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 특별히 어려운 내용을 담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그 속에 실타래처럼 얽힌 인간의 삶에 관한 질문들에 대해 답하다보면 나도 어느새 거미줄에 갖힌 벌레 같다는 느낌이 든다. . 절제하기보다는 과장된 듯한 이야기 방식도 일반적인 소설과 비교해서 그리 친숙하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특히 2~3페이지씩 연속해서 이루어지는 대화는 일다보면 때로 그 요지를 놓치기 십상이다.
아버지 표도르 카라마조프는 카라마조프가의 원조이자 원죄이다. 그 자신은 마치 모든 인간의 문제에 깔려있는 어떤 배경 같다는 느낌이 강하다.
이 소설의 무대는 러시아의 어느 시골 도시이다. 카라마조프의 집안은 늙은 홀아비 표도르 카라마조프와 그의 자식들, 즉 장남 드미트리, 둘째 이반, 셋째 알료샤, 그리고 사생아 스메르자코프로 구성되어 있다. 이 작품은 음탕한 아버지와 그의 네 아들을 중심으로 아버지와 아들, 형과 아우의 애욕의 갈등을 묘사하는 한편, 이반과 조시마 장로 사이에 벌어지는 사상의 갈등을 전개한 소설이다.
이 소설에서는 그 이전의 어느 작품에서 보다 많은 유형의 상이한 성격 소유자들이 등장하지만, 그들은 다 같이 각양각색의 특질과 본성을 인격화한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몰락한 시골 귀족의 후예인 아버지 표도로는 방탕한 호색한이다. 독설가로도 유명하고, 선악의 경계를 완전히 초월한 리비도의 소유자이며 육욕과 물욕의 화신이라 할 수 있다. 장남인 드미트리는 카라마조프가의 '정열'이 세계를 대표한다. 그는 아버지와 비슷한 정열적인 감정과 야성적인 생명력을 물려받고 있지만, 명예와 진리를 존중하는 고상한 일면도 지니고 있다.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는 그 싸움을 조명해 보고 다만 그 싸움이 얼마나 소모적이었는가를 살펴보기 위해 사용했던 환상적인 렌즈인 것이다. 이반의 정신이 대표하는 악한 것, 알료샤가 대변하는 선한 것은 '이러한 것이 선한 것이고 이러한 것이 악한 것이다.'라고 단정짓기를 거부한다. 다만 우리는 그들이 내부로부터 끊임없이 계속하고 있는 선악에 대한 투쟁의 과정을 지켜볼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런데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소설이 고통과 고뇌의 끊임없는 연속이며 동시에 그에 대한 명확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적인 기대가 소설 전체에 충만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반의 정신이 파멸하여 마침내 낡고 병든 것이 물러가면 사랑으로 충만한 새로운 삶이 비로소 시작되리라는 기대이다. 우리는 조시마 장로의 그리스도적 사랑을 이미 알고 있지만 작가는 그것을 우리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조시마 장로는 사상의 틀을 형성하며 주인공들의 사고를 때때로 보완할 뿐이다. 작가의 회의 속에서 시작되었고 회의적인 사고들이 이야기를 끌어나가고 있다.
이반 까라마조프가 신이 창조한 세계를 부정하며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왜 아무죄도 없는 어린아이들까지 고통받아야 하지?` 라고 의아해 하는 것처럼 그의 지하 생활자들은 신을 간과한채 악의 눈으로 신의 세계를 평가하려 하곤 한다. 이러한 논리는 오류이다. 선과 악의 대결, 신과 악마의 대립구도라는 것은 본래가 `신의 품안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논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반그리스도적인 악의 주변에는 항상 선이 존재하고 있다. 아니 선의 주위에 악이 존재한다라는 표현이 훨씬 정확할 것이다. 왜냐하면 악이라는 것은 언제나 선을 더욱 현실적으로 생동감있게 드러내는 구도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첫댓글 앙,,,,, 난 아직도 안 읽었는뎅....m_m;;
excell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