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식으로 관하는 인간과 세계 28부~1(습기와2취3자성,신어는무기체는思)
由諸業習氣 모든 업의 습기와
二取習氣俱 이취의 습기가 함께 함에 의하여
前異熟旣盡 앞의 이숙이 이미 다하면서
復生餘異熟 다시 다른 이숙을 생겨나게 한다 19誦
“상분과 견분,명과 색,심왕 및 심소,근본과 지말(本末), 그 취함(彼取)은 모두 이취(二取)에 포함된다.“ p757자운규기의술기에의한,주석성유식론,한산암,
“이것은 업의 기분이라고 함은 기氣를 해석하고, 현행의 훈습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함은 습習을 해석한다.이 업은 훈습해서 이룬다. 이 습기는 살바다 등에서 과거의 체가 있는 과거의 업이라고 함을 가려내고, 그리고 순세외도가 일체의 결과는 오직 현재의 업의 소득으로서 지을 때에 곧 받는다고 설하는 것을 가려낸다. 지금 이 습기는 이치가 곧 그렇지 않다. 과거의 무간멸의 현행이 훈습함에 의하기 때문이고, 종자는 순간순간 전이 멸하고 후가 일어나므로 항상 현재에 있기 때문이다.“
이 사바세계는 분단생사이며 3계는 물질로 이루어진 생각으로 이루어진 번뇌장으로 이루어진 세상입니다. 한편 소지장은 습기의 장애이기에 생사윤회를 하지 않습니다. 변역생사는 몸인 신체를 유지하지만 죽지 않는 몸입니다. 보살은 중생제도에 대한 선정과 원력으로 무루법을 증장하여서, 소지장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2승이나 타의 수행은 번뇌나 생각을 멸진하여서 윤회를 벗어나는 방법입니다. 즉 알아차림입니다. 생각이 없는 공이 지속된다면 이것이 해탈 열반입니다. 이것은 번뇌장이며 견소단입니다.
보살의 부사의 변역생사는 8지보살이상의 불퇴전의 무생법인으로 극락세계와 같습니다. 보살의 신체는 아직 습기의 유루법이지만 번뇌장이 아니기에 윤회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유정과 2승들은 지극히 미묘하고 청결하고 수승한 붓다님과 보살의 몸과 경계는 알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소지장의 수소단은 자량위 가행위 통달위 수습위 구경위의 5단계에서 수습위의 보살수행법입니다. 통달위에서 진리인 진여를 깨달아 증득하여서,
여기서 다시 보살은 내부의 습기를 제거하는 수행에 진입하고 있습니다. 2승은 통달위에서 열반에 들 수 있습니다. 변역생사는 자비와 원력으로 유루의 신체를 유지하지만 선정력으로 물러나지 않습니다. 여기는 번뇌와 생각을 벗어난 경계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처음 깨달음을 얻은 이는 갓 깨어난 병아리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즉 초지보살에서 8지까지가 1아승지겁의 수행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습기는 살바다 등에서 과거의 체가 있는 과거의 업이라고 함을 가려내고, 그리고 순세외도가 일체의 결과는 오직 현재의 업의 소득으로서 지을 때에 곧 받는다고 설하는 것을 가려낸다“에서
이 습기는 유루이지만 과거의 체이라면 생사윤회에 속하는 것이 되어 소멸되는 업종자입니다. 그러나 무루의 선정삼매에 의하여 습기의 신체는 지금 현행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습기의 신체의 결과는 훈습되어진 것으로 현행의 결과로 지금 업보를 받을 수는 없습니다. 습기가 아닌 업의 종자는 무간멸로 사라지고 태어나지만, 습기는 그대로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성문 연각 보살의 의성신(意成身)은 이렇게 수명을 늘릴 수 있으며 만약 그 국토이라면 8식 종자가 삼매이라서 죽거나 윤회하지 않습니다.
즉 理界에 소속되어져 있습니다. 붓다님의 정토도 불퇴전의 삼매이라서 태어나기만 하면 죽지 않습니다. 소지장이 이미 소멸되었기에 번뇌와 고통이 없습니다. 일체법이 바로 佛法입니다. 즉 연기법이기에 一乘의 정토가 부처님 국토입니다. 붓다님의 무량광명의 가피로 업장을 소멸하여 씻으면 정토에 태어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염불수행이 가장 필요한 이유입니다. 인간 몸 받기가 산하대지의 흙에 비유하면 손톱위의 흙이나 먼지의 양과 같아서, 사람으로 태어나기를 기대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이것은 손톱경에 있습니다.
