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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도는 진번(대방)을 황해도라 하였지만, 晉書의 대방은 조백하 부근 고구려 국경지역
◉ 한일합병 16년 전에 발표된 일본인의 한반도내 한사군 설치 논문
일본인들은 1905년 을사보호조약으로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5년 후인 1910년 경술국치 또는 한일합병이란 이름으로 대한제국의 국권을 빼앗았다.
일본인들은 조선 침략의 한일합병이 이루어 진 1910년 보다 16년 전인 1894년에 ”나카 미치요“가 「조선낙랑현도대방고(朝鮮樂浪玄菟帶方考)」를 발표하면서 조선의 낙랑과 현도가 요서 지방이 아닌 한반도 내에 있었다는 주장을 폈다. 일본이 조선 침략 이전에 자기나라도 아닌 조선의 북쪽 땅이 모두 한나라의 한사군에 속해 있어서 조선은 한무제 이래 조선의 속국이난 주장을 한 것이다.
”나카 미치요“는 왜 자기나라의 역사도 아닌 조선의 역사에 대하여 조선의 고대 역사가 중국의 속국이라는 주장을 하였을ㄲ? 그 이유는 일본의 역사학자나 고고학자들이 당시 많은 일본인 들이 주장하던 정한론(征韓論)을 뒷받침 하기 위하여 발벗고 나섰기 때문이다.
일본은 명치유신보다 훨씬 이전인 1853년 미국의 해굱 제독 페리가 함선 4척이 일본을 침략 상륙한 후 곧바로 그 군대가 수도까지 진격하여 미국 13대 대토령의 국서를 막부에 전달하고 수교를 요청했으며, 이듬해 〈미일화친조약〉(가나가와 조약) 체결에 이르렀다. 아 사건은 일본인에게 엄청난 충격을 준 사건이었다.
이후 1867년 막부를 타도하고 천황이 된 명치(明治)는 엄청난 국력으로 전 세계에 식민지를 지배하고 있는 서구 열강을 모방하는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친다. 명치의 집권 초기인 1870년대부터 많은 일본인들이 조선을 정벌하여 영토화 해야 한다는 정한론(征韓論)을 펼쳤다. 정한론의 근거는 백제 멸망(AD 662년) 보다 약 60년 후 처음 간행된 일본서기(日本書紀)에서 일본이 4세기 경 진구 황후가 백제를 속국으로 두고 신라를 정벌했다는 주장(삼한정벌).이 있는데, 백제가 일본의 속국이 될 수 없는 기록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에 그치지 않고 일본계 세력이 가야 지역을 중심으로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주장이 일본 교과서에 지도와 함께 실려 있다.
이같은 일본서기를 바탕으로 명치유신 직후부터 많은 일본인 들이 서구 열강처럼 일본도 외국에 식민지를 확장하자는 주장을 하였고, 그 첫 번째 대상이 일본서기를 빙자한 정한론(征韓論)이었다. 이 정한론을 뒷받침 하기 위해 일본 역사학자들은 고대 일본의 한반도 남부 지배와 한(漢)나라 낙랑과 대방, 현도의 조선 북부 및 심지어 전라도까지 지배했다는 것을 논문으로 발표하게 된 것이다.
정한론은 한일합병보다 40여 년 전부터 많은 일본인들에 의하여 주장된 정한론을 뒷받침 하기 위하여 일본의 역사학자들이 일본의 한국 남부 지배론과 중국의 한반도 북부 지배론을 앞다투어 발표하게 된 것이다.
◉일본인들의 한국고대사 말살을 위한 한반도 내 한사군설
이후 일본인들은 한국의 역사 왜곡을 급속하고도 철저히 시작했다. 불과 한일합병 3년 후 이병도의 일본 와세다 대학 스승이었고, 후에 조선사편수회의 중심인물이었던 쓰다 소우키치(津田左右吉)가 남만주철도주식회사의 용역을 받아 <조선역사지리>(朝鮮歷史地理: 1913)를 썼는데, 이 자는 <조선역사지리>에서 “낙랑군의 남부에는 후한(後漢) 말에 이르러 대방군(지금의 경기, 황해도 지방)이 분치되었다”라고 처음 왜곡된 주장을 하였다.
쓰다스츠키 뿐 아니라, 일본인 조선편수회 직원인 이마니시 류(今西龍)는 진번군을 충청·전라북도 지역으로 비정하였고,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는 충청도 지역으로 진번군을 비정하였는데, 이들 일본인들은 모두 각종 궤변을 학설이란 이름으로 발표한 것이다. 이들은 한국의 고대사에서 한무제가 설치한 한사군은 충청도 및 전라도까지이어서 전국토가 중국의 한사군 영토라고 왜곡하는데, 서슴치 않았다.
