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인산악회에 가입한 이 후에 명사십리와 명사포란 별명(nickname)을
쓰다보니 "아름다운 자연의 표상"이란 카페에서 쓰는 닉네임과 겹쳐서 그런지?
문자로나 카톡으로의 게시물 발송이 되질 않아서 2024년1월10일 다녀온 남파랑길
46코스 자료부터 게시물 작성자의 필명(筆名)을 명사십리와 명사포(鳴沙浦) 내고향
서남해(西南海) 바다의 푸른 물결과 해변의 풍경을 표명(表明)하며 파도가 부서지면서
운다는 뜻을 지닌 청해명파(靑海鳴波)로 고칩니다
관음포전투[觀音浦戰鬪]
정의
1383년(우왕 9) 남해현(南海縣) 북방의 관음포 앞바다에서 왜구를 크게 무찌른 전투.
내용
왜구는 13∼16세기에 걸쳐 존재했던 일본인 해적집단을 총칭한 것으로서,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에 우리 나라로 몰려와 재산과 인명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왜구는 배를 이용해 해안으로 침입하였기 때문에 수군으로 격파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관음포전투도 수군으로 왜구를 대파한 싸움이었다. 해도원수(海道元帥) 정지(鄭地)는 여러 차례 수군을 이용해 왜구를 무찌른 용장이었다. 그는 1383년(우왕 9) 5월 왜선 120척이 침입해 온다는 합포원수(合浦元帥) 유만수(柳曼殊)의 급보를 받고, 나주와 목포에 주둔시키고 있던 전선 47척을 이끌고 경상도로 향하였다. 이때 스스로 노를 저어 군사의 사기를 드높였다. 섬진강 어귀에 이르러 합포의 군사를 징집해 군열을 다시 정비했는데 이미 왜구는 관음포에 도달하였다. 그는 지리산 신사(神祠)에서 승전을 기원한 뒤 전투에 임하니, 내리던 비가 그치고 순풍이 불어 그의 전선은 나는 듯이 헤쳐나가 순식간에 박두양(朴頭洋)에 이르러 적과 대치하게 되었다. 이때 왜구는 대선(大船) 20척을 선봉으로 삼고, 배마다 힘센 군사 140명씩을 배치하여 전진해 왔다. 그는 먼저 선봉함선을 무찌르고, 화포를 이용해 선봉대선 17척을 완파하니, 왜구는 전의를 잃고 퇴각하였다. 싸움에 이긴 뒤 정지는 “내가 일찍이 왜적을 많이 격파했으나 오늘 같이 통쾌한 것은 없었다.”라고 할 정도로 통쾌하게 이긴 싸움이었다. 이 싸움에서 왜구는 17척의 대선과 2천여 명의 전사자를 내었다. 이때 왜선에는 사신으로 일본에 다녀오던 군기윤(軍器尹) 방지용(房之用)이 붙들려 있다가 구출되기도 하였다.
의의와 평가
이 전투는 최영의 홍산대첩(鴻山大捷), 나세(羅世) 등의 진포대첩(鎭浦大捷), 이성계의 황산대첩(荒山大捷)과 함께 왜구의 세력을 크게 꺾은 싸움이었다. 이 전투 이후 고려 군사의 사기가 높아졌으며 이듬해 10월에 왜구 입구의 근거지라 할 수 있는 축산도에 선졸(船卒)을 두는데 성공하였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고려후기 왜구와 해양방어대책」(이재범, 『이순신연구논총』13, 2010)
「고려말 정지와 최무선의 남해 관음포대첩」(정의연,『慶南鄕土史論叢』Ⅵ,1997
「홍건적과 왜구」(나종우, 『신편한국사』20, 국사편찬위원회, 1994)
「고려말기(高麗末期)의 왜구(倭寇)」(손홍렬, 『사학지(史學志)』9, 1975)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남해 관음포이충무공 유적[南海 觀音浦 李忠武公 遺蹟]
정의
경상남도 남해군 고현면에 있는 조선시대 충무공 이순신 관련 순국지. 사당. 사적.
내용
1973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이순신(李舜臣)이 전사한 관음포 앞 바다를 배경으로 조성되었다. 관음포는 이락파(李落波)와 노량(露梁)을 연결하는 해역(海域)으로 정유재란 때 이순신이 최후의 해전을 치른 곳이며, 달아나는 왜장 소서행장(小西行長)를 추격하다가 이순신이 유탄에 맞아 장렬한 최후를 마친 곳이다. 후대의 사람들은 이곳을‘이순신이 순국한 유서깊은 곳’이라 하여 ‘이락파’라고 불렀고, 돌출한 작은 곶도(串島)를 이락산(李落山)이라 하여 이순신의 충성을 추모하였다. 1598년(선조 31) 11월 9일에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과 명나라 수군은 소금도(召今島)를 출발해 남해안의 왜적을 완전히 소탕하면서 동진하다가 동년 11월 19일 아침에 이곳 관음포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 왜적은 서둘러 퇴각을 하다가 뱃길이 막히는 관음포로 쫓겨났는데, 여기서 그들은 남으로 빠져나가고자 하였다. 결국 관음포 전투는 근접전으로 벌어지게 되었다. 이 때 이순신은 한 척의 왜적 전선도 돌려보내지 않으려고 친히 진두에 나서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워 왜선 200여척을 침몰시켰다.
그러나 이 치열한 전투에서 이순신은 적의 유탄을 맞아 전사하였다.그는 죽기 전에 아군의 사기를 위해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남해 관음포 이충무공 유적에는 앞 바다를 바라보는 연안에 이순신을 제향한 이락사(李落祠)가 있다. 이것은 순국한 지 230년이 지난 1832년(순조 32)에 그의 8대손 이항권(李恒權)이 통제사로 부임하면서 왕명에 따라 단을 설치하고 제사를 지내던 사당이다. 이곳에다 높이 1.9m, 너비 0.73m 되는 충무공유허비(忠武公遺墟碑)를 세웠다. 또한 이락사 경내에는 ‘큰별이 바다에 지다(大星殞海)’라는 현액(懸額)이 붙은 충무공묘비각(忠武公墓碑閣)이 있다. 그 외에 순조 때 홍문관대제학 홍석주(洪奭周)가 세운 이충무공 유허비를 비롯해 근래에 세운 이충무공 사적비도 함께 있다. 이처럼 이곳은 순국한 이순신의 공적과 충성을 기리고 있는 역사적 유허이다.
참고문헌
『경상남도지』(경상남도지편찬위원회, 1978)
『문화유적총람』-경상남도편-(문화재관리국, 1977)
『문화재대관』-사적편 하-(문화재관리국, 1976)
문화재청(www.cha.go.kr)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여산 휴게소의 아침풍경
2024-01-10 작성자 청해명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