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설명: 지월스님(사진 왼쪽)은 성철스님과도 두터운 교분을 갖고 있었다. 사진 지월대선사영첩 |
다음날 마을에서 해충약을 사온 대중들이 법당과 요사채, 공양간을 돌며 구석구석 약을 뿌렸다. 하지만 지월(指月)스님 방만은 스님이 한사코 마다해 약을 치지 못했다.
지월스님이 당시 찾아온 젊은 스님들께 이렇게 말했다. “스님들은 빈대가 물면 아파서 공부하는데 방해가 되는 귀찮은 해충이지만, 나에게는 그렇지 않소. 내가 밤에 화두를 들고 공부할 때 수마가 찾아올만하면 나를 물어서 잠을 쫓아주니 얼마나 고마운 도반이요. 그러니 밤에 스님들이 와서 나를 잠 못 자게 경책해줄려면 약을 치고, 그렇지 않으면 그냥 돌아가시오.”
삼보정재를 소중하게 여겼던 지월스님과 관련된 또 하나의 일화이다. 한번은 해인사 수곽(水廓,우물)에서 쌀을 씻던 행자가 미처 반토막난 쌀이 떨어진 것을 모르고 공양간으로 돌아왔다.
우연히 수곽을 지나던 지월스님이 물을 마시려다 바닥에 떨어진 쌀 반톨을 보았다. 조금 뒤 “오늘 공양주 행자가 누구요”라며 공양간에 들어섰다. “네, 스님 접니다” 공양주 행자가 노스님 앞으로 다가오자, 지월스님은 손바닥위에 놓인 쌀반톨을 보이며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이게 뭡니까” “쌀 반톨입니다” “이게 수곽에 떨어져 있어요” 공양주 행자가 말을 잃고 서 있었다. “쌀 한 톨에 시은(施恩)이 일곱근이라고 할 만큼 중요한데, 쌀을 소홀히 하는 것은 수행자 자세가 아닙니다.” 조용하고 자상하게 일러주는 스님의 경책이 서운할리 없다. 그 뒤로 해인사는 쌀 한 톨도 소중하게 여기는 가풍이 마련됐다.
열반 앞두고 “염라대왕 안 보여”
어느 겨울날 지월스님이 해인사 행자방을 찾았다. 겨울 산사의 날씨는 뼈가 시릴 정도로 춥다. 행자방은 땔감을 가득 넣은 덕분에 가마솥처럼 펄펄 끓고 있었다. 가만히 아랫목에 앉은 지월스님은 곁에 있는 행자들에게 방석을 하나씩 계속 달라고 했다. 여섯 장 정도 방석을 깔고 앉은 스님은 조용히 이렇게 말했다. “방이 너무 더워. 요새 방에다 장작을 몇개 넣었는고” “열개 넣었습니다” 행자의 답이 있자 지월스님 이렇게 경책했다. “안 얼어 죽을 정도만 되면 되지, 수행자가 너무 절절 끓는 방에서 공부하면 안 되지요” 지월스님이 열반하신 다음해 해인사는 거름이 부족했다고 한다. 스님 생전에는 부목들과 함께 낙엽이나 풀을 모아다 해우소에 대변과 함께 쌓아 거름으로 사용했는데, 스님이 돌아가신 뒤에는 아무도 돌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인사에 머물던 한 젊은 스님이 입영영장이 나와 군에 입대하기 위해 인사차 지월스님을 찾았다. 노스님은 젊은 스님의 두 손을 꼭 잡고 “공부하는 곳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니, 군에 가서도 열심히 정진하고 정진하라”는 당부를 했다.
노스님은 인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젊은 스님을 하염없이 바라보았고, 산중턱에서 이를 본 또 다른 젊은 스님이 군에 가는 스님께 상황을 설명하자, 뒤늦게 그 같은 사실을 알고는 노스님이 계신 곳을 향해 길에서 삼배의 예를 올렸다. 노스님은 지월스님이고, 군에 가는 스님은 향적스님, 귀뜸해준 스님은 현호스님이었다.
열반을 앞두고 몸이 편찮으실 때 봉선사에 주석하던 운허스님이 문병하기 위해 찾아왔다. 운허스님이 “스님, 화두가 들립니까”라고 물으니, 지월스님은 “내가 내 집을 두고 어디를 가는가”라고 답했다. 또 어느 날 상좌들이 “스님 염라대왕이 보입니까”라고 질문하자, 스님은 “내 눈에는 안보여”라고 대답을 했다. 수행자의 길을 묵묵히 걸어온 노스님이 평생 공부한 내용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지월스님은 1973년 3월27일 세수 63세, 법납 47세로 열반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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