그러면 왜 경상도는 한사군에서 빠졌을까? 일본인들은 경상도는 일본의 임나일본부가 점령한 땅이어서 경상도는 일본 땅이고 결국은 한국 고대사에서 조선이란 나라는 완전히 식민지이 땅일 뿐이라는 역사 말살을 서슴치 않았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쓰다스츠키(津田左右吉), 이마니시 류(今西龍) 및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의 한반도 내 한사군설 중에서 쓰다소유치비의 제자이기도 한 이병도는 쓰다의 주장을 그대로 추종하여 진번군 대방 설치설과 후에 진번군의 대방교치설을 주장 하였으며, 쓰디스츠키와 이병도란 자의 황해도 진번군 및 대방군설은 오늘날 까지도 식민 사학자들에 의해서 금과옥조로 유지되고 있다.
◉이병도란 자의 진번과 대방에 대한 황당무계한 왜곡 주장
진번군은 한(漢) 무제(武帝)가 서기전 108년에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자리에 진번(眞蕃), 임둔(臨屯), 현도(玄菟), 낙랑(樂浪)의 4개 군을 두었다고 하였는데, 이병도는 일본인 쓰다스츠키의 주장을 그대로 추종하여 이 진번군을 지금의 황해도와 경기도 북부 지방에 두었다고 주장한 것이다. 또 대방군(帶方郡)은 후한 말기 건안(建安) 연중에 공손강이 낙랑의 둔유현(屯有縣) 이남의 땅에 대방군을 설치했다는데, 이 대방군은 예전 진번군 자리에 설치했다고 이들은 주장한다.
이병도(李丙燾)란 자는 “재령평야설은 진번군의 강역이 대체로 황해도 재령평야를 중심으로 동쪽은 지금의 춘천 일대, 북쪽은 자비령, 남쪽은 한강 북안에 이르는 것”이라는 주장을 했다. 또 쓰다스츠키나 이병도와 유사한 주장을 한 자로는 한백겸과 중국의 양수경이란 자가 후한 말 공손강(公孫康)이 낙랑군의 둔유현 이남 미개척지에 새로 설치한 대방군은 지금의 자비령과 대동강 입구를 북계로 삼고 황해도의 대부분을 차지한 것이며 동시에 진번(眞蕃)의 북계도 이와 일치한다고 하였다.
이병도는 또 1911년 일본인 학자들이 황해도 봉산군에서 발굴한 ‘대방태수 장무이(張撫夷)의 무덤’을 근거로 대방군의 치소인 대방현이 봉산군이라고 비정했다. 장무이 무덤의 무신(戊申)년은 역사학자들이 말하는 대방군이 멸망한 해(AD 313년) 보다 35년 후인 동진(東晋) 영화(永和) 4년(348)이어서 결코 대방군이 존재할 수 없는 시기이다.
이병도는 둔유현을 황해도 황주로 비정했는데 그 논리를 보자.
산해경에는 “열구, 요동에 있다”라고 했지만, 국사- 이병도는 둔유현을 황해도 황주라고 주장했는데, 그의 해괴한 논리는
“고려사 지리지 황주목(黃州牧)조를 보면 ‘황주목, 본 고구려 동홀(冬忽)’이라고 하고 그 밑의 분주(分註)에 ‘일운(一云) 우동어홀(于冬於忽)’이라고 하였다. 여기 ‘우동어홀’의 동어(冬於)와 둔유(屯有)의 음이 서로 근사한데 우리의 주의를 끈다.
속히 말하면 ‘둔유’와 ‘동어’는 즉 같은 말의 이사(異寫: 달리 적음)가 아닌가 생각된다. 우(于)는 고구려 지명 위에 흔히 붙는 것으로서 방위의 상(上: 웃)을 표시하는 의미의 말이 아닌가 추찰된다. 하여튼 둔유현이 지금의 황주(黃州)에 해당하리라고 생각되는 점은 비단 지명상으로뿐만 아니라 또한 실제 지리상으로 보더라도 적중(的中)하다고 믿는 바이다.”(이병도, ‘진번군고’, <한국고대사연구>)
이병도란 자는 장황한 설명 후 ‘적중하다고 믿는 바이다’라고 단정했지만 이병도가 황주를 둔유라고 본 근거는 동어(冬於)와 둔유(屯有)의 음이 비슷하다는 것 하나뿐이다. 뜻글자인 한자를 발음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같다고 단정하는 것은 언어학적으로도 문제가 많다.
