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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으로 도선국사 비문에서 "백계산유고사왈옥룡(白鷄山有古寺曰玉龍)"즉 "백계산(백계산)에 옥룡 이라는 옛 절이 있다"는 기록에서 ,백계산은 주산인 옥룡산을 말하고 경보선사의 비문에서 "백계산동지운암강(白鷄山東之雲巖崗)" 즉 백계산을 동쪽 운암사 산 능선이라 한 것은,백계의 혈처인 추산리 백계산을 말하는 것으로,운암사 동쪽 산 능선에 탑을 세웠다는 기록이다.
삼신산의 우두머리인 방장산(지리산)과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좌측에 있는 백운산은 그 자체가 "순천 서면(西面)"과 "구례 간전면(墾田面)"에 두 발(鷄足山)을 딛고 ,동서(東西)로 날개를 펴고 ,북쪽을 향하여 날아오르는 닭의 형국이다.
백계산의 혈처라는 도선국사의 비가 서 있는 산은 보는 사람마다 이견이 있겠지만 날아오르는 닭의 등에 해당 하는 것으로, 즉 이러한 전체적인 풍수는 학(鶴)을 타고 승천하는 신선도(神仙圖)와 같은 의미이고,혜철국사가 이 산을 크게 중용한 것은 북쪽의 한반도를 안정시키고 국가의 태평성대를 위한 포석을 위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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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풍수지리로 본 백계산(白鷄山)
- 백계산에는 왜 물이 귀할까?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백계산(白鷄山)은 현의 북쪽 20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산 머리에 바위가 있고 바위 아래 샘이 있으며,샘 밑에서 흰 구름이 때로 일어나는데,소원을 빌기만 하면 문득 영험이 있고 몸과 마음이 깨끗이 하고 부정(不淨)한 일을 멀리 하지 않으면 샘물이 마른다"는 기록에서 보듯이, 물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을 알 수가 있으며, 또한 이곳은 백계(白鷄)라는 풍수로 보아도,수맥이 있어서도 안되는 곳이다.
즉, 계(鷄)는 물이 없어야 하고, 용(龍)은 물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계(鷄)와 용(龍) 둘의 조건은 ,물이 있고 없음에 따라 생사(生死)가 갈리는 극과 극이다.
다시 말하면 백계(白鷄)의 혈처에 옥룡(玉龍)이 있는 것은 상극(相剋)이고 현무(玄武)의 혈처에 옥룡이(玉龍)이 있다는 것은 상생(相生)이니,풍수로 보아도 백계의 혈에 옥룡이 있다는 것은, 합이 맞지 않는 잘못된 것으로 ,자자손손 패가망신(敗家亡身)할 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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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선국사가 처음 이곳에 왔을때 커다란 연못이 있었고, 그 연못에 백룡(白龍)이 살고 있었는데,숯으로 연못을 메우고 법당을 지었다는 전설에서 보듯이 ,백룡(白龍)은 옥룡(玉龍)과 같은 "흰 용"으로 옥룡(玉龍)의 혈처에 지은 법당이라면,그것이 연못이든 물구멍이든 당연히 수맥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의 추산이 백계산 옥룡사는 전설과는 거리가 먼 땅이다.
도선국사가 점지했다는 백계산 운암사라는 지명과 풍수를 보고, 세상 사람들은 이곳이 백계(白鷄)가 알을 품고 홰를 치는 명당이라는 등등.......저마다 그럴 듯 한 이유를 들어 명당이라고 주장을 하는데, 이는 운암사의 존재가 무엇인지, 그 실체는 물론 풍수의 기본도 모르는 잘못된 해석이다.
계(鷄)와 수(水)는 상극인데, 닭이 알을 품은 백계포란(白鷄抱卵)의 혈처에,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운암(雲巖), 즉 구름과 바위가 있고, 더구나 그 알을 훔쳐 먹고 사는 뱀 즉 용(龍)이 똬리를 틀고 있다는 것은, 패가망신하고 자손이 멸절(滅絶)될 뿐, 백해무익(百害無益)한 것임에도, 엉뚱한 전설이 이어져 온 것은, 부질없는 사람들의 허욕이, 도선국사라는 이름으로 만들어낸 망상일 뿐, 이곳에 운암사를 세운 도선국사의 마음은 분명 아니었다.
또 다른 전설에서, 도선국사가 절을 세울 때, 땅의 기운이 약한 것을 보충하려고 심었다는 주위의 동백나무숲 역시 이른바 풍수들이 밥을 빌기 위한 말장난이다.
