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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바람재 들꽃 원문보기 글쓴이: 황금마삭
1. 2009년 조선 왕릉 40기,
세계문화유산 등록!~
왕이 승하했다.
그 시신이 안치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무려 다섯달.
영면한 왕을 모시기 위해 지극한 정성과 국력이 모아졌다.
역사를 간직한 채 비밀을 유지한 왕릉.
조선 왕릉은 당대 기술과 국력이 집약되었다.
청동기시대 고인돌에서 조선 왕릉까지 능묘엔 당대 역사가 투영되어 있다.
벽화로 유명한 고구려 고분에서 거대한 봉분을 자랑하는 신라의 왕릉이 대표적이다.
세계가 주목하기 시작하여
2009년 6월 마침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인정받은 조선 왕릉 40 기.
조선 왕릉은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떤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걸까?
어떤 의미와 가치가 있는지 우리는 충분히 알고 있는가?
조선 왕릉의 비밀을 알아보자.
2006년 1월.
경기도 고흥 순창원 서오릉.
칠흙 같은 어둠을 틈타 움직이는 낯선 사람들이 있었다.
한밤중에 땅을 파기 시작한 침입자들.
도굴범들이었다.
이들이 노린 것은 다름 아닌 왕세자 부부의 무덤이다.
순창원은 명종의 아들 순회세자와 세자빈의 능이다.
하지만 도굴 시도는 미수에 그치고 만다.
실패한 이유는 무엇인가?
도굴은
뒷편 2.7m까지 파들어가다가
단단한 층에 막혀 흙을 다시 메우고 중단되었다.
"전문 장비를 가지고 몇 일간 작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밑에 단단한 층에 막혀 실패한 것입니다."
- 박정상(경복궁 관리과장 당시 서오릉 관리소장)
도굴이 불가능한 조선 왕릉은 과연 어떻게 조성된 것일까?
1926년 6월 10일.
조선 마지막 왕 순종황제의 국장 행렬 사진이 있다.
조선 국장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동영상 자료엔
발인에서부터 장례 행렬까지의 조선 왕조 장례 장면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왕릉 조성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순종황제(1874~1926) 승하 80여 년.
현재 유릉엔 그와 함께 두 명의 황후,
순명효황후와 계비 순정효황후가 합장되어 있다.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능은 황제능으로 조성되어 화려하다.
그런데 순종의 능에서 왕릉 조성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순종의 증손자인 이혜원씨는
순종 국장 장면을 포함해 유릉에 관련된 사진 100여 점을 소장하고 있었다.
지게를 진 부역꾼 등 유릉 만들 당시의 생생한 현장 모습과
능침을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한 원뿔 모양의 능산각도 볼 수 있었다.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왕릉에 대한 귀한 유물 한 점을 접할 수 있었다.
임금의 관, 즉 재궁(梓宮)이었다.
"재궁은 순종황제 재위시 다섯 개를 미리 만들었다고 합니다.
순종황제 장례 때 사용하고
유일하게 한 점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 이혜원(순종황제 증손자)
왕위에 오르면 미리 준비해두는 재궁은
황장목으로 견실하게 짜여져 있는데,
수십 번의 옻칠과
이음새 사이 나비모양의 나무쪽을 끼워 넣게 되어 있다.
재궁안은 어떻게 만들었을까?
재궁과 일반관을 비교해보면 한 눈에 큰 차이를 알 수 있다.
폭이 70cm, 길이가 50cm인 재궁은 크기 못지않게 명품이다.
두께도 두께지만
이음새에 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끼워 맞추어
모서리 부분이 서로 꼭 맞물리게 되어 있다.
왕의 시신이 안치되는 왕릉은 어디에, 어떻게 조성했을까?
조선 왕릉은
서울 강남구 선릉처럼 도심 한복판에 섬처럼 조성되기도 하고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처럼 서울 근교에 남아 있기도 하며
오늘날 대표적 녹지공간으로 남아있다.