<진서>에는 대방군에 소속된 7개 현의 이름이 나온다. ‘대방·열구(列口)·남신(南新)·장잠(長岑)·제해(提奚)·함자(含資)·해명(海冥)’현이 그것이다. 그중 하나가 열구현(列口縣)인데
이병도는 열구현을 황해도 은율(恩栗)로 비정했다. 다시 그 논리를 보자.
“은율군은 고구려 시대의 ‘율구(栗口)’ 혹은 ‘율천(栗川)’이니 율구(栗口)는 열구(列口)와 음이 거의 같고 율천(栗川)도 열수(列水)의 이사(異寫)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열구현(列口縣)이 오늘의 은율 부근이라 함에는 이론(異論)이 없을 것이다.”(이병도, ‘진번군고’, <한국고대사연구>)
한사군의 설치 위치에 대해서는
크게 정리하면 진번군이 요동이나 고구려 지역에 있었다는 북방설과 황해도 등지에 있었다는 남방설이 있다. 이병도는 북방설에 대해 “일소(一笑)에 붙이고도 남음이 있다”고 일축하면서 ‘진번군=대방군=황해·경기도’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그가 이런 근거로 든 것은 고대 사료가 아니라 19세기 말~20세기 초의 중국학자 양수경(楊守敬: 1839~1915)이 <회명헌고>(晦明軒稿)에서 대방군의 7개 현을 옛 진번군의 잔현(殘縣)이라고 주장한 것을 그대로 차용한 것이다. 아무런 사료적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 양수경의 주장에 대해 이병도는 “어떻든 대방 7현을 고(故) 진번의 잔현(殘縣)으로 추단(推斷: 추측해서 단정함)한 것은 틀림없는 탁견으로 진번 문제 해결에 한 서광을 비추어주었다”(<한국고대사연구> 114쪽)라고 극찬했다
이병도는 수성(遂成: 수나라 탁군태수 최홍승의 진격로)을 황해도 수안(遂安)과 앞글자 “수(遂)“자가 같아서 수성(遂成)이 황해도 수안이라고 왜곡하여 갈석산 만리장성 시발점을 황해도 수안으로 끌어들였다.
이병도란 자의 논문은 이같은 해괴한 논리를 논리라고 내세워서 열구를 은율로 둔갑 왜곡 비정하고 있다.<참고: 이덕일교수의 글 일부 인용>
그러나, 이병도는 세키노 타다시(關野貞)가 발굴지 황해도 봉산(鳳山)을 대방의 치현(治縣)란 주장을 그대로 인용했고, 낙랑군 둔유현(屯有縣을) 황해도 황주(黃州)로, 대방군 열구현(列口縣)을 황해도 은율(殷栗)로, 낙랑군 수성현(遂城縣)을 황해도 수안(遂安)이라는 황당하고 해괴한 궤변을 논문으로 발표하여 황해도와 경기도 북부를 대방군으로 확정한 장본인이 되었다.
이병도는 일본인 세키노 다타시(關野貞)가 중국 북경의 유리창 등에서 밀수해온 낙랑계 유물을 황해도 봉산 지역 무덤 발굴 시 끼워넣고 황해도에서 다량의 낙랑계 유물이 발굴 되었고, 대방태수 장무이의 명문벽돌오 발굴되었다고 날조한 사실을 전혀 비판도 아지 않은 채 세키노 타다시의 고고학 발굴을 근거로 일본인들이 주장한 황해도 대방군설을 추종하고 꿰맞추어 준 인물이다.
일본인 세키노 타다시의 평안도 및 황해도 발굴 시 북경 유리창에서 밀수해 온 골동품을 끼워 넣고 고고학을 날조한 것이다.
◉ 세키노 타다시의 장무이 무덤 발굴과 낙랑 평양무덤 발굴품이 오염되었고, 폐기되어야 할 이유
황해도 장무이 무덤과 평양 낙랑군 유적 발굴에 최고로 기여한 자는 세키노 타다시(関野 貞)이다. 그는 수차 북경의 유리창(琉璃廠)이라는 골동품 판매 중심지를 방문하고 많은 낙랑군 유물을 구입했다는 일기 기록이 남아 있다. 특히 그의 일기장에는 북경 유리창에서 다량의 한 대(漢代)와 낙랑(樂浪) 유물을 구입했다고 했다. 그가 북경에서 낙랑 유물을 구입했으며, 낙랑이 북경부근에 있었다고 해야 했지만, 그는 구입한 유물들을 평안도와 황해도 무덤 발굴 시 끼워 넣고, 평안도에서 낙랑 유물을 발견했으니, 평안도가 낙랑 지역이라고 날조 왜곡함을 서슴치 않았다.그는 고고학을 오염시킨 범죄자이었다.
