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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행자의 서원』 중에서 「참회분」, 큰스님의 절대긍정이 잘 드러나는 명법문입니다
~~~죄업은 이것이 어둠이오며, 참회는 이것을 밝은 자성광명 앞에 드러냄이옵니다. 찬란한 자성광명 앞에 어찌 사라지지 아니할 어둠이 있사오리까. 밝음 앞에 어둠이 사라지듯이 저의 참회 앞에 모든 죄업이 사라짐을 믿사옵니다. 죄업이 사라졌으매 다시 어찌 청정한 자성광명을 가로막을 것이 있사오리까. 참회하였으므로 죄업이 소멸되고, 모든 죄업이 소멸되었사오매 저의 생명에는 끝없는 부처님의 자비공덕이 넘쳐남을 믿사옵니다. ~~~
금주의 법어--두 번째 구르는 진리의 수레법륜 【第二轉法輪】
금주의 법사--불광법회 선덕 혜담스님
사랑하는 불광법회 불광사 법등가족 형제 여러분 대단히 감사합니다. 또한 유튜브를 통하여 전국에서 오늘의 불광법회를 함께 하고 계시는 사부대중 여러분 대단히 감사합니다. 오늘의 이 인연공덕으로 형제 여러분들의 가정에 부처님의 자비광명이 항상 함께 해서 가족 모두 건강하고 모두 성취하기를 기원합니다.
지난 일요법회에서 효림스님이 법문하면서 반야사상에 대해 혜담스님이 대가라고 말씀했습니다만 그건 과찬의 말씀이고 다만 저는 그동안 한국불교에서 반야사상이라고 하면 그저 『금강경』과 『반야심경』에 매몰되어 있던 것에서 탈피해 이렇게 반야불교 신행론이라는 책을 1997년에 초판했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금강경과 반야심경으로 집필하지 않고 『대품반야경』 혹은 『소품반야경』 『대반야경』으로 집필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동안의 반야사상이라고 하면 금강경과 반야심경을 주로 하던 한국불교의 풍토에 다른 반야경도 있다는 사상의 전환을 가져왔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할 것은 승속을 막론하고 금강경과 반야심경을 통해서 반야사상의 핵심을 찾으려 하고 그것이 핵심적인 건 사실입니다. 한국불교의 풍토에 있어서 금강경과 반야심경만 아니고 다양한 반야경의 사상이 있다는 것을 환기시켰다고 하는 나름대로의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법회보에 나와 있는 것처럼 제목이 ‘두 번째 구르는 진리의 수레바퀴【第二轉法輪】으로 되어 있습니다. 아마 이 말 자체도 녹야원의 초전법륜만 있지 제2전법륜이 있느냐고 생각하실 분들이 대다수의 승속을 불문한 불자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제2전법륜이라는 것은 오직 이 반야경, 대반야경과 대품반야경에서만 나오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제2전법륜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녹야원의 초전법륜을 이해해야 되어서 다음 시간까지 2회에 걸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바라나시 녹야원에서 다섯 비구에게 설법한 것을 초전법륜이라고 한다. 그런데 반야경에서는 반야법문이 설해지는 것을 두 번째 구르는 진리의 수레법륜(제2전법륜)이라고 설하고 있다. 예를 들어 『대품반야경』 「대여품 제54」에는 설법을 주저하는 부처님의 마음을 이렇게 설시하고 있다. 아래를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법회보 전문 참조)
반야바라밀이 설해지는 것을 모든 사람들, 당시 성문 연각들은 이 모습을 보고 두 번째의 진리 수레바퀴를 굴린다고 느꼈고 많은 사람들이 무생법인, 평온한 마음을 얻었다는 내용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초전법륜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초전법륜을 알아야 제2전법륜이 왜 있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부처님의 생애에 대해서 책도 보고 강의도 봤습니다. 부처님께서 부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얻으신 뒤에 스스로 생각했습니다. 이 법은 참 희유하고 신기로워서 보통 사람이 들어서는 이해하기 어려워서 내가 법을 설한다고 해도 법을 들은 사람들이 믿지 않고 오히려 혼란되고 나만 헛소리하는 사람으로 알 것이므로 차라리 법을 설하지 않고 그대로 열반에 들어야겠다고 마음을 정합니다. 이것을 범천, 브라만이 부처님 마음을 아시고 사람 모습을 하고 세 번 절하면서 말씀드립니다. ’세존이시여, 법을 설해주십시오. 세상에는 마음이 더러운 사람이 있고 깨끗한 사람이 있습니다. 마음이 더러운 사람은 법에 관계 없이 깨닫지 못하겠지만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법을 듣게 되지 못하면 그대로 살겠지만 마음이 열린 사람은 법을 듣게 되면 깨달을 수 있으므로 법을 설해주소서.‘라고 해도 하지 않으시니까 그렇게 아홉 번 절을 하면서 세 번째 말씀드립니다. 부다가야 근처 연못에는 청련화 홍련화 황련화 백련화 등 많은 연꽃이 피어 있는데 거기에는 물에 잠겨 있는 꽃도 있고 물 위에 솟아 있는 연꽃도 있어서 흙에서 피어난 연꽃이지만 깨끗하고 맑은 것을 봤습니다. 저렇게 꽃처럼 사람도 상근기들은 법을 들으면 깨달을 수 있고 하근기들은 못할 것이므로 법을 설하지 않으면 모두 깨닫지 못할 것이라고 범천이 말합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 것이므로 법을 설할 것이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범천은 춤을 추면서 돌았다는 말이 나옵니다.