세상이 이야기 하는 것처럼, 동백나무숲이 백계산 백계포란(白鷄抱卵)의 혈을 보호하기 위함이라면, 그곳에 구멍 즉 우물을 파는 순간, 흰 닭이 품고 있던 신령한 알은 깨어져버렸고, 다시 사람이 머물며 불을 지핀 것은, 곧 그 백계마저 죽여 태워버리는 사혈(死穴) 즉 사지(死地)가 되었고, 사람의 시신을 그곳에 묻는 것은, 신성(神聖)해야 할 신의 땅을 오염시키고, 포란을 부패시키는 일이므로, 아마도 도선국사 이후, 그곳을 살아서 들어가, 살아서 나온 이는 없었을 것이며, 오늘날까지도 그 터가 온전하게 보존되지 못하고, 끝없이 수난을 당하는 이유라 할 것이다.
- 백계산과 풍수와의 모순
이러한 풍수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이 무엇이든, 백계의 혈에 우물을 파고, 구들을 만들어 불을 피우고, 시신을 묻고, 탑과 비를 세우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절대 금기사항인데....... 임금의 명령으로 백계산에 비를 세운 경보선사는 말할 것이 없지만, 천하 풍수의 대가라는 도선국사가 자신이 살아생전에 신을 위해 마련한 신의 땅을, 죽어서 침범하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유언으로 남겼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백계혈이 있다는 땅을 중심으로, 동서 골짜기에, 조성된 동백 숲을 가지고, 굳이 풍수를 논한다면, 그것은 닭의 깃을 아름답게 장엄하여, 장천(長天)을 날아가려는 신선사상(神仙思想) 즉 백계산 산신령을 위한 배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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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오늘날까지 수많은 풍수들이 백계산을 거론했지만, 도선국사 이후 "이곳에 옥녀탄금혈(玉女彈琴穴) 즉 선녀가 거문고를 연주하고, 옥녀배혈(玉女拜穴) 즉 선녀가 엎드려 절하는 명당이 있다."고 말했다는 당나라에서 온 양맥수란 사람만이, 겨우 담 너머로 도선국사의 뜰 마당을 보고, 자신의 이름값을 했을 뿐이었다.
한마디로 백계산 운암사(현 추산리 옥룡사)는 도선국사가 국가의 안녕을 도모하기 위한 비보(裨補)로써, 백계산 산신령을 위해 마련한 자리이고, 인간들의 탐욕이 만든, 백계포란(白鷄抱卵)의 혈처라는 전설로 보아도, 사람들이 머물러 살거나, 시신을 묻어서는 안 되는 지세(地勢)이므로. 사람의 거처를 위한 구들을 없애고, 우물도 메우고, 냄새나는 사람의 시체까지 들어내어, 처음 그대로 솔바람 물결소리 향기로운 청정한 도량을 만들어, 백계산 주인이신 산신령님께 돌려드리고, 국태민안을 비는 것이, 당장의 국리민복을 위하고, 다시 천년의 사직을 비보하는 역사가 될 것이다.
옥룡자(玉龍子)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는 통일신라 말기의 승려이자, 선도(仙道)를 공부했던 풍수(風水)의 대가이다. 옥룡자(玉龍子)라는 도호(道號)는 바로 선도적(仙道的) 의미가 담겨 있는 호이다.
옥룡자 도선국사는 전라남도 영암(靈岩) 구림동(鳩林洞)에서 월출산의 정기를 받고 태어났다. 어머니 최씨가 신인(神人)에게서 한 알의 밝은 구슬을 받아 삼키는 꿈을 꾼 뒤 잉태했다고 해서, 옥룡자(玉龍子)라고 하였다고 한다.
어머니 최씨는 처녀의 몸으로 옥룡자를 잉태했는데, 한겨울에 월출산 아래 물가에서 빨래를 하다가, 물에 떠내려 오는 청외를 건져 먹고 임신을 했다고 한다.
최씨는 처녀의 몸으로 남몰래 아기를 낳았으므로, 숲 속 바위 위에다 아기를 내다버렸다. 그리고 다음날 가보니, 비둘기 떼들이 모여들어 날개로 아기를 덮어 보호하고 있더라는 것이다. 최씨는 그 신기한 광경에 감화 받아, 아기를 안고 다시 집으로 되돌아왔다.