“그의 일기장에는,
”대정 7년(1918) 3월 20일 맑음 북경
서협(西脇)씨의 소개로 중산용차(中山龍次氏)씨(중국: 지나 교통부 고문, 월후 출신)를 방문했다. 그의 소개로 우편국장 중림(공백) 씨를 방문하여 우편국 촉탁인 문학사 흑전간일(黑田幹一) 씨의 동도(東道)부터 유리창( 瑠璃廠)의 골동품 점을 둘러보고,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위하여 한나라 때(漢時)의 발굴품을 300여 엔에 구입했다.
(大正七年三月二十日晴 北京西脇氏ノ紹介二ヨリ中山龍次氏(支那交通部顧問, 越後 出身)ヲ訪ヒ,同氏ノ紹介二ヨリ郵便局長中林(空白)氏 ヲ訪ヒ,郵便局囑託文學士黑田幹一ノ東道ニヨリ瑠璃廠ノ骨董店ヲ廻覽シ, 朝鮮總督府博物館ノ爲メ漢時ノ 發掘品ヲ三百餘円ヲ購フ.)
대정 7년(1918) 3월 22일 맑음
오전에 죽촌(竹村) 씨와 유리창에 가서 골동품을 샀다. 유리창의 골동품 점에 는 비교적 한 대(漢代)의 발굴물이 많아서, 낙랑(樂浪) 출토품은 대체로 모두 갖추어 져 있기에 내가 적극적으로 그것들을 수집했다. (二十二日晴 午前, 竹村氏 瑠璃廠 往古玩購. 瑠璃廠 骨董鋪 比較的漢代 發掘物多, 浪出土品大抵皆在, 余極力之蒐集.)라고 기록 되어 있었다(자료 출처: 문성재 교수 (인하대 고조선연구소)
세키노 타다시 (関野 貞 , 1868년 ~ 1935년)”
또 평양 낙랑군 태수의 봉니라고 주장한 유적이 현장에서 발굴한 게 아니고 조선총옥부 박물관에서 사들인 것이란 기록도 있다.
“1922년 10월 30일, 조선총독부 박물관에서 ‘낙랑태수장’ 봉니를 고가인 150원에 매입”
“1931년 12월, 조선총독부 박물관에서 ‘낙랑태수장’ 봉니를 100원에 매입”
“1934년 2월, 조선총독부 박물관에서 ‘낙랑대윤장’ 봉니를 100원에 매입” (자료 출처: 문성재 교수 (인하대 고조선연구소))
***참고: 위의 대방과 낙랑군유적 발굴에 최고로 기여한 자는 세키노 타다시(関野 貞)는 북경 유리창을 찾아가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위하여 한나라 때의 골동품을 첫날 300여 엔(円) 어치의 엄청난 양을 구입하였다고 하였다.
당시 300엔은 “1922년 조선총독부 박물관에서 ‘낙랑태수장’ 봉니를 고가인 150원에 매입”했다는 기록에서 볼 수 있드시 어마어마한 금액으로 한 대와 낙랑 유물을 매입하였던 것이다.
세키노 타다시(関野 貞)는 이틋날인 1918년 3월 22일에도
“유리창의 골동품 점에 는 비교적 한 대(漢代)의 발굴물이 많아서, 낙랑(樂浪) 출토품은 대체로 모두 갖추어 져 있기에 내가 적극적으로 그것들을 수집했다”아고 일기에 기록하고 있는데, 이날 낙랑의 출토품이 대체로 모두 갖추어져 있다고 한 낙랑 유물을 적극적으로 구입한 수량이 얼마나 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세키노 일기에 엄청난 양의 낙랑 유물을 북경 유리창에서 구입했다고 기록산 사실을 볼 때 세키노는 마땅히 낙랑이 북경 부근에 있었다고 주장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이같이 세키노가 구입한 한 대와 낙랑 유물이 평양의 낙랑군 유적 발굴 시 유리창에서 구입한 낙랑군 골동품을 평양 무덤에서 출토된 것이라고 슬쩍 집어넣어서 날조 조작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필자는 세키노가 이같은 수법으로 낙랑과 대방의 골동품을 황해도 대방의 고고학적 유물이라고 위조하고, 평양의 냑랑계 유물이라고 위조하였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틀림없는 사실임을 확신한다. 그 이유는 대방과 낙랑이 황해도나 평양에 있었던 적이 역사적으로 없었고, 모두 만리장성 안쪽 조백하 부근에 있었음이 역사적으로 증명되기 때문이다. 부연하면, 수양제의 침략경로와 당태종의 치략경로 최초 목표에 낙랑과 대방 및 현도, 요동 등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낙랑과 대방과 현도는 요서 만리장성 안쪽에 있었고, 황해도나 평안도 또는 압록강변에 존재한 사실이 역사적으로 없다.
