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5. 14 부활 제5주일)
의무가 아니라 사랑, 일이 아니라 봉사
오늘 사도행전은 우리에게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요는 사도들이 배급 문제로 공동체에 갈등이 생기자 본연의 임무인 기도와 말씀에 전념하고자 신자들 가운데 식탁 봉사자 7명을 뽑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도 바오로도 여러 번 언급하셨지만, 초대교회의 성찬례 이후 이어지는 식사와 식량 배급에 다소 문제가 있었습니다. 성찬의 정신이 실제 식사와 배급에도 이어져야 하는데, 몇 몇 욕심 많은 신자들 때문에 그것이 평등하지 않았나 봅니다. 즉,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과부나 고아들은 줄에서 밀려 피해를 봐야 했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식량이 충분하지 않을 때 과부와 고아들은 충분히 배를 채울 수 없거나 굶주려야 했다는 점입니다. 앞서 식탁에 앉은 사람들이 뒷사람을 배려하지 않고 폭식을 일삼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도들은 자신들의 배급 임무를 이른바 식탁 봉사자 7명에게 위임합니다. 그럼으로써 사도들은 영성적인 것에 더 집중하고, 배급 불평등 문제를 사전에 방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제도가 발전하여 후대에 부제직이 생깁니다. 디아콘이라고 불리는 부제직은 원래 식탁 봉사자의 명칭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부제직은 시간이 흘러 주교-사제-부제라는 로마 가톨릭 성직자 제도 안으로 흡수되고 평신도들은 참여할 수 없는 고유 직무가 되고 맙니다. 그러다가 현대에 와서 미주 교회를 중심으로 평신도들이 참여할 수 있는 종신 부제가 생겼는데, 이는 고령화된 교회와 사제수 감소에 따른 시대 요청적인 역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제 부족이라는 교회 현실을 반영하여 일정 부분 기혼자인 종신 부제가 사제의 역할을 대신하고 보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의 부제제도는 그 생성 역사를 고려할 때, 오늘날 종신 부제가 아니라 오히려 지금의 본당 사목위원과 구역장, 그리고 각 제단체장들의 봉사직에 더 가깝습니다. 이들은 사제가 말씀과 기도와 같은 영성 생활에 집중할 수 있도록 사목을 돕는 봉사자들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사제를 도와 공동체의 선익을 위하여 기쁘게 봉사하며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특히 이중에 구역장들은 친교 식사에 직접 봉사하기 때문에 초대 교회의 식탁 봉사자, 즉 부제와 같은 개념입니다.
초대 교회에서 7부제는 온 공동체가 동의하는 가운데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으로 선출했다고 전해집니다. 제가 구역장을 구역 교회의 사도라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구역 밥만 책임지는 사람이 아니라 구역원들의 영신 사정을 살피고, 본당 신부의 사목 지침을 잘 전달하고 수행하는 영성적인 중개자인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고린토 전서에서 지체론을 이야기하면서 봉사직의 순서를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입니다. 하느님께서 교회 안에 세우신 이들은, 첫째가 사도들이고 둘째가 예언자들이며 셋째가 교사들입니다.”(1고린 12, 27-28) 사도, 예언자, 교사. 이는 계급의 우선순위가 아니라 직무의 우선순위입니다. 즉, 차별적 서열이 아니라 역할에 따른 구별입니다. 사도는 지금의 주교이고, 예언자는 지금의 말씀 선포자 곧 사제입니다. 그리고 다음이 교사인데, 이는 지금의 주일학교 교사보다 수준이 높은 성경과 교리에 해박한 전도사를 말합니다. 교사가 탑 3에 들어온 이유는 선교와 교육이 그 만큼 교회 성장에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높고 낮음이 없습니다. 그리고 편애와 홀대도 없습니다. 교리교사의 봉사가 성가대나 구역장의 봉사를 능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봉사가 모두 같다고도 볼 수 없습니다. 각기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해서 봉사는 것은 같지만 그 대상이 다르고 사목의 우선순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구역장은 구역장대로의 중요한 임무가 있고, 교사는 교사대로의 중요한 임무가 있습니다. 단순하게 비교 평가할 수 없고, 누가 더 큰 일을 한다고도 볼 수 없습니다. 다만 사목위원, 구역장, 교리교사, 성가대는 경력과 지속성을 요구하는 봉사직입니다. 단순히 개인 심신 단체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상황에 따라 어떤 봉사직은 사목자의 장기 사목 계획 속에서 숙련된 노하우와 지속성을 가지고 임해야 하는 분야도 있습니다. 사실 직무 특성상 자주 바뀌는 게 좋지 않은 봉사직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구역장, 교리 교사, 전례부입니다. 바뀔 때 마다 처음부터 다시 교육해야 하고, 그간의 노하우는 아무리 인수인계를 하더라도 금방 발휘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정 상 여러 가지 고충을 고려하여 2년제로 사목위원과 구역장의 임기 원칙을 세웠지만, 공동체가 동의하고 필요로 하는 한, 때에 따라서는 임기를 연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서로 역할이 중복되고 충돌될 수 있기 때문에 지혜가 필요하고, 무엇보다 떠밀기식, 땜빵식, 기피식 봉사직이 아니라 주님과 공동체를 위한 자발적인 희생과 봉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봉사직은 성령께서 지도하십니다. 내 능력과 경험에만 의존하다보면 교만과 욕심이 생겨 공동체에 분열이 생기고 공동선을 위한 소통을 가로 막습니다. 그러므로 봉사자는 겸손한 자세로 성령께 기도해야 합니다. 