그 때부터 아기가 태어난 마을 이름이 비들기 구(鳩), 수풀 림(林)자를 써서 구림동(鳩林洞)이 되었으며, 아기를 버렸던 바위는 국사암(國師巖)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옥룡자는 15세에 월출산(月出山) 월암사(月庵寺)로 출가를 하였고, 월유산(月遊山) 화엄사(華嚴寺)에서는《화엄경》을 공부하였다. 그리고 곡성 동리산(桐裡山) 태안사(泰安寺)에서 교외별전(敎外別傳)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선풍을 떨치던 혜철(惠哲,786~861) 스님에게서 무설설(無說說, 주장 없는 주장) 무법법(無法法, 법 없는 법)의 묘리를 깨우쳤다.
그리고 옥룡자는 운수행각에 나섰는데, 태백산에서 움막을 치고 수도생활에 용맹정진 하는 등, 백운유수(白雲流水)를 벗 삼아 천하를 주유(周遊)하였다.
《청학집》에 의하면 옥룡자가 풍악산에서 물계자를 만났다고 한다. 그때 물계자는 동안(童顔)에 눈같이 흰 살결로 병을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데, 연세를 여쭤보니 800세라고 했다고 한다. 《청학집》은 옥룡자가 물계자의 여운이라고 계보를 밝히고 있다.
옥룡자 도선국사의 연구가들은 옥룡자의 사상이 애니미즘, 샤머니즘, 불교, 유교, 도교 등 어느 종교, 어느 사상과도 상충하지 않고 포괄적으로 모두를 흡수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이미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 선생도〈난랑비서(鸞郞碑序)〉에서 주지했다시피, 현묘지도(玄妙之道) 풍류도(風流道), 즉 선도(仙道)는 근본적으로 유·불·도(儒佛道) 3교(敎)를 이미 자체 내에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전국의 팔도강산을 두루 행각한 옥룡자는 당나라로 가서 일행(一行) 선사에게 천문(天文) 지리(地理) 음양(陰陽) 술수(術數)를 배우기도 하였다.
이윽고 신라로 돌아온 옥룡자는 전국의 산세를 두루 살펴보며 삼천리 팔도강산의 아름다운 산천(山川)과 명혈(名穴)을 모두 답사하였다. 그리고 천하를 통일할 영웅 호걸들이 태어날 천하 명당들을 많이 발견하였다.
마지막으로 천문(天文)을 보기 위해 하늘을 보는 순간, 갑자기 자미(紫微)에 황운(黃雲)이 끼면서 불길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발견하였다. 옥룡자는 깜짝 놀라 천문(天文)을 제삼 살펴본즉, 아뿔싸! 이는 필시 중국에 있는 일행선사가 신라에 영웅 호걸이 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장난을 치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옥룡자는 바로 그 자리에 앉아 명상에 들어갔다. 그러자 일행선사가 중국에 앉아서 신라의 명산(名山) 대혈(大穴) 들의 영기(靈氣)를 모두 끊어버리기 위해 진언을 암송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옥룡자는 곧바로 천상(天上)의 오성(五星)에게 조공(照拱)한 후에, 천태산(天台山)으로 급히 달려갔다. 천태산은 영기(靈氣)로써 중국에 있는 천태산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산이었다.
옥룡자는 천태산 상봉(上峰)에 넓은 돌을 박아 반석을 만들고, 제단(祭壇)을 쌓았다. 그리고 그 위에 쇠로 만든 철마(鐵馬) 방아를 안치하고 매일같이 산에 올라 당나라를 향해 철마방아를 찧었다. 그러자 당나라에서 괴변이 일어났다. 왕실의 동량이 되는 큰 인물들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지는 앙화가 계속되었다.
중국의 왕은 태사관(太史官)을 불러 점을 치도록 했다. 태사관(太史官)이 천문을 두루 살펴보고 점을 친즉, 진방(震方)에서 살기(殺氣)가 일어나 태방(兌方)을 치니, 그때마다 당나라에서 괴변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었다. 진방(震方)은 동쪽이니 신라요, 태방(兌方)은 서쪽이니 당나라였다.
한편 일행선사도 옥룡자가 자기에게 맞서고 있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신라에 사람을 보내 꾸짖자, 옥룡자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일행선사께서 먼저 의(義)를 끊으셨으니, 나를 나무라지는 마시오.”
“그게 무슨 말이오?”
