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메리카 : 최대의 경품
(1) 아메리카의 광대함 : 불리하면서도 유리한 조건
(2) 지방시장과 전국시장
(3) 연속적인 여러 종류의 예속
(4) 유럽에 봉사하는 아메리카
(5) 유럽에 대항하는 아메리카
(6) 산업상의 투쟁
(7) 영국의 식민지들이 자유를 찾다
(8) 상업상의 도전과 경쟁
(9)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식민지 경영
(10) 스페인 령 아메리카에 대한 재고
(11) 스페인 제국의 대응
(12) 최고의 보물
(13) 봉건제도 아니고 자본주의도 아닌가?
❖ 블랙 아프리카 : 외부로부터 지배당한 것만은 아니다
(1) 서부 아프리카
(2) 고립된 그러나 접근할 수 있는 대륙
(3) 연안으로부터 내륙으로
(4) 삼각 무역과 교역조건
(5) 노예제의 종식
이제까지 살펴본 유럽지역을 제외한 전 세계는 드넓은 동유럽 변경지역, 블랙 아프리카, 아메리카, 이슬람, 거대한 극동지역 이렇게 다섯 지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 비유럽 지역들은 18세기 이전부터 서유럽 세력이 이 지역에 끼친 영향을 고려하여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유럽은 자신에게 필요한 자양분과 힘의 많은 부분을 전 세계로부터 끌어왔다. 이런 도움 없이 18세기 말 이후 유럽에서의 산업혁명이 가능했을까?
또 유럽은 전 세계의 나머지 지역과는 다른 인간적, 역사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는가? 이 장에서 유럽과 나머지 지역 사이의 비교를 통해 알아보도록 하자.
아메리카 : 최대의 경품
아메리카는 유럽의 행동이며 그것을 통해서 유럽이 자신의 존재를 가장 잘 드러낸 작품이다. 그러나 그 작품은 너무나 느리게 완성, 완수되어 전체 시간지속 속에서 그리고 전체적인 관점에서 볼 때에만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1) 아메리카의 광대함 : 불리하면서도 유리한 조건
아메리카를 발견하고 유럽은 즉각적으로 얻는 것이 거의 없었는데, 이는 백인들이 이 대륙의 일부분만 알고, 또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럽은 아메리카가 자신들의 욕구에 응답하게 하기 위해 아메리카를 재구성했다. 이는 수세기의 시간이 필요했고 그나마 거대한 변형과 일탈을 감수해야 했으며 그것을 위해 일련을 난제들을 극복해나가야만 했다.
제일 먼저 닥친 문제는 거친 자연, 비인간적으로 엄청나게 넓은 공간의 문제였다. 아메리카 대륙의 광대함은 제동장치이기도 하고 가속 페달이기도 했으며, 또 제약조건이기도 하고 해방이기도 했다. 대지가 넓을수록 땅값은 내려가고 사람의 가치는 올라간다. 농노제와 노예제는 공간이 지나치게 넓은 까닭에 이곳에서 절로 재생했다. 그것은 필요한 것이었지만 동시에 저주이기도 했다. 식민지 아메리카는 두려움을 자아내는 “세상의 끝”이며 “땅끝(finistere)”으로 가득했지만 이곳들은 경작하기 좋은 땅이었다. 자유를 약속해주는 희망의 땅, 이는 “꽉찬 세계”인 구대륙과의 큰 차이였다. 구대륙은 필요한 경우 기근과 이민을 통해 식량/인구 사이의 균형을 다시 맞추어야 하는 곳이었다.
(2) 지방시장과 전국시장
사람들은 점점 더 넓은 공간을 장악해갔고, 도시도 터를 잡기 시작했다. 길이 열렸다는 것은 진보를 의미하며 이는 또다른 진보들의 조건이 되었다. 특히 이것은 도시에 대한 식량의 공급을 원활히 하고 도처에서 등장하던 정기시들을 활성화시켰다.
17세기 말부터 새로운 활기가 아메리카 전체를 흔들어놓게 되었을 때, 경제적 공간의 조직화가 완수되었다. 광대한 스페인 령 아메리카에서, 꽤 일찍 형성되었으나 반쯤 비어 있는 행정구획 내에 점차 사람, 도로, 수송용 가축 등이 들어차면서 지방시장들이 모양을 갖추어갔다.
공간의 구획화는 느린 과정이어서 18세기 말에도 길에서 멀리 벗어난 곳에는 빈 땅들이 남아 있었다. 이런 공간은 아메리카 대륙 전체에 걸쳐 있었는데, 그 결과 오늘날까지도 많은 방랑자들이 존재한다. 농업 역시 사람들을 정착시키지 못하고, 농장 주인과 일꾼, 가축 등이 모두 이전해가는 일이 흔히 일어났다.
결국 사람들은 부분적으로만 공간을 장악했을 뿐이라 18세기까지도 야생동물들이 마음껏 뛰놀 수 있었다. 특히 넓고 대륙적인 북아메리카 지역이 대표적인 곳이었다. 뉴-멕시코의 광대한 지역에서 원주민의 수가 격감하면서 빈 땅이 늘어가자 곧 야생동물이 사람을 대체해버린 것이다.
(3) 연속적인 여러 종류의 예속
그러므로 지나치게 광대한 이 땅에서 사람의 부족은 항구적인 문제였다. 막 형성중인 아메리카로서는 새로운 경제를 발달시키기 위해 저렴한 비용의 말 잘 듣는 인력을 많이 얻을 수만 있다면 이상적일 것이다. 에릭 윌리엄스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노예제, 준(準)노예제, 농노제, 준종노제, 임금제, 준임금제의 발달과 구대륙 유럽에서의 자본주의적 성장 사이에는 확실한 인과관계가 있음 얘기했다.
아메리카에서는 모든 피부색의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인디오들과 아프리카의 흑인들에 대해서는 인종절멸이라는 말이 심한 말이 아니지만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백인들도 무사히 넘어간 것은 아니란 것이다.
사실 신대륙에서는 여러 종류의 예속이 연이어지면서 차례로 사람들을 짓밟았다. 우선 현지의 인디오들은 이 엄청난 시련에 저항하지 못했다. 다음으로 백인인 유럽인들(프랑스의 ‘앙가제[engage]’, 영국의 ‘서번트[servant]’ 등)이 중간매개 역할을 했는데 특히 안틸레스 제도와 대륙 내부의 영국 식민지에서 주로 이들이 이용되었다. 마지막으로 아프리카의 흑인들이 이용되었는데 이들은 어느 곳에서든 그리고 어떤 것에도 대항하여 뿌리를 내리고 수를 늘리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 덧붙여야 할 것은 19-20세기에 유럽 전역으로부터 들어온 이민들인데, 이들은 아프리카로부터 인력공급이 감소하는 시점에서 가속적으로 유입되었다.
