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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v.daum.net/v/20261023093004135
어머니를 떠나보내며 남긴 부탁도 애틋했다. 김미화는 “그간의 고통과 외로움 모두 훨훨 떨쳐버리시고 좋은 곳으로 가실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전했다.
김미화는 “가족장으로 진행하며 조문, 조의금, 조화 등 정중히 사절하오니 양해 부탁드립니다”라며 외부 조문을 받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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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이 좋은 곳으로 가시길 기원하는 것은 인지상정으로 모든 자식들의 바램일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심리를 이용하여 교세를 확장하고 천도제나 기도를 빌미로 돈벌이를 하는 불순한 종교인들도 많은게 현실이다.
오늘날 일부 목회자들은 예수를 믿으면 모든 죄를 사해주기 때문에 믿으면 천국에 갈 수 있고, 믿지 않으면 설령 착하게 살아도 지옥에 간다는 뜻으로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을 맹목적으로 믿고 전파하기 전에 예수의 실제 가르침과 비교하여 교주에 대한 믿음과 실제 삶의 행위 가운데 무엇이 더 중요한가, 그리고 이런 목회자들의 주장이 과연 진실에 부합하는 가를 깊이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만약 이 말이 진실이 아니라면 자신도 속고 남도 속이는 죄업을 짓는 일이기 때문이다.
붓다께서 인도에서 불법(佛法)을 전하실 당시에도 상류층이 믿던 바라문교가 있어서 양측은 종교적 교리와 수행의 문제를 두고 서로 다른 입장을 보였다.
당시 바라문교에서는 산 동물을 죽여 제사를 지내는 등 기복적 신앙으로 변해 신에 대한 제사와 의례를 중시했으며, 붓다는 이를 지적하고 인간의 행위와 그에 따른 인과응보, 그리고 올바른 수행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붓다는 단순한 믿음이나 축원보다 행위와 인과법칙을 더 중시하였다.
《중아함경》 「가미니경」에는 가미니라는 사람이 부처님을 찾아와 중생을 천상에 태어나게 해 달라고 간청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가미니는 바라문들이 죽은 사람을 천상에 태어나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부처님께서도 그렇게 해 주실 수 있느냐고 여쭈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어 그의 생각을 일깨워 주셨다.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나난타원(那難 園)을 유행하실 적에 장촌나림(牆村林)에 계셨다. 그 때 아사라천(阿私羅天)의 아들이 있었는데, 가미니(伽彌尼)라 이름하였다. 얼굴 모양이 준수하였고 안색은 밝고 빛났다. 그는 먼동이 틀 무렵 부처님 처소로 나아가 부처님을 뵙고 여쭈었다.
“부처님, 바라문은 스스로 잘난 체 하면서 하늘을 섬깁니다. 어떤 중생이 목숨을 마치면 바라문은 마음대로 죽은 이를 천상에 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원컨대 法의 주인이신 부처님께서도 중생들이 목숨을 마치거든 천상에 태어나도록 해 주십시오.”
그 말을 들은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가미니여! 너에게 물을 테니 아는 대로 대답하여라. 어떤 사람이 게을러서 정진하지 않고 게다가 산 목숨을 죽이며, 주지 않는 것을 갖고, 삿된 음행을 행하며, 거짓말을 하고, 삿된 소견을 가지는 등 온갖 나쁜 業을 지으면서 살았다고 하자.
그가 죽을 때 많은 사람들이 와서 ‘당신은 게을러서 정진하지 않고 악업만을 행했습니다. 당신은 그 인연으로 목숨이 다한 뒤에는 반드시 천상에 태어나십시오.’라고 했다 하자. 가미니여, 이렇게 여러 사람들이 그를 축원했다고 해서 그가 천상에 태어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다. 게으른 그가 더구나 온갖 나쁜 업을 지은 그가 축원을 받았다고 해서 천상에 태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비유를 들면 저쪽에 깊은 연못이 하나 있는데 어떤 사람이 거기에 크고 무거운 돌을 던졌다. 마을 사람들이 연못에 모여서 ‘돌아, 떠올라라.’하고 축원을 하였다. 그 크고 무거운 돌이 축원을 하였다고 그들의 소원대로 떠오를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다. 그가 천상에 태어날 수 없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나쁜 업은 검은 것(흑색물질)이어서 그 갚음으로 저절로 밑으로 내려가 반드시 나쁜 곳에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또 어떤 사람은 부지런히 정진하면서 묘한 법을 실행하고 온갖 착한 業을 닦았다고 하자. 그가 목숨을 마칠 때 여러 사람이 모여서
‘당신은 부지런히 정진하면서 묘한 법을 실행하여 온갖 착한 업을 이루었습니다. 당신은 그 인연으로 목숨이 다한 뒤에는 반드시 지옥에 떨어지십시오.’라고 저주했다면 어떻게 될까? 그가 과연 그들의 저주대로 지옥에 떨어지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 그것은 당치도 않은 말이다. 왜냐하면 착한 業은 흰 것(백색물질)이어서 그 갚음으로 저절로 위로 올라가 반드시 좋은 곳에 이를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기름병을 깨뜨려 연못에 던지면 부서진 병조각은 밑으로 가라앉지만, 기름은 물위로 떠오르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와 같이 목숨이 다한 육신은 흩어져 까마귀나 새가 쪼아먹고 짐승들이 뜯어먹거나, 혹은 태우거나, 묻히어 마침내는 흙이 되고 만다. 그러나 그 心意識만은 항상 믿음에 훈습되고 정진과 보시와 지혜에 훈습되어 저절로 위로 올라가 좋은 곳에 나는 것이다.
