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서예와 완당(阮堂) 김정희(金正喜)
한국서예
우리 나라는 중국 문화를 직접 빋아들인 나라이기에 종족과 언어만 다를 뿐이지 모든 문물 제도는 중국과 대략 같게 수천년을 살아온 게 사실이다.
나는 대만에 갔을 때 우선 고궁 박물관을 찾아보고 서화, 도자기 등을 위시하여 모든 것을 살펴보며 하나하나 우리 것을 연상하느라 바빴다.
또 중국 대륙을 돌아다니며 그 곳에 산재해 있는 수많은 건축. 도성(都城). 능원(陵園) 등 명소 고적을 살펴볼 때 역시 우리 나라의 문화유산이 생각나 시종 비교하여 보느라 여념이 없을 지경이었다.
저 중국으로 말하면 국토의 넓이로는 우리의 몇 배인지 말할 수 없고 역사상 제반 자취도 대단하며 현재의 인구도 12억을 산(算)하고 그 곳에 사는 종족도 56종족이라니 모든 것이 우리와 어찌 견주어 말하랴.
그러나 넓고 크고 많은 것은 한 마디로 우리와 비교가 어려우나 문화유산으로 말하면 조그마한 우리 나라로서도 짜임새 있고 아름다운 점에서 볼 때 하나도 손색이 없게 느껴 자위할 만하였다.
중국 관광에서 본 수많고 한없는 것을 어찌 다 말할까마는 그 중 비림(碑林)을 본 것이 가장 인상적이어서 적어 보겠다. 비림(碑林)은 많은 비가 몰려 있어서 '비림(碑林)' 이라 일컫는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산재한 것을 모아서 큰 집 속에 보관한 것이다. 안근례비(顔勤禮碑)를 비롯하여 수많은 천하 명보(名寶)를 한눈으로 단숨에 볼 때 그저 황홀할 뿐이다. 특히 서학도(書學徒)로서는 감탄할 따름이었다. 여기서 생각나는 것이 있으니 우리 나라도 산재한 국보급 금석(金石)을 큰 집을 짓고 한 곳에 모아 보관도 안전하게 하며 감상도 편리하게 하였으면 하였다. 관광에서 얻은 소득이 이만큼 지대하다는 것을 잊을 수 없다.
다음에 역사적으로 뚜렷한 서적(書蹟)과 서가(書家)에 대하여 소개하겠다.
삼국시대(三國時代)
광개토경호태왕릉비(廣開土境好太王陵碑) : 예서(隸書)9414) 고구려(高句麗) 방엄질후(方嚴質厚) 파책(波책)이 없는 고예(古隸)
신라(新羅) 북한산진흥왕순수비(北漢山眞興王巡狩碑) : 육조(六朝)
백제(百濟) 무녕왕릉(武寧王陵) 지석(誌石) : 육조(六朝)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
성주사(聖住寺) 사적비편(事蹟碑片) : 근엄단아(謹嚴端雅) 안진경다보탑체(顔眞卿多寶塔體)
단속사신행선사비(斷俗寺神行禪師碑) : 석영업 서(釋靈業 書) 행초(行草) 왕희지체(王羲之體)
쌍계사비(雙溪寺碑) 최치원 서(崔致遠 書) 구양순(歐陽詢), 유공권체(柳公權體)
고려시대(高麗時代)
백월서운비(白月栖雲碑) : 김생(金生) 집자(集字) 행초(行草)
봉암사정진대사비(鳳巖寺靜眞大師碑) : 장단설. 서(張端說. 書) 우세남체(虞世南體)
현화사비(玄化寺碑) : 채충순 .서(蔡忠順 . 書) 구양순체(歐陽詢體)
거둔사승묘선사비(居둔寺勝妙禪師碑) : 김거웅. 서(金巨雄. 書) 구양순체(歐陽詢體)
현화사개창비(玄化寺開創碑) : 백현예. 서(白玄禮. 書) 구양순체(歐陽詢體)
법천사지광국사비(法泉寺智光國寺碑) : 안민후. 서(安民厚. 書) 구양순체(歐陽詢體)
영통사대각국사비(靈通寺大覺國師碑) ; 오언후. 서(吳彦侯. 書) 구양순체(歐陽詢體)
문수사장경비(文殊寺藏經碑) ; 이암. 서(李암. 書) 해행체(楷行體)
고려시대만 해도 육필로 남은 것은 근소하고 금석문만 남아 있다.그리고 고려는 불교를 숭봉(崇奉)한 까닭에 불찰에 궁비(穹碑)가 많이 있고 서체는 구양순체가 대종을 이루었다.
