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4장
나그네와 같이 고난 가운데 처한 이들에게
사도 베드로는 3장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3:14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3: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3:16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어떤 일, 어떤 어려움을 당하든 간에
첫째 두려워하거나 근심하지 말고
둘째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기에
흔들리지 않는 소망을 두고
셋째 선한 양심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왜냐?
그래야 우리의 착한 행실을 헐뜯던 자들이
바로 그 일로 인해 스스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옳은 일을 행하는데도 고난을 당한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처럼 두려워하거나
근심하지 말고 오히려 그러한 일을
행복하다고 여기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품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삶의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도전하실 만하십니까?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쉬지 않고 항상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소서.’
바울은 오늘 본문 4장에서도 같은
맥락 속에서 권면합니다.
4: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고난이 주는 아픔을 외면하거나, 거부하거나,
제거하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아픔을 반기라는 것입니다.
왜냐?
우리에게는 그 아픔 가운데서도 위로하시고
도우시고 구원하시는 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이지요.
그러니 모든 인생에게도 아픔이 따르겠지만
특히 믿는 사람들에게 다가오는 더 많은
고난과 더 많은 아픔을 오히려 즐거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4: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왜 우리가 지금 당하는 고난을 즐거워해야하는가?
그것은 우리의 악한 행실로 말미암은
심판의 고난(아픔)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난 그 십자가에 참여할 수
있는 영광의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영광의 고난’입니다.
그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 베드로는 16절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4: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그리스도인으로 겪게 되는 고난
그 고난의 상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인해 여러분의 심령이 가난해 지셨습니까?
그러면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남의 것을 탐내고 도둑질을 한 것이
부끄러운 것이지 그리스도로 인한 가난은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로 인해 고난의 흔적, 핍박의 상처가 있습니까?
그러면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남을 헤하고도 남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고도 깨닫지 못하는 인생이 부끄러운 것이지
그리스도로 인한 상처 그 고난의 흔적은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이런 것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오염된 교회가 문제이지 그리스도로 인한 가난,
그리스도로 인한 상처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기에 흔들리지 않는 소망을 두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즐겨 참여하면서,
나의 영혼을 진실하신 하나님께 날마다
의탁하고 있는가?’ 입니다.
4: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
(공)4:19 그러므로 하느님의 뜻을 따라 고난을 받는
사람들은 착한 일을 행하면서 자기 영혼을
진실하신 창조주께 맡겨야 합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5장 행복선언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미치도록 아픈데, 미치도록 슬픈데, 왜 그것이
복이 된다고 하신 것일까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늘의 위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위로’입니다.
그래서 시인 윤동주는 마태복음 5장 행복선언에
등장하는 팔복을 이렇게 고쳐 노래합니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왜 청년 동주는 영원한 슬픔을 노래했을까요?
거기에 바로 하나님의 영원한 위로하심과
영원한 구원하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그 영원한 위로와 영원한 구원하심
속에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금산교회 김화준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