가미니야, 산 목숨을 죽이지 않고, 주지 않는 것을 갖지 않으며, 삿된 음행과 거짓말을 하지 않고, 사특한 소견에서 벗어나는 좋은 길이 있다.
이른바 八正道(올바른 견해, 올바른 사유, 올바른 말,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 올바른 정진, 올바른 마음챙김, 올바른 삼매)가 위로 오르는 길이며 좋은 곳으로 가는 길이다.”》
위 문답을 보면 붓다의 가르침은 자연의 이치와 인과응보라는 우주의 법칙에 어긋남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즉, 무거운 돌이 아래로 가라앉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듯, 선행을 통해 선업 즉 德(백색물질)을 쌓으면 덕은 가벼운 것이라서 천상의 좋은 세계로 올라가고, 악행을 많이 하면 악업(검은물질)은 무겁기에 지옥 아귀 축생계 같은 나쁜 곳으로 떨어져 내려간다는 것이다.
붓다는 카르마(業)와 인과응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하였다.
"이 하늘과 땅 사이에는 지옥과 아귀와 축생과 인간세상에 이어 천상계가 있어서 業에 따라 그 세계들이 등차적으로 건립되어 있다. 중생은 자기가 지은 그 죄과에 의하여 자기에게 맞는 세계에 태어나고 또 다른 다음의 業因을 지어가는 것으로 끝없는 삶을 살아간다. 선행을 행한 착한 사람은 안락한 세계에서 한결 더 안락한 세계로 나아가다 보니 그 지혜는 더욱 더 밝아지게 되며, 악행을 지은 악한 사람은 고통스런 세상에서 한결 더 고통스러운 세상으로 나아가다 보니 그 마음이 더욱 더 혼탁하고 어두워질 수밖에 없다."《수능엄경》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살생하지 않고, 주지 않는 것을 갖지 않으며, 삿된 음행과 거짓말을 삼가고, 그릇된 견해에서 벗어나는 실천의 길을 가르치셨다. 바로 올바른 견해와 사유, 올바른 말과 행위, 올바른 생활과 정진, 올바른 마음챙김과 삼매로 이루어진 팔정도(八正道)를 해탈하여 천국세계로 올라가는 길로 제시한 것이다.
이는 단순히 어떤 신이나 종교를 믿는 것만으로 천국행이 보장된다고 주장하는 관점과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 즉 맹목적인 믿음이나 타인의 축원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과 행위를 바르게 다스리고 생활 속에서 진리를 실천하는 일이 중요한 것이다.
평생 다른 사람을 해치고 거짓말과 탐욕을 일삼던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거나 고치려는 노력도 없이 특정 종교를 믿거나 타인의 축원만으로 천국에 갈 수 있다면, 과연 그곳은 어떤 세계가 되겠는가?
만일 악한 마음을 지닌 채 천국에 간다면 거기서도 여전히 남과 다투고 나쁜 일을 할 것이니, 그 세계 역시 인간 세상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믿음이 참되다면 그 믿음은 반드시 심성의 승화와 선한 행위로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불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도 천국에 들어가는 자를 말씀하시면서 믿음과 실제 행위 사이의 차이를 분명히 지적하셨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산상수훈에서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신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신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이 말씀에서 예수께서는 단순히 자신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만을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마음이 가난하고 깨끗한 사람, 세상을 화평케 하는 사람, 정의로운 일을 행하다가 박해받는 사람을 복 있는 자라고 가르치셨다.
특히 마태복음 7장 21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이 말씀은 믿음을 입으로 고백하는 것이 아닌 실제로 하느님의 뜻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것이 곧 천국으로 들어가는 길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께서는 마태복음에서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가르치셨다.
마태복음 5장 44절에서는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다.
야고보서 2장 17절 역시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가르친다.
이러한 말씀들을 종합하면, 믿음은 단순한 말이나 신앙에 그치는게 아니라, 탐욕을 버려서 마음을 청결하게 하고 사랑과 자비, 화평과 정의의 실천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오늘날 일부 목회자들의 주장은 과연 예수의 가르침에 부합하는가?
오늘날 예수의 가르침은 목회자들을 통해 교인들에게 얼마나 올바르게 전해지고 있는가?
이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며 진정으로 천국에 갈 수 있느냐, 갈 수 없느냐가 달린 아주 관건적인 문제다. 그러므로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말을 맹신하고 전도하기에 앞서 목회자들이 과연 예수의 가르침을 정확히 이해하고 실천하며, 신도들에게도 바르게 전하고 있는지를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예수는 요한복음 8장 32~36절에서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고 말한다.