조선 왕릉은
519년 동안 모두 42기 조성되었는데,
'도성에서 십 리밖, 백 리 안에 조성하라'는 기준에 따라
주로 서울 인근에 분포하고,
개경에 2기(태조의 비 신의왕후의 제릉과 , 2대 정종과 비 정안왕후의 후릉)
영월에 1기(단종의 장릉)가 있다.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아홉 개의 능이 있는 동구릉 최고봉은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建元陵)이다.
정자각 뒤로 멀리 높은 능원 위에 자리잡은 능침이 보인다.
능원 위로 올라서자 비로소 구조물이 한 눈에 들어온다.
600년 세월 왕릉을 지켜온 문인석과 무인석.
그러나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능침이다.
잔디가 아닌 억새풀이 솟아있는 능침.
고향을 그리워하는 태조를 위해
아들 태종이
함흥에서부터 흙과 억새풀을 가져와 덮어줬다고 한다.
"지금도 건원릉만 갈대를 잘 관리하기 위해
1년에 한 번만 벌초를 하고 있습니다.
갈대는 꺽지 않습니다."
- 조인제(동구릉 관리소장)
<태조 건원릉 - 능침 위에 잔디가 아니라 억새풀이다.>
(문인은 도포를 입고 머리에 복두나 금관을 쓰며, 손에는 홀을 든 공복 차림을 하고,
무인은 머리에 투구를 쓰고 몸에는 갑옷을 입고, 두 손은 정면 중앙에 수직으로 세운 장검을 잡고 있다.)
600년 역사의 건원릉 모태로
그후 조선 왕릉은 일정한 질서를 갖춘다.
건원릉은 한 눈에 봐도 대단히 위엄이 있다.
건원릉이 완공되기까지
충청도, 강원도, 황해도에서 징발한 인력이 수천 명에 달했다고 한다.
당시로선 대역사였다.
2. 장례 절차는 어떻게 치뤄졌나?~
그런데 태조 이성계가 승하하고 묻히기까지 무려 다섯달.
태조 이성계의 경우만 특별했던 것은 아니고
원칙적으로 조선 국장은 다섯달로 정해져 있다.
과연 다섯달 동안 무슨 일이 진행되는 것일까?
왕의 승하후 맨 먼저 코밑에 솜을 얹어 왕의 승하를 확인하는 의식
초종(初終)부터 시작해,
지붕위에 올라가 옷을 흔들며 왕의 혼을 부르는 의식 복(復),
머리를 풀고 소복으로 바꿔 입으며
사흘간 왕세자와 왕자들은 음식을 먹지 않는 역복불식(易服不食)을 한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계령(戒令)'을 보면
음악을 정지하고(停樂)
혼인을 금지하며(禁嫁娶)
닷새 동안 장을 열지 않게 했고(巷市)
부정을 막기 위해 도살도 금지했다(禁屠殺).
"계령이란 것은 국가비상사태를 의미합니다.
국장 때 모든 국민이 따르도록 명령을 내린 것이지요.
국장을 잘 치루기 위해서 임시기구를 설치했습니다."
- 김시덕(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관)
지금의 장례위원회처럼
조선 시대엔 3개의 도감을 구성했으니,
빈전 설치와 염습을 하는 빈전도감(殯殿都監),
장례를 총괄하는 국장도감(國葬都監),
왕릉을 만드는 산릉도감(山陵都監)이다.
유교국가로서 국장 절차만 총 69가지인데
왕의 시신과 복식을 담당하는 것은 빈전도감 몫이다.
그 중 머리를 감긴 후
손톱과 발톱을 깍아 작은 주머니에 담고,
명의(明衣)를 입히는 목욕(沐浴),
명의는 목욕후 처음 입히는 옷이며,
습을 할 때는 왕이 평소 입던 곤룡포를 입히는데
왕세자, 대군, 왕비, 왕세자빈이 차례로 곡하는 위위곡(爲位哭),
입 속에 쌀을 넣고 진주를 물리는 의식인 함(含) ,
함을 할 때 수저는 버드나무 수저로 한다.