◉ 서한군국도(西漢郡國圖)와 서진군국도(西晉郡國圖)에도 낙랑과 대방은 만리장성의 남쪽에 위치해 있었다.
한(漢)나라 때의 한나라 영토를 표시한 서한군국도에 낙랑과 대방, 요동, 요서, 어양, 우북평 등의 지역이 모두 만리장성(燕長城) 남쪽에 표시되어 있다. 또 (晉)나라 때의 진나라 영토를 표시한 서진군국도에도 낙랑, 대방, 요동, 현도 및 요서가 모두 만리장성(연장성)의 남쪽에 그려져 있다.
이는 서한군국도 및 서진군국도에 표시된 바와 같이 낙랑과 대방은 모두 만리장성의 남쪽에 위치해 있었고, 결코 만리장성에서 수천리 떨어진 평안도나 황해도에 있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서한군국도와 서진 군국도에 표시된 만리장성은 어디인가?
원래 진번조선의 영토는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및 요동까지 포함된 지역이었다. 그러나 진번조선에 인질로 잡혀있던 진개가 연나라로 돌아간 후 진번조선을 공격하여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및 요동의 땅 1천리(또는 2천리)를 빼앗고, 이 지역에 연오군(燕五郡)을 설치하였다. 빼앗은 땅을 경계로 양평(陽平)에서 조양(朝陽)에 이르는 연장성(燕長城)을 쌓았다. 이후 진시황은 이 연장성을 보수 증축하여 만리장성을 쌓았다. 이 만리장성의 시작은 양평(陽平)인데, 이 양평은 지금의 갈석산 지역으로 비정된다. 또 조양은 지금의 북경 팔달령 부근인 북경시 조양구(朝陽區) 지역으로 비정된다.
진시황은 연나라를 멸망시킨 후 유주(幽州)의 대군과 탁군 등의 북쪽 지역 연오군을 유주에 포함시켰다. 이 진시황의 유주(幽州에 속한 10개의 군(郡)은 1) 탁군, 2) 발해군, 3) 대군, 4) 상곡군, 5) 어양군, 6) 우북평군, 7) 요서군, 8) 요동군, 9) 현도군, 10) 낙랑군이다.
이중 낙랑군과 요동군 대방현은 모두 서한군국도와 서진군국도에 표시된 바와 같이 만리장성의 안쪽에 위치해 있던 지명이다. 세키노 타다시의 장무이 무덤 발굴이나 평양 낙랑유물 발굴이 모두 북경 유리창에서 구입한 낙랑 유물을 끼워넣고 사기를 친 사실에 비추어 세키노의 평안도 낙랑 유물이나 황해도 대방 유물 발굴은 모두 날조임을 밝히고 폐기되어야 한다.
결코 유주 10군 중의 하나인 낙랑군이 평안도가 될 수 없으며, 요동군 대방현이 황해도가 될 수 없다.
◉ 대방(大方)은 후한말 설치가 아니라, 춘추전국 시대 이후 계속된 지명
진서에 포함된 대방군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공손강(公孫康)이 건안 연간(建安年間 : 196∼220)에 낙랑군 소속 둔유현(屯有縣 : 지금의 黃海道 黃州?) 이남의 땅을 떼어서 새로 대방군을 설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참으로 잘못 왜곡된 내용을 올려놓고 있다.
이 기록은 일본인들과 이병도란 자의 학설을 그대로 추종한 한국 역사학자들의 개탄스러운 역사 왜곡이다. 이 기록 그대로 지금의 대방군의 지도는 황해도와 경기도 북부지방까지 포함된 것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전술한 바와 같이 대방군에 대한 기록은
흔히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후한 말 공손탁(도)의 뒤를 이은 공손강이 3세기 초(AD 200년 도) 낙랑군 둔유현에 대방군과 6개 현을 두었고, AD 238년 위나라 사마의가 공손연을 참살하고 위나라가 이땅을 지배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대방의 위치를 일본인들이나 이병도 등이 황해도와 경기도, 심지어는 전라도까지 대방군을 설치했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대방은 공손강이 처음 설치한 곳이 아니라, 이전부터 있었던 지명임며, 요동에 위치해 있던 지명이다.
