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주사/ 김임순
애당초 도암 들판 돌이었고 바위였네
하늘 자리 별자리를 땅으로 끌어와서
빚은 돌 천불천탑을 세워
새 세상을 꿈꾸었네
하나같이 어진 부처 말없이 말을 걸고
쫓긴 듯 다 던지고 이슬 밟고 떠난 도공들
그 자리 와불이 된 채
기다림에 잠겨있는
쏟아지는 별빛에 소쩍새 우는 밤도
기대는 듯 가고 마는 바람에 이골나고
천년도 살면 또 살아진다
품에 가만 누워 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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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주사에 들다/ 이말라
비 내리는 운주사에 와불을 뵈러 갔네
누워계신 부처님은 너무나 평안해서
어물쩡 난간을 잡고 배알하는 우릴 웃네
비탈을 미끄러지며 안간힘 쓰면서
찌그러진 부처님과 동지인 양 반가웠네
세상사 울고 웃으며 그리 살라 이르네
이형석탑 이형불상 천년을 기약하고
천불천탑 모두가 우리 삶을 닮았네
돌에도
흠이
나고
나고
나서
먼지 된다 이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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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순/ 공란영
은발이 어루만진 기억마저 희끗하다
마음 눈
크게 뜨라고
눈은 점점 희미해져
마음귀
잘 닫으라고
귀도 점점 옅어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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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이로구나/ 김석이
묵은 앙금 털어내고 가볍게 건너가세
액막이 추임새에 안녕을 끼워 넣고
올 한 해 굿(good)이로구나 덕담을 풀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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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스테라/ 김소해
소나기 함께 맞다 함께 젖어 돌아가는 길
넓은 잎 심장 가운데 구멍 몇 개 뚫어두면
당신의 마지막 눈물 받아내는 잎사귀
망설임이 흐르고 중얼거림이 흘러내린다
햇빛을 나누면서 그림자를 나누는 통로
젖어도 혼자 젖지 않게 당신으로 가는 지름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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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꽃/ 박경연
모나게 던졌던 말 몇 사람 꽂았을까
마음과 달랐다고 외면을 해 보지만
발 없이 달려 나가서 송이송이 붉겠지
사각 귀 깎아내면 둥글게 된다는데
숨겨져 앉아있다 거친 맘 늘 엿본다
잠시만 한눈팔아도 뾰족하게 설까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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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춘고양이/ 박옥위
봄짗빛 따라 아기고양이 꽃밭에 나왔다가
봄이 어디 있나 꽃밭을 긁었는데
퍼얼쩍 어미개구리 얼결 양이 눈을 친다
어안이 벙벙한 양이 멀뚱히 앉았다가
길 가는 나를 보고 울먹울먹 어쩌라고
봄 햇살 까르르 웃자 매화 빤짝 눈을 뜬다
냐아옹! 이게 뭐야 봄은 참 무서워!
내 따귀를 때리고 달아난 게 봄이라고
매화꽃 하아하아 웃다 배꼽까지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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둠벙/ 손영자
돌 하나 던진다
동그라미 파문만 진다
또 하나 던진다
파문만 지다 사라진다
보내도
읽지 않는 카톡
지워지지 않는 숫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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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교/ 신진경
이 다리 건너는 분 정토를 기원합니다
선운사 극락교에
적힌 문구 새겨본다
어디쯤
가야 닿을까
찾으려고 헤매던 곳
여기서 건너가면
저기가 정토이고
거기서 돌아오면
여긴 다시 세속인가
이제야
어렴풋이 보이는
내 마음속 극락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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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나무집 각시수련/ 우아지
텅 빈 집 혼자 남아 낮달을 올려다본다
풀 먹인 모시적삼 저만치서 걸어온다
세상을 건나가는 길 애써 눈물 감추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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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번호/ 이영희
수년을 꿈꿔왔던
내 집 한 채 생겼다
주인님 오셨어요
넙죽 절이라도 해야지
손가락 관절 절뚝인다
누구세요? 문전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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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장아찌/ 장남숙
웅크린 가슴팍이 탱탱하게 부풀었다
세월 베고 삭힌 눈물 한통속으로 붙어 앉아
단칸방 등뻐 세운 저녁
긴 바람이 알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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섶섬이 보이는 풍경*/ 전연희
황소는 눈만 남아
흰 소는 뼈만 남아
엽서만 한 풍경에도
목을 놓는 파도소리
물너울 섶섬을 넘네
섶섬 돌아 부서지네
*섶섬이 보이는 풍경: 이중섭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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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점/ 정희경
스피드에 별점 하나
단맛에 별점 다섯
별로 주는 점수에
가게마다 별천지다
밤하늘 사라진 별들
도시를 휙휙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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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곶자왈에 와서/ 제만자
숲도 돌 틈도
눈에 묻힌 곶자왈
그대로 엉겨 붙어 고인 대로 산다는데
모가 난 삐쭉 성질도 젖은 채로 품어주며
껍질로 뒹구는
순한 너도 거기 있고
굳어져 휘감겨도 뒤척일 일 아니라 해
내 듣고 움츠렸던 말 담아서 올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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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월의 눈/ 지춘화
싸락눈 팔랑팔랑 봄나들이 갑니다
산모퉁이 돌아서 햇살 땨라 왔다가
반가운 환호성에 으쓱, 어깨춤을 춥니다
지난달 만난 친구 또 보고 간다면서
이 골목 저 골목을 바삐 뛰어 다니다가
다 못 한 이야기들을 높은 산에 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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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풍속도 13/ 최성아
작아서 못 보는 건 옛말로 넘어간다
눈치를 살짝 넣어 키워서 보는 재미
깨알을 잡아당기면 수박 덩이 따라온다
볼록렌즈 지구에서 하루를 헤엄치다
귀퉁이 숨겨봐도 어느새 따라잡는
콩 한 쪽 속일 수 없다
손으로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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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버스/ 최옥자
바쁜 걸음 속에서
더딘 널 기다린다
가파른 언덕길을
몇 구빌 넘었는지
긴 입김 토해내면서
숨 가쁘게 오고 있다
낡고 작은 그 몸으로
무게도 마다 않고
빈자의 허기까지
함께 싣고 가려는지
비탈길 덜컹거리며
산동네를 넘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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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먹태였다/ 황순희
낯짝은 거무튀튀 제상에도 못 오를 몸
얼크러진 밤을 세며 바다를 펴 말린다
그녀의 먹먹한 기록 일어선다 꾸덕하게
갈가리 찢기어도 내색조차 마다하고
아작아작 씹히어도 꿋꿋한 그녀의 문장
덕장도 용대리 덕장 그 바람을 퇴고한다
주눅 든 이름으로 볏 한번 못 세웠네
사는 일 까슬해도 더러는 쫀득한데
먹수저 쥐여줬으면 글발이라도 주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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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1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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