함이 끝나면 곤룡포를 입힌다.
그런데 이러한 왕의 시신은 다섯달 동안 어디에 모셔두었을까?
기록엔 '설빙(設氷)'이란 특별한 장치이야기가 나온다.
<국조상례보편>엔 구체적으로 그림까지 그려져 있다.
우선 동빙고에서 가져온 얼음을 이용하여
바닥에 얼음을 깐 빙반(氷盤)을 만들고,
그 위에 다시 대나무로 만든 평상(平牀)을 놓고,
그 평상의 사방을 난간으로 둘러싼 잔상(棧牀)을 설치한다.
그리고 그 잔상위에 왕의 시신을 안치하고
다시 잔상을 둘러싸는 울타리 잔방(棧防)을 두르고
잔방과 벽과 사이에 다시 얼음을 잰다.
설빙은 지금의 냉동영안실에 해당된다.
서울 용산구 옥수동에 <동빙고터>가 남아 있다.
설빙에 쓰인 얼음 저장고 자리다.
"동빙고 자립니다.
동빙고 얼음은 국가의 큰 제사, 왕실의 상례가 있을 경우 사용했습니다."
- 나각순(서울시사편찬위 연구간사)
불과 50년전까지도 한강에서 얼음을 채취했다는 것을 볼 때
얼음에 대한 기록은 정확한 것 일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빙반이 놓인 잔상 난간위에 마른 미역을 두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마른 미역으로 얼음이 녹으면서 생기는 습기를 흡수하여
왕의 시신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 임민혁(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
2002년 9월 파평 윤씨 모자 미이라 발굴에서
유교를 국시로 삼았던 조선에서
의례와 관련된 복식을 얼마나 중요시 했나 알 수 있었다.
국장을 비롯해 모든 장례에 복식을 특별히 다루었는데,
내관에서 수의는 물론,
누비장옷에,
금박 입힌 치마까지,
66점의 복식류가 출도되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왕의 염에 옷은 몇 벌이나 사용했을까?
승하후 3일에 행해지는 소렴(小斂)에서 19벌,
승하후 5일에 행해지는 대렴(大斂)에서 90벌을 입혔다.
조선시대 '9'라는 수(數)는
최고의 수(數)로 완벽함을 상징한다.
때문에 '9'가 들어간 수를 선택했다.
그런데 이 많은 옷들 중에 특별한 옷이 있다.
왕을 상징하는 구장복(九章服)으로
혼례, 제례 등 국가 큰 행사에만 입었던 왕의 대례복이다.
"본인 신분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 수의였습니다.
본인 평상시 옷중 가장 좋은 옷, 가장 깨끗한 옷을 입혔습니다."
- 이민주 박사(복식사)
재궁이 끝나면 시신은 빈전에 모신다.
빈소에 시신을 그대로 두는 일반인과는 달리
재궁은 다섯달 걸리는 국장 기간 동안
찬궁이라 불리는 찬실에 모셔진다.
3. 조선 왕릉 조성!!!~~
한편 그 사이 왕릉이 조성된다.
왕릉 조성에는 다양한 기구를 사용하는데
그중 녹로는 일종의 도르래 원리를 이용해
재궁을 지하 입구 무덤속에 내려놓는 장치이고,
윤여(輪轝)는 내려진 재궁을 무덤안으로 밀어넣을 때 사용하는 기구다.
"국장할 때 5개월 걸립니다.
이 기간을 연관시켜 생각해볼 때
왕위 계승 받은 새로운 왕이 그의 왕권을 탄탄히 하는 시간, 과정이 될 것입니다."
- 김시덕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관)
다섯달 걸려 조성된 조선 3대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능, 헌릉.
