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하고 사랑하는 부모님께.(전, 포항공대 김호길 총장 누이들이 쓴 편지)
아버지의 일주기를 맞아 딸 삼형제가 문안드립니다.
보고 싶은 아버지, 어머니, 큰 오빠, 셋째 오빠, 언니!
모두가 계셨던 그 때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오늘은 새로운
존재양상으로 손에 손 잡으시고 함께 오셨으리라 믿습니다.
어머니 첫 상망 때 아버지께서 전화를 하시고 "꼭 오너라.
아직은 너 어매가 여기 계신다". 하시면서 아버지께서 직접
불러 주시던 자애로우신 우리 아버지! 작년 마지막 생신 때
꽃다발과 케이크를 드렸을 때 흐뭇해하시던 모습이 그립습니다.
상망 때 자주 와서 뵙지 못하여 죄송합니다.
작년 8월 16일 오전 안동 병원 중환자실에서
"아부지요, 저들이 왔습니다". 라는 통곡 에 “응” 하시는 마지막
음성으로 대답을 하신 후 누군가를 간절히 기다리시는
모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자랑스럽고 믿으셨던 훌륭한 아들을 갑자기 앞세우시고,
70년 동안 해로하신 사랑하는 아내를 보내시고,
53년 세월을 근심으로 돌보시던
딸의 관을 잡으시고 애통해 하시면서 “잘 가거라.” 하시던
아버지께서는 이제 내 할 일이 다 끝났다. 하시는 것 같이
아무 말씀 없이 지면을 통해 아버지의 뜻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준비해 주셨습니다.
마지막까지 완벽한
삶을 사셨음에 더욱 존경스럽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셔서
유가전통(儒家傳統) 가문에서 두메산골 지역에 굴하지 않으시고
일제치하 때 학교를 설립 하셨고 선비나 농부나 가진 자나
가난한 자나 평등하게 대접하신 우리 부모님을 저희들은
우러러 뵙고 있습니다. 일제치하 좌우익 환란 6.25를 거칠 때
목숨의 위험과 어려운 난관이 많으셨지만 천대받던 사람들을
평소 사랑해 주셨기에 그 사람들의 도움으로 살아나실 수 있었다는
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훌륭하신 아버지의 딸임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언제나 원만하신 성품으로 여러 자녀들의 성장 과정에서든
성격에 모가 없어 인간관계 형성에 부모님을 기리며 잘 살고
있습니다. 저희들도 사랑으로 가득 찬 부모님 상을 닮도록
노력하면서 자녀 교육에 여유 있고 풍요로움으로 주위를 끼리며
정을 나누는 삶을 영위 하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멋있고 좋으신 오빠들의 그늘에서 저희들은 그저 살아가는 것 같아
감사드립니다. 저희들이 어렸을 적에 우리 집은 언제나 손님으로
가득 차 어머니와 큰 언니가 분주하게 수고 하시던 기억을 합니다.
미리 미리 밑반찬을 준비하시어, 갑작스런 접빈객 수발에
부족함이 없이,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내시던 우리 어머니!
때로는 어머니께서 너무 힘드시는 것 같아 철없는 나이에 손님이
그만 오시면 좋겠다고 말씀 드리면 말이 끝나기가 바쁘게 그
런 말 하면 안 된다. 사람 사는 집에 사람이 들끓어야 한다.
하시던 어머니의 교육은 절대로 잊혀 지지 않습니다.
인간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너무나 귀중한 교육을 시켜
주셨음을 깨닫고 있습니다. 아마도 나그네 대접을 잘 하셨기에
자녀의 축복을 받으시어, 집안 형편이 가장 어려웠을 때
드러나지 않게 효성스러우심과, 더불어 세계적인 과학자들을
낳게 되었다고 믿고 싶습니다.
또 잊혀 지지 않는 기억은
어머니께서 해마다 한 가마니 넘는 콩을 삶아 디딜방앗간에서
찧은 다음 메주를 만들어 방 시렁에다 매달아 띄어서 교통도
불편할 때 아버지께서 여러 남매 집집마다 보내시던 부모님!
까질에 정자골 샛밭에 등등 어머니께서 직접 농사 지으시어
봉다리 봉다리 보내 주시던 기억이 납니다. 농사일을 해 보시지
않으시던 분이 자녀들의 한없는 사랑의 뒷바라지를 위해 희생하시던
부모님께 머리 숙여 경배 드립니다. 30년-40년 전 경제적으로
무척 어려운 시기였음을 기억할 뿐, 그 때 부모님의 어려움을 헤아려
드리지 못하고 철없이 행동했던 것을 죄송하게 생각 하고 있습니다.
효성과 우애가 남다른 오빠들의 도움으로 집안 형편이 조금씩
나아지게 되었으니 오빠와 형님들의 사랑에 찬 희생정신이 아니었으면
가능하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이 기회에 특히 형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아버지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후 우리 집 장손도 태어 낳고
효손이었던 호태 호극이도 장가를 들어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호원 여러 남매의 지극한 우애로 종태도 잘 있고 언니 산소도
정성껏 돌봐 주고 고맙기 그지 없습니다.