조선시대(朝鮮時代)
초엽에는 왕희지 조맹부 서체가 성행하여 그 여운이 중엽까지도 전수되다가 안진경체가 싹트기 시작하여 몇몇 작가의 출현을 보겠고 계속해서 안체에 관심이 커서 사육신 신도비(神道碑), 이충무공 신도비, 송우암묘비 등 유명한 금석문의 집자가 발현되었으니 이는 한국서예사상 일대 획기적인 변혁이라 할 수 있다. 말엽에 이르러서는 청조의 영향을 받아 다양해지며 전(篆), 예(隸), 해(楷), 행(行), 초(草) 전반에 걸쳐 새로운 면모를 보이게 되었다.
고려 이전은 연대가 오래되어 육필이 거의 없어 금석문만 가지고 글씨의 성쇠를 알게 된다. 조선조에는 임란 전의 유적으로는 간찰(簡札)이 어느정도 남아 있고 그 이후는 간찰이 많아 그 연구에 있어서 간찰의 비중이 매우 크다.
조선조 서예는 작가 본위로 소개하겠다.
정도전(鄭道傳) 삼봉(三峯) 조체(趙體)
성석린(成石璘) 독곡(獨谷) 조체(趙體) 건원릉비(建元陵碑)
권근(權近) 양촌(陽村)
설경수(설慶壽) 용재(용齋) 왕법(王法) 용문사정지국사비(龍門寺正智國師碑)
공부(孔俯) 어촌(漁村) 예해초(隸楷草), 이색신도비(李穡神道碑). 무학선사탑비(無學禪師
塔碑)
석만우(釋卍雨) 천봉(千峰) 안평대군 소상팔경시권(瀟湘八景詩卷)
권홍(權弘) 송운헌(松雲軒) 전예(篆隸) 헌릉비음(獻陵碑陰) 성균관비(成均館碑)
신색(申穡) 암헌(巖軒) 조법(趙法) 숭례문(崇禮門)
김숙자(金叔滋) 강호산인(江湖散人)
강석덕(姜碩德) 전예(篆隸)
정척(鄭陟) 정암(整庵) 새보(璽寶) 관인(官印)
성개(成槪) 수헌(睡軒) 유법(柳法) 성령대군(誠寧大君) 이종신도비(李種神道碑)
안숭선(安崇善) 옹재(雍齋) 왕법(王法)
정인지(鄭麟趾) 학역재(學易齋) 조법(趙法)
이영서(李永瑞) 희현당(希賢堂) 팔경시권(八景詩卷)
문종(文宗) 조법입신(趙法入神)
이용(李瑢) 안평대군 자(字) 청지(淸之) 호(號) 비해당(匪懈堂) 낭간거사 매죽헌(梅竹軒)
왕법(王法) 조법(趙法) 화금(畵琴) 문종2년 동활자서사(銅活字書寫) 임신자(
壬申字) 몽유도원도발문(夢遊桃源圖跋文)
박팽년(朴彭年) 취금헌(醉琴軒) 조법(趙法) 몽유도원도서(夢遊桃源圖序)
성삼문成三問) 매죽헌(梅竹軒) 조법(趙法)
이개(李塏) 백옥헌(白玉軒) 조법(趙法)
이현로(李賢老) 조법(趙法) 몽유도원도부(夢遊桃源圖賦)
강희안(姜希顔) 인재(人齋 시서화(詩書畵) 왕(王) 조법(趙法) 을해자(乙亥字)
성임(成任) 안법(顔法), 홍화문(弘化門)
정난종(鄭蘭宗) 허백당(虛白堂) 왕법(王法) 을유자(乙酉字)
성종(成宗) 조법(趙法)
김구(金絿) 자암(自庵) 회소풍(懷素風) 광초(狂草) 인수체(人壽體) 안평대군. 김구(金絿)
양사언(楊士彦). 한호(韓濩 사대가(四大家)
성수침(成守琛) 청송당(聽松堂) 문징명법(文徵明法)
이황(李滉) 퇴계(退溪) 왕법(王法)
황기지(黃耆志) 노고산(老孤山) 왕법(王法) 회소풍(懷素風) 광초(狂草) 초성(草聖)
김인후(金麟厚) 하서(河西) 안법(顔法) 초(草)
