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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1) '국민국가의 형성'이 향후 시사하는 바는?
(2) 왜? 자본의 시대인가?
(3) 세계 3대 혁명이라 일컬어지는 것은?
인류 경제사에서 가장 큰 역사적 사건을 들라면 000 00과 00 00을 첫손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오늘 날의 00 00까지 아울러 이들 셋을 3대 혁명이라 부르기도 한다.
tip: 생산력을 급격히 발전했을 뿐만 아니라 그 결과 삶의 방식과 사회 구조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4) 각 행에 해당하는 조항은?
인권 선언의 기본 사상은 현대의 모든 국가의 헙법에 남아 있을 정도로 인간의 기본권과 시민 사회의 정치 이념을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자유 민주주의 체제의 기본 모델이 되었다.>
자유, 평등의 자연권적 권리선언 ()조
주권 재민사상은 ()조
언론의 자유은 ()조
소유권 신성불가침사상은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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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문-
자본의 시대_에릭 홉스봄
제5장 국민들의 형성
은진씨 김은진
- 국가,국민,내셔널리즘은 그 이전과 다른, 새로이 등장한 개념의 만들지는 개념이다.
* 내셔널리즘 형태분석 : [{영어}nation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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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제정치와 국내정치는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그 중심에는 '내셔널리티의 원칙'이 있다. 지금의 내셔널리즘이다.
- '국민들의 봄'이었던 1848년은 국제적 시각에서 볼 때 명백히 민족들의 자기주장 시기였다
- 국민국가로 이루어지는 하나의 유럽 세계 창출이 당시 국제정치의 중심과제였다
- 독일인, 이탈리아인, 헝가리인, 폴란드인, 루마니아인 등은 체코인, 크로아티아인, 덴마크인들과 마찬가지로
독립할 권리와 그 민족의 모든 부분을 하나로 묶는 통일국가를 형성할 권리를 그들을 통치하는 압제자들에게 요구하고
있었다
- 국민(Nation)은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 국민이란 그 과거의 역사, 공통의 문화, 그 인종적 구성, 그리고 더욱더 그 '언어'에 의하여 규정되는 것이었다.
- '국민들(nations)을 주권적 '국민국가'(nation-state)로 개편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믿어졌다.
19세기에 새로운 역사적 형상이였다.
- 한 국민의 성립 여부는 역사적 기준에서는 지배층 또는 교육받은 엘리트층의 제도와 문화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일반 대중과 상충하지 않는한
- 국민적 독자성은 인종적인 것 또는 언어적인 것으로 말할 수 없다. 구전문화(노래, 민요, 서사시)의 습속과 생활양식에
입각하고 있었다.
- '국민적 부흥'의 제1단계는 민중적 유산을 수집 재발견하고 그 속에서 민족적 긍지를 찾아내는 일이다.
그 자체로서는 정치성이 없다. '비역사적' 내지 '준역사적'인 민족 역시 '소규모의 민족이였다.
- '국민국가'주창자들은 궁극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경제와 기술국가조직과 군사력을 발전시켜나갈 만한 능력을 가진 어느
정도 큰 국민을 전재하고 있었다. '독립' 못지않게 '통일'이 그 원리의 하나가 되어 있었다.
- 국민국가를 진보의 개념과 결합시키는 자들은 소수 후진민족의 실재를 부인하거나 민족 내부의 한 지방 특질로 간주한다
거나 어떤 문화민족에 동화시킴으로써 소멸 시켜야 한다고 주장 한다.
- 소수민족이 스스로 민족적 주체성을 주장한 경우에만 정치적인 의의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2.
- 국민국가를 형성하겠다는 운동은 정치 구조물 건설에 목적이 있으나 내셔널리즘은 아니다.
ex) 이탈리아 - 전제 인구의 2.5%만 이탈리아어 사용
알프스 지역에서 시칠리아에 이르기까지 단일 통치권력이 존재한 선례는 고대 로마 이후 없었다.
단지 지리사적 표현에 불과했다.
- 내셔널리즘은 크건 작건 모두 야심적인 정치적 변혁을 추구함으로 그들로 하여금 '민족주의자'이게 했다.
- 내셔널리즘 운동은 교사와 성직자 중 하층부, 도시 상점주인 및 수공업자의 일부, 계층사회에서 농민의 자녀로 오를만큼
오른 사람들로 정치활동을 전개 했으며 이 후 노동자, 하인층, 농민들이 뒤를 이었다.