그러자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하니 예수는 바로 다음과 같이 답한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그리스도)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예수께서 가르키는 자유는 신분의 자유를 말하는게 아니라, ‘죄업의 속박’ 으로 인한 생사윤회의 고통에서 해탈하는 자유를 가리킨다.
인간들의 죄업은 무지와 거짓, 탐욕과 분노, 원한 등을 통해 남을 해롭게 하는 악행으로 생긴다. 우주의 진리를 깨달은 대각자가 전하는 진리는 거짓과 무지를 타파할 수 있고, 욕심과 집착을 버리게 할 수도 있으며, 나쁜 일을 하려는 마음을 제어하고 正念을 강하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진리에 거하고 이를 실천하면 다툼과 갈등이 줄어들어 사회가 안정될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죄업의 속박으로부터 해탈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진리가 아닌 거짓말을 믿고 이를 실천한다면 오히려 정반대의 결과가 나타날 수 있다. 그러므로 설령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 할지라도 예수의 진실한 가르침이 아닌 일부 목회자들이 주장하는 거짓말을 믿고 그 말에 거한다면, 결국 죄업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수 없을 것이다.
현재 일부 목회자들은 수십년 전부터 특정 인물이 대통령이 된다면 남한을 공산화를 할거라고 교인들에게 거짓선동을 해왔다. 근래에는 사회적 갈등이 첨예한 사안에 관해 확실한 근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중국 공산당이 관여한 부정선거가 진실인냥 단정적으로 퍼뜨리며 사회의 갈등을 심화시킨다.
또한 정치적 반대편을 악마화하고 없애버려야 할 마귀로 여기며, 두려움과 분노를 자극하여 신도들의 결속을 강화하여 악행을 부추기고 이를 통해 헌금을 모으는 행태가 나타나기도 한다.
물론 선거의 공정성을 의심하고 국가의 미래를 걱정하며 정치적 의견을 표현하는 일 자체가 잘못은 아니다. 종교인들도 일반인들과 같이 사회 문제에 관해 충분히 의견을 밝힐 수 있다.
그러나 그 주장이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거짓 선동이거나, 반대자를 증오와 적대의 대상으로 만들고, 종교적 권위를 이용해 신도들의 두려움과 분노를 부추기는 것이라면 이는 가벼운 잘못이 아니다.
거짓과 증오를 이용해 정의를 외치고 애국을 내세운다고 해서 거짓과 분노에 기초한 행위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예수께서는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가르쳤고, 원수를 사랑하며, 화평하게 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셨다. 또한 남을 잘못을 비판하기에 앞서 자신의 잘못부터 살피라고 하셨다.
예수께서는 “거짓은 惡에서 나온다”고 하였다. 예수는 산상수훈에서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하라. 이에 어긋나는 것은 다 惡에서 나느니라.”(마태복음 5:37)
만약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거짓을 퍼뜨리고, 다른 사람을 증오하며, 사회적 갈등을 부추기고, 종교적 권위를 이용해 사익을 추구한다면 그 믿음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오히려 죄업의 속박을 더욱 강화시키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거짓말을 부풀리며 사회적 갈등을 부추기고 상대방에 대한 증오를 확산시키는 행위가 과연 예수의 가르침에 부합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참된 정의는 진실과 정직, 평화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 참된 애국은 거짓과 폭력적 시위로 국민들의 재산을 파괴하며 나라를 분열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진실에 입각하여 공동체의 안전과 평화, 자유와 정의를 지키는 데 있어야 한다.
종교적 신념 역시 타인을 증오하고 혐오하는 구실이 아니라 자신을 성찰하고 진리와 진실로써 타인을 일깨우며 이웃을 사랑하는 원동력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거짓과 분노를 이용해 사회적 대립을 부추기는 목회자들에게 돈을 후원하는 행위가 과연 애국이자 정의이며, 복이 될 수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신분이 성직자이니까 그들이 내세우는 주장을 무조건 믿고 따를 것이 아니라, 그 주장이 과연 진실에 근거하는지, 그 활동이 사회에 분열과 평화 중 어떤 결과를 낳는지, 그리고 그가 예수께서 가르치신 사랑과 정의와 화평을 실천하고 있는지, 반대로 분노와 적대감을 키우지는 않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붓다는 자신의 행위에 따른 인과를 강조하고, 예수는도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삶과 이웃 사랑을 중요하게 가르친다. 이처럼 두 분 모두 자신의 마음과 행위를 바로잡고 선을 실천해야 한다는 점에서 서로 공통점이 존재한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과 예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종교에 대한 믿음이 참되다면 그 믿음은 현실의 삶에서도 선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예수를 믿지 않는다고 타인을 지옥에 갈 사람이라고 단죄하기에 앞서 자신의 마음에 증오와 탐욕과 거짓이 자리 잡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고 바로잡는 것, 바로 거기에서 참된 신앙의 길이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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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회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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