사임당(師任堂) 신씨(申氏) 왕법(王法) 초(草)
양사언(楊士彦) 봉래(蓬萊) 해초(楷草) 안법(顔法)
석휴정(釋休靜) 청허당(淸虛堂) 서산대사 천의무봉필법(天衣無縫筆法)
송준길(宋浚吉) 동춘(同春) 조법(趙法)
송시열(宋時烈) 우암(尤庵) 안법(顔法)
성혼(成渾) 우계(牛溪) 안법(顔法)
윤근수(尹根壽) 월정(月汀) 왕법(王法) 영화체(永和體)
이산해(李山海) 아계(鵝溪) 왕법(王法) 정암(靜庵) 조광조비(趙光祖碑). 회재(晦齋) 이언적비(李
彦迪碑)
김현성(金玄成) 남창(南窓) 송설체(松雪體) 통제이공수군대첩비(統制李公水軍大捷碑) 숭인전비
(崇仁殿碑)
한호(韓濩) 석봉(石峯) 사자관(寫字官)
김상헌(金尙憲) 청음(淸陰) 동기창법(董其昌法)
신익성(申翊聖) 동회(東淮) 전예(篆隸)
허목(許穆) 미수(眉수) 전(篆)
김수증(金壽增) 곡운(谷雲) 예전(隸篆)
이우(李우) 관난정(觀난亭) 낭선군(朗善君) 선조손(宣祖孫) 대동금석첩(大東金石帖)
윤순(尹淳) 백하(白下) 행(行)
이간(李간) 최락당(最樂堂) 낭원군(朗原君) 선조손(宣祖孫) 전예(篆隸)
이광사(李匡師) 원교(圓嶠) 해행(楷行) 초(草) 백하문인(白下門人)
이인상(李麟祥) 능호관(凌壺觀) 삼절(三絶)
강세황(姜世晃) 표암(豹庵) 삼절(三絶) 왕.미.조법(王. 米.趙法)
정조(正祖) 홍재(弘齋) 만천명월주인(萬川明月主人) 홍재전서(弘齋全書)
유한지(兪漢芝) 기원(綺園) 전예(篆隸)
정약용(丁若鏞) 다산(茶山 행서(行書)
신위(申緯) 자하(紫霞) 동기창(董其昌) 삼절(三絶)
조광진(曺匡振) 눌인(訥人) 유석암(劉石庵) 예서(隸書)
권돈인(權敦仁) 이재(彛齋) 추사서풍(秋史書風)
김정희(金正喜) 추사(秋史) 완당(阮堂) 추사서체(秋史書體)
전기(田琦) 고람(古藍) 전예해행(篆隸楷行 화(畵)
오경석(吳慶錫) 역매(亦梅0 삼한금석(三韓金石)
윤용구(尹用求) 해관(海觀) 구법(軀法)
민형식(閔衡植) 우하(又荷) 안법(顔法)
김돈희(金敦熙) 성당(惺堂) 각체(各體)
김용진(金容鎭) 영운(潁雲) 안법(顔法) 예(隸)
오세창(吳世昌) 위창(葦蒼) 전(篆)
손재형(孫在馨) 소전(素筌) 전(篆)
유희강(柳熙綱) 검여(劍如) 육조(六朝)
학술이나 예술이나 배우고 연구하려면 그 원천을 찾아야 함은 더 말할 나위 없지만 글씨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옛날에는 인쇄술이 발달되지 못하였지만 현대는 이의 발달로 진서귀적이 얼마든지 나와 공부하기가 편리해졌다. 원천을 찾아 고법을 배우되 당대 이전으로 올라가야 창작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다. 법첩을 공부함에 있어서는 많은 종류를 욕심내서 쓰는 것 보다 가지 수를 정선하여 일생을 두고 공부하는 것이 좋다. 우리 나라 금석문은 모두 중국 서법에 의거하고 우러나온 것이므로 참고에 그치는 것이 합당할 줄로 안다.