- 체코의 민족주의 운동: 소콜 체육 클럽(1862년 개관),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자들: '타보르'라는 이름 차용함
아일랜드 공화국(IRA), 페니어회:영국으로부터의 완전한 독립만이 목적
- '국민적'(또는 민족적) 정치의식을 대치할 수 있는 정치의식이란 실제로 노동자 계급의
'국제주의'가 아니라, 국민국가라는 척도보다 훨씬 작거나 그것과 문관한 정치 이하의 정치의식이다.
- 민족주의는 정치적 힘에 의해 규정된다. 민족주의 출현과 함께 국가주의가 출현한다
3.
- 내이션이란 인공적인 산물이었다. 제도란 국가를 의미한다.
- 중등교육은 중산계급의 증대화 함께 커갔다.
- 초등학교의 목적은 사회의 가티(여러 덕목, 애국심 등)를 심어주는 데 있다.
- 새로운 국민국가에서는 교육제도가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녔다. 교육을 통해서 '국어'가 사람들이 쓰고 대화하는 데 사용
되는 언어가 될 수 있었다.
- 한편 강제적인 이중 공용어 체제 반감이 일기도 했다. 학교나 고등교육기관들이 교육에 쓰는 언어를 하나로 정하여 강요
하는 것은 하나의 문화, 하나의 국민성을 강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학교 교육은 어떤 정부가 그 정부의 바탕이 되어줄 국민을 형성하는 데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는 법
- 역설적이게도 고유한 국민국가를 형성하는 데에서 동화를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열위 소수민족임을 감수하느냐 하는 선택
의 기로에 선 사람들로 하여금 대항 내셔널리즘을 낳게 했다.
- 미국: 모국에 대한 정치적 충성과 모국어 및 모국의 문화에 관한 공식적 지위 요구의 포기를 전제로 국민을 형성했다
그런데도 이민공동체는 그 출신국이 무시 못할 민족적 세력일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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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국민국가를 형성하려는 소망은 그 자체가 프랑스 혁명의 산물이다.
본문: - 그 민족의 모든 부분을 하나로 묶는 통일국가를 형성할 권리를 그들을 통치하는 압제자들에게 요구하고 있었다.
- 혁명은 실패했지만 같은 열망은 그 후 25년 동안 유럽 정치를 지배했다
-정치범 수용 및 무기고 였던 바스티유 감옥을 처들어가면서 프랑스 혁명 시작-
-> 1789년 프랑스는 오스트라아, 작센, 스웨덴, 러시아와 동맹해 영국, 프로이센, 하노버와 식민지를 놓고
7년 전쟁 끝에 패하고 재정적자에 허덕이고 있었다. 농민과 평민들은 굶주리고 있었다.
-> 5월 루이16세는 세금징수를 위해 '삼부회(성직자, 귀족, 평민)'를 소집한다.
-> 평민들이 자신들의 동의없이 세금을 걷을 수 없다는 주장에 국왕은 그들을 의사당 밖으로 내몰고
그들은 근처 테니스 코트에 모여 새로운 법을 획득하는 날까지 해산하지 않기로 결의한다.
-> 국왕은 군대에게 발포를 명령했지만 듣지 않자 용병을 동원해 민중을 대상으로 발포한다.
-> 이에 화가난 민중은 봉기 했고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을 함락한다.
-> '삼부회'는 '국미의회'로 바뀌었고 국왕은 입헌 군주 또는 제한 국주,
즉 국왕은 의회의 지시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고 규정되었다.
(18세기에는 국왕이 없는 나라를 상상하기 힘들었다. 국왕의 입장에선 폭도였으나 그들 중 누구도 루이16세를
페위시키자고 주장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프랑스가 국왕없이 꾸려나가자고 결의한 것은 국왕이 동망치다가
체포된 뒤의 일이다.)
-> 1789년 8월 27일. 새로 선출된 프랑스 국민의회는 이른바 '인간과 시민의 권리'를 체택하기로 가결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국민의회를 구성하고 있는 프랑스 국민의 대표자들은 이권에 대한 무지와 망각 또는 멸시가 공공의 불행과
정부의 부패를 낳는 유일한 원인이라는 데 유의하면서 인간의 타고난, 양도할 수 업는 , 신성한 권리들을
엄숙한 선언을 통해 천명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이러한 선언이 사회조직의 모든 구성원들 앞에서 계속해서
그들의 권리와 의무를 상기시키돌록 하기 위함이며, 입법권과 행정권의 제 행위가 계속해서 모든 정치제도의
목적과 비교됨으로써 이에 따라 보다 존중되도록하기 위함이며, 시민의 요구가 앞으로 단순하고 명확한
원칙들에 입각하여 언제나 헌법의 유지와 모두의 행복에 이바지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국민의회는 지고의 존재, 하는님의 임하심과 보살핌 속에 다음과 같이 인간과 시미의 제 권리를
승인하고 선언하는 바이다.
