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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거룩하고 복된 주의 날, 특별히 어버이주일에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께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3절까지는 어버이 주일에 몇 번 설교하였는데 오늘은 4절에 맞춰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은 “좋은 부모가 됩시다.”입니다.
감리교의 창시자라 불리는 존 웨슬리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 세 가지 질문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첫째, 너에게 준 시간을 어떻게 관리했느냐? 둘째, 너에게 준 재산을 어떻게 관리했느냐? 셋째, 너에게 맡긴 자녀를 어떻게 양육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질문에 대답할 준비를 항상 하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녀들을 맡겼습니다. 내 자녀이전에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모로 세우시고 양육할 의무와 권리를 주시면서 맡겼습니다. 우리는 맡은 자녀를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도록 힘써 잘 양육해야 합니다.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라’는 말의 의미는 아이들이라도 ‘인격적으로 대하라’는 말입니다. 일방적으로 밀어붙이지 말고 주입식으로 가르치지 말고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잘 설득하여 깨닫게 해주는 것을 말합니다. 아이들을 무시하거나 상처주지 마라는 뜻입니다. 설령 매를 들어도 분노를 유발시키지 말고 잘못을 알고 뉘우치게 해야 합니다.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말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을 텍스트로 삼고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22:6)고 했습니다.
성경은 신명기에서 자녀들에게 집에나 길에서나 일어날 때나 잠들 때에도 하나님의 계명을 가르치라고 했습니다. 또 잠언에서도 수없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기록자인 모세나 솔로몬이 어릴 때 자신의 경험에서 나왔을 것입니다. 즉 모세는 바로의 공주 아들로 자랐지만 유모인 레위지파 어머니 요게벳에게서 양육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솔로몬은 다윗왕의 기도와 훈계로 자랐습니다. 이들의 어린 시절이 짐작 되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부모가 되려면 먼저 1.좋은 믿음을 물려주는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바른 신앙을 물려주는 부모가 좋은 부모입니다. 많은 유산을 물려주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그것도 바른 신앙 위에 물려주어야 합니다. 오늘날 재벌 3세들의 행동을 우리는 지켜보고 있습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단순히 물질적인 풍요만 물려주면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을 방증합니다. 부요 이전에 바른 정신, 바른 신앙을 물려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믿음의 계승자가 되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에게 재물을 물려준 것이 아니라 믿음을 물려주었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받은 약속을 물려주었습니다. 히11:8이하에 보시면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고 합니다. 아들 이삭과 손자 야곱에게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물려준 것입니다.
자식은 아버지가 보여준 대로 따라합니다. 아버지가 하나님을 잘 섬기는 모습을 보여주면 자식도 따라합니다. 그런데 좋은 것만 아니라 잘못된 것도 그대로 따라합니다. 아버지가 불의를 행하면 자식도 따라 합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위험하다고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더니 세상에 아들이 그대로 따라합니다. 따라할 게 없어서 그런 것을 따라할까요.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이 그렇게 할 때 이삭은 태어나지도 않았기에, 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따라 했을까요? 유전자는 못 속이는 것입니다. 유전자가 아버지 옆구리 있을 때 인식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 조심해야 합니다.
이삭은 아버지의 순종을 보고 배운 까닭일까요. 그의 생애는 큰 다툼이나 환란이 없이 평안했습니다. 우물을 파는 곳마다 물이 솟아났고 농사도 한 해 백배의 수확을 올리는 풍작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이삭의 생애는 복되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가 아름다운 신앙 유산을 물려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디모데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바울은 디모데를 생각하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딤후1:3이하에 “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 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디모데의 믿음은 먼저 외할머니 로이스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 유니게를 거쳐서 디모데에게 이르렀습니다. 이 가정은 믿음이 잘 계승되었습니다. 신앙이 잘 상속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신앙을 더 중요시했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더 중요하게 여기느냐에 따라 그것이 전달되지 않겠습니까. 무엇을 더 보물로 생각하느냐에 따라 그것을 더 전해주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가업을 보물로 여기면 가업을 잇게 하려고 합니다. 우리에게 보물은 무엇입니까. 믿음이 정말 보물이 되어 있습니까? 주 예수 보다 귀한 것은 없습니까? 손에 있는 부귀보다 주를 더 사랑합니까? 정말 그렇다면 믿음의 유산을 고집해야 합니다. 믿음을 고집하되 생명을 다해 고집해야 합니다. 그저 이 땅에서 아들 딸 낳고 배 안 곪고 사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100년 전 미국 선교사들이 조선에 와서 병원과 학교를 세우고 교회를 세울 때 그들은 믿음 좋은 성도들에게서 기부를 받아 선교활동을 해 나갔습니다. 그리고 기부자들의 이름을 붙여 학교도, 교회도 세웠습니다. 세브란스병원이 그랬고 피어슨신학교가 그랬고 미드 메모리얼교회(지금의 서울상동교회), 가우처교회(지금의 서울중앙교회), 루이스 워커교회(지금의 종교교회) 등입니다. 왜 이런 이름을 붙였겠습니까? 그 가정에서 세웠기 때문입니다. 그 가정이 재물을 소중히 여기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재물보다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을 더 보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재물을 바르게 쓰서 자녀에게 믿음을 유산으로 남기고자 한 것입니다. 이렇게 좋은 신앙을 물려준 부모가 좋은 부모입니다. 이들의 좋은 믿음이 결국 좋은 부모 되게 한 것입니다.