예속적인 인디오들은 인구밀도가 높고 사회의 응집성이 높아서 고용을 장기간 보장받는, 이전의 아스텍 제국과 잉카 제국이 있었던 곳에서만 유지되었다. 다른 곳에서는 시련이 닥치자마자 그들 스스로가 뿔뿔이 흩어졌다. 브라질에서는 해안지역 인디오들이 내륙지역으로 도망갔고 미국 지역도 마찬가지였다. 스페인 인, 네덜란드 인, 프랑스 인, 영국인 등의 침입을 받은 안틸레스 제도에서도 원주민들은 우선 백인들이 들여온 질병의 희상자가 되었고 또 새로 들어온 백인들에게 이용될 수 없다는 이유로 말살 당했다. 이와 반대로 원래 스페인이 정복 대상으로 삼았던 인구밀집 지역에서는 인디오들을 쉽게 장악했다. 이들은 정복과 식민지적 착취의 시련들을 겪었는데, 여기서 살아남기는 힘든 일이었다. 그 결과 중부 멕시코에서는 2,500만 명으로부터 단 100만 명으로 인구가 감소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원주민들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고 17세기 중반부터는 다시 증가했다. 인디오들에 대한 착취는 준(準)예속체제인 엔코미엔다(encomienda), 도시의 가내하인, 광산에서의 강제노역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16세기부터 뉴-멕시코에서는 임금제 “자유” 노동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원주민이 감소하여 황폐화 지역들이 생겼다. 황무지와 부당한 몰수를 통해 생긴 땅에 아시엔다(hachienda)라는 대토지들이 퍼져나갔다. 마을이나 국가가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하여 부과한 노역을 피하기 위해서 인디오들은 아시엔다나 도시, 혹은 광산으로 가는 것이 가능했다. 인디오들은 광산, 농업생산, 노새나 라마를 이용한 카라반 수송 등의 일을 맡아 함으로 스페인 국왕의 신대륙에 대한 초기 착취를 도와야했다.
이와 반대로 원주민 사회가 여기저기 흩어진 종족단위로만 존재했던 곳에서는 백인들 스스로 식민화 사업을 추진해야만 했다. 대략 1670-1680년대까지 영국인들과 프랑스 인들은 불어로는 “앙가제(engage)”, 영어로는 “인덴처드 서번트(indentured servant: 정식으로 등록된 계약에 따른 고용인)”라고 부르는 사람들에게 크게 의존했다. 이 두 가지 말로 불리던 사람들은 거의 노예에 가까웠다. “앙가제들”은 매매되었으며, 주인들은 계약기간이 끝나면 이들을 붙잡아 둘 수 없기에 그들에게 더 가혹하게 대했다. 영국이나 프랑스에서는 필요한 이주민들을 모집하기 위해서 허위광고, 폭력, 심지어는 인신매매까지 행해졌다.
백인의 예속은 인디오들이 부족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고 또 아프리카로부터 아메리카로 흑인들이 대규모로 유입된 것은 인디오들과 유럽으로부터의 이주민이 부족해졌기 때문이다. 뉴욕 북쪽에서 밀을 경작하는 경우처럼 흑인들을 사용하지 않는 곳에서는 서번트가 18세기까지도 계속 남아 있었다. 이렇게 식민지상의 요구가 변화를 불러오고 어떤 결과를 초래한 것은 인종적인 요인보다는 경제적인 요인 때문이었다. 즉 그것은 “피부 색깔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백인 “노예들”이 자리를 양보한 것은 그들이 일정한 시간제로만 노예였기 때문이다.
앙가제와 서번트는 일단 해방되고 나면 소규모 토지를 개간하여 담배, 인디고, 커피, 면화 등의 농사를 지었다. 그러나 곧 이들은 대(大)플랜테이션에 이 땅을 빼앗기곤 했다. 사탕수수를 재배하는 대토지는 소토지를 몰아냈다. 그러나 사실 소규모 개간인들이 덤불을 제거하고 경작에 알맞게 이런 땅들을 준비한 것이 플랜테이션을 가능케 한 요인이었다. 대개 사탕수수 재배로 인해서 형성된 이런 플랜테이션은 자본주의적인 사업이었으며 고정자본은 말할 것도 없고 많은 노동력과 원재료를 필요로 했다. 16-17세기에 대토지 농장들이 형성되면서 이곳에 필수불가결한 요소인 흑인 노예들이 증가했다. 노예매매 때문에 그 당시로는 어마어마한 규모였던 플랜테이션의 성립이 가능했다. 흑인은 유순하고 쉼 없고 힘이 세서 그들의 노동은 가장 싸고 효율적이며 곧 사람들이 흔히 찾는 도구가 되었다. 흑인들은 그 외의 다른 일에도 많이 이용되었다. 17세기말에 시작된 브라질의 사금채취는 수천 명의 흑인 노예들이 도입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아메리카에 존재했던 여러 종류의 예속노동은 사람들이 이야기한 것보다는 더 대체 가능한 것이었다.
(4) 유럽에 봉사하는 아메리카
아메리카는 유럽사의 긴 단계들을 가능한 대로, 그러나 자신의 상황에 맞게 재현해야 했다. 고대, 중세, 르네상스, 종교개혁 등 유럽의 경험은 이곳에서 혼융된 채로 재발견된다.
각각의 모국 도시들이 아메리카의 일부 지역에 대해서 독점적인 지배를 하고 “식민지 조약”의 준수와 “식민지 독점체제”의 존중을 강요하는 한 아메리카의 각 사회들은 대서양 저편으로부터 강요된 보호와 그 집요한 모델을 벗어던질 수는 없었다. 영국과 스페인은 초기 아메리카 식민지들이 마음대로 성장하도록 내버려두었다가 이 식민지들이 성장하고 번영을 누리게 되자 다시 모든 것을 제자리에 배치시키고 자신의 여러 기관들에게 이익이 되도록 소위 “중앙집중화”를 꾀했다.