산해경(山海經)은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대체로 진(秦)나라를 포함한 전국시대(BC 403~221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시 산해경의 해내북경(山海經 卷12 海內北經)에는
“동해의 안쪽, 북해의 모퉁이에는 조선과 천독이 있는데 그들은 물가에 살며 남을 아끼고 사랑한다. 또 “조선은 열양(列水 와 陽)의 동쪽에 있는데, 바다의 북쪽이고, 산의 남쪽이다. 열양은 연나라에 속한다(東海之內 北海之隅 有國名曰 朝鮮 天毒 其人水居 偎人愛之 朝鮮在列陽東 海北山南 列陽屬燕)”
*註1. 조선(朝鮮)은 지금의 낙랑현(樂浪縣)으로 기자가 봉해진 땅이다.
*註2. 열양(列陽)은 지금의 대방 유구현(大方有口縣)이 이것이다. 열(列)은 물이름(列水)이다.
<곽박郭璞의 주석註釋>에는
“조선은 지금의 낙랑현으로 기자가 봉해진 곳이다. 열은 또한 물 이름이며 지금의 대방에 위치하고 대방에 열구현이 있다”(朝鮮今樂浪縣箕子所封地 列亦水名也今在帶方 帶方有列口縣) 라고 하였다.
***참고: 이 기록을 보면 BC 2세기 이전 한무제나 진시황 이전의 전국시대에 열양이란 지명이 있었고, 그 열양이 대방(大方)리라고 기록하고 있어서 조선과 연나라의 국경지역에 열양(대방)이 존재 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한서(漢書)의 (幽州) 낙랑군에도 대방현(大方縣)과 대방군의 속현들이 이 낙랑군애 모두 포함되어 있어서 이미 공손강이 대방군을 설치하기 수백년 전부터 대방군이 설치되어 있었고, 공손강은 이 낙강군의 6개 지역을 합쳐서 대방군을 설치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고구려 6대 태조왕(AD 53-146년) 94년(AD 146년)에
“왕이 장수를 보내 한나라를 습경하고요동군 서안평현을 점령하고, 대방현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와 그 처자를 빼앗아 돌아왔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王이 遣將하여 襲漢하고 遼東의 西쪽 安平縣하여 殺 帶方令하고, 掠得 樂浪太守와 妻子하다.) <삼국사기 태조왕조>
***참고: 위의 기록을 보면 후한의 공손강이 대방을 설치했다는 AD 200년 초나 서진이 AD 238년 공손연을 참살하고 대방군을 빼앗은(AD 238년 보다 80-90년 전에 고구려 태조왕이 대방현령을 참살한 기록이 있어서 결코 역사학자들의 주장처럼 공손강이 황해도에 처음 대방을 설치한 것이 아니다. 또 태조왕이 빼앗은 대방은 요동에 있고, 요동 서쪽의 안평현 부근이었음이 분명히 들어나고 있다.
한국 역사학자들은 고구려 15대 미천왕 14년(AD 312년) 낙랑군에 침입하여 남녀 포로 2000여 명을 잡아왔다는 기록과, 미천왕 15년(AD 313년) 남쪽의 대방을 침략했다는 기록을 근거로 평양 낙랑과 황해도 대방을 미천왕이 빼앗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낙랑 침입 보다 1년 전인 미천왕 12년(AD 311년)에는 요동군 서안평현(태조대왕이 대방현령을 참살했던 땅)을 습격하여 빼앗았다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이때의 요동군은 압록강 지역이 아니라, 수양젝 한탄한 요서지방의 요동군이다. 한국 식민 사학자들은 요동군 서안평현(西安平縣)을 지금의 압록강변 단동이란 궤변으로 일관하고 있다.
위와 같은 낙랑군과 후에 설치된 대방군과 그 속현 이름은 고구려 영양와조에 수양제가 고구려를 침략하기 위해 설정한 좌12군 및 우12군과 2개의 특별군대 침략경로에 거의 대부분 포함되어 있다. 이는 뒤에서 다시 설명하거니와 모두 고구려의 서쪽 국경 지역의 조백하 부근 고구려 영토에 속해 있었음을 증명한 증거가 있다.
