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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산 쌍봉사
쌍봉사는 신라시대에 세워진 절로서, 855년 경 철감(澈鑒) 선사가 산수 수려한 이곳에 주석하며 구산선문의 하나인 사자산문(獅子山門)의 기초를 마련한 유서깊은 고찰이다. 따라서 쌍봉사가 자리잡고 있는 계당산 역시 마을사람들에게는 사자산(獅子山)이라는 명칭으로 더 익숙하다.
역사성만큼이나 문화재 역시 화려하여, 철감스님의 흔적을 살필 수 있는 국보 철감선사부도(澈鑒禪師浮屠)와 보물 철감선사부도비(澈鑒禪師浮屠碑)는 신라 석조물의 격조 높은 화려함의 극치를 보이고 있다. 그밖에도 여러 불보살상과 전각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좀처럼 보기 드문 3층의 이색적인 목조 대웅전은 쌍봉사의 자랑거리이기도 하다.
고려시대의 문인 김극기(金克己)는, 쌍봉사의 고찰(古刹)로서의 면모와 주변의 뛰어난 풍광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선명한 단청이 자줏빛 푸른산에 비치니
푸른 하늘 나는 학은 지둔에게 사례하고
연못에 노니는 금잉어는 혜관에게 감사하네
첩첩 고개 너머 옥비녀봉이 난간 앞에 빼어나고
빠른 여울소리 시원하게 섬돌 아래 떨어진다
담소하다 무심코 바라보는 저 조계종 물은
만길이나 하늘로 이어져 거센 물결 이는구나
조선조에는 세조(世祖)의 원당으로 나라의 보살핌을 받게 되어, 세조는 즉위 초에 “전라도 능성의 쌍봉사에 대해서는 감사와 수령에게 이미 전지를 내려보낸 바 있으나, 다시 잘 살펴 더욱 보호를 두텁게 하여 모든 잡역을 면제하라”는 교지를 내리기도 하였다.
관람포인트
1. 쌍봉사 대웅전은 우리나라 목탑의 원형을 가늠하게 하는 귀중한 목조건축으로, 현재의 건물은 신축된 것이지만 소실되기 전 상태대로 복원해놓아 옛 법당의 감회를 느껴볼 수 있다.
2. 대웅전 뒤로 이어진 대숲을 따라 오솔길을 올라가면 철감선사부도(국보 제57호)와 부도비(보물 제170호)가 있다.
3. 쌍봉사 지장전에는 지장보살 등 21구의 목조각상이 있다. 1667년(현종 8)에 조성된 이들 조각상은 예술성이 뛰어나다.
쌍봉사 창건
쌍봉사의 절 이름에는 두 가지 유래가 전하는데, 하나는 중조산의 한 갈래가 왼쪽으로 돌아 에워싸면서 절을 향해 우뚝 솟아 있어, 마치 남북의 두 봉우리가 서로 읍(揖)하고 있는 듯하여 ‘쌍봉’이라 칭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철감선사가 이곳에 자리잡으면서 붙여진 명칭이라 하는데, 이는 선사가 중국에 머무를 당시 소주(蘇州)에 있는 쌍봉사에서 도를 깨쳤다 하여 그의 도호(道號)를 ‘쌍봉’이라 하였고, 이 사찰에 머무르면서 선사와의 인연을 되새기고자 쌍봉사라 불렀다고 한다.
847년에 귀국한 철감선사가 855년(문성왕 17) 무렵 쌍봉사로 와서 10여 년간 머물며 선문구산의 하나인 사자산문(獅子山門)의 터전을 마련하였고, 이곳에서 선사의 선풍을 이어받은 제자 징효선사(澄曉禪師)가 강원도 영월 홍녕사에서 사자산문을 개창하게 되니, 결국 쌍봉사는 사자산문의 시초로서 기틀을 잡은 곳이라 할 수 있다.
창건 이후 퇴락해 버린 쌍봉사는 1081년(문종 35)에 혜조국사(慧照國師)가 창건 당시의 모습대로 중창불사 하였고, 조선 세종대에 전라도관찰사로 있던 김방(金倣)이 3창불사를 하였다. 세조대에 이르러 나라의 각별한 보살핌을 받게 되어, 1468년(세조 14)에는 세조의 원당을 짓고 사방 30리에 달하는 불량답(佛糧畓)이 있었다. 이때의 가람은 전각ㆍ누각ㆍ암자ㆍ승방ㆍ요사 등이 모두 400여 칸에 달하는 규모였다고 한다.
