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백범 김구 선생님의 둘째 아들 김신의 회고록이다.
어머니를 일찍 여읜 김신은 할머니 손에 키워졌고, 독립운동을 하는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서 거의 지내다시피 했다. 아버지의 권유로 그는 광복 후에도 미국으로 건너가 조종사 교육을 받았고 한국전쟁 때는 공군 조종사로 참전한다. 타이완 한국 대사로 근무하였으며 교통부장관과 유정회 전국구 국회의원을 지냈다. 그의 삶을 통해 독립운동을 했던 많은 이들의 고생을 책 속에서 볼 수 있었다.
광복 후 민족의 분단을 막기 위한 백범 김구의 노력을 생생하게 들을 수 있게 되었으며, 김구의 암살범 뒤에는 친일세력이 존재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한국전쟁 후 친일세력이 고스란히 정부 요직에 등용되어 활개를 펼 수 있었던 것은 맥아더 장군의 영향임을 알게 된다. 만약, 광복군이 참전하게 되어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다면 친일세력을 깨끗히 청산할 수 있었을 것인데 이 대목이 참 아쉽다.
1.
일요일만 되면 아버지(김구)는 나를 한경직 목사가 설교하는 천막 교회에 데려가셨다. 이북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드리는 교회였다. 소련군이 북에 주둔하면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112쪽)
2.
이승만 박사는 1946년 6월 3일 정읍에서 남쪽만의 단복 정부 수립이 필요하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 아버지는 이 박사의 주장에 불같이 화를 내셨다.
"그렇게 하려면 독립운동을 왜 했는가? 남한만의 단독 정부는 절대로 안 된다. 남북이 갈라지면 동족상잔의 전쟁밖에 할 것이 없다."
아버지는 같은 민족끼리 총부리를 겨누는 비극만은 피하고 싶었기에 이승만 박사와 다른 노선을 택했다. 이승만 박사는 군정이 끝난 뒤, 국내에 자기 기반이나 세력이 없었기 때문에 친일파들을 받아들였다. 당시만 해도 임정의 한독당 세력이 강했기 때문에 친일했던 사람들은 이승만 박사를 옹립하는 데 더욱 필사적이었다. 이런 식으로 아버지와 이승만 박사의 관계는 벌어지기 시작했다. (119쪽)
3.
아버지는 그 소식(일본의 항복)을 듣고 기뻐하시기는 커녕 길게 탄식하셨다.
" 아, 왜적의 항복! 이것은 기쁜 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다. 천신만고 끝에 참전을 준비한 것이 다 허사다. 우리 병력이 국내에 진공하기 전이니만큼, 해방 후 우리 목소리보다는 외세의 목소리가 클 수밖에 없다."
아버지의 예상대로 우리나라는 해방 후 미소 간의 힘겨루기 속에 좌우익으로 갈라져 서로 물어뜯기에 바빴다. 아버지는 이런 상황 속에서 민족이 둘로 갈라지는 최악의 상황만큼은 피해 보고자 북에 가기로 결심하였던 것이다.(120쪽)
4.
혁명의 본래 뜻은 무엇인가? 하늘의 명을 통째로 바꾸고 시대의 대세를 근본부터 바꾼다는 뜻이니 목숨 걸고 매진한다 해도 성공을 기약하기 어렵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고자 분투하는 수밖에 없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고 낙숫물로 댓돌을 때려서 바위를 깨고 댓돌을 뚫고자 하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본래 의미의 혁명에 나서는 심정, 민족이 살 길을 반드시 열어야만 한다는 마음, 그것이 방북 길에 오른 아버지의 마음이었다. (136쪽)
5.
나는 1948년 12월에 임학준 선생의 둘째 딸 임윤연과 남대문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신부가 입는 드레스도 비단이 아니라 광목으로 만들었다. 아버지는 결혼식 부조금을 북쪽에서 온 사람들이 머물고 있던 수용소에 모두 갖다주라고 하셨다. (147쪽)
6.
국민 다수의 요구에 의해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생겼다. 반민특위는 친일 행위를 했던 사람들을 속속 잡아들였다. 그런데 고등계 형사 출신으로 독립지사들을 검거하고 고문하는 등 악명을 떨친 친일 경찰 노덕술이 이승만 박사를 찾아가, 당신은 정치적 기반이 없으니 자기들이 협조를 해 주겠다면서 반민특위 활동을 제지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이승만 박사는 요청을 받아들여 반민특위를 해산하고 무기를 회수해 버렸다. 결국 친일 행위를 한 사람들에 대한 처벌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158쪽)
7.
친일 세력은 아버지를 제거하고 나자 한독당 사람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165쪽)
8.
장제스 총통은 중국 본토를 빼앗긴 이유 가운데 하나로 '보희불보우'를 들곤 했다. '기쁘고 좋은 소식만 보고하고, 걱정스런 얘기는 전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231쪽)
9.
나는 어릴 적에 할머니가 간절하게 기도하시고 찬송가 부르시는 모습을 보고 자랐다. 할머니와 내 주위에는 마음 깊이 의지할 사람이 없었다. 늘 감시당하면서 언제 잡혀갈지 모르는 상황 속에 의지할 곳이라고는 진정 하늘밖에 없었다. 그래서 살림이라고 할 것까지도 없는 궁색한 처지에서도 할머니는 교회에 헌금을 하시고 나에게도 헌금하라며 돈을 주셨다.(279쪽)
10.
일본이 항복을 하자 한국은 맥아더 장군의 관할로 들어갔다. 한국이 웨드마이어가 관할하는 중국 지역으로 편입되었다면, 광복군을 그대로 국군으로 전환시킬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한국이 맥아더 사령관 관할로 넘어가자, 맥아더 장군 직계에 있던 존 하지 장군은 한국에 주둔한 일본군을 무장 해제하고 나서 치안과 행정 업무에 친일파를 그대로 쓰게 했다. 남북이 갈라진 것도 비극이고, 전쟁이 일어난 것도 비극이지만, 친일파의 뿌리를 뽑지 못한 것이 비극 중의 비극이다.(30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