보통 왕릉보다 두배 많은 석물이
조선 초기의 왕릉의 위엄과 권위이 돋보인다.
원경왕후 옆에 놓인 태종의 능침.
조선의 기틀을 닦은 태종의 능침은 과연 어떻게 만들었을까.
<세종실록>에
아들 세종이 아버지 태종묘를 만드는 과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기록에 따라 복원해보면
다듬은 돌을 쌓아 만든 석실과
석실 덮개 두께만 90cm가 넘을 정도로 거대한 규모다.
내부 석실 돌의 무게만 50톤이 넘는
돌을 캐서 다듬고 운반까지 얼마의 공력이 들었을까?
42기 모두 이렇게 만들었을까?
서울 서초구 내곡동 태종의 헌릉 근처에서 의미 있는 발굴이 있었다.
구(舊) 세종대왕릉 자리로,
세종(1337~1450)과 정비 소헌왕후(1335~1446)의 합장릉으로
8대 예종 1년
경기 여주 능서면 영릉(英陵)으로 옮겼다.
2008년 5월 발굴 당시
거대한 석실이 드러날 거라는 기대를 달리하고
석회혼합물의 회격이 발굴되었다.
단순한 구조의 무덤터 발굴을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묘실 크기도 고구려, 신라 왕릉의 묘실에 비해 상당히 작은 규모였다.
그러나 발굴 조사단은 잘 보존된 묘실에서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다시 복토된 채 말끔히 단장했다.
그런데 이곳에 어떤 진실이 숨어 있는 걸까?
묘실은 석회혼합물을 다져 만들었다.
너비 깊이는 2m 30cm, 길이는 3m. 40cm였다.
모셔진 분이 누구인가?
"본 발굴조사를 통해서 확인된 유구는
동분이실이 아니고
회격으로 단실로 축조 됐기 때문에
세종 때 축조됐던 묘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조병구(한국문화재보호재단 중부조사연구소장)
결국 세종이 묻혔던 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실록에 의하면
세종릉은
'석실(石室) 내부에 방 두 개 동궁이실(同宮異室)'
즉 세종과 소헌왕후가 두 개의 석실에 각각 안치된 합장릉이어야 하는 것이다.
"원래 우리나라는 삼국시대 이후 계속 석실을 사용했습니다.
고구려, 고려도 모두 석실이 전통이었습니다."
- 한영우(이화여대 석좌교수 문화재위원회 사적분과위원장)
그렇다면 이번에 발견된 무덤의 정체,
무덤 주변의 정교한 석물들은 정말 왕릉이기나 한 것일까?
무덤 주인을 알리는 결정적인 증거는 무덤의 깊이다.
<국조오례의>에 의하면
왕의 무덤의 깊이는 10척(3m)으로 정해두었다.
사대부나 일반 백성들은 무덤의 깊이를 왕릉과 같게 할 수 없다.
"대체로 사대부들은 무덤 깊이가 1m 30cm에서 2m 이내로 했습니다.
왕과 같지 않게 조성했습니다.
- 박준범(한강문화재연구원 부원장)
그럼 무덤의 주인은 누구인가?
묘실안에 한 가지 특이한 것이 있었다.
암반위에 조성된 것이다.
일반 백성조차 꺼리는 곳을 장지로 한 것으로 흔치 않는 일이다.
중종때 왕비 묘실안에 암반이 발견되어 묘실을 옮겼다는 기록이 나온다.
'광중유석-壙中有石' - 중종 32년, 중종실록
다른 단서도 있는가?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윤씨의 희릉인 것입니다.
희릉이 태종의 헌릉 오른쪽에 조성했다고 했습니다.
희릉과 일치합니다."
- 한영우(이화여대 석좌교수)
무덤의 주인은 아들을 낳은 지 7일만에 세상을 뜬 장경왕후 윤씨.
현재 경기도 고양 서삼릉으로 옮기기까지
22년간 있었던 장경왕후의 옛릉이었다.