이후 1579년(선조 30)에 정유재란으로 대부분 건물이 소실되었다가 1628년(인조 6)에 요의(了誼) 스님이 대웅전을 중수하였으며, 1633년(인조 11) 인환(印幻) 스님의 팔상탱 조성 및 단청 보수, 1637년(인조 15) 수인(守印) 스님의 명부전 건립 및 지장보살상ㆍ시왕탱 봉안, 1650년(효종 1) 웅준(雄俊) 스님의 동부도(東浮屠) 건립, 1667년 선익화상(善益和尙)의 명부전 시왕상 봉안, 1677년(숙종 3)의 사천왕상 조성 등이 있었다. 1679년에는 동쪽 기슭에 불묘(佛墓)를 만들어 비로자나ㆍ노사나ㆍ석가불상 등 3체를 묻었으며, 1688년에 수열(守悅) 스님이 치달루(致達樓)를 건립하고 1690년에 대웅전 중건과 1694년에 대웅전 석가삼존불 및 극락전 아미타삼존불을 봉안하였다.
1724년(경종 4)에 치현(致玄) 스님의 대웅전 3차 중수가 있었고, 1761년(영조 37)에 일규(一奎) 스님의 동부도ㆍ서부도 중수에 이어 1774년에는 불유청(佛油廳)ㆍ상경청(上京廳)ㆍ잡물청(雜物廳)ㆍ삼보청(三補廳)ㆍ본전청(本箋廳) 등을 건립하였다. 1786년(정조 10)에 쌍봉사사적비를 세우고 1802년(순조 2)에 우철스님이 「쌍봉사기념합록(雙峯寺記念合錄)」을 편찬하는 등, 조선시대 전 기간에 걸쳐 꾸준한 사세를 유지하였다.
근래에 와서는 1902년(고종 39)에 주지 벽운(碧雲) 스님이 칠성ㆍ산신탱화를 봉안했으며, 1919년에 효해(曉海) 스님이 신중탱화를 봉안하고, 1935년에 오백나한상을 백양사로 옮겨 봉안하게 되었다. 그러나 6.25 때 대웅전과 극락전만을 남긴 채 대부분의 당우들이 소실되었고, 보물 제163호로서 우리나라 3층 목탑건물의 진수를 보여주었던 대웅전이 1984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지금의 대웅전은 1986년에 복원된 것이며, 현재도 계속 중수 중에 있다.
철감도윤
그의 어머니가 신이한 빛이 방안을 가득 채우는 태몽을 꾸었다고 한다. 18세에 출가하여 귀신사(鬼神寺)에서 《화엄경》을 공부하였으나, 원돈(圓頓)을 가르치는 화엄이 심인(心印)을 전하는 선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여 825년 당나라로 갔다. 도일(道一)의 제자 보원(普願)를 찾아가니 보원은 첫눈에 법기(法器)임을 알고 그에게 심인을 전한 뒤 그의 법인(法印)이 신라로 간다고 탄식하였다고 한다.
847년(문성왕 9) 범일(梵日)과 함께 귀국하여 금강산에 머무르면서 후학들을 지도하였는데, 경문왕도 그때 그에게 귀의하였다. 868년 4월 18일 문인들을 모아 법을 널리 펼 것을 당부하고 나이 71세, 법랍 44세로 입적하였다. 시호는 철감선사(澈鑒禪師)이며, 탑호(塔號)는 징소(澄昭)이다.
중국에서 귀국한 후 금강산 장담사로 가서 머물던 철감선사는 855년(문성왕 17년) 무렵 쌍봉사(雙峯寺)로 와서 10여년 간 머물면서 종풍을 떨쳤다. 그가 쌍봉사에 머물던 기간에 쌍봉사는 사세가 번창하여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으며, 선문구산의 하나인 사자산문(獅子山門)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이곳에서 선사의 선풍을 이어받은 제자 징효선사(澄曉禪師)가 강원도 영월 홍녕사(지금의 법흥사)에서 사자산문을 열게 되었다.현재 국보 제57호와 보물 제163호로 지정된 철감선사탑(澈鑒禪師塔)과 철감선사비가 쌍봉사에 모셔져 있다.