다른 유럽 세력들의 공격에 대해서 신생 식민지들이 방어하는 데에는 중앙집중화가 필수불가결했으므로 자연스럽게 그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또 중앙집중화가 가속화된 것은 이것이 식민지 내부에서 소수 백인들의 지배를 보장해주기 때문이기도 했다. 백인들은 이미 “구”대륙이 된 유럽의 신앙, 사고방식, 언어, 생활양식 등에 집착하고 있었다.
식민지 사회들이 모국에 대해서 어느 정도 유순한 태도를 취했고 또 의존적이었다. 가장 불복종적이고 지배의 손아귀에서 멀리 벗어나 있는 사회들은 대륙간 경제의 큰 흐름 밖에 놓여 있는 사회들이 있었다. 이런 사회 및 경제들은 유럽의 대상인들의 흥미를 거의 끌지 않았고 그래서 거의 투자를 못 받았기 때문에 가난한 채로 남아 있었지만 반면에 자유로웠고 그 상태에서 자급자족 상태에 갇혀버렸다. 도시들 중에서도 아메리카의 공간 내에 홀로 고립되어 있어 어쩔 수 없이 자치를 해야만 하는 곳들도 이런 상태에 있었다. 그렇지만 그보다는 복종적이고 잘 길들여진 경제들이 훨씬 많았다. 아메리카가 독립하기 위해서는 질서가 유지되고 모국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발전할 정도로 충분한 자립적인 힘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그런데 사실 이 질서는 언제나 항구적인 위험에 처해 있었다.
(5) 유럽에 대항하는 아메리카
식민지라는 것은 본국의 부, 명예, 힘에 봉사하는 한에서만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다. 식민지의 교역과 삶 전체는 감시 아래 있었다. 본국은 식민지에 대해서 흑자를 기록했으므로 현찰을 받을 따름이지 공급한 적이 없었다. 이 열악한 지역의 인내력이 아무리 크다고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그와 같은 규제가 정확히 준수되었다면, 또 두 지역 사이의 거리가 멀어 일정한 자유가 생겨나지 않았다면, 또 밀수가 행해져 그들이 좀더 풍족해지지 않았다면 이 체제는 오래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 결과 어느 정도의 온건주의, 즉 내버려두자는 자유방임의 경향이 생겼다. 그 결과 기존 체제가 어느 정도 왜곡되고, 재균형화 되었다. 그리하여 세관들이 효율성을 상실했고, 행정기관도 모국의 명령을 그대로 따르기보다 현지의 사적인 이해에 양보하게 되었다. 더욱이 교환의 증가로 말미암아 아메리카의 경제가 화폐화되고 또 아메리카산 귀금속의 일부가 밀수에 의해서이든 시장법칙의 논리에 의해서이든 유럽으로 가는 대신 현지에 그대로 남게 되었다. 지방상인들 사이에는 무시하지 못할 규모의 축적이 진행되었다. 어쨌든 식민지 독립의 위기가 닥쳤을 때 신대륙의 상인들과 본국의 자본가들 사이에는 갈등과 심한 적개심이 개재되어 있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아메리카의 식민지에 막 도착한 스페인 출신 신참자로서 경험은 없으나 야망을 가지고 있고 흔히는 이전에 번 재산을 가지고 온 사람들은 차페톤이나 가추핀이라고 부르는 현상은 아주 흥미로운 사회심리학의 주제가 될 것이다. 이 사람들은 앞서 도착하여 상업의 요지에 자리 잡고 있던 소그룹에 합류한다.
(6) 산업상의 투쟁
상업적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산업적 측면에서도 식민지와 모국 사이에는 오래 전부터 갈등이 준비되어왔다. 16세기 말 유럽의 자본주의는 곤경에 빠져 있었다. 따라서 17세기에는 대서양 너머 아메리카에서도 스스로 어려움을 헤쳐나가야 했다. 당시 형성 중이던 지방시장들은 교환을 증대시키고, 여러 산업들이 성장하게 되었다. 직물업이 성장하고, 농산물과 축산물을 가공하는 산업들 역시 다양하게 발달했다. 어디서나 비누와 수지 양초를 제조하는가 하면 도처에서 가죽 산업 역시 발달하게 되었다.
17세기의 그 어려운 시기에 이런 초보적인 산업들이 발달했던 만큼, 콩종크튀르가 좋아지는 때가 되면 이 산업들은 빠르게 퍼져 나갈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렇게 되려면 유럽이 매뉴팩처의 독점을 포기해야만 했다. 하지만 유럽은 이를 원치 않았다. 반면 신대륙으로서는 그들이 필요로 하는 상품의 제조업을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결국 아메리카 전체는 성숙해가면서 균형을 찾고 도망갈 궁리를 마련하게 되었다. 특히 스페인 령 아메리카는 밀수망을 이용해서 추가로 자유와 이윤을 획득했다. 18세기 말까지 은화와 은괴의 태반은 카톨릭 왕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사개인 상인들에게로 갔다. 그리고 신대륙의 상인들도 여기에서 한몫을 차지했다.
(7) 영국의 식민지들이 자유를 찾다
신대륙에서의 전반적인 항의는 영국 식민지에서부터 일어났다. 1774년 12월 16일에 인디언으로 위장한 사람들이 보스턴 항에 정박해 있던 영국 도인도 회사 소속의 선박 세 척에 침입해서 적재되어 있던 차를 바다에 던져버린 소위 보스턴 차 사건을 계기로 해서 장래 미국이 될 식민지들과 영국 사이가 분열되었다. 이 갈등은 아메리카의 식민지들의 번영을 가져온 18세기의 경제성장에 기인한 것이었다. 더구나 이 식민지들은 국내외적으로 활기찬 교역을 하여 더욱 번영했다.
이러한 상승을 보여주는 첫 번째의 표시는 잉글랜드의 노동자, 아일랜드의 농민 그리고 스코틀랜드 인들의 이민이 계속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이민은 진짜 “사람 장사”였다. 주요 대상이 되었던 것은 아일랜드 인들이었다. 이 교역은 흑인 노예 무역과 가장 비슷한 것으로서 독립을 획득한 이후에도 감소하지 않고 확대되었다.
결과적으로 대서양 연안지역으로부터 산악지역과 서부로의 이주가 시작되었다. 이주농들은 흔히 그들이 새로 얻은 토지를 팔고 다른 곳에서 미경작지를 새로 얻어서 개간한 다음 다시 파는 일을 한다. 변경지대는 계약기간이 끝난 이주민 중에 큰돈을 벌려는 사람들을 유인했다. 서부의 대지와 삼림으로 사람들이 몰려드는 이 현상은 전반적인 경제 성장과 병행했고 동시에 그것을 촉진했다. 아메리카 인들은 되도록 아이를 많이 낳았다. 높은 출산율은 인구의 이동을 증가시켰다. 그리고 스코틀랜드 인, 아일랜드 인, 독일인, 네덜란드 인들은 영국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차라리 적대적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아주 일찍부터 시작되고 점차 가속화된 인종의 혼합은 분명히 모국과의 관계단절에도 일조했다.