1. 인간은 자유롭게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태어났다. 사회적 차별은 공동이익을 근거로 해서만 성립될 수 있다.
2. 모든 정치적 결사의 목적은 인간의 자연적이고 양도할 수 없는 제 권리를 수호하는 것이다. 그 권리란 자유와 재산, 안전, 그리고 압제에 대한 저항이다.
3. 모든 주권의 원천은 본질적으로 국민에게 있다. 어떤 집단과 개인도 국민으로부터 명시적으로 나오지 않는 권위를 행사할 수 없다.
4. 자유란 남에게 해가 되지 않는 일은 무엇이나 할 수 있음을 말한다. 따라서 모든 인간의 자연권 행사는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에게 같은 권리의 향유를 보장하는 이외의 제약을 받지 아니한다. 이러한 한계는 법에 의해서만 규정될 수 있다.
5. 법은 사회에 유해한 행위가 아니면 금지할 권리를 갖지 아니한다. 법에 의해 금지되지 않는 것은 어떤 것이라도 방해될 수 없으며, 누구도 법이 명백하지 않은 것을 행하도록 강제할 수 없다.
6. 법은 일반의사의 표현이다. 모든 시민은 스스로 또는 대표자를 통해 그 작성에 협력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 법은 보호를 부여하는 경우에도, 처벌을 가하는 경우에도 모두에게 동일한 것이어야 한다. 모든 시민은 법 앞에 평등하므로 그 능력에 따라, 그리고 덕과 재능의 차별 이외에는 차별 없이 모든 공적인 위계, 지위, 직무에 평등하게 취임할 수 있다.
7. 누구도 법에 의해 규정된 경우에, 그리고 법이 정하는 형식에 정하지 아니하고는 소추, 체포, 또는 구금될 수 없다. 자의적인 명령을 간청하거나 발령하거나 집행시키는 자는 처벌된다. 그러나 법에 의해 소환되거나 체포된 시민은 모두 즉각 순응하여야 한다. 이에 저항하는 자는 범죄자가 된다.
8. 법은 엄격히 명백히 필요한 처벌만을 설정해야 하고, 누구도 범죄 이전에 제정 ∙공포되고 또 합법적으로 적용된 법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처벌될 수 없다.
9. 모든 사람은 유죄선고를 받을 때까지 무죄로 추정되므로, 체포가 불가필할 경우 피의자의 신병을 확보하는 데 불가결하지 않은 모든 강제조처는 법에 의해 준엄하게 제압된다.
10. 누구도 그 의사가 종교상의 의사라 할지라도 그 표명이 법에 의해 설정된 고공질서를 교란하지 않는 한 방해될 수 없다.
11. 사상과 의사의 자유로운 통교는 가장 소중한 인권의 하나이다. 따라서 모든 시민은 자유롭게 발언하고 기술하고 인쇄할 수 있다. 다만, 법에 의해 규정된 경우에 있어서의 그 자유의 남용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한다.
12. 인간과 시민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공공의 무력이 필요하다. 따라서 이는 모두의 이익을 위해 설치되는 것으로서, 그것이 위탁되는 사람들의 특수이익을 위해 설치되지 아니한다.
13. 공공무력의 유지와 행정비용을 위해 일반적인 조세는 불가결하다. 이는 모든 시민에게 그들의 능력에 따라 평등하게 배분되어야 한다.
14. 모든 시민은 스스로 또는 대표자를 통해 공공조세의 필요성을 검토하고, 그것에 자유로이 동의하며, 그 용도를 감시하고, 또한 그 액수, 기준, 징수, 그리고 존속기간을 설정할 권리를 갖는다.
15. 사회는 모든 공직자에게 그 행정에 관한 보고를 요구할 권리를 갖는다.
16. 권리의 보장이 확보되어 있지 않고, 권력의 분립이 확정되어 있지 아니한 사회는 헌법을 가지고 있지 아니하다.
17. 소유권은 신성하고 침해할 수 없는 권리이므로, 합법적으로 확인된 공공필요성이 명백히 요구하고 또 정당하고 사전배상의 조건하에서가 아니면 침탈될 수 없다.
-발췌 : 문화사 유럽/페이터 리트베르헨 지음
==> 선거권은 아래로부터의 요구이다.
-> 1789년 10월 국민 의회는 특권 폐지를 결의하고 '인권 선언'을 채택해서 신 헌법을 심의하고 있었다.