4. 조선 유교국가의 애민 사상!~
세조 광릉, 병풍석을 없애다!~
1450년 세종, 소헌왕후 합장릉과
1512년 장경왕후의 첫 무덤은 65년의 시차를 두고 있다.
둘다 엄격한 조선 국장 예법을 따랐지만 내부 모습은 확연히 다르다.
왜인가?
경기도 남양주엔 조선 7대 세조의 광릉이 있다.
사후 500년 동안 극진한 예로 경건하고 엄숙한 제사가 계속 되고 있다.
얼핏보면 여느 왕릉과 별다른 차이가 없지만
조금만 잘 둘러보면 봉분을 둘러싼 병풍석이 없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3대 태종의 헌릉과
불과 40여 년의 시차를 두고 있지만
왕릉 조성에 든 인력은 6천 명이나 차이가 난다.
왕릉 조성은 인적. 물적 대역사다.
그중에 석실을 만드는 데는 백성의 부담이 컸다.
기록에 의하면 태종의 석실을 만드는데 부상자가 속출했다고 한다.
"(헌릉을 조성하면서) 만 오천명이 부역하고
백 여 명이 죽었다."
- <세종실록>
"그 당시 운반 수단은 오로지 노동력이었습니다.
엄청난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었습니다."
- 정재훈(문화재위원회 문화재위원)
이에 다음과 같은 기록도 전한다.
"태상왕(세조)께서 유언하기를
'죽으면 속히 썩어야 하니 석실과 석곽을 마련하지 말라' 하였다."
- <예종1년, 예종실록>
이후 석실 아닌 회격릉 형식으로 바뀐 것이다.
"유교사회에 애민, 민본사상과 관련 있습니다.
백성을 위한 정치, 왕실의 사치는 용납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검소하게 하도록 한 것입니다.
왕릉의 사치도 마찬가지입니다."
- 한영우(이화여대 석좌교수)
5. 조선 왕릉은
과학기술에서 자연과학까지
당대의 총제적 학문 집약!~
무덤에 다시 주목할 점이 있다.
왜 회격을 사용했는가?
회격(灰膈)이란
석회혼합물로 만든 작은 무덤방을 말한다.
"회격 같은 경우 화학적 반응에 따라
오랜 시간 지하 하부에서 있다 보면 토합에 의해 세월이 지날수록 더 견고해집니다."
- 안경호(문화재 실측설계전문가)
문헌에 따르면 회격은
석회와 황토와 모래가
3 : 1 : 1의 비율로 섞어 만들었다고 한다.
<문화재 궁릉보수단>과 더불어 기록대로 회격을 만들어 보았다.
강회라고도 불리는 생석회에 물을 뿌린다.
이때 열과 가스가 발생하여 쉽게 덩어리가 부서진다.
석회를 체에 걸러 고운 가루로 만들고
황토와 모래를 3 : 1로 섞는다.
섞을 때 느릅나무 껍질 삶은 물을 사용한다.
왜냐면 느릅나무 껍질을 삶으면
끈적거리는 성분이 나와 접착력이 강해지기 때문이다.
준비된 재료를 섞어 석회혼합물을 만들고
틀에 넣어 다져서 회격 조각으로 만든다.
회격을 만들 때 다지는 것은 강도를 높히기 때문이다.
실험을 위해 여러 개을 만들었다.
<한국건설기술연구원>에서 한달후 압축 강도 실험을 해보았다.
만든 회격이 파괴될 때까지
가해진 힘과 재료의 변형 정도를 실험하는 것이었는데
예상보다 쉽게 균열되었다.
제작 한 달 후에도 쉽게 균열이 일어났다.
그러나 제작 두 달 후부터는 높은 압력을 가해도 끄덕 없었다.
두 배 높은 압력을 가하자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한 달 사이 압축 강도는 두 배 가까이 세진 것이다.