여기에서 부처님께서는 법을 설하실 것을 결심하시고 제자들, 성문승이 60명 되었을 때 이제 법을 설하러 떠나겠으니 너희들도 법을 전하러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섯 비구가 수행하는 녹야원까지는 거의 300km 정도 먼 거리를 인도의 뙤약볕을 맨발로 걸어서 출발하십니다. 법이 설해지는데 처음에는 아함경이 설해지고 방등경 다음에는 반야경 마지막에는 법화경이 설해진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반야부 경전이 설해지는 데 21년 설해진다고 나옵니다. 부처님께서 전법하신 것은 49년 혹은 교리적으로는 40년을 설하였다고 하는데 21년 동안 반야경 설합니다. 반야경 설하는 중에 중요한 부분은 이 부분입니다. 부처님이 반야경을 설하실 때 천자들이 청련화 홍련화 황련화 백련화를 뿌리면서 말합니다. “저희들은 염부제에서 두 번째 진리의 수레바퀴(제2전법륜)가 구르는 것을 봅니다.“ 그러자 이러한 가운데서 한량없는 백 천의 천자들이 진실한 이치를 깨달아 평온한 마음(無生法忍)을 얻었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반야경을 설하는 것이 제2전법륜이라는 겁니다. 제가 법화경을 그리 많이 본 건 아니지만 아마 법화경에도 이런 말은 없을 겁니다. 오직 반야경 설하시는 것을 천자들, 범천은 제2전법륜이라고 말씀합니다. 초전법륜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사성제, 네 가지의 진리, 고집멸도라는 사성제입니다. 이 사성제 법문에서는 일체 중생은 고통에 처해있고 그 고통의 원인은 근본적으로 애욕의 집착에 있다고 합니다. 고통을 없앨 수 있는 방법, 수행이 있는데 고통의 원인인 집착심을 다 멸하면 도, 고통이 없는 열반을 얻는다는 겁니다. 사성제 법문에서는 근본적으로 인간은 고통스럽고 그 고통의 원인은 중생의 애욕에 대한 집착심이고 집착심을 버릴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그 수행의 결과로 언젠가는 열반, 무생법인, 고통이 없는 큰 즐거움의 상태를 맞이한다는 것이 근본입니다. 여기에서 연기법으로 하나하나를 설명하는 것이 녹야원에서 초전법륜인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제2전법륜에서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반야심경, 깨달음을 얻은 반야바라밀에서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이 나옵니다. 이 불생불멸은 원래 진리란 영원한 것이어서 생겼다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일체 중생의 본성은 본래 청정해서 불구부정이고, 부증불감은 늘지도 줄지도 않는 겁니다. 우리가 부처님께 기도하고 무엇을 이루겠다고 원을 세우는 것은 내가 부족해서 원하는 것을 부처님의 위신력을 통해서 성취하겠다는 마음이 있는데 우리가 원하는 모든 공덕, 능력은 부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우리 모두가 원래 갖고 있다는 뜻이 부증불감입니다. 이것이 원만구족성입니다. 내가 뭔가를 부처님께 기원하는 모든 것은 근본적으로 내가 가진 것을 내어 쓰겠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불교와 다른 종교의 차이입니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했고 창조할 때 많은 것을 줬지만 죄를 지어서 죄의 사함을 받기 위해 하나님께 충성을 바치면 창조주인 하나님이 줄 것이라고 되어 있어서 철저히 이원론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창조주인 신에게 아부를 하고 잘 보이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신을 믿지 않는 종교에서는 그 이론과는 정반대로 극과 극의 차이입니다. 내가 부처님께 바라는 것은 본래로 내게 있음을 깨닫고, 알라고 합니다.