국왕 부부와 특권계급의 무리들은 법령 실행을 지연시키며 예전의 세력을 만회활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 차에 인민들에게 베르사유 궁전에서 호화판 연회가 열린다는 소문이 전해졌다.
날마다 끼니 걱정을 해야하는 부녀자들의 가슴에 격분이 일고 있었으며 한 젊은 아가씨가 병영 안으로 뛰어들어가
북을 두드리자 순식간에 수많은 여자들이 행렬을 지어 "빵을 달라! 빵을 달라!"고 외치며 베르사유를 향해 행진했다.
-> 인권선언의 최종 재가를 망설이고 국왕은 "파리가 행진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당황한 나머지 무조건 승인한다
-> 봉기 민중은 국왕을 자기네 사람으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왕에게 빠리로 환궁을 요청했다.
왕과 왕비 왕자는 더이상 버틸 수 없어 마차에 올라탔다. 그들은 의기양양하게 국왕을 호위하고 파리로 돌아왔다.
-> 프랑스는 비로소 '국왕의 나라'에서 '인민의 나라'로 바뀌었다.
남성들이 7월 14일(바스티유 점령)를 만들고, 여성들이 10월 6일을 만들었다." 고
역사가인 튈 미률레는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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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적 배경 -
① 프랑스이 정치세력 -1. 왕당파(주권 없음) - 왕정을 지지하는 귀족세력
2. 공화주의자(주권 행①사) - 하층 부르주아지, 노동자, 나폴레옹 지지자들
3. 입헌 군주제(주권 위임) - 상층 부르주아지
(오를레앙파라고도 불렸다. 오를레앙공작은 루이14세의 남동생이며 루이 필리프의 아버지)
② 실직자 증가 : 산업혁명 => 농업사회 붕괴=>도시 노동자 증가 =>불황(이익률 하락)=> 실직자 증가(1840년대)
③ 영국= 지주사회, 프로이센=유커(토호세력), 프랑스=황제
④ 산업혁명: 1780년대를 기점으로 근 100년에 걸친 생산 기술의 혁신과, 그 결과 나타난 경제적, 사회 구조적 변화를
의미한다. 단순히 생산성만 높인 것이 아니라, 빠르게 부를 축적할 수 있는 물리적 근거가 되었다.
수공업-> 대규모 공장 등장, 도시 출현, 거대한 노동자 계급을 만들어 냈다(사회주의 운동의 태동) 즉 새로운
피지배계급 만들어 짐
=> 홉스봄 주장:
① 홉스봄의 주장은 영국에서 산업이 발전할 수 있었던 환경은 이미 조성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산업혁명 100년 전의 찰스 1세의 처형으로 경제정책이 우선순위를 가졌으며, 이미 당시에 매뉴팩처가 성행
하고 있었다. 또한 이전 시대의 인클로저 운동으로 잉여노동인구가 풍풉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바탕위에 해
외 식민지 무역을 통한 면공업을 팽창적으로 운영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② 홉스봄은 경제력은 프랑스가 영국보다 앞서 있었다고 평가. 산업 혁명이 적용된 면직 공업이 전체 산업에
서 차지하는 부분도 미미하다고 보앗다. 세계 시장이 없다고 가저하면 공급은 계속도리 수 있어도 수요가 한
정된 탓에 공황이나 불황으로 이어질 가능성 높다. 영국이 사업 혁명을 통해서 세계 패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생산 조건뿐 아니라 상품을 판매할 수 있는 시장 연건이 충족되었기 때문이다.
-사상적 배경-
볼테르(1694~1778), 루소(1712~1778) 등의 계몽사상에 입각하여 "신분차별이 정당한가?"라는 명제로 의문을 키우게 된다.
- 시사 점-
- 프랑스 혁명은 파리의 평민, 상점주, 노동자, 농민 및 혁명에 공감하는 귀족과 성직자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 신흥 자본가 계급에게 프랑스 혁명은 사회의 걸림돌 역할을 했던 각종 봉건주의적 잔재들을 모두 청산해 버렸다.
자본이 원하는 방향로 움직일 수 있는 효율적이고도 중앙 집권적인 국가 체제를 만들어 내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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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코뱅파의 피의 숙청 - 단두대를 [국민의 면도칼], 자코뱅파를 피에 미친 악마에 비유됨
- 나폴레옹이 쿠테타의 수장이 되어서 스스로를 황제라 칭하고 프랑스 최고의 권력자가 된다.