하중(LOAD) - 한 달 후 5887.24
두 달 후 9184.53
"회격의 특성은 빨리 급격히 반응하는 것이 아니고
천천히 꾸준히 반응하는 물리적 특성이 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강도가 강해집니다."
- 고경택
비록 왕릉은 아니지만 사대부 무덤중에도 회격의 사용으로
밀도, 압축 강도가 암석, 콘크리트보다 더 단단한 것도 있다.
발굴 당시 포크레인과 굴착기를 동원해야 가능하다.
회격외에 왕릉엔 견고함을 더하기 위해 숯가루도 사용한다.
이번에 발견된 장경왕후 옛릉에서도
묘실이 온통 두꺼운 숯가루로 덮혀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숯가루는 5촌(15cm) 두께로 규정해두었다(炭末五寸).
습도 조절과 해충을 막는 역할을 한 것이다.
조선 왕실에서는 숯의 다양한 성질을 알고 왕릉 조성에 십분 활용한 것이다.
"해충의 침입, 나무 뿌리의 침입, 도굴 등을
근본적으로 막을 수 있는 기본 건축 재료입니다."
-김왕직(명지대 건축학과 교수)
이제 조선 왕릉 지하공간을 복원해보자.
먼저 광을 판 후 석회혼합물을 다져 회격을 만든다.
그리고 녹로와 윤여를 통해 외관인 대관을 넣고
이어 왕의 시신을 모신 재궁을 내린다.
마지막으로 문을 닫고 숯가루층을 입히고 복토한다.
조선 왕릉 조성 과정이다.
조선 왕릉에 사용한 회격 강도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예가 있다.
구한말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묘를 도굴하려던 독일 상인 오페르트.
바로 회격에 막혀 도굴에 실패한 것이다.
능의 봉분인 능상에도 비밀이 있다.
아무리 잘 만들었어도 수 백년 능상이 무너지지 않는 것은 대단히 신기하다.
과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지난 11월 낯선 실험을 했다.
태종의 헌릉에 한국지질자본연구원의 도움을 얻어 봉분의 지질을 탐사한 것이다.
지반 탐사하는데 쓰이는
레이저탐사기법과 전기비저항탐사기법을 동시에 사용했다.
무려 5m에 달하는 태종의 헌릉.
수 백년간 무너지지 않고 제 모습을 지키는 봉분엔 어떤 비밀이 있는가?
탐사 한 달이 지나
전기비저항탐사 결과 봉분 내부 구조 윤곽을 파악할 수 있었다.
결과는 뜻밖이었다.
봉분안에 특이한 구조물이 얹혀 있었다.
렌즈형태의 층이 육안으로도 확인되었다.
무너지지 않는 봉분의 내부는 단단한 층으로 쌓여 있었던 것이다.
답사 결과를 종합해보면
내구성을 높이기 위해 봉분안에 석회혼합물층을 쌓아 넣었던 것이다.
이것이 조선 왕릉이 오랜 세월 무너지지 않는 이유였다.
"비가 많이 오면 기존 흙으로 누르는 압력외에
수압이 작용하여 병풍석까지 밀려 나갈 것입니다.
봉분위에 방수 역할을 하는 석물을 침으로써
빗물이 옆으로 흘러 내리는 역할을 하고
봉분의 흙이 무너지는 것도 방지했던 것입니다."
- 조성준(한국지질자원연구원 지반탐사연구실장)
조선 왕실은 국장에 대한 모든 것을 기록으로 남겼다.
<정조국장도감의궤>에는
총 40면에 달하는 정조의 국장 행렬도가 그려져 있다.
행렬에 눈에 띄는 장면이 많다.
가면을 쓴 채 악귀를 쫓는 역할을 하는 방상씨(方相氏),
무장한 호위군사와
얼굴을 가리고 곡을 담당한 궁녀의 모습들.