그 명확한 그 증거는 수양제가 고구려를 침략하기 전 내린 조서에서,
“아름다운 땅 낙랑과 현도 및 요동이 오랑케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고, 갈발지간(갈석과 발해군 지역)을 빼앗았고, 요서를 침략했다”고 분개하면서 고구려 침략을 지시하였다. 수양제 침략경로는 고구려의 국경지대 지명으로 24개 군의 진격 경로를 지시하였는데, 그 24개 진격 경로에 낙랑과 대방의 모든 군현이 거의 다 포함 되어 있기 때문이다.
수양제의 조서 기록은 일반 역사서에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인 역사 기록이다. 이 조서에 기록된 낙랑군과 대방군 및 그 속현들은 요서 조백하 부근에 밀집되어 있었다. ,
◉ 대방군이 황해도가 아닌 요서 지방에 있었던 역사적 기록
후한 말 공손탁(公孫度: 공손도)의 아들 공손강은 “낙랑군 둔유현(屯有縣)의 남부에 대방군을 설치하였다.”라고 하였는데, 사실은 한(漢)나라 때 낙라군에 속했던 25개 현에 이미 포함되어 있던 대방현(大方縣), 열구현(列口縣), 장잠현(長岑縣), 제해현(提奚縣), 함자현(含資縣), 명해현(冥海縣)을 묶어서 대방군으로 통합하고, 나머지를 남겨서 낙랑군(樂浪郡)으로 삼은 것이다.
낙랑군 둔유현이 황해도 황주이고, 황해도와 경기도가 중국 식민지 대방군이라는 날조된 학설과 대방군이 전라도 및 충청도까지 점령하고 있었다는 일본인 들의 주장은 역사 날조이다. 낙랑군과 대방군은 고구려 서쪽 국경지역이어서 수양제의 침략경로이었기 때문이다.
晉書에 나타난 한사군은
낙라군의 속현에 1) 朝鮮조선, 2) 屯有둔유, 3) 渾彌혼미, 4) 遂城수성, 5)鏤方누방, 6) 駟望사망의 6개 현이 있었고
7) 帶方대방군 소속의 현에는 8)列口열구, 9) 長岑장잠, 10) 提奚제해, 11) 含資함자. 12) 冥海명해, 13)呑列탄열 6개 현이 있었다.
삼국사기의 영양왕 22년(AD 611년) 수양제는 고구려 침략시에
좌12군(左十二軍)은 1) 누방, 2) 장잠, 3) 명해, 4) 개마, 5) 건안, 6) 남소, 7) 요동, 8) 현도(玄菟), 9) 부여, 10) 조선, 11) 옥저(沃沮), 12) 낙랑(樂浪) 등의 길(道)로 나아가고,
우십이군(右十二軍)은 1) 점선, 2) 함자, 3) 혼미, 4) 임둔(臨屯), 5) 후성, 6) 제해, 7) 답돈, 8) 숙신, 9) 갈석, 10) 동이, 11) 대방(帶方), 12) 양평 등의 길(道)로 나아가 계속 진군하여 평양에 총 집합하라.“고 하였다. 또 탁군태수 최홍승은 수성(遂成)으로 나아가 고구려 평양으로 진격하라고 하였다.
◉ 대방과 대방군 속현은 모두 수양제 침략경로 조백하 부근 요서지방에 있었다.
위의 수양제 침략경로를 보면
진서(晉書)에 기록된 치소인
대방군(帶方郡) 대방현(大方縣)은 우 12군의 11번째)을 비롯하여
장잠(長岑)은 좌12군 2번째에,
제해(提奚)는 우12군 6번째에
함자(含資)는 우12군 2번째에,
명해(溟海)는 좌12군 3번째에
각각 이들의 군현들이 모두 수나라에서 평양으로 진격하는 진격로의 고구려 땅에 있었다.
진서에 나타난 열구(列口)와 탄열(呑列)이 빠져 있지만, 이는 이 지역이 중요한 지역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결론
서한군국도(西漢郡國圖)와 서진군국도(西晉郡國圖)에 낙랑군과 대방군은 모두 지금의 만리장성 안쪽에 표시되어 있다. 만리장성은 연나라가 진번조선에서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및 요동을 빼앗고, 양평에서 조양에 이르는 지역에 연장성을 쌓고 그 서쪽에 연오군이 설치된 지역이다. 그러므로 낙랑과 대방은 역사적으로 만리장서의 서쪽에 위치한 곳이며, 결코 평안도나 황해도에 설치된 역사적 사실이 없다.