부증불감이 원만구족성이라는 도리는 사실 불교의 근본을 담고 있습니다. 선불교를 일으킨 '달마조사'나 실질적으로 선불교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6조 혜능스님'이나 다른 조사스님들 말씀도 똑같습니다. 먼저 너 자신이 갖고 있는 부증불감의 도리를 깨닫고 알라고 합니다. 문제는 이 부증불감의 원만구족성의 도리를 다른 조사스님들은 아주 애매하게 장황스럽게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존경해 마지 않는 광덕대선사는 이런 복잡한 이론을 딱 한 마디로 정리합니다. 내 생명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입니다. 사실 이것이 불광법회의 캐치프레이저로 되어 있는데 이건 지금까지 어떤 조사스님도 이렇게 간결하게 불교의 수행의 진수를 말씀하신 분이 없습니다. 오직 광덕대선사만이 우리에게 가르쳤고 우리는 그것을 믿고 있습니다. '내 생명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을 우리는 믿는데 믿는다는 개념 속에는 불신이 깔려 있습니다. 긴가민가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법문을 들을 때는 알겠는데 보광당 나서면 그게 안 되는 것 같습니다. 내게는 고통이 있는데 왜 그렇게 말씀하실까 이런 의심이 가죠. 믿는 것이 아니고 바로 아는 겁니다. 내가 체득하고 알아야 합니다. 중요한 건 체득이라 내 생명이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이라고 아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임을 유의해야 합니다.
이 진리를 나만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형제 여러분의 가족들에게 이웃들에게 널리 알리는 것이 바로 전법입니다. 절에 가면 복 받는다고 하는 것이 전법이 아니고 너의 생명은 죄를 지은 생명이 아니고 부처님의 한량없는 공덕을 그대로 갖고 있는 사람임을 다른 사람에게 알려주는 것을 전법이라고 말합니다. 나는 죄인이라고 가슴을 치는 도반에게 그건 잘못된 말이고 너는 부처님의 한량없는 공덕 생명이라 말해주고, 그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곳으로 인도하는 것을 이름해서 불광에서는 전법이라 말합니다. 절에 가서 돈 내는 것이 전법이 아니고 진리를 알려주고 함께 마하반야바라밀을 염송하면서 우리 스스로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임을 체득하는 것이 전법입니다. 그러면 누구한테 빌 필요도 없고 그저 시간을 정해서 하루에 한두 시간 마하반야바라밀을 염송함에 의해서 이것을 자기 스스로 확신해 나가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이 내 생활 속에 피어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극락세계죠.
요즘 유튜브를 보면 향봉스님이 나와서 많은 말씀을 하는데 이 분은 극락도, 내세도, 윤회도 없다고 말씀합니다. 잘못된 겁니다. 향봉스님은 저보다 나이도 2~3살 많은데 70년대에 굉장한 스님이었습니다. 베스트셀러 작가였고 해인사 선방에 대중들 공양하는 곳에 똥물을 끼얹어서 해인사를 발칵 뒤집은 스님입니다. 그런 스님께서 오랜 수행 생활로 인도에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씀하시니 맞겠죠. 그러나 윤회도 극락도 없다는 말씀은 틀렸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만 우리가 부증불감의 도리, 내 본성 생명이 바로 무한 공덕 생명이고 그것을 타고 났는데 다만 이것을 우리는 미망에 덮혀서 잊고 있다. 이것을 우리는 확실히 알아야 하는데 알기 위해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막연하게 안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므로 꺼집어 내 쓰기 위해서 끊임없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 노력으로 광덕대선사께서는 마하반야바라밀을 염송하는 그것이 바로 꺼내쓰는 방법이라고 하십니다. 생각만으로는 꺼내 쓸 수 없습니다. 끊임없이 내 생명이 부처님의 한량없는 공덕생명임을 알고, 꺼내쓰기 위해 마하반야바라밀을 끊임없이 쉬지 않고 염송을 하는 겁니다. 마하반야바라밀이라는 짧은 말 속에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이라는 뜻이 다 들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 부증불감입니다.