맹구우목, “인신난득 어삼보중 신경존중 역난가득 문피여래명호 배난어차”, 약사여래본원경입니다. 사람몸 받기 어렵고, 삼보님을 믿고 공경하기 어렵고, 여래님 명호를 듣고 칭명하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모두 거의가 3악도 소속이며 성격과 성정이 음흉하며 교활하고 포악하기 때문에, 사람으로 있을 때 3계를 탈출하여서 극락정토가 유일한 희망입니다. 우리들의 내면과 내심은 자신도 보장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사이코 패스, 소시오 패스 등 누가 누군지 알 수 없습니다. 선악 진위가 어렵기 때문에 함부로 움직이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 즉 가만히 있는 것이 편리합니다.
“상분과 견분,명과 색,심왕 및 심소,근본과 지말(本末), 그 취함(彼取)은 모두 이취(二取)에 포함된다.“에서
2취는 주관과 객관, 정신과 물질, 8식과 6식 등의 현상으로 나타나는 연기법입니다. 이것은 3자성에 의해서 성립된 세계입니다. 변계소집은 심왕의 작용이며 의타기성은 내부의 7식 작용이며, 원성실성은 자성인 8식의 작용입니다. 이 3성은 모두 내부의 것으로 識의 작용 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식이라 함은 궁극적으로 습기를 뜻하고 있습니다. 습기는 유루이나 선정과 원력에 의하여 보살은 무루의 신체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습기의 마지막은 10지보살의 끝에서 금강유정에서 붓다님이 될 때 모두를 버릴 수 있습니다. 현행의 습기는 등무간연에서 현재에서 이숙인으로 사라지고 훈습하여서 이숙과로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숙과는 종자입니다. 다시 무간멸의 습기는 이숙인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결국 항상 존재하는 것은 종자이며 습기는 중간에 중단되고 있습니다. 즉 무루의 삼매가 중간에 습기를 훈습하여서 청정한 신체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구경위에서는 2취의 습기가 원성실의 자성으로 2취를 이루고 있습니다. 2取 자체는 없앨 수가 없습니다. 일체가 식이다고 하는 것은 3자성이 모두 3무자성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식은 실체가 없으며 일체법은 상호간에만 존재하는 것이며, 3자성에는 습기와 2取가 있습니다.
모든 업을 해석함
((모든 업이라 함은, 복업 비복업(非福) 부동업(不動)을 말한다. 곧 유루의 선 불선의 사업(思業)이다. 업에 3가지가 있기 때문에 모든 업이라고 한다. 복은 뛰어나다(勝)는 뜻이다. 자체 및 결과 모두 애락(愛樂)할 만하니, 양상이 수승하기 때문이다. 비복이라고 함은 애락할 만하지 않은 것이다. 자체 및 결과 모두 사랑할 만하지 않으니, 양상이 비열(鄙劣)하기 때문이다. 부동이라고 함은 바뀔 수 없다(不可改轉)는 뜻이다. 그 업은 많든 적든 하나의 경계에 머물러서 이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가사지론에서 말한다. 말하자면 선취(善趣)의 이숙 및 5취에 수순하는 감수를 감응하는 선업을 복이라고 이름한다. 그런데 지옥에서 역시 별보의 선업이 있다고 설하는 것은 등류과를 받는 것이니, 시원한 바람이 신체에 접촉되는 등과 같다. 별보에 상사(相似)한 업을 이름하여 선이라고 하는 것이다. 또 지옥의 모든 괴로움을 경미하게 만드는 것을 이름하여 선이라고 한다. 비복업이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악취의 이숙 및 5취에 수순하는 이숙을 감응하는 것이라고 한다. 처음은 3악취의 총업이고, 뒤는 5악취의 별업이다. 부동이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색계와 무색계의 이숙 및 색 무색계에 수순하는 감수를 감응하는 업이라고 한다. 앞은 총업이고 뒤는 별업이다. 대법론에서는 설한다. 문, 무엇 때문에 색 무색계의 업을 이름하여 부동이라고 하는가? 