우리 나라의 서예는 중국 서예에 근거를 두어야 함은 물론이겠지만 우리의 특수사정으로 국문 글씨를 쓰는데 주력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그러나 국문 글씨만 썼다고 서예가라고 하기는 힘들 것으로 안다.
완당선생(阮堂先生)
완당 김정희 선생의 본관은 경주요 자는 원춘(元春)이요 호는 완당(阮堂) 이외에 추사(秋史), 예당(禮堂), 시암(詩庵), 과파(果坡),와 별서(別署)를 모두 합치면 수백을 꼽을 것이다.
정조 10년(1876)에 판서 노경의 아들로 회임 24개월 만에 태어났다고 하며 백부 노영에게 출계(出系)하였다.
순조 9년에 생원이 되고 1819년 문과에 급제하여 설서(說書) 검열 대교(待敎), 충청우도 암행어사, 의정부 검상, 성균관 대사성 등을 거쳐 이조참판에 이르렀다.
24세 때에 생부를 따라 북경에 가서 그곳 거유 완원(阮元). 옹방강(翁方綱) 등과 교유하여 막역한 사이가 되었다. 1840년 윤상도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 1848년에 석방되었으나 1851년 헌종의 묘천 문재 때 그 주창자로 북청에 유배. 그 다음에 풀려났다.
학문에 있어서는 실사구시(實事求是)가 요도(要道)임을 주장하고 그것을 훈고(訓誥)로써 실천하는데 있다고 역설하였다. 또한 역대의 명필을 연구, 그 장점을 모아서 독특한 일체를 이루어 대성하니 이를 추사체라 일컫게 되었다. 그중 예서 행서는 전무후무한 경지를 열었다. 이는 심오하고 해박한 학문의 배경과 원천 없이는 불가능한 결과라 하겠다.
문인화 또한 서법과 학문의 저력에서 우러나 탈속 비범하여 추종를 불허한다. 금석학에 주력하여 <금석과안록(金石過眼錄)>이 있으며, 북한산에 있는 진흥왕 순수비를 고증하였다.
완당의 대가를 이룬 세 가지 연유를 들면 (1)명문가에 출생 (2)고증학의 성세 (3)장수하였던 것을 말하겠다. 그외에 천부적인 재질은 더 말할 나위 없다.
그의 서예를 서체별로 간략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 전서(篆書)
완당의 전서는 많지 않으나 주역상경과 장서목록 일부가 전서로 되어 있다. 그 유필은 철선전(鐵線篆)으로 고문과 소전을 혼합하여 원만한 장봉이다. 장엄한 태세를 잃지 않을 뿐 아니라 탈속하였다.
2. 예서(隸書)
완당의 글씨 중에 예서와 행서가 대종을 이뤘다. 그리고 가장 많이 전한다. 서경예(西京隸) 즉 전한예(前漢隸) 동경예(東京隸) 즉 후한예(後漢隸)로 구분하였으니 서경예는 파세(波勢)가 없고 동경예는 파책(波책)이 있다. 완당의 예는 서경예에 주력한 듯하다.
서시우아(書示佑兒) 중 일구(一句)를 보면
隸書 是書法祖家 若欲留心書道 不可不知隸矣.........(중략)
라 하였고 또
又非有胸中文字香書卷氣 不能現發於腕下指頭..........(중략)
라 하였으니, 예서(隸書)는 바로 서법의 조가(祖家)이다. 만약 서도에 마음을 두고자 하면 예서를 몰라서는 아니된다. 더구나 가슴속에 문자향(文字香) 서권기(書卷氣)가 들어있지 않으면 능히 완하(腕下)와 지두(指頭)에 발현되지 않는다 라고 하여 문자향. 서권기의 중요성을 서시(書示)하였다. 이와 같이 예서의 진수를 피력하였고 서법의 조종(祖宗)으로 예서를 들었다. 무릇 서도에 뜻을 두었다면 반드시 예서에 뜻을 두지 아니하고는 안 된다고까지 강조하였으니 바로 완당 서법의 특징이라고 하겠다.
예서의 방경 고졸(方勁古拙)함과 청고 고아(淸高古雅)한 필의와 흉중에 문자향. 서권기가 들어 있어야만 비로소 이루어진다는 것이 완당 서법의 정체(正體)이기도 하다.