그런 현상은 영국의 남부 식민지보다 북부 식민지와 더 관련이 깊은 일이다. 남부는 완전히 다른 곳으로서 플랜테이션과 흑인 노예들의 고장이었다. 북부와 남부 사이의 대립은 미국사의 초기부터 두드러진 구조적 양태였다. 남부지역과 북부의 일부 지역에서는 때로는 교묘한 방식으로, 때로는 백일하에 드러내놓은 방식으로 귀족체제의 면모를 띠고 있었는데 이것은 과거 영국의 사회체제를 “이식한” 것이었다. 여기에는 장자상속권이 핵심적인 요소였지만 어디에서나 소토지들은 대영지들 사이사이에 파고들어가 있었다. 농업이 지배적인 이 경제에서 토지의 분배가 불균등하게 되어 있었으면서도 사회적으로 제법 탄탄한 균형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그러면서도 부자들에게 유리한 상태가 만들어져 있었다.
그러므로 실제의 농업체제는 일반적인 도식에 따라서 남부와 북부를 대조하는 것보다는 더 복잡했다. 이상한 것은 노예들을 가장 많이 소유하고 있는 버지니아 주의 귀족들이 휘그, 즉 혁명에 가장 동조적이어서 아마도 이것이 혁명의 성공에 중요한 요인이었다는 점이다.
백인들이 영국에 대해서는 자유를 요구하면서도 흑인들의 예속에 대해서는 그리 큰 마음의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히 모순이었다.
(8) 상업상의 도전과 경쟁
13개 식민지 전체는 아직 본질적으로 농업사회였다. 그러나 땅과 개간, 경작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고는 해도 무엇보다도 뉴잉글랜드를 필두로 한 북부지역의 점증하는 항해와 교역활동에 의해서 식민지들이 봉기에 이끌리게 된 것이 사실이다. 상업 활동은 지배적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그래도 결정적인 요소였다. 영국의 이주민들은 자유를 누리고 있었지만, 국제무역만은 예외였다. 이것은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식민지의 경제생활 전체를 방해했고 반드시 런던의 중재를 거쳐야만 하도록 만들었다. 일찍이 해외무역에 눈을 떴고 보스턴과 플리머스라는 중요한 항구들을 가지고 있는 식민지로서는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으므로 마지못해 동의는 했으나 속임수를 쓰고 장애물을 우회했다.
뉴잉글랜드는 스튜어트 왕조에 의해서 쫓겨난 이주민들이 1620-1640년 사이에 재건설한 곳이다. 이 사람들의 첫 번째 야심은 이 세상의 죄와 불의와 불평등을 멀리한 폐쇄적인 세계를 건설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세계는 자연히 가난할 수밖에 없었지만 문제는 바다가 서비스를 제공했다는 점이다. 일찍부터 이곳에 활기찬 상인들의 소세계가 자리를 잡았다. 이곳 뉴잉글랜드의 주민들은 어업을 통해 돈을 벌었다.
또 이들은 식민지의 중부와 남부의 연안항해를 도맡아 하면서 밀, 담배, 쌀, 인디고 등의 생산물들을 원거리로 재분배했다. 이들은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덴마크 령 안틸레스 제도에 대한 식량의 보급을 책임지고 있었다. 이와 동시에 이들이 안틸레스 제도나 가까운 대륙의 항구들을 통해서 스페인 령 아메리카의 은 유통권에 들어갔기 때문에 은화를 가지고 돌아오기도 했다. 이렇게 상업활동이 남부에까지 성공적으로 팽창해간 결과 북부 식민지에서는 상업세력이 팽창하고 또 조선업, 나사 및 거친 직포 직조업, 철물업, 럼 주 양조업, 철괴나 선철 또는 주철 등의 제조업과 같은 산업들이 발달했다.
게다가 뉴욕이나 필라델피아와 같은 북부 항구의 상인들은 그들의 항해를 북대서양 전체로, 즉 마데이라와 같은 여러 섬들, 북아프리카, 바르바리, 포르투갈, 스페인, 프랑스 등지의 연안 그리고 영국에까지 확대했다. 전세계를 향한 이와 같은 상업적 팽창은 삼각 무역의 성격을 띠게 되었는데 여기에는 영국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메리카의 배가 암스테르담으로 직접 간다고 해도 런던은 언제나 삼각형의 한 꼭지점을 형성했다. 영국과 식민지 사이의 수지에서 영국이 흑자였기 때문에 이상과 같은 상업활동에서 얻은 잉여의 상당 부분은 런던에 남겨졌다. 하지만 일찍이 아메리카가 경쟁자로 성장해갔고, 식민지의 번영이 영국의 번영을 갉아먹으며 런던의 상업적인 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에 영국측이 보복조치를 취했지만 효과는 없었다.
물론 식민지들과 모국 사이에는 다른 갈등들도 일어났다. 식민지는 이제 더 이상 보호받을 필요를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파리 조약 직후부터 식민지와 영국 사이에는 갈등이 일어났다. 영국은 식민지를 복종시켜서 당시 막 끝났던 전쟁의 엄청난 비용의 일부를 부담시키려고 했다. 식민지는 1765년에 영국 상품 불매운동을 조직하기까지 했는데 이것은 대역죄에 해당하는 일이었다. 다시 말해서 미국이 유럽 세계-경제를 지배하게 될 첫 징조들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9)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식민지 경영
또다른 아메리카인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완전히 다른 현실, 완전히 다른 역사가 진행되었다. 북유럽과 남유럽은 대서양 너머에서 다시 차별성과 대립성을 재구성한 것이다. 또다른 중요한 차이점은 영국 식민지들은 1783년에 해방되었으나 이베리아 식민지들은 1822-1824년에 가서야 해방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때도 남아메리카의 해방은 허구적인 것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예전의 지배 대신 영국의 후견체제가 들어서서 대략 1940년까지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미국이 들어섰다. 간단히 말해서 북쪽은 활력, 힘, 독립, 개인적인 약진을 맛보았던 데 비해서 남쪽은 무기력, 예속, 본국으로부터의 엄중한 간섭 등 일반적으로 “주변부” 지역의 조건에 내재적인 일련의 제약들에 묶여 있었다.