요즘 이런 생각을 합니다. 사목에 필요한 일과 역할에 비해 교우 숫자가 적다 보니 2중, 3중으로 봉사하고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따라서 직장 생활, 가정생활에 더하여 교회 생활까지 과중하다고 느껴 부담감과 피곤도가 높아 질 수 있는 생각을 해봅니다. 실제 오랜 세월 장기 봉사한 분들은 사실 영적으로 메마르고 몸도 지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후임을 찾아보아도 선득 나서는 사람이 없습니다. 심지어는 차라리 로컬에 가서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혼자 신앙생활하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께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일시적으로 편하고 평화로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동체는 쇠퇴합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형평성 논쟁과 봉사 회피가 아니라 서로에 대한 배려와 응원입니다. 이해하고 양보하고 희생하고 기도할 때 우리는 성장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십자가 없이는 우리는 교회를 이룰 수 없습니다. 이제 서로 형평성을 따지며 불만과 불평을 드러낼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정신으로 서로 이해하고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느님을 뵐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봉사를 하면서 하느님을 만나는 방법 또한 예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그분께로 고개를 돌려야 합니다. 그분의 생각으로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여담입니다만, 지난 10일에 문재인 디모테오 대통령이 당선되었습니다. 지금도 이 분을 지지하는 국민도 있고 그렇지 않은 국민도 있습니다. 여전히 우리 안에는 이념과 세대 간의 갈등과 반목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자리에서 정치를 논하지 않겠지만, 오늘 복음과 관련하여 새 대통령의 신앙에 대해서 몇 마디는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미 뉴스 보도를 통해서 아시겠지만 대통령의 뿌리는 이북입니다. 전쟁 중에 강압적인 공산당 가입이 싫어 대통령의 부모는 흥남철수 때 라울 선장이 이끄는 빅토리오호에 몸을 실습니다. 빅토리호는 먼 훗날 미국 뉴저지 베네딕도회 뉴튼 수도원의 마리너스 수사가 된 라우 선장이 죽음을 각오하고 한국민 1만 4천명을 태운 기적의 배입니다. 피난 때부터 천주교와 인연은 맺은 대통령은 먼저 어머니의 입교에 이어 초등학교 3학년 때 첫영성체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대학생 때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최루탄을 맞고 쓰러진 자신을 구해준 지금의 부인을 만나게 되는데, 모태 신앙을 가진 김정숙 골롬바 영부인과 대통령은 성당에서 혼배를 할 정도로 신심이 깊습니다. 그리고 대통령의 모친은 부산 영도의 신선 성당에 다니시는데, 저도 여러 차례 미사를 거기서 드렸지만, 자신을 문재인의 어머니라고 드러내지 않아 지금도 그분을 잘 모릅니다. 인상적인 것은 저도 제 어머니의 유품인 묵주를 보면서 어머니의 삶을 늘 회고하지만, 대통령도 90세 노모가 주신 묵주반지를 늘 끼고 다닌답니다. 최근 TV에 자주 노출된 대통령의 손을 보면서 그 반지가 묵주반지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20년 전 인권 변호사 시절 바빠서 성당에 잘 나가지 못할 때 어머니가 선물로 주신 것이랍니다. 대통령은 이 반지를 보면서 어머니를 늘 떠올린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양말 공장 부도로 가난해졌을 때 어머니는 노점상 같은 장사를 하셨는데, 한 번은 일을 마치고 부산역에서 거제까지 돌아가야 하는데, 표는 매진이고 암표만 팔더랍니다. 그러나 아들에게 작은 법을 어기는 것조차 부끄러워하셨던 어머니는 아들을 앞세우고 걷기 시작합니다. 끼니도 거르고 늦은 밤이 돼서야 도착했지만 훗날 이 기억이 지금의 대통령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오늘이 어머니의 날인데요, 이와 관련한 대통령의 회고록을 소개합니다.
비록 가난 했지만
가야 할 길과 가지 말아야
할 길을 보여주신 어머니.
“어려울 때는
가장 기본으로 돌아가라.”
“아무리 힘들어도 가지
말아야 할 길을 돌아보지 마라.”
나의 좌우명인 이 말은
어머니에게서 배운 것이다.
오늘도
나는 어머니의
묵주반지를 보며
그 가르침을 새긴다.
천주교의 사회교리는 생명, 정의, 평화, 환경의 가치를 중요시합니다. 저는 대통령의 국정 운영 방향이 이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봅니다. 저는 지난 부활 제2주일에 당시 후보였던 대통령으로부터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 내용은 그 당시 신자들에게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선거 중에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는 사제의 의무 때문이었습니다. 그 편지 내용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정치인이기 전에 천주교 신자인 디모테오를 위해서 기도해달라는 것과 언제든지 부족한 점이 있으면 신부님들께서 조언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부디 나라 안팎으로 가장 어려운 시기에 중책을 맡은 대통령이 본인의 말 대로 정치인이기 전에 한 신앙인으로서 복음적 가치를 잘 실현할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품고 사는, 그래서 갈등과 분열을 극복하고 진정 국민을 사랑하고 섬기는 대통령이 되어주시기를 기도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