2.또한 자녀를 위해 기도의 벽돌을 쌓는 부모가 좋은 부모입니다. 부모들은 자녀의 미래를 세우는 자입니다. 자녀가 건너야 할 물가에 돌 하나 하나를 놓아가는 자입니다. 우리가 놓은 돌다리로 자녀가 건너갑니다. 그런데 적당히 대충 놓아서야 되겠습니까. 우리가 벽돌을 쌓는다는 것은 집을 짓는다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살 집을 짓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어떤 분들은 불에 탈 나무와 섶으로 집을 짓는 자도 있고 영원히 불에 타지 않을 금과 은으로 짓는 자도 있습니다. 자녀를 위해 기도를 쉬지 않는 것은 결국 자녀를 위해 금과 은으로 만든 집을 짓는 것입니다. 기도로 짓는 집은 눈에 보이는 집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적인 복으로 세우는 집입니다. 밑 빠진 독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물 샐 틈 없이 견고한 집,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는 반석위에 세우는 집과 같은 것입니다. 그 집은 영적인 원수가 침범하지 못하는 집입니다. 지금 그런 집을 짓고 계십니까? 우리가 자녀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돌 하나, 벽돌 하나 놓아주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도바울 이래 기독교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 어거스틴입니다. 그가 어떻게 개종하였고 그의 개종의 뒤에는 어머니의 기도가 있었음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어머니 모니카여사는 아들이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음에도 그 아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의 줄을 놓지 않았습니다. 모니카 여사가 얼마나 기도에 힘썼는지 그녀가 기도하는 것을 지켜보던 목사님이 그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어머님, 기도로 키운 자녀는 결코 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의 말대로 어거스틴은 결국 한 아이가 들려준 성경구절을 펼쳐 들고는 어둠 가운데서 빛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 어머니의 기도의 힘입니다. 어머니가 권사인데 아들이 죄를 짓고 피해 다니다가 절에 숨었다가 그만 스님이 되고 말았습니다. 33년을 스님으로 살다가 지난번에 개종해서 성도가 되었습니다. 서건석 성도라고 금산 열린 교회에 출석합니다. 어머니의 기도는 위대합니다.
예수님보다 육 개월 먼저 태어나서 예수님이 오시는 길을 예비하고 세례를 베풀었던 세례요한의 부모는 어땠습니까.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생활에 대한 유일한 증거인 눅1:6에 보시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그리고 13절에 가서는 천사가 사가랴에게 나타나 이르기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고 했습니다. 세례요한의 부모는 의인이요 흠이 없이 순종하던 사람이요 무엇보다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기도로 아들을 낳았으니 얼마나 그 아들을 또한 기도로 키웠겠습니까. 이것은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이처럼 기도로 양육한 자녀는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어떤 방법보다 기도해주는 부모가 진정 좋은 부모입니다. 솔로몬은 아버지가 평소에 자기를 위해 기도한 것을 기억하고 그대로 시로 남겼는데 그것이 시편 72편입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공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 그가 주의 백성을 공의로 재판하며 주의 가난한 자를 정의로 재판하리니 의로 말미암아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도 그리하리로다”고 했습니다. 솔로몬이 왕이 되자마자 기브온에서 일천번제를 드리며 지혜를 구한 것은 그의 아버지가 이런 기도를 드리는 것을 들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3.그리고 생활에 본을 보여주는 부모가 좋은 부모입니다. 학교나 학원과 가정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똑같이 가르치되 돈을 받고 안 받는 차이가 아닙니다. 학교나 학원은 아무리 전인교육이니 참교육이니, 인성교육이니 하지만 테크닉, 스킬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가정은 삶을, 윤리를, 습관을 가르칩니다. 이전에 어떤 분이 “내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유치원에서 배웠다”고 책을 썼지만 우리는 모든 생활의 원리를 가정에서 배웁니다. 부모로부터 배웁니다. 신앙은 교회에서만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이러해야한다고 가르침을 받았다면 가정에서는 그렇게 살아가는 신앙인을 보고 배우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 중에 함께 있게 하려는 것을 말씀하셨을까요? 함께 있으면서 생활을 배우는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고전11:1에서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하시고 빌4:9에서 “너희는 내게서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고 했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판사였던 포터박사는 어느 날 자신이 존경하는 스승의 아들을 재판하게 되었습니다. 난감한 상황에 처하게 된 포터 박사는 피고인에게 아버지가 쓴 책을 읽어 보았는지 물었습니다. 아버지가 쓴 훌륭한 책을 읽어 보았다면 이러한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스승의 아들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네, 저도 그 책을 알고 있지만,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아버지가 그 책을 쓰시는 동안 저는 항상 뒷전이었고, 제가 아버지를 찾으면 원고를 빨리 끝내야 한다며 귀찮아 하셨습니다." 자신의 삶에서 아무리 성공적인 업적을 남겼다 해도 자녀가 어둡고 그늘진 삶을 살아간다면 결코 가치 있는 성공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말보다 본을 보이는 부모가 좋은 부모입니다. 먼저 행동의 본을 보여야 합니다. 많은 어른들이 여기서 실패합니다. 우리는 자녀에게 좋은 부모가 되려면 힘들어도 바른 길을 가는 모습을 먼저 보여주어야 합니다.
솔로몬이 기브온에서 지혜를 구하는 기도의 내용에 보면 이렇게 고백합니다. “솔로몬이 이르되 주의 종 내 아버지 다윗이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 앞에서 행하므로 주께서 그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고 주께서 또 그를 위하여 이 큰 은혜를 항상 주사 오늘과 같이 그의 자리에 앉을 아들을 그에게 주셨나이다.(왕상3:6)” 아버지 다윗이 언제나 본을 보여주었다고 고백합니다. 이처럼 생활에 본을 보여주는 부모가 좋은 부모입니다. 또한 기도로 벽돌을 쌓는 부모가 좋은 부모입니다. 그리고 신앙을 유산으로 물려주는 부모가 좋은 부모입니다.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않는 부모가 좋은 부모입니다. 우리도 좋은 부모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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