이런 차이는 분명히 상이한 구조, 상이한 과거와 유산의 산물이다. 북아메리카와 달리 이베리아 아메리카는 다른 편에 봉사해야만 했고, 거역할 수 없는 국제분업의 명령에 의해서 자신에게 맡겨진 직분을 강요당했다.
(10) 스페인 령 아메리카에 대한 재고
그러므로 스페인 령 아메리카는 늦은 시기에 느린 속도로 해방되었다. 1810년 부에노스 아이레스로부터 해방이 시작되었는데, 스페인에 대한 종속이 사라지자 곧 영국 자본에로의 종속이 뒤이어 나타났다.
브라질은 지나치게 강한 반대에 직면하지 않고 독립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스페인 령 아메리카의 독립은 쉽지 않았다. 처음부터 스페인은 신대륙의 “거대한” 시장을 혼자 힘으로 개척할 능력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스페인은 유럽 전체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스페인의 산업이 16세기 말 이전에 쇠퇴했고 유럽은 서둘러서 이 기회를 잡으려고 했던 만큼 그런 경향이 더욱 강화되었다. 그러므로 스페인보다도 나머지 유럽 전체가 더 열심히 스페인 식민지 개발에 참여했다. 아메리카의 부의 원천인 은의 “수송”을 규제하는 스페인의 법들은 물론 엄중하긴 했지만, “마르멜로 열매(스페인 화폐)는 유럽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다.” 스페인의 엄격한 법률이 무용지물이 된 이유는 다름 아닌 밀수 때문이다. 그 활동영역은 대서양 전체와 남해(태평양)를 포괄하고 있다.
대서양 반대편의 “카스티야의 인도”에서도 밀수는 행해졌다. 기존의 식민체제와 함께 민활하고 효과적인 반(反)체제가 형성되어갔다.
그러나 밀수라는 것은 해당 지역상인들 및 감시권력과의 공모가 없이는 번영하지 못하는 법인데, 만약 밀수가 대규모로 발달했다면 이로 인한 이익이 커다란 위험과 부패의 비용을 다 대고도 남을 만큼 크기 때문이다. 한편 밀수란 전적으로 공공의 선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밀수를 옹호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밀수는 어느 시대에나 존재하지만 그 중요성은 시대에 따라 변화한다. 가능성 있는 계산을 추측해볼 때 1619년 이후 그리고 어쩌면 그 이전에라도 밀수는 액수로 볼 때 공식 교역보다 더 컸으리라 예상된다. 이 상황은 대략 1760년대까지도 계속되었을 것이므로 약 한 세기 이상 지속된 셈이다.
(11) 스페인 제국의 대응
마침내 스페인 정부는 이러한 무질서에 대한 대응책을 강구했다. 질서의 회복은 처음에는 느리고 힘들게 이루어졌으나 18세기 말에는 정력적이고 “혁명적으로” 이루어졌다. 사람들은 식민 모국의 행정적 조치가 혁명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예컨대 지사(intendant)는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는 구래의 쿠레올 귀족들을 분쇄하려는 마드리드 정부의 의도에 따른 것이고, 예수회에 대한 억압(1767) 역시 권위와 힘을 갖춘 군사적 체제가 일종의 도덕질서를 대체해가는 과정의 시작으로 볼 수 있다.
1713년부터 개혁론자들은 자연히 가장 큰 판돈이자 마지막 기회인 신대륙으로 주의를 돌렸다. 전쟁기간 동안 아메리카 해안에 마음 놓고 선박들을 보내곤 했던 프랑스로서는 태평양 연안에 대해서이든 뉴-스페인의 변경지역에 대해서이든 간에 야망을 포기하려고 하지 않았다. 영국측으로부터의 위험은 덜 명확하게 보였는데 사실은 더욱 심각한 것이었다.
그러나 치유의 가능성은 있었다. 스페인 정부가 활동을 개시하여 1714년에는 프랑스의 모델을 좇아 “해군 및 인도 담당성”을 만들었다. 같은 해에 온두라스 회사가, 1728년에는 카라카스 회사 그리고 1740년에는 아바나 회사가 만들어졌다. 1717-1718년에는 세비야가 독점하던 기관인 서인도 무역관과 서인도 이사회가 카디스로 이전했다. 그러나 1756년에는 이 회사들의 독점을 무효화시켜야만 했다. 그러나 아마도 이 실패는 자유로운 무역이 발달하는 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또다른 중요한 조치로는 1776년의 부에노스 아이레스 총독령 창설을 들 수 있다: 이로써 리우 데 라 플라타를 통한 밀수가 크게 줄었다. 스페인 령 아메리카 전체로 보면 밀수의 절대적인 수치가 계속 증가한 듯하지만 전반적인 교역이 급증한 것을 고려하면 상대적으로는 감소했다(1790년대에는 밀수가 공식 교역의 1/3정도로 축소되었다).
진보는 옛 질서의 파괴를 가져왔다. 부르봉 왕조는 오래 전부터 있던 특권들을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멕시코 시와 리마의 두 오래된 콘술라도 외에 다른 콘술라도들을 만들어서 이웃의 전임자들과 경쟁하도록 만들었다. 동시에 유럽(특히 영국과 스페인)으로부터 대량 유입된 공산품들이 지방시장들을 잠식해갔는데 값이 싸면서도 품질이 우수한 이 상품들은 지방산업들을 점차로 파괴했다. 마지막으로 상업순환들의 변화는 지방교역에 대해서 때로는 유리하게, 때로는 불리하게 작용했다. 예컨대 페루는 광산지역인 고지 페루(안데스 지역)를 상실했는데 이것은 식량과 직물상품들에 대한 수요를 통해서 이 나라의 경제균형에 도움을 주었던 부속지역마저 상실한 결과를 가져왔다.