우리 불자들이 승속을 막론하고 법회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반야심경입니다. 반야심경이 짧은 경전이지만 모든 불자들의 근본 경전인 것은 이 경전의 내용이 반야부 핵심으로 가장 중요한 '내 생명이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임을 직접적으로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부증불감이라는 이 내용을 많은 스님이나 불자들이 그냥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다고만 알고 있습니다. 반야심경을 해설하는 다른 책을 사서 보시면 모두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불광법회가 처음 대각사 대웅전에서 생겼을 때 빠른 시간 내에 많은 젊은 불자들이 구름같이 모여든 데에는 이런 이유도 있었습니다. 큰스님의 사상에는 내 생명이 본래 밝은 것이라는 사상이 있었고 이것을 끊임없이 알렸습니다. 그래서 생명은 밝은 것이고 중생의 생명은 죄인이 아님을 끊임없이 법문했습니다. 지금은 12월 31일 보신각에서 타종식을 할 때 많은 시민이 모이는데 처음으로 보신각 타종식에 사람들이 모이게 한 분은 바로 불광법회의 큰스님입니다. 불광법회 큰스님께서 제야의 종소리 들으러 가야된다고 해서 바라밀 합창단 비롯해서 많은 불광법회 불자들이 보신각에 모였습니다. 그것이 시초가 되어서 오늘날 서울에서 제야의 종소리 듣고 보기 위해 많은 시민이 모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기원을 알아야됩니다. 광덕대선사께서 얼마나 선각자이신가! 우연히 사람들이 모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는 불광법회에서 제일 먼저 종소리 듣기 위해 모였고 찬불가를 한 것이 시작입니다.
그 당시 대각사에 젊은 불자들이 남녀 불문하고 다 모여서 법문을 들은 이유가 '내 생명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입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한국 사회는 기독교가 늘어나던 시대였는데 기독교에서 너는 죄인이라는 사상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기독교 사상에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이 바로 불광법회의 '내 생명이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입니다. 이것으로 대각사에 많은 사람이 모였고 그 힘이 모여서 이 불광사가 창건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광덕스님 상좌라는 스님들이 이것을 부정합니다. 큰스님께서 직접 친필로 불광사의 소유권은 불광법회에 있다고 분명히 남겼는데도 상좌라는 스님들이 이것을 부정해요. 저들은 큰스님이 실수했다고 하는데 실수할 일이 아닙니다. 제가 항상 말씀드리는 것처럼 은사스님 사상이 싫으면 은사스님을 떠나면 됩니다. 새로 온 주지스님이 언젠가 찾아오겠다고 하는 문자가 왔습니다. 그 스님이 오면 물어보려고 합니다. 지홍스님은 불광문도회를 탈퇴했으니 문도가 아닙니다. 물론 문도가 아닌 스님도 불광사 주지를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불광문도가 주지를 했는데 지금 주지스님은 문도가 아니잖아요. 은사인 지홍스님이 문도를 탈퇴했으니 상좌도 자연적으로 문도가 아닙니다. 이걸 모르고 불광문도, 광덕스님 문도라고 하면 안 되죠. 이런 것을 지적해줘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큰스님의 큰 서원력을 잘 인식해서 반드시 불광법회를 지켜내고 이 사상을 자손 후대 만대로 이어갈 수 있게 전하는 것이 불광 불자들에게 맡겨진 임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형제 여러분의 큰 정진과 원이 함께 하기를 바라면서 오늘 마치겠습니다. 여러분 대단히 감사합니다.
불광인의 선서
우리는 횃불이다. 스스로 타오르며 역사를 밝힌다.
내 생명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 용맹정진하여 바라밀 국토 성취한다.
법등오서
우리는 불광법등입니다. 전법으로 정정진을 삼겠습니다.
보현행원으로 보리 이루리!!! 나무 마하반야바라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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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내 생명 부처님 무량 공덕 생명'
늘 함께 하는 큰스님 가르침이지만, 혜담 스님의 법문을 들으며 다시 한번 가슴 깊이 새기며 되새겨 보았습니다.
바라밀 님,
녹취 상태도 어려운 법문 잘 정리하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