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기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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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왕이신 예수님,
당신은 사도들에게
이 세상의 힘있는 사람들처럼
권력을 얻기 위해
경쟁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사랑으로 서로를
섬겨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당신의 능력 안에서만
모든 것을 선으로
바꿀 수 있음을 아오니
저희를 도와주소서.
[성시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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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기도지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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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진리와 지혜의 원천이신 주님, 세상의 많은 교사들이 자신의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그들과 함께 하시고, 배움의 길을 걷고 있는 학생들에게 모범이 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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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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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 루카 6,12-19
그 무렵에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그들을 사도라고도 부르셨는데, 그들은 베드로라고 이름을 지어주신 시몬, 그의 동생 안드레아, 그리고 야고보, 요한,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열혈당원이라고 불리는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 또 배신자가 된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많은 군중을 이루고, 온 유다와 예루살렘, 그리고 티로와 시돈의 해안 지방에서 온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질병도 고치려고 온 사람들이었다. 그리하여 더러운 영들에게 시달리는 이들도 낫게 되었다. 군중은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를 썼다.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주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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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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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의 옷자락이라도
대학 초년 시절 인도의 마더 데레사께서 처음 한국을 방문했다. 노벨 평화상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라 언론에서 대서특필했고 김포공항에서부터 환영 인파가 몰려들었다. 사람들이 그분의 손이나 옷자락을 만지려고 몰려드는 바람에 입국장을 나오면서 넘어지는 일이 발생했다. 그 말을 전해 들은 나는 이튿날 강연을 하려고 학교에 온 데레사 수녀님을 위해 덩치 큰 친구 몇몇과 함께 보디가드 역할을 자처했다. 그분의 손을 잡고 강당에서 총장실로 운동장으로 이동했다. ‘살아 있는 성녀’ 라고 언론에서 떠들었기 때문일까 ? 과연 들은 대로 사람들은 수녀님의 옷이라도 만지려고 사방에서 손을 내밀었다. 나는 노동자 손처럼 거칠고 굳은살 박힌 그분의 손을 잊을 수 없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한테서 힘이 나와 사람들을 고쳐주었기에 군중은 그분을 만지려 했다고 전한다. 그들은 그분이 지니신 신비한 힘을 느꼈음에 틀림없다. 그리스어 원문에서 이 신비로운 ‘힘’ 을 가리키는 말은 ‘뒤나미스 ()’ 다. 권력과 권위를 뜻하는 ‘엑수시아 ()’와 다른 말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부어주실 때 제자들이 받는 힘이 바로 이 뒤나미스다. (사도 1, 8) 예수님을 만질 수 있을 만큼 가까이 만난 사람은 그 내밀한 친교에서 힘과 능력을 얻어 그분 사랑의 증인이 된다.
성경은 사도들을 보통 제자들과 확실히 구분한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부활 메시지를 선포할 사명을 받은 이들이 사도이고 그들이 교회의 초석이 되었다. 사도들은 세상 곳곳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온갖 고난을 기쁘게 감내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인간적 또는 초인간적 능력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의 힘’ 이었고 하느님께 받은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 이었다. (2티모 1, 7 - 8) 그리스어에서는 모두 같은 말 뒤나미스다.
오늘 우리 신자들은 제자로 머물 것인가 아니면 사도로 간택되어 파견될 것인가 ? 사도란 힘을 지닌 사람이다. 사람들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살리는 힘, 위로하고 격려하고 일치하게 하는 힘을 받은 사람이다. 예수님을 만지려 손을 내밀고 또 우리를 어루만져 주시는 그분의 손길에 자신을 내맡기는 사람이다.
[신한열 수사 (프랑스 떼제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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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독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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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 대한 참된 두려음
"복되어라,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그 도를 닦는 자는." 성서가 주님께 대한 두려웅에 관해 이야기할 때마다 이 두려움만 있으면 신앙의 완성을 이룰 수 있는 듯이 두려움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동시에 하느님께 대한 이 두려움의 이유와 참된 뜻을 설명하는 여러 가지의 것을 덧붙여 줍니다. 이에 대해 솔로몬이 잠언에서 말해 주었습니다.
"슬기를 찾아 구하고 바른 판단을 얻고 싶다고 소리쳐 불러라. 은을 찾아 헤매듯 그것을 구하고 숨은 보화를 파헤치듯 그것을 찾아라. 그래야 눈이 열려 주님 두려운 줄 알게 되리라."
위의 말에서 몇 단계를 거쳐야 주님께 대한 두려움에 도달할 수 있는지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지혜의 은혜를 청해야 합니다. 즉, 독서나 다른 방법으로 지성의 탐구를 통하여 지혜를 찾아내어 지혜와 친숙해져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두려움에 대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분명히 하느님께 대한 참된 두려움의 뜻이 아닙니다.
두려움이란 인간의 나약성이 자기가 겪고 싶지 않은 것을 겪게 될 것을 무서워 할 때 갖는 공포심입니다. 이 두려움은 우리의 죄 의식으로, 또는 우리보다 더 강한 자의 권세에 의해서, 또는 너무도 강렬한 자의 공격으로 말미암아, 또는 질병이나 야생 동물의 공격으로, 또는 어떤 악의 재난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입니다.
이 두려움은 학습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나약성에서 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는지 배우지 않습니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사물 그 자체가 우리 마음속에 공포심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녀들아, 다들 와서 내 말 듣거라. 주님께 대한 두려움을 가르쳐 주겠노라." 그러니까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은 하느님이 가르쳐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공포 속에서가 아니라 교훈 속에서 찾는 것입니다. 우리가 계명에 순종함으로써, 흠 없는 생활을 함으로써, 그리고 진리를 알게 됨으로써 그것이 솟아나오는 것이고, 인간의 자연적인 전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있어 하느님께 대한 참된 두려움은 사랑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완전하게 해줍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분의 권고를 따르며 그분의 법에 순종하고 그분의 약속에 신뢰심을 두는 것입니다. 성서의 말씀을 들읍시다. "이제, 너 이스라엘아! 너희 주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너희 주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그가 보여주신 길 만 따라가며 그를 사랑하는 것이요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쏟아 그를 섬기는 것이 아니냐?"
주님 친히 길이시고, 그분의 길은 여러가지입니다. 주님 이 당신 자신에 대해 말씀하실 때 자신을 길이라 하셨고, 당신 자신이 왜 길이신지 다음과 같이 보여 주셨습니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일한 좋은 길을 찾기 위해서 많은 길을 검토해 보고 많은 이들의 교훈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의 유일한 길을 찾아야 합니다. 그 길은 율법에서 찾을 수 있고 예언자에게서 찾을 수 있으며 복음서에서 찾을 수 있고 사도들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 속에 거니는 복된 이들이 계명을 지킬 때 행하게 되는 여러 가지 일들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 성 힐라리오 주교의 「시편 주해」에서 (Ps 127,1-3. CSEL 24,628-630) **
[오요한 신부님의 '가톨릭 영성' 사이트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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