이병도는 세키노 타다시(關野貞)가 발굴지 황해도 봉산(鳳山)을 대방의 치현(治縣)란 주장을 그대로 인용했고, 낙랑군 둔유현(屯有縣을) 황해도 황주(黃州)로, 대방군 열구현(列口縣)을 황해도 은율(殷栗)로, 낙랑군 수성현(遂城縣)을 황해도 수안(遂安)이라는 황당하고 해괴한 궤변을 논문으로 발표하여 황해도와 경기도 북부를 대방군으로 확정한 장본인이 되었다.
그러나, 일본인 세키노 다타시(關野貞)는 중국 북경의 유리창 등에서 밀수해온 낙랑계 유물을 황해도 봉산 지역 무덤 발굴 시 끼워넣고 황해도에서 다량의 낙랑계 유물이 발굴 되었고, 대방태수 장무이의 명문벽돌오 발굴되었다고 날조한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고, 세키노 타다시의 날조된 장무이 무덤 벽돌 명문을 근거로 황해도 대방군설 날조에 동조한 것이다.
수양제는 고구려 침략 당시 그의 조서에서
영양왕 22년(AD 611년) 정 2월 봄에 수양제가 고구려 토벌을 하명하였는데, 2개월 후인 하4월에는 탁군(涿郡)에 도착하였으며, 각지의 병사들이 이곳 탁군으로 집결하였다.
수양제는 조명을 내리기를 “고구려는 작고 추잡한 것들이(小醜) 혼미하고 불공하여 발해와 갈석 사이를 점령해 있고(碣發之間 崇聚), 요동 예맥의 땅을 잠식했으며...글안의 무리와 해변을 지키는 수나라의 사병을 죽이고, 또 말갈의 항복자와 요서를 침범하였다....요동(遼東), 현도(玄菟), 낙랑(樂浪)의 아름다운 강토를 돌아보니 이제 모두 오랑케의 땅이 되었다”라고 분개하면서 한탄하였다.
수양제의 이 침략경로 땅은 광개토대왕이 평주의 숙군을 점령하고, 고구려 20대 장수왕 때 북연(北燕)의 황제 풍홍이 고구려에 항복하면서 낙랑과 요동, 현도 및 대방의 모든 땅이 고구려 영토로 되었던 것이며, 이후 고구려 멸망시까지 이 땅은 고구려 영토이었다.
그러므로 수양제의 침략경로에 존재한 낙랑과 대방을 황해도나 충청도, 심지어는 전라도까지가 대방군이었다는 수많은 일본인 들의 주장이나 이를 추종한 이병도를 비롯한 수많은 식민사학자들의 논문이나 글은 날조된 역사이다. 역사 날조는 역사를 오염시킨 범죄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특히 장무이 무덤을 발굴하고 그 무덤에서 대방태수 장무이 벽돌명문이 나왔다고 날조하기도 하고, 평안도의 여러 무덤을 발굴하면서 북경 유리창에서 구입한 낙랑 유물을 끼워넣고 낙랑계 유물이 다수 발굴되었다고 사기를 치면서 고고학을 오염시킨 다케노 타다시의 고고학 날조는 역사하계와 고고학계에서 분명히 밝히고 낙랑과 대방이 평안도나 황해도에 설치한 역사적 사실이 업소, 요서지방에 있었음을 반드시 밝혀야 한다.
https://cafe.daum.net/hangaram-forum/FPWg/373
<참고>
서한군국도와 서진군국도 지도 출저
https://cafe.daum.net/hangaram-forum/FPWg/61

첫댓글 이병도란 자는 황해도 은율의 율천이 중국 열구의 열수라는 아주 황당한 글로 황해도 대방군 설치설을 주장하였다. 이병도란 자가 주장한 열수는 수경주(水經註) 14권에서 “습여수”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습수”는 이 습여수를 줄인 말이다.
[사기] 조선전 집해集解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집해] 장안이 말하기를, 「조선에는 습수濕水·열수洌水·산수汕水가 있고, 이 세 강물이 합하여 열수洌水가 된다. 낙랑樂浪·조선朝鮮이란 여기에서 취한 이름이라고 추정된다([集解] 張晏曰 朝鮮有 濕水洌水汕水, 三水合爲洌水, 疑樂浪朝鮮取名於此也)라고 하였다.
이 습수(습여수)는 지금의 영정하로 북경을 지나 천진으로 들어가는 강이다. 이병도가 말하는 황해도 은율의 열수가 결코 습수와 산수가 합쳐지는 곳이 아니다. 또 조선이 수양제 침략경로에 있는 고구려 서쪽 국경지역임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이병도의 열수 황해도 율천설은 해괴한 거짓 주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