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오리엔트의 격변
비블로스가 아모리인들의 손에 넘어가고, 그 과정에서 가나인 인들이 형성되고 티레나 시돈 같은 도시들이 만들어지는 시기에 중동에서는 엄청난 일들이 벌어진다. 기원전 17세기 중반 가공할 신무기인 전차를 장비한 힉소스 인들이 이집트를 정복하고 백년 이상 지배하는 파천황적 대격변이 일어난 것이다.
하지만 이집트인들은 결국 그들을 타도하고 이집트의 나폴레옹라고 불리우는 토트모세 3세(재위 기원전 1469-1425)가 등장한다. 여러 차례의 원정으로 가나안들의 연합군을 물리치고 유프라테스 강 상류까지 정복한 그는 이곳에 세 개의 속주를 두었는데 그 중 하나의 이름이 가나안이었다. 하지만 이집트는 속주의 수도를 제외하고는 현지인들에게 폭넓은 자치를 허용하고 종주권을 행사하는 정책을 썼기에 가나안 인들은 이집트의 영향을 깊게 받으면서도 나름대로의 문화를 만드는 데 성공한다. 투트모세의 후계자 중 하나는 기원전 1370년, 비블로스를 포위해 항복시켰는데, 여기서 인류 최초의 해상봉쇄가 벌어진다. 하지만 이 시기인 기원전 14세기에는 인류 최초의 국제화 시대가 열렸다.
이 시기 페니키아의 무역이 어느 정도 활발했는지를 알려주는 증거 중 하나가 기원전 1316년 무렵 현재의 터키 울룬부룬에서 난파 된 페니키아의 상선이 1984년에 발견되었다. 이 배에 실린 전체 화물은 15톤, 그 중 10톤은 구리와 주석 이었는데, 적어도 9개 지방에서 나온 화물이 실려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다만 이 배가 페니키아의 것임은 거의 확실하지만, 어느 항구에서 출발했음은 알 길이 없다. 문헌적 증거는 이 보다 일 백 년 전에 발견되었다.
1887년, 이집트의 텔 엘 아마르나 Tell el-Amarna에서 발굴된 점토판들이 그 증거다. 발굴된 지역의 이름을 따 아마르나 문서라고 불리우게 되는 이 귀중한 자료는 이것은 아멘호텝 3세(기원전 1386년 ~ 기원전 1349년)와 4세(이크나톤으로 더 유명하다), 투탕카멘 초기의 약 25년간에 걸친 외교서신들로서, 당시의 이집트 파라오와 주변국가의 왕이나 제후들과 주고받은 서신들이다. 당시의 국제어였던 아카드 어로 쓰여진 이 서신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하나는 파라오에게 종속된 영주들의 편지이고 다른 하나는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미타니, 히타이트처럼 파라오와 대등한 관계에 있던 중동 국가 왕들의 편지이다.
후자의 문서들은 대부분 외교 관례에 따른 의례적인 인사와 ‘형제’로서의 대등한 관계를 강조하는 장광설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정치적 대화는 극히 적고, 대신 상대와의 신뢰를 돈독히 하고 우호관계를 위해 보내는 엄청난 양의 선물이나, 정략결혼, 사절단의 예방 등이 주된 내용이다. 이와는 달리 전자의 문서들은 종속관계이기에 ‘종’을 자처하며 충성심을 나타내는 의례적인 인사로 시작된다. 영주들은 자신의 충성이 절대적임을 과장해서 표현하고, 위대한 파라오만이 보내줄 수 있는 것이라며 금이나 군대 등 자신이 필요한 것을 부탁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집트의 통치력이 점차 약해지면서부터는 시리아와 가나안의 무정부적 상황과 난세를 틈탄 영주들의 불충스러운 행동이나 반역을 준비하는 모습 등도 짐작할 수 있다. 이 때 주목할 만한 인물이 티레의 영주 아비 밀쿠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