“일행선사께서 먼저 신라에서 큰 인물이 나는 것을 막으려고, 도력(道力)을 써서 신라의 산맥(山脈)을 끊었소이다.”
“······!”
“일행선사께서 먼저 경우 없는 행동을 하셨으니, 나는 모든 것을 그대로 따랐을 뿐이오이다.”
옥룡자의 말을 듣고 난 사신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옥룡자는 그 자리에서 편지를 써서 일행선사에게 보냈다. 내용인즉슨, 일행선사가 끊은 신라의 산맥을 하루 속히 다시 이어달라는 편지였다.
일행선사는 중국 왕실에서 일어나는 앙화를 막기 위해서라도,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리하여 자신이 도력으로 끊었던 신라의 산맥들을 다시 이어주고, 옥룡자가 더 이상 당나라에 피해를 주지 않도록 부탁하였다.
신라의 산맥과 영웅 호걸들을 구한 옥룡자는 더 이상 철마방아를 찧을 필요가 없었다. 그 후에도 철마(鐵馬)만은 반석 위에 그대로 있었는데, 일제시대 때 일본인들의 손에 의해 없어졌다고 《도암면지(道岩面誌)》는 전하고 있다.
천태산(天台山)은 전남 화순군 도암면 소재지에 있다. 지금은 철마도 없어지고, 반석만이 무성한 이끼에 덮여, 오가는 등산객들에게 옛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고 한다.
이후 옥룡자는 전남 광양시 옥룡면 백계산(白鷄山) 옥룡사(玉龍寺)에서 연좌망언(宴坐忘言)으로 35년간 주석하면서 많은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신라 헌강왕(憲康王, 재위875~886)은 옥룡자의 명성을 듣고 사람을 보내 그를 궁중으로 모시기도 하였다. 옥룡자는 왕의 마음을 열리게 하였으며,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국왕이 해야 할 도리를 조언해 주고는 산으로 되돌아갔다고 한다. 옥룡자는 신라 천년 왕도의 위업이 머잖아 막을 내릴 것을 이미 내다보고 있었다.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룩한 이래 신라는 중앙 왕실과 귀족들이 부패로 치달려가고 있었으며, 삼국통일의 주역인 화랑도들을 견제하기 시작하였다. 전쟁터에서 공을 이룬 장수들이 전쟁이 끝나면, 권력자의 시기질투를 받아 견제당하는 것은 늘상 있는 일이었다.
김유신 장군과 함께 부원수로서 전쟁터에 나가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룩한 죽지랑(竹旨郞)과 그 낭도들이 전쟁이 끝나고는, 관리들에게 대놓고 무시당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미 고인이 된 김유신 장군은 자신의 자손이 무시당하는 점에 대해 지하에서조차 통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왕족과 귀족들의 부정부패에 지방 세력들이 반발하면서 신라 국정은 붕괴일로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리하여 각 지방의 호족들이 중앙정부의 통제를 벗어나 새로운 국가 건설의 꿈을 키워갔으니 궁예, 견훤, 왕건 등이 바로 그들이었다.
옥룡자는 이미 왕건이 태어나기 전에, 왕건의 아버지에게 송악(개성)에 제왕지지(帝王之地)의 집터를 잡아주고 뒷날을 준비시킨 바 있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왕건 태조(재위918~943)가 고려(高麗)를 건국하는데, 결정적인 영향력을 미쳤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고려 때의 문신 최유청(崔惟淸)이 의종(毅宗)의 명에 의해 찬술한 《백계산옥룡사증시선각국사비명》과 《고려사(高麗史)》에 상세하게 나온다.
989년(효공왕 2년) 3월 10일, 옥룡자는 제자들을 모아놓고 말하였다.“나는 이제 간다. 인연 있어 왔다가 인연이 다해 떠나니, 슬퍼하지 말라.”그리고 그 자리에 앉은 채 입적하니, 세수(世壽) 72세였다. 제자들은 스승께서 35년 동안 머물렀던 옥룡사 북쪽 언덕에 사리탑을 모셨다.
한편 옥룡자 도선국사가 탄생한 구림동 백암마을에는 '도선바위'로 불리는 큰 바위가 있다고 한다. 이 바위가 검은 색을 띠면 옥룡자 도선국사가 죽은 것이고, 흰색을 띠고 있으면 살아있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었는데, 바위는 지금까지도 흰 색깔을 띠고 있다고 한다.
(다음 블로그 위대한 여정에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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