(12) 최고의 보물
스페인-포르투갈 령 아메리카 전체(라틴 아메리카)의 운명은 그보다 더 큰 전체인 유럽 세계-경제에 의존해 있다. 라틴 아메리카가 그 종속관계를 깰 가능성은 희박했다. 가장 중요한 이유로는 브라질과 스페인 령 아메리카가 비록 선박과 선원들을 보유하고는 있었지만 결코 해양세력으로 발돋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다른 이유로 라틴 아메리카는 18세기라는 결정적인 시기 동안 이베리아의 식민 모국(포르투갈과 스페인)에 대한 종속과 유럽(특히 영국)에 대한 종속이라는 이중의 종속 아래에 있었기 때문이다. 유럽은 아메리카의 금과 은을 포기할 수 없었다. 19세기 초에 아메리카는 니콜 부스케가 생각한 것처럼 최고의 보물이었을까? 이 문제를 명쾌히 풀기 위해서는 스페인 령 아메리카와 브라질의 국민총생산을 추산하고 다음에 이곳이 유럽에게 제공한 잉여를 계산해야 한다. 왜냐하면 바로 이 잉여가 사람들이 그토록 탐냈던 보물이기 때문이다.
뉴-멕시코는 국민총생산이 8억 페소정도로 추측되고, 브라질의 국민총생산은 1억 8000만 페소로 추측되므로, “라틴”아메리카 전체의 국민총생산은 10억 페소에 약간 모자라는 정도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는 물론 불확실한 계산이지만 적어도 일인당 소득이 미약했다는 결론을 이끌어낼 수는 있다.
우리가 보고자 하는 것은 이 아메리카가 유럽에 얼마의 잉여를 송출했는가이다. 스페인의 아메리카에 대한 무역수지 적자와 브라질의 몫을 더하면 유럽이 아메리카로부터 이끌어낸 “보물”은 최소한 600만 파운드 이상이다. 1785년경에 영국을 포함해서 유럽이 인도에서 이끌어낸 액수가 평균 130만 파운드였다는 것과 비교하면 이것은 분명히 엄청난 금액이다.
스페인 령 아메리카(인구 1,900만 명)는 따라서 해마다 인도(인구 약 1억 명)의 4-5배에 달하는 잉여를 제공한 셈이다. 혁명전쟁과 나폴레옹 전쟁 동안에는 귀금속을 바다로 운송하는 것이 매우 위험했으므로 현지에 귀금속이 쌓여갔다.
다른 모든 나라 위에 군림해 있는 나라인 영국은 이 보물을 가지고 싶어 했다. 스페인 제국의 해체가 진행되고 있었다.
유럽 각국은 영국을 뒤좇아 산업화해갔고 또 영국을 모델로 삼아 보호관세를 통해서 자신들을 지키려고 했다. 그리하여 유럽의 교역은 공기가 모자라 숨이 막힐 지경이 되었다. 이 때문에 해외시장으로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와 같은 경쟁에서는 영국이 가장 유리했다. 금융이라는 길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런던에 연결되어 있는 라틴 아메리카는 유럽 세계-경제의 주변부에 포섭되었다.
다시 보물 문제로 되돌아가보자. 이 보물은 여전히 제자리에 남아 있었지만 19세기에는 확실히 줄어들었다. “남아메리카”의 모든 공채가 액면가격 이하를 기록하고 있었다는 점을 통해 알 수 있다. 유럽 경제의 쇠퇴(1817-1851)가 아주 이른 시기인 1810년부터 남아메리카에서 시작되었다는 점, 멕시코의 국민총생산이 1810년부터 1860년대까지 감소했다는 점 등은 19세기 전반 동안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가 매우 음울했다는 것을 가리키는 또다른 표시들이었다.
마지막으로 볼 사항은 “선진국”이 자신의 발전된 기술을 “개발도상”지역에 도입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한 것은 판단착오였다는 점이다.
사업의 결과가 나쁘고 런던 거래소에서의 시세가 안 좋아진 원인이 이런 것들이다.
(13) 봉건제도 아니고 자본주의도 아닌가?
아메리카 대륙의 사회와 경제는 구대륙 모델의 재생이며 동시에 변형이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우선 유럽에 익숙한 개념에 따라서 정의를 내리려고 했고 또 이것들 모두를 한 단위로 귀결시킬 모델을 찾으려고 했다. 어떤 사람들은 봉건제를 이야기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자본주의를 이야기했다; 일부 현명한 사람들은 과도기라는 식으로 파악하여 양측의 논쟁 당사자들을 다 만족시키려고 했다. 슬리허 반 바트 등은 두 개념 모두를 채택하지 않고 백지상태에서 재출발하려고 했다.
사회체제들이 나라마다 다르고, 하나의 꼬리표를 붙이는 것이 불가능한 여러 요소들이 섞여 있기도 해서, 아메리카 전체에 대해 하나의 사회모델이 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뉴잉글랜드를 비롯한 다른 영국 식민지들은 자본주의 사회인가? 이는 지나친 말이다. 1789년에도 대개 농업이 지배적이었고, 노예제 사회가 존재했다. 1783년 사업이 발달했는데, 유통되는 화폐 중에는 가치를 상실한 지폐와 외국 화폐들이 다수였다. 또 항해에서 원거리 항해를 거의 영국이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진짜 자본주의는 아직도 세계의 중심이었던 런던의 것이었으며 미국의 자본주의는 부차적인 것이었다.
아메리카의 다른 지역에서는 자본주의는 아직 일부 개인이나 일부 자본에만 한정된 점조직 형태로 되어 있었는데 이것들은 지방 조직망을 이루기보다는 유럽 자본주의에 융합되어 있었다. 이렇게 대단히 한정된 상업자본주의의 옆자리 여기저기에 “봉건적인” 형태들이 산재해 있다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토지소유의 문제로부터 출발한다고 해도 역시 분명한 결론에 이르기는 쉽지 않다. 스페인 령 아메리카에서는 세 종류의 토지소유 방식이 있었다: 플랜테이션(plantation), 아시엔다(hacienda), 엔코미엔다(encomienda)가 그것이다. 플랜테이션은 소유주나 또는 그에게 도움을 주고 있는 상인들에게는 자본주의적이었다. 아시엔다는 특히 17세기에 신대륙이 “재봉건화할” 때 형성된 대토지이다. 이 대토지는 자체 내에서 자급자족하며 살아가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외부세계와 연결되었다. 엔코미엔다는 “봉건제”와 더 가까운 방식이다. 원칙적으로 이것은 임시적인 소유권으로서, 토지에 대한 문자 그대로의 소유권이나 노동력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니라 인디오들로부터 부과조 수취 권리는 얻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론에 불과한 이야기이고 지주는 흔히 이런 제약을 쉽게 깨뜨렸다. 스페인령 아메리카는 대부분이 공무원 사회 혹은 관료제인 모델 국가처럼 되어버렸다. 그러므로 이 사회가 정말로 봉건제의 고전적인 도식에 맞다고 보기는 힘든 일이다.
