름까지는 설로 간주하고 별다른 농사일은 안 했다. 당산나무 돌무더기 쌓은 곳에서 동신제를 지냈다. 제주로 뽑히는 사람은 지나간 해 액이 없던 집의 바깥사람이었다. 당산부터 제주네 집까지는 황토를 점점이 뿌려 부정 타지 않도록 했다. 산신제도 뒷산 바위아래 터 잡아둔 자리서 같은 날 지냈다. 경건하게 제를 지내면서 마을이 안녕하고 풍년이 들기를 소박하게 빌었다.
보름까지 상쇠가 앞장선 마을농악대가 지신을 밟았다. 공동우물터나 빨래터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그리고 집집마다 농악대가 순례했다. 안마당, 바깥마당, 부엌, 외양간, 곳간 등 집안 구석구석 신명나게 사물을 두들겼다. 한바탕 공연이 끝나면 마당에 멍석을 펴서 술과 안주를 대접했다. 때로는 쌀이나 보리쌀을 조금씩 추렴하기도 했다. 이 곡식으로 마을 공동기금을 마련해 요긴한 때 썼다.
아이들도 보름날까지는 연을 날렸다. 겨우내 날렸던 연은 보름날 달집을 지으면서 솔가지와 청대 끝에 매달았다. 보름달이 덩그렇게 솟아오를 때 한 해 소원을 빌며 달집을 태웠다. 어린 시절 설과 보름 풍습을 회상하다 반지동 대동아파트 쪽으로 내려섰다. 내친김에 조금 더 걸어보기로 하고 건너편 명서동 뒷산으로 방향을 정했다. 지귀상가에 이르니 설에 쓸 과일과 생선들이 많이 보였다.
코롱아파트 뒤로 난 등산길을 올랐다. 인근 주민들이 아침저녁 자주 이용하는 산책길이다. 곳곳에 운동기구들이 마련되어 있다. 예전에 내가 명서동 살 적 더러 찾았던 산이었다. 산 속에 들면 올망졸망 갈래 길에 여럿 나온다. 약수터도 세 곳이나 있어 주민들이 자주 이용하고 있다. 전에는 예사로 여겼는데 산 이름이 ‘태복산(太福山)’이었다. 야트막한 산이라 웬만한 지도에는 나오지 않는 산이다.
뚜벅뚜벅 걸으면서 내가 오르는 산 이름을 음미해 보았다. 클 태(太) 자에 복 복(福) 자라. 크게 복을 받는 산이라는 풀이였다. 이 산에 오르는 사람이나, 이 산 아래 사는 사람 모두 복을 크게 받고, 많이 받았으면 했다. 나라 안팎에서 IMF보다 더 어려워질 경제전망이 나오고 있다. 청년취업난은 더 심각하고 실질성장률이 마이너스가 될 것이라고 한다. 국민의 주름이 주금이나마 펴지길 바랐다.
그리 높지 않은 산정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봉곡동과 명서동은 단독 주택지였다. 시티세븐은 우뚝 솟았고 멀리 대방동까지 아파트가 숲을 이루었다. 이미 귀성길에 오르거나 오를 채비를 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가족이 창원에 모여 설을 보내는 집도 더러 있을 것이다. 그 때 손전화가 울려 받았더니 지인으로부터 설 잘 쇠라는 안부전화였다. 나도 집안이 모두 편하길 바란다고 했다. 09.0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