쌍봉사 가람배치
쌍봉사는 중조산 남쪽 자락의 평평한 대지 위에 가람을 형성하고 있다. 우선 쌍봉사로 들어서는 입구에는 조경이 잘된 연못이 비교적 큰 조성되어 있으며, 해탈문 좌우로 사역을 표시하는 담장이 둘러져 있다.
해탈문에서 대웅전을 바라볼 때 좌측 끝으로 범종각이 동향하여 위치하고, 나머지 전각들은 대웅전 뒤에 자리를 잡아 대웅전과 같은 축으로 남향해 있다. 대웅전 뒤로 한 단 높은 곳에 극락전이 자리하고, 극락전 좌우로 나한전과 명부전이, 나한전 앞으로 호성전이 위치해 있다.
쌍봉사의 요사채들은 이 중심영역 좌우로 배치되어 있는데, 돌담을 쌓고 내문을 달아 영역을 구분하고 있다. 지장전 뒤로 산길을 따라 100m 정도 오르면 철감선사 부도와 탑비가 있으며, 쌍봉사의 나머지 부도들은 사적비와 함께 사찰 외곽에 부도전을 조성하여 모셔놓았다.
유서깊은 고찰인 만큼 지정문화재 역시 풍성하다. 현재 철감선사부도(澈鑒禪師浮屠)와 철감선사탑비가 각각 국보 제57호와 보물 제16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그 밖의 지정문화재로는 대웅전 석가삼존불상(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251호), 극락전 아미타여래좌상(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252호), 지장전 지장보살좌상 및 시왕상 일괄(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 253호), 극락전(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66호) 등이 있다.
철감선사탑비
비신(碑身)이 없어 철감선사의 자세한 행적은 알 수 없으나 『조당집』이나 사자산문을 개창한 징효대사(折中, 825~900) 보인탑비 등에 부분적인 기록이 남아 있다. 이들 기록에 의하면 선사는 신라 원성왕 14년에 태어나 18세에 출가한 뒤 김제 귀신사(歸信寺)에서 화엄경을 읽으며 수학하다가 헌덕왕 17년(825)에 중국으로 건너갔다. 남전보원(748~834)의 심인을 전승받은 후 문성왕 9년(847)에 굴산사를 개창했던 범일선사와 함께 귀국하였다. 풍악 장담사에 머무르면서 경문왕을 불법에 귀의케 하고 징효대사에게 불법을 잇게 하여 강원도 영월지역에서 개창한 사자산문의 개조로 추앙되었다. 또한 선사는 말년에 주석한 쌍봉사를 중창하였으며 이곳에서 868년(경문왕 8) 4월 18일에 입적하였다. 경문왕은 시호를 철감(澈鑒), 탑명을 징소(澄昭)라 하사하였다.
귀부는 방형의 대좌 위에 있으며 높이가 아주 낮고 깨진 부분 없이 완전히 잘 남아 있다. 용두(龍頭)화된 귀부의 머리는 정면을 바라보고 있고, 입에는 둥근 여의주를 물고 있다. 머리 위에는 하나의 뿔이 돋아나 있으며 입가에는 활짝 펼친 날개 같은 것이 있다.
쌍봉사 철감선사 탑
높이는 2.3m이며 하대석 1매, 중대석과 상대석이 1매, 몸돌 1매, 지붕돌 1매의 모두 4매의 석재로 이루어져 있다. 지붕돌 위에는 둥근 철주구멍만 남아 있고 상륜부는 없어졌다. 세부 조각수법에서는 목조 건축양식을 본뜨고 있어, 그 무렵 건축기술의 단면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도굴꾼들이 사리장치를 빼내기 위해 쓰러뜨려 놓았는데, 1975년에 다시 짜 맞추었다고 한다. 그 탓인지 지붕돌 추녀가 조금씩 상해 있다.
중대석과 하대석의 여결부위는 하대석 윗부분을 안으로 파서 그 안에 중대석 아랫면이 끼도록 되어 있다. 팔각을 이룬 중대석의 각 모서리에는 아래위로 날개처럼 펼쳐진 연잎으로 기둥을 조각하고, 그 사이 각 면에 안상을 새긴 후 그 가운데에 얼굴이 매우 큰 가릉빈가를 새겨 넣었다.