1848년 2월 혁명
->프랑스의 마지막 황제 루이 필리프가 '노동조합' 결성을 금지
노동자의 불만이 쌓인 상태에서 1848년 2월 22일 '선거법' 개혁을 위한 야당의 집회를 정부가 무력으로 금지
화가난 민중이 봉기하여 왕정을 무너뜨리고 임시정부를 수립한다.
-> 2월 24일 폭동에 앞장 섰던 노동자의 요구로 공화정이 선포된다.
-> "유럽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활동적이고 호전적이었던 노동자들은, 프롤레타리아가 아니라, 장인 조합 작업장에서
일하는 전문 기술자들로, 고유의 상업 조직, 전통과 문화, 심지어는 고유의 정치적 성향까지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독립성은 새로운 산업기술과 공장 체계, 그리고 값싼 생산 방법 등에 의해 위협받았다.
-> 1848년에는 이들을 경쟁(산업자본)으로부터 보호해 줄 것을 촉구하는 주장들이 사회주의 사상에서 가져온 진보적 성
향들과 맞물렸다.
-> 파리, 리옹, 루앙과 리모쥬는 그렇게 정치적 자각이 있는 기술자들로 가득했고, 이들은 독일- 특히 작센, 뷔르템베르
크, 프로이센, 프랑크푸르트와 라인란트에서도 활동적이었다. 비엔나에서는 노동자들이 자신들 고유의 정치성을 수
립하지는 못했으나, 대학생들과 언론인들의 지도를 따라 과격파 중산층 주도의 급진 운동에 힘을 제공해주었다.
-> 노동층의 호전성과 급진 좌익은 (사회에 있어) 귀족들이나 고위 부르주아들만이 아니라, 토지를 소유한 농부들, 그리
고 부유한 수공업자 계층 등 사유재산을 가진 모두를 위험에 빠트리는 것처럼 비춰졌다.
-> 혁명 후 집권한 온건/중도 개혁세력(liberals and moderates)은 혁명이 그 단계에서 완성되었다 보았으나,
-> 산업화에 위기를 느낀 중산층 수공업자들의 경제적 욕구로 인한 사회 불안정화와, 완전한 정치 혁명과 공화국을 꿈꾸
던 급진주의 과격파들과의 충돌이 이어지게 되었고, 집권 세력은 이러한 충돌을 안정화시키지 못했다. 중도 자유주의
세력은 우유부단하게 기존 체제와 기득권층에 너무 많은 힘을 남겨둔 상태에서 일을 진행했다.
-> 한편 급진 과격파들은 위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동맹' 사례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자신들이 도우려 한 '노동계급'의
당시 실체와 정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큰 지지도 받지 못했다. 그동안 지지부진하게 계속되는 무력
충돌, 사회 불안과 불경기에 질린 사람들이 보수주의로 방향을 돌렸고, 집권한 혁명세력도 급진파들을 제압하기 위해
보수화 되다 보니 결국 반혁명 세력 / 기득권 세력이 다시 재기할 기회를 줘 버리게 된 것이다. . 자신들이 얻어낸
새 정치적 자유들을 보존하는 것과, 자신들의 목숨, 재산, 그리고 공동체를 혼돈으로부터 지켜내는 것, 이
두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자유를 안전을 위해 희생하는 쪽을 택했다. 좌익 운
동이 초래한 사회적 공포는, 따라서, 제 2 혁명의 위협이 두려워 중립지를 버리고 권위주의적 수단에 의존
하게 된 자유주의자, 온건파, 그리고 부동층들을 보수주의자들의 손에 놀아나게 만들었다.*"
- 윌리엄 카, 『독일근대사] 중에서
==> 사회혁명은 사라졌지만 프롤레타리아들의 정치적 진출은 뚜렸했다.
==> 혁명이란 역사 발전 과정에서 나타나는 급격한 사회 변동을 의미한다.
귀족과 노예-> 본건 귀족과 농노->자본가와 노동자 계급
첫댓글 국민국가란 국민에게 자유라는 권리를 주고, 정치 권력에 참여하게끔 유도한 후에 국민들로부터 각종 자원을 추출하는 것이다. (펌 : http://blog.naver.com/oyee?Redirect=Log&logNo=100011340043)
향후 시사하는 바 : 바쁜 직장맘에게도 진정한 자유가 생기고, 정치권력에 참여할 이론 무장을 위해 독토에 참석할 수 있게 된다?
치열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는 직장맘~!!
진정한 자유를 후딱 찾게 만들려면~ 행동을 해야 하는데 자유를 찾을 시간이 없네
ㅋㅋㅋ 독토에 참석할수 있도록 권력을 부여하노라~~~ 아멘
고생하셨어요. 많은 준비하셨다는 느낌이 빡~~ 끝~~!!
감사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