3. 해서(楷書)
해서에 있어서 서시우아(書示佑兒)에
書法 非醴泉銘 無以入手.........(중략)
라고 하였는데 이는 서법은 예천명이 아니면 손을 들여 놓을 수가 없다 한 것이니, 완당의 해서관(楷書觀)을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초학(初學)에 있어서 예천(醴泉). 화도(化度) 등 비(碑)에 입수(入手)할 것을 역설하였다.
채상국(蔡相國)은 완당이 6, 7세 때 쓴 입춘첩을 보고는 훗날 이름을 날릴 것을 점쳤다고 하는데 그가 8세 때 쓴 서간문을 보면 그럴 만도 하다.
그의 이론가 서법을 보면 전. 예. 행. 초의 특징이 종합되어야 비로소 해서가 될 수 있다는데 주목해야 될 것이다. 완당의 해서는 이왕(二王). 구. 저(歐.楮). 안진경의 법을 배워 근원을 삼았고 소식. 황정견. 유용. 옹방강 등의 영향이 적지 않았으며, 육조해서의 필법과 관심 또한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4. 행서(行書)
완당의 행서는 서체 연변(演變)에 따라 해서에 바탕을 두었음을 더 말할 나위 없다. 구. 저와 안진경을 거쳐 소식. 황정견. 문징명. 심주. 동기창. 유용. 옹방강에 이르기까지 그 영향이 미치지 아니한 것이 없다.
그는 행서의 원칙을 이왕(二王)에 두고 그후 제가(諸家)의 장점을 취하고 더욱 육조 비판(碑版)의 깊은 맛을 더하여 완당 서법이 나타난 것이다. 그가 연경(燕京)에서 옹방강과 필담한 묵적(墨蹟)으로 볼 때 그가 24세 때의 행서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옹(翁)과 대비하여 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청년의 서(書)와 노필(老筆)의 대비도 되려니와 여기서 완당의 행서가 비상함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5. 초서(草書)
완당의 논고인서(論古人書) 중 초서에 관하여
白陽山人草法 有孫虔禮揚少師規度 是草法正宗也 草法不由孫揚
皆作一鎭宅符 東人尤甚 無非惡札耳
라는 대문이 있으니, 즉 백양산인(白陽山人: 陳淳) 의 초서 쓰는 법에 손과정(孫過庭). 양무구(揚无咎)의 규법이 있으니, 이는 바로 초법(草法)의 정종(正宗)이다 초법이 손. 양을 말미암지 않는다면 모두 진택부(鎭宅符: 집 지키는 부적)를 만들 뿐인데, 동쪽 우리나라 사람들이 더욱 심하여 악찰(惡札: 졸렬한 편지나 글씨)이 아닌 것이 없다고 단정하였다.
성친왕(成親王)의 글씨를 논함에
草法尤長於孫虔禮舊法 一洗惡札之鎭宅符俗習 可爲後民之式
이라 하여 성친왕(成親王)의 초법이 손과정의 법을 따랐기 때문에 진택부같은 속(俗)된 버릇을 씻어내니 뒷 사람의 법식이 될 만하다고 지적하였다.
6. 전각(篆刻)
완당의 전각은 노경에 들 수록 자각풍(自刻風)의 졸박 청수(拙樸淸瘦)한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그 많은 별호와 문자인(文字印)등이 모두 자각으로 고문(古文). 기자(奇字). 무전(繆篆). 예서(隸書). 초상인(肖像印) 등에 이르기까지 구비하고 있어서 이 분야에 있어서도 한국 전각의 선구를 이루었다.
전각이 문인이나 서화가들 손으로 직접 주도(奏刀)된 까닭은 비단 장인(匠人)에 의한 속기(俗氣)를 피하려는데 그치는 것뿐만 아니라 자기의 고상한 풍취를 그 전각에 발휘해 보려는 의욕이기도 하다.
특히 화가로서 전각을 겸한다면 더욱 좋은 일이며 불연(不然)이라도 안목은 지녀야 하겠다. 낙관이 작품에 있어서 화룡점정(畵龍點睛)이니 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따라서 작품이 죽고 사는 관건이니 만큼 매우 유념해야 할 일이다. 수장인(收藏人) 또한 낙관인만 못지 않아 그 진장품(珍藏品)의 품위도 결정짓는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