큰 형님의 노고로 집도 잘 보존되고 친정에 오면 따뜻한 정을
나누면서 다정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큰 오빠, 셋째 오빠, 언니는 낙원인
하늘나라에서 우리들을 위해 빌어주고 계시리라 믿고 있습니다.
저희들도 남은여생을 부모님 오빠들을 따라 잘 살다가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날 수 있는 희망을 가지고 살겠습니다.
생전에 쌓으신 공덕으로 저희 여러 남매 조카들 주위 동기간에
서로 정을 나누며 먼저가신 분들의 빈자리를 채우도록
성실하게 살 것입니다.
조상님들의 은덕을 기리며 훌륭하신
핏줄을 이어받은 저희 자녀들과 함께 베풀어 주신 은혜를
보답해 드리기 위해 온 몸과 온 마음으로 정성을 다 할 것입니다.
늘 자랑스럽던 부모님과 오빠들깨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
하느님의 자비 하심으로 이 영혼들을 돌보시어 평화의 안식을
누리게 하소서. 아멘. 1996년. 9월 8일 딸 삼형제 드림.
전, 포항공대 김호길 총장 누이들이 돌아가신 부모님께 쓴 절절한 편지글을 올리며
전, 포항공대 총장이셨던 김호길 선생의 누이동생들이 쓴 글인데 저의 외삼촌(김재영 씨)
의 장례 차 외가에 들렸다가 외삼촌의 여타 서류를 정리하다가 나온 글입니다. 아마
김호길 선생과 우리 외삼촌과는 시골에서 그리 머지 않는 촌수 집안이므로 아마 딸래들이
친정에 와서 그래도 글을 보일만하신 저희 외삼촌께 자문을 했던 지 아니면 한 부를
정서해서 가져왔던지 둘 중에 하나일 터입니다. 그런데 정서해서 별도로 한 부를 가져 온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글 중간 중간 고치기도 하고 줄도 긋고 한 것을 보아서
말입니다.
버릴 수 없는 글입니다. 요즘처럼 효와 우애가 땅에 떨어진 시대에는 참으로 타산지석(他山
之石)으로 삼을 만한 글이기에 저희 집안에도 돌려가며 보고 혹 인터넷으로도 알린다면,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 되어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의성김씨 문중(안동 임하, 내앞, 지례, 뒷바들, 한절골 등의 의성김씨 집성촌)에서도
이 우애가 있기로 유명한 명문가의 딸들이 돌아가신 부모님께 편지를 쓴, 그야말로
절절한 사부곡(思父曲)이요 (思母曲)이 아닐까 여겨집니다. 이 글을 보신 분들께서도 이
글을 돌려가며 보여 주시길 앙망하는 바입니다.(글은 원고지에 차곡 착곡 정성 들여 쓰여
져 있습니다. 원본이 필요하신 분은 한 부를 복사해 드릴 용의도 없지 않는 바입니다.)
김호길 박사와 김영길 박사는 세계적인 과학자가 되어 나라의 부름을 받고 포항공대
총장 재임 시 직원 운동회 때 넘어져 졸지에 아까운 국가적인 인재를 잃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故 김호길 박사와 형제간인 김영길 박사는 한동대학 총장으로 재임 중에
있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의 아버지께서 안동군 임하면 지례초등학교 교사로 있을 때 김호길 박사 이야길
들어 보면 참으로 부지런하기 이를 대 없었다고 합니다. 그 첩첩산중에서 핍박하던
시절 공부를 하여 외국 유학까지 가서 미국에서 교수를 하다가 나라의 부름을 받아
고국으로 와서 후학을 가르치는 두 김호길, 김영길 형제를 생각하면 성공하여
금의환향 했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 외국에서 최고의 대우를 마다하고 고국으로
돌아 와 후학을 길러낸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나라가 그리 희망이 영 없진 않다고
봅니다. 지금 정치하는 사람들이 어눌하여 똑똑한 우리 젊은이들이 오갈 대
없이 실업자이거나 안정된 직장이 못되는 인턴이니 비정규직이라는 해괴한
노동 정책으로 인하여 우리 그 똑똑한 젊은이들을 불쌍하게 만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어려울수록 정을 내고 힘을 합해 어려움을 슬기롭게 극복한 민족
입니다. 우리 가족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웃 간에도 정을 내며 살아갈 수
있도록 먼저 효도와 우애부터 키우도록 노력해야 할 것 같아요.
첫댓글 독수리타법을 빌어 밤세워 귀한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시금 부모형제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셨군요 틈나시면 편지 원본을 보고싶네요 예쁜 테이블에 정리해서 여러 네티즌들에게 알리고 싶습니다 설 잘 보내시고 외국출장 잘 다녀오십시오
세자매의 편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큰 귀감으로 새겨듣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