부장품을 담은 가마,
1880년에 거행된 정조의 국장 행렬도엔
맨 앞에 행렬을 인도하는 경기감사부터,
황룡기, 주작기를 비롯한 무수한 깃발부대와
가마, 말, 왕과 문무백관, 궁녀, 내시 등
총 1,400여 명이 등장한다.
이렇게 하여 22대 정조와 효의왕후 김씨 합장릉 건릉이 조성된다.
정조의 건릉에 어떤 부장품이 있을까?
<정조국장도감의궤>에는 모든 것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원칙적으로 조선 왕릉 무덤에 넣은 부장품을 일일히 규정하고 있는데
그 종류만도 수십 가지다.
먼저 작은 그릇을 모형으로 포함하고,
악기 모형도 넣고,
갑옷 한 벌에 투구와 무기도 넣는다.
순종황제의 경우 부장품으로 책, 시계 그릇 같은 평소 사용한 물건을 포함했다.
일반적으로 짐작하듯이
금은보화로 화려하게 장식하는 대신
작고 거칠게 만든 부장품들이었다.
"부장품을 고급스럽게 넣게 되면
그것이 결국 백성을 괴롭히는 것이므로
조선 유교 사회는 민폐를 가급적 피한 것입니다."
- 한영우 교수
유교국가 조선은 조상을 중시하여
왕릉을 조성하는데 풍수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
조선 왕릉은
한강을 중심으로 좋은 기운이 모여 있다는
한남정맥의 끝자락에 분포한다.
경기도 죽산의 칠현산으로부터
서북쪽으로 돌아 안성, 용인, 안산, 인천을 거쳐
김포의 북성산에서 멈춘 한강 남쪽의 산줄기다.
"왕릉 선정은 풍수가 절대적 기준이었습니다.
좋은 혈처가 어디에 있느냐,
비산비야( 非山非野 ),
큰 산의 능선이 흘려가다가 앞에 큰 강이나 내를 만나서 더 이상 달리지 못하고 멈추는 곳,
그곳에 바로 혈처가 형성됩니다.
조선 왕릉은 혈처를 찾아 조성했습니다."
- 김두규 교수(우석대 교양학부)
대부분의 명당은 혈처, '꽃심자리'다.
뒤로 산이 감싸는 듯, 앞으로는 물이 흐르는 그 가운데 자리다.
왕릉 배치에도 숨은 과학이 있다.
"왕릉의 경관의 조형적 특성을 '정자각'에서 볼 수 있습니다.
정자각 뒤로 '능침'은 신성함을 강조하기 위해 폐쇄감을 강조하는 배치입니다."
- 이창환 교수(상지영서대학 조경과)
먼저 참배하는 후손의 시선을 따라 가보자.
정자각 아래서 제례 올리는 후손은
능침의 높이와 정자각에 가려져
능침을 올려다봐도 한 눈에 능침 전체를 볼 수 없다.
이 '폐쇄감' 때문에 신비감과 경외심은 고양된다.
반면 왕의 혼령이 있는 능원은
그 높이로 인해 '개방성'을 가진다.
산비탈 언덕 위에 조성된 능원.
능원 위는아래 전체를 넓게 조망할 수 있다.
조선 왕릉은 단순한 구조속에 단순하지 않는 의미를 담고 있다.
"역사, 건축, 문화, 미술사, 풍수지리학,
왕릉 조성에 보인 과학적 지식, 자연과학에 이르기까지
풍부한 학문적 영역을 잘 보이는 압축된 공간이 조선 왕릉입니다."
- 신병주 교수(건국대 사학과)
자연속 평온하게 잠들어 있는 조선 왕릉.
600년 세월 너머 굳건히 제자리 지키는 조선 왕릉.
조선 왕릉은
단순한 무덤이 아닌 조선 왕실의 철학과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살아 숨쉬는 공간이다.
조선 왕릉은 이제 우리 문화유산을 넘어
인류 보편의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은 자랑스런 세계문화유산이다.
- 한상권의 <역사추적>을 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