아메리카 전체는 다양한 사회와 경제의 병존 또는 누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층에는 반쯤 폐쇄적인 경제가 있고 그 위에 반쯤 열려 있는 경제가 존재하며 마지막으로 상층에는 광산, 플랜테이션 그리고 아마도 목축업을 하는 일부 조직과 상업 조직이 존재한다. 자본주의는 기껏해야 제일 마지막의 상업층에만 해당된다.
에릭 윌리엄스의 견해에 따르면 유럽의 우월성은 바로 신대륙에 대한 착취, 그 중에서도 특히 플랜테이션의 항구적인 수익이 유럽 생활에 가져온 가속화에서 유래했다. 루이지 보렐리는 대서양과 유럽의 근대성을 자본주의와 노예제가 함께 관계를 맺고 있는 아메리카에서 찾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 더해서 광업을 경영하는 아메리카까지 포함하더라도 아메리카만이 유럽의 거대함을 만들어준 유일한 요소는 아닐 것이다.
블랙 아프리카 : 외부로부터 지배당한 것만은 아니다
아프리카 최남단은 18세기에도 아직 반 정도 무인상태였다: 1657년에 네덜란드 인들에 의해서 건설된 케이프 식민지는 동인도로 가는 해로상의 휴식지점에 불과했다. 한편 인도양을 마주하고 있는 끝없이 긴 아프리카 해안은 인도에 중심을 두고 있는 세계-경제에 속하는 곳으로서 이 세계-경제에 대한 중요한 수송로이면서 동시에 주변부 지역이었다. 콘트라 코스타(남부 아프리카 연안의 인도양)는 거대한 모노모타파 국가 내부에서 사금채취업이 이루어졌고 잠베지 강의 델타 남쪽 소팔라의 항구를 통해서 금의 수출이 이루어져 중요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오래 되지 못했다. 남부 아프리카의 “인도”쪽 사면의 전성기는 이미 지났다.
(1) 서부 아프리카
모로코로부터 포르투갈 령 앙골라에 이르는 대서양 연안은 사정이 다르다. 유럽은 이곳에 대해서 15세기부터 암초가 많은 연안지역을 탐사하고 이곳 주민들과 대화를 시도했다. 포르투갈 인들과 다른 유럽인들이 아프리카의 해안 가까운 지역에서 발견한 것은 소수 종족들과 아주 미약한 국가들이어서 이들을 근거로 해서는 그 어떤 일도 도모할 수 없었다. 그보다는 약간 더 강한 조직을 갖추고 있는 콩고와 같은 국가들은 대륙의 내지에 위치해, 대륙의 넓이 그 자체에 의해 보호 받고 있었고, 동시에 정치적 조직이 미약하거나 거의 결여된 연안의 여러 사회들에 의해서 보호를 받고 있었다. 해안지역에서 유럽 인들이 처음으로 겪게 된 열대병들 역시 하나의 장벽에 속했다. 유럽 인들은 아메리카 열대지역에서도 그와 비슷한 문제에 봉착했는데 이는 아프리카 내륙지역에서는 상대적으로 인구가 많고 사회의 활력이 컸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은 아메리카 인디오들과는 달리 발전된 야금업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고 흔히 호전적인 성격이었다.
다른 한편 유럽 인들로서는 접근이 용이한 해안지역에서 상아, 밀랍, 세네갈 고무, 사금 그리고 그지없이 훌륭한 상품이었던 흑인 노예들을 얻을 수 있었으므로 굳이 내륙지역으로 들어갈 이유가 없었다.
유럽 인들이 도처에서 마주친 것은 원시적인 경제였다. 그들은 돈을 사용하지 않았다. 아프리카 경제는 그들 자신의 화폐, 즉 “교환수단이며 통용되는 가치기준”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직물조각일 수도 있고 혹은 소금, 가축 그리고 18세기에는 수입된 쇠막대 등일 수도 있다. 아마도 18세기 중반에 소위 이 후진지역들로부터 매년 5만 명 이상의 흑인들이 노예무역 항구를 통해서 유출된 것으로 추정된다.
매년 이와 같은 노예의 유출이 새롭게 벌어졌다는 것 자체가 어느 정도의 활력을 가진 경제를 상정하게 한다. 필립 커틴은 노예 무역에 대해“대서양 경제의 한 하위체제이지만 동시에 서부 아프리카 사회, 이곳의 태도, 종교, 직업적인 표준, 정체성 그리고 그 외의 많은 것을 포괄하는 더 큰 모델의 하위체제”라고 했다.
(2) 고립된 그러나 접근할 수 있는 대륙
블랙 아프리카는 북쪽의 사하라 사막, 동쪽의 인도양, 서쪽의 대서양이라는 거대한 세 개의 공간 사이에 있는 거대한 삼각형으로 되어 있다. 사하라의 변경지역과 대서양 연안지역은 끝없는 공격 전선으로서 이곳을 통해서 외국세력이 블랙 아프리카로 들어오는 관문 역할을 했다. 이상한 것은 흑인들 자신은 진짜 바다이든 사막이라는 바다이든 간에 그곳을 항해해서 관문을 나가본 적이 없었다는 점이다. 대양과 사막은 이들에게는 단지 하나의 변경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단절적인 칸막이였다. 서부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백인은 바다에서 나온 사람들로 알려져 있었다.
대서양 연안에서 유럽 인들의 배는 아무런 저항이나 감시를 받지 않았다. 오히려 완벽한 자유를 누리면서 원하는 곳 어디로든 가서 마음놓고 교역할 수 있었으며 얼마 전에 다른 곳에서 실패했던 것이든 성공한 것이든 다시 시도해서 성공을 거두었다. 더 나아가서 비록 규모는 작지만 동양의 “인도 내 무역”을 모델로 한 “아프리카 내 무역”을 만들었다. 이와 똑같은 과정이 사하라 사막의 변두리 지역에서도 일어났다. 낙타 대상을 보유하고 있는 이슬람 권은 선박을 보유하고 있는 유럽과 마찬가지로 자유롭게 출입로를 선택할 수 있었다. 가나, 말리 그리고 가오 제국은 모두 상아, 사금, 노예 등의 개발과 연결된 통로였다.