팔각 몸돌의 각 귀퉁이에는 배흘림된 둥근 기둥을 세웠고, 기둥 윗부분에 목조건축의 짜임이 뚜렷이 새겨져 있다. 몸돌 앞뒤에는 자물통이 달린 문이 새겨져 있고, 앞뒷문 좌우에 사천왕상이 있으며 나머지 두 면에는 옷자락을 날리며 내려오는 비천상이 한 쌍씩 새겨져 있다.
각 부분의 조각은 정교하고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 모든 모서리와 구석은 단호하게 각이 졌고 몸돌의 사천왕상은 옷매듭까지 여실하며, 지름이 2cm 남짓한 막새기와 안의 연꽃무늬는 정교하기 그지없다.
쌍봉사괘불지주
쌍봉사극락전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66호로 지정되어 있는 쌍봉사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 된 다포계 양식의 단아한 건물이다. 6.25로 대부분의 당우들이 소실될 때 대웅전과 함께 보전되었으며, 이후 대웅전이 1984년에 소실된 점을 생각하면 쌍봉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라 할 수 있다. 극락전 앞에 자리잡은 두 그루의 단풍나무가, 행여 법당을 가릴 새라 각기 바깥쪽을 향해 비스듬히 서 있는 모습이 극락전의 운치를 더욱 살려 주고 있다.
건물형태는 잡석으로 높직하게 쌓아올린 축대 위에 낮은 외벌대의 기단을 구성하였다. 커다란 덤벙주초를 놓은 뒤 배흘림 두리기둥을 세웠으며, 기둥머리에는 창방을 끼워 넣고 평방을 올린 다음 공포를 포작하였다.
공포의 구성은 내외 2출목으로 주 칸마다 공간포를 1좌씩 배치하였고, 설첨자 부분에는 연봉과 봉두를 깎아 장식하였다. 천정은 우물천정에 바닥에는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창문은 2분합 띠살문이다. 앞쪽의 처마는 부연을 내달은 겹처마이고 뒤쪽 처마는 흩처마이며, 처마 양측에 풍판을 달았다. 가구구조는 평5량으로 대들보 위에 동자주를 세우고 종보를 얹은 다음 판대공을 놓고 종도리를 걸치는 일반적인 형식을 하고 있다.
쌍봉사(雙峰寺): 극락전 불단(極樂殿 佛壇)
원래 극락전에는 아미타삼존불로서 중앙에 아미타여래좌상과 좌측에 관세음보살, 우측에 대세지보살이 입상으로 봉안되어 있었으나, 1989년에 양 협시불을 도난당하여 현재 아미타여래좌상만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52호로 지정되어 있다.
나무로 만든 아미타여래좌상은 전체높이 165㎝로, 넓적한 얼굴은 사각형에 가까우며 등이 약간 굽어 있다. 머리는 나발이 촘촘하고 육계는 정상에 원통형으로 처리하였으며 머리 중간에 반월형의 계주가 있다. 백호는 이마에서 양미간 사이로 내려와 있다.
일자형에 가까운 눈, 반원통형의 코와 콧볼의 상단만 약간 파서 형식적으로 처리한 점, 미소를 머금은 듯한 입, 크고 두툼하며 귓볼이 뭉툭한 귀, 삼도(三道)가 얕게 패인 짧은 목, 양 어깨를 감싼 두툼한 통견의 법의(法衣) 등이 대웅전 석가여래좌상과 흡사한 모습이다.
극락전의 왼편 단 위에는 석조지장보살좌상이 모셔져 있다. 소형의 보살상으로, 두건을 쓰고 있는 피모지장보살이다. 좌상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재료는 석고처럼 보이지만 ‘불석’이라 불리는 돌로 만든 석조이다.
머리를 약간 아래로 떨군 채 지그시 눈을 감고, 두 손은 무릎 위에 살며시 올려놓았다. 법의는 통견이며 승각기 매듭은 가슴 위로 올라 와 있다. 얼굴과 손과 피부에는 호분이 칠해져 있으며, 두건과 법의에 금칠이 되어 있다. 전체적인 상호나 법의(法衣)의 의습선 등으로 보아 조선후기에 조성된 불상으로 여겨진다.
