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경건의 모양만, 아니면 경건의 능력도……
지금 한국 정치는 2007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고 노무현 대통령의 서해북방한계선(NLL) 대화록 때문에 난리입니다. 국정원이 공개해서는 안 될 정상회담의 대화록을 공개하고 나서 정치권은 극도의 혼란 속에 빠졌습니다. 국민들의 현재 처해져 있는 민생은 뒷전으로 밀리고 정치인들은 국가보다는 자신들의 정치적 이득 챙기기에 주판알을 튕겨가며 혈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들 정치인들에게서는 정치인의 모양만 보이지 정치인들이 소유해야 할 국민들을 위한 참된 능력은 보이질 않습니다.
참으로 우리의 형제이자 이웃인 북한, 그들의 손을 하염없이 계속 잡고만 있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손에서 내팽개쳐 버릴 수도 없는 참 아이러니한 존재임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어느 누가 정권을 잡느냐에 따라서 북한을 대하는 태도는 달라집니다. 아마도 그것은 통일이 되는 그 날까지 계속 될 것입니다.
2005년 6월 11일. 나는 나의 부모님의 고향인 북한 땅을 밟게 되었습니다. 내가 북한에 가게 된 것은 2000년 6월 15일에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일 국방 위원장이 합의하여 발표한 6.15 공동선언의 5돌을 맞아 북한에서 민족 통일 대회를 평양에서 열면서 남북 민간인 대표와 해외동포 대표들을 평양으로 초청했습니다. 그 때 남한의 대표단은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이끌면서 서울에서 바로 평양으로 날아갔습니다.
나는 북한의 인민들의 실제 삶의 모습을 보고 싶었고 또 북한 교회의 실제 모습을 보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리고 8일 동안 북한의 여기 저기를 둘러 볼 수 있었습니다.
평양의 비행장에서 내려 평양 시가지로 가는 동안 나는 강가에서 낚시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내가 북한에 들어가기 전에 들은 것으로는 북한에서 낚시하는 사람들은 다 보이기 위한 선전용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 사람들이 다 선전용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 의구심이 생겼습니다. 이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보여 주기 위해 여기 저기서 낚시를 하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평양 중심지에 있는 대동강 변에 있는 고급 호텔에 묵었습니다. 나는 일부러 일찍 일어나 안내원이 오기 전에 대동강 변을 따라 산책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안내원이 오면 내 마음대로 보고 싶은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강변을 따라 걷다 보니 강가에 앉아 낚시를 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앉아서 낚시를 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들 곁으로 가서 몇 마리를 잡았는지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 곁에는 한 마리의 물고기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계속 강변을 따라 가 보았지만 어느 누구도 물고기를 잡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낚시 대에 낚시 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미끼 없는 낚시 대를 강에 두리고 있는데 어떻게 물고기가 낚시 대에 물릴 수 있겠습니까? 물론 낚시대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러한 좋은 낚시 대는 물론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자신들이 먹을 것 조차도 제대로 없는데 어떻게 물고기를 잡을 미끼를 준비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낚시를 하는 모양은 가지고 있었지만 낚시를 하는 능력을 소유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그들이 하는 낚시는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전시용 보다는 그냥 놀이 문화가 없는 사람들이 강변에 나와 시간을 보내는 하나의 소일거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도 기다리던 주일이 왔습니다. 나는 미국과 캐나다 등 해외에서 온 기독교인들과 함께 말로만 들어왔던 봉수교회를 갔습니다. 마당에 모인 손님 기독교인들은 봉수교회의 담임 목사님의 입장과 함께 아름다운 파이프 오르간이 울려 퍼지는 예배당 안으로 들어 갔습니다. 이미 예배당 안에는 200명이 넘는 교인(?)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지만 이상한 점은 젊은 청년들이 한 사람도 보이지를 않았습니다.
자리에 앉자 찬송가와 성경책이 눈에 띄었습니다. 찬송가는 전에 우리가 쓰던 찬송가와 페이지만 다를 뿐 거의 비슷했고 성경은 공동번역을 내용으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 보아도 주보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되자 여느 예배와 같이 목사님은 예배 인도를 했고 기도는 장로나 집사가 아닌 일반 여성이 종이에 쓴 기도문을 읽어 내려갔습니다.
36명의 찬양대가 찬양을 하고 특송도 있었는데 노래는 상당한 수준급이었습니다. 목사님의 설교는 마음에 와 닿지는 않았지만 여느 설교처럼 하려는 노력은 보였습니다. 예배 중 나는 그곳에 모인 사람들을 둘러 보았는데 그들의 눈의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허공이었습니다. 그들의 생각은 하나님 나라가 아닌 딴 잡념에 푹 빠져 있었습니다.
북한의 봉수교회는 분명 예배의 모양은 갖추었습니다. 그러나 그 예배에는 가장 중요한 하나님이 있지 아니했습니다. 그곳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이 없었습니다. 나는 그곳에서 이것이 바로 경건의 모양은 갖추었지만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들의 모습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3:5)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습니다. 동생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여호와께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만 받으셨습니다. 이 일로 인해 결국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이는 끔찍한 일을 저지릅니다.
성경은 속 시원하게 왜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아니하시고 아벨의 제사만 받으셨는지 에 대해 말해 주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히브리서 11장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아벨의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셨다고 말하십니다. 그래서 아벨이 하나님께 드린 제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피의 제사였다고 말합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께서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히11:4)
그렇다면 가인도 짐승으로 예물을 드렸다면 하나님께서 받으셨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설령 가인이 그렇게 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인이 드린 예물은 형식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가인은 제사의 흉내만 낸 것입니다. 가인은 경건의 모양만 갖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사를 원하시니 마지못해 자기 주관대로 형식적으로 제사를 드리는 척했을 것입니다. 가인은 자신의 제사에 경건의 능력을 동반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경에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의 예물을 받으셨다고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창4:4)
그렇다면 경건의 모양과 경건의 능력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단순하게 형식적이다, 아니다 라고 말하는 차원을 넘어섭니다. 먼저 성경에서 경건이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닮는 것이라고 말하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말하는 경건의 모양이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흉내 내는 것,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척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경건의 능력이란 단순하게 척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하나님의 구속적 사랑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오늘도 예배를 드립니다. 기도를 합니다. 찬송을 합니다. 예물을 드립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경건의 모양만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북한 교회의 교인들이 예배를 드리는 모습과 별반 다를 것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도 북한의 주민처럼 낚시하는 흉내만 내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도 북한의 자칭 교인들처럼 경건의 모양만 흉내 내는 예배를 드리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도 가인처럼 경건의 능력이 소실된 인본주의의 모습으로 제자의 길을 걷고 있지 않습니까?
자, 이제 나 자신을 직시해 봅시다. 나는 경건의 모양만 갖추고 있습니까? 아니면 경건의 능력도 소유하고 있습니까?
(김해찬 / 시드니하나교회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