이슬람 제국주의와 서유럽 제국주의, 이 두 개의 공격적이고 노예주의적인 문명에 대해서 감시를 게을리하고 취약성을 드러내고 있는 블랙 아프리카는 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다. 물론 블랙 아프리카의 변두리 지역에 모습을 드러낸 침략자들은 아주 매력적인 상품들을 가지고 사람들의 욕심을 자극했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팔았다. 그리고 여기에 전문화한 상인들이 많이 있어서 이들이 사람들을 속여 노예상인들에게 넘겨버렸다. 아프리카에서 인신매매 교역이 이루어진 것은 유럽이 그것을 원하고 그래서 그것을 강요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유럽 인들이 도착하기 훨씬 이전부터 이슬람 권, 지중해, 인도양 지역 등으로 노예무역을 수행하던 나쁜 관행이 사전에 존재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노예제는 풍토병적인 것이었고 일상의 구조였다.
아메리카로부터의 수요 아래 엄청나게 발달한 노예무역은 검은 대륙 전체를 뒤흔들어놓았다. 노예무역은 내륙과 연안 사이에 이중의 역할을 했다: 모노모타파나 콩고 같은 대국을 약화, 쇠퇴시켰지만 이와 달리 연안 가까이에서는 유럽 상인들에게 흑인들과 상품을 공급해주는 일종의 중개국가 역할을 하는 소국들을 발전시켰다.
(3) 연안으로부터 내륙으로
이런 과정을 거쳐서 블랙 아프리카는 이전에 역사가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심층적으로 예속적이 되었다. 유럽은 연안의 근거지들 등을 넘어 내륙 깊숙한 지역으로 뿌리를 뻗어 들어갔다.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등이 거액의 비용을 들여가며 유지한 노예무역을 하는 지점들이나 요새들은 흑인들이나 유럽의 경쟁세력들의 공격으로부터 보호를 해주었다. 같은 종류의 상업활동을 하고 있던 백인들은 많은 경우에 상호 대립하며 서로 상대방의 요새를 빼앗으려고 했고 단지 공동의 적이 있을 때에만 이들간의 화해가 가능했다.
연안지역으로부터 강을 거슬러 올라가 상류의 기착지나 정기시에서 교역을 하는 데에는 노를 사용하는 작은 배를 이용했다. 이런 곳에서 유럽 인들의 상업은 카라반 대상과 만났다. 이 교역에는 현지에서 태어난 중간상인들이 이용되었다. 그러다 영국인들과 프랑스 인들이 스스로 강을 거슬러 올라가서 내륙지역에 정착하려고 했다. 18세기 후반에 영국의 왕립회사가 그들의 활동을 대부분 포기하고 감비아 강의 하구를 방기했을 때 유럽의 상업은 다시 이전에 하던 대로 현지인들을 이용했다. 흑인들은 이 교역에서 부지배인의 위치를 차지했다. 이런 발전은 이상하게도 예전에 포르투갈 인들이 아프리카나 극동지방에서 처음 교역을 시작하던 당시의 발전을 재현했다. “아프리카 내 무역”을 수행했던 것은 상 투메 섬의 상인들이었는데 사정이 잘 풀리면 자잘한 일들은 아프리카 출신의 중개인이나 대리인들이 맡아서 하게 되었다. 특히 폼베이로라고 불린 혼혈인이나 흑인인 조력자 또는 보조인들은 자신을 고용한 주인이 누구이든 상관없이 백인들보다 더 잔인하게 같은 피부색의 동료들을 착취했다.
(4) 삼각 무역과 교역조건
아프리카 해안에서 닻을 올려 삼각 무역을 하는 배는 포루투갈,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등 어느 국적이든 간에 똑같았다. 영국 선박이라면 자메이카에서 노예를 팔고 설탕, 커피, 인디고, 면화를 싣고 영국으로 귀환한 다음 다시 아프리카로 향할 것이다. 이 도식은 모든 노예무역 선박에 다 해당되는 방식이다. 삼각형의 모든 꼭지점에서 이윤이 실현되며 이 유통의 전체 결산은 각각의 꼭지점에서의 결산의 합이 된다.
리버풀이나 낭트에서 떠날 때 싣는 상품은 변함이 없다. 언제나 무수히 많은 종류의 직물이 적재되는데 그중에는 인도의 면직물, 줄무늬 타프타 천, 주석 접시와 그릇들, 화약, 피스톨, “무역용”장총 그리고 무엇보다도 증류주들……이 포함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이 교역이 크게 증가해갔던 유럽의 수요에 조응하기 위해서는 유럽 상품의 공급 증가에 대하여 아프리카 시장이 어느 정도의 탄력성을 보여야만 했다. 즉 수송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활발히 이루어진 교역,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 시장과 정기시, 잉여에 대한 요구가 아주 강한 여러 활력에 넘친 도시들 그리고 원시적이면서도 훌륭하게 교환의 도구 역할을 하고 있는 화폐 등이 그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유럽 상품의 수용도 선택적으로 이루어졌다.
필립 커틴은 가격과 교역조건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그의 명제-아프리카의 수출의 이익은 약 10배로 증가했다. 오차의 한계가 대단히 크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진보가 있었다는 것은 명백하다-를 증명했다. 커틴은 수출과 수입, 이 나라에 들어갈 때의 가격과 나갈 때의 가격을 비교함으로써 세네감비아는 외부와의 교역에서 갈수록 유리해졌다고 결론을 내렸다. 더 많은 금과 노예, 상아를 얻기 위해서 유럽 인들이 그들의 상품의 공급을 늘리고 가격을 낮추어야만 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블랙 아프리카는 신대륙의 플랜테이션, 사금채취장, 도시들의 요구에 응해서 점차 더 많은 노예들을 공급했다.
유럽의 수요에 따라서 세네감비아는 상업적으로 전문화하기에 이르렀다. 즉 매번 한 가지 상품이 주도적인 지위를 차지하는 것이다. 17세기 초에는 가죽, 19세기까지는 노예, 더 뒷시기에는 고무 그리고 그보다 더 후에는 땅콩이 주도적인 상품이었다.
(5) 노예제의 종식
1815년 빈 회의에서 영국의 제안에 의해서 노예무역이 공식적으로 폐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하루아침에 갑자기 중단되지는 않았다는 것은 일단 그와 같은 교역의 힘이 생기면 지속적으로 작용하게 된다는 것으로 설명된다. 영국의 노예무역의 후퇴 때문에 아프리카에서 구매수준과 가격이 떨어지는 것으로부터 이익을 취한 것은 포르투갈과 스페인이었다. 이 두 나라 사람들은 노예 가격의 하락으로 “설탕과 커피만이 아니라 그 외의 모든 열대상품들을 영국보다 더 유리하게 외국 시장에서 팔 수 있는 수단을” 가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