쌍봉사(雙峰寺): 극락전 불화(極樂殿 佛畵)
산신탱과 칠성탱의 하단 화기를 보면 1984년에 봉안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당시에는 독성탱도 함께 조성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산신탱은 백발의 수염을 쓰다듬고 있는 산신을 중심으로 호랑이와 동자, 천녀들이 배치되어 있고 뒤의 배경은 소나무와 기암절벽을 수묵채색으로 그려 깊은 산속을 표현하였다
쌍봉사나한전
쌍봉사나한전 불단
쌍봉사 나한전에는 목조석가여래좌상을 비롯하여 16나한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모두 근래에 조성된 것이다. 본존인 석가여래좌상은 항마촉지인의 수인에 결가부좌하고 있으며, 상호는 네모난 편으로 머리에는 넓적한 육계와 반월형 계주가 솟아 있다. 법의는 통견으로 승각기 매듭이 가슴 윗부분에 처리되어 있는데, 전체적으로 대웅전의 석가여래좌상과 비슷한 모습을 취하고 있다.
쌍봉사(雙峰寺): 대웅전 (大雄殿)
1962년 해체공사 때, 3층 중도리에서 1690년(숙종16)의 두번째 중건에 이어 1724년에 세번째 중건된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 상량문(上樑文)이 나왔다. 즉, 이 건물이 숙종16(1690)에 중창되고 경종4년(1724)에 3창된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초창의 시기는 언제인지 확실치 않다. 정유재란에 전소된 것으로 추정하여 병자호란 이전 인조 때 중건된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최근까지 대웅전으로 사용되었던 3층각은 원래 대웅전 건물이 아닌 탑이었다고 전한다. 총높이 12m의 정방형 3층 건물로 상륜부(相輪部)를 제외하고는 우리나라에서 3층목탑의 모습을 전하고 있는 유일한 건물이었으나, 1984년 4월초에 촛불로 인한 실화로 소진되었다.
이에 문화재관리국에서 희귀한 문화재의 인멸을 방지하기 위하여 1985년 8월5일 복원 공사에 착공, 1986년 12월30일 준공하였다. 소실 이전의 모습은 3층으로 지붕이 팔작형식이었는데, 현재는 사모지붕의 목탑 지붕형식으로 바꾸고 상륜부까지 보완하였다.
각층마다 옥신은 4면이 한 칸의 벽면을 이루고 있으며, 규모는 1층 1변이 4m, 2층은 3.3m, 3층은 2.6m이며, 2층과 3층에서는 옥신 높이가 극도로 줄어들어 벽체 부분이 얼마 되지 않는다. 그 위로 처마 밑에 받친 공포가 2ㆍ3층은 2출목(二出目), 초층은 3출목(三出目)이며, 공간포(空間包)는 초층과 2층이 2개씩, 3층은 1개를 배치하였다.
내부 1층에는 마루를 깔고 불단(佛壇)을 안치하였으며, 천장은 우물천장을 가설하였다. 2ㆍ3층은 하나로 튼 통층(通層)이며 중심에 심주(心柱)가 하나 있는데, 각층 지붕의 춘설(春舌)은 모두 그 뒤끝이 이 심주에 연결되어 있다. 1962년 복원공사 당시 마루도리에서 상량문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1724년(경종 4)에 3중창할 시기의 상량문이다. 2중창에서 3중창에 이르는 기간이 30여 년에 불과하여 3중창은 부분적인 중수공사인 것으로 여겨지며, 1690년(숙종 16) 2중창 당시에 세운 원형을 거의 그대로 유지해온 것으로 보인다.
대웅전 내부에 봉안된 석가삼존불은 다행히 화재를 면해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며, 현재는 대웅전 보수공사 관계로 호성전(護聖殿)에 모셔 봉안하고 있다.
쌍봉사(雙峰寺): 대웅전 불단(大雄殿 佛壇)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51호인 대웅전의 목조삼존불좌상은 1984년 대웅전에 불이 났을 때 다행히도 타지 않고 보존되었다. 석가여래좌상의 좌우로 아난과 가섭존자가 두 손을 가슴 앞으로 모아 합장한 채 시립하고