답, 욕계의 다른 취(餘趣)의 업과 같은 것은, 연을 만나 전전해서 다른 취처(趣處)에서 감수를 얻지만, 그 업은 그렇지 않으니 결정코 자처(自處)에서 감수하기 때문이다.(소위 감수부동) 문, 어째서 그런가? 답,선정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산위의 업(散業)과 같지 않다. 또 선정의 지위에 포함되는 것을 이름하여 부동이라고 한다.(소위 경계부동) 선정은 능히 하나의 경계에 머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3업은 신 어 의에 통한다. 의업은 3계에 통하고, 신 어업은 오직 2지(욕계와 초선)만이니, 심구 사찰이 있기 때문이다. 신 어를 디뎌서(遊履) 신 어를 움직이기 때문에, 이름하여 업이라고 한다. 신 어는 오직 무기여서 선 악의 성품이 아니기 때문에, 오직 사로써 체로 한다))
“신 어를 디뎌서(遊履) 신 어를 움직이기 때문에, 이름하여 업이라고 한다. 신 어는 오직 무기여서 선 악의 성품이 아니기 때문에, 오직 사로써 체로 한다“에서
몸과 말을 사용하여서 표현되면 이것은 생각이 나타난 것입니다. 식종자입니다. 선 악에 따라서 습기와 업종자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색계 무색계가 무루의 선입니다. 선은 유루이지만 삼매이기에 무루입니다. 선한 생각이 삼매이거나 무기일 때 이것은 습기이며 이숙인입니다. 습기가 현행이 될 때 업종자가 되어 증상연으로 8식에 저장되며, 습기는 이숙인이 되어 업보는 받지 않습니다.
이 때 8식이 청정을 유지할 때는 업종자는 청정종자로 전변할 수 있습니다. 識은 내부에 있기 때문에 3자성 변계 의타 원성실은 구분과 차별의 경계가 없습니다. 만약 외부라면 차별의 경계가 있습니다. 또한 識만 있기 때문에 3자성은 무자성입니다. 변계소집은 6식이며, 의타기성은 7식이며, 원성실성은 8식 자성입니다. 여기서 존재하는 것은 2取입니다. 이 2취는 습기입니다. 습기는 삼매에서는 소멸되지 않습니다. 이숙과의 업종자는 인연을 만나면 소멸되어 사라집니다.
((업의 권속(眷屬) 역시 업이라는 이름을 건립한다. 곧 오온(업인 사 심소와 시간을 같이 하는 오온)의 성품이다. 선 불선의 율의(律儀)도 실제로는 업의 권속(무표색)이기 때문이다))
“같이 인 만(引滿)의 이숙과를 초감하기 때문이다. 모두 업과 더불어 같이 인 만의 이숙과를 초감하기 때문이다.“
선 불선의 율의는 무기이며 허공처럼 형태가 없는 무표색입니다. 습기와 같은 맥락으로 8식에 따라서 업종자를 만들 수 있습니다. 따라서 3계에 속하는 것으로 명언유지 명언습기처럼 아집습기가 있습니다. 습기는 유전하여 상속되지만 윤회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2취습기로 견분과 상분이 항상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3자성에서 식은 내부에 있으므로 변계와 의타 원성실성은 경계가 없습니다.
따라서 2취의 자성이 영체로써 물질인 식과 함께 존재하고 있습니다. 의타기성이 7식입니다. 7식 영체는 6식 5온의 형태를 취하여 이루어진 진여자성의 원성실성입니다. 기세간과 중생세간이 3천대천세계입니다. 이것은 6식인 유정들의 안목이기에 붓다님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망념과 잡념이 없기에 해탈세계에서 물질세계로 진입할 수 있습니다. 즉 3자성은 경계가 없습니다.
자체의 체에 있어서는 붓다님이나 보살 아라한 유정에 있어서 자성으로 동일합니다. 등급이나 계급에서 차이가 있기에 4개의 영체로 신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견분 자체는 무색계 8식 자성으로 유지되기에, 사람으로서 다른 몸을 받아도 다른 환경에 그대로 적응할 수가 있습니다. 지정각세간은 중생세간과 분리되어 있지만, 중생계에는 각각 종자에 그대로 정토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염불할 때에 여러 부처님께서 소리를 따라서 출현하심은 종자에 계시는 부처님입니다. 보신부처님의 출현하심은 한분의 붓다님께서 직접 오시는 경우입니다. 후오백세의 2600년의 경우는 地上에 붓다님의 탄생으로, 佛法의 진면목이 밝혀지는 경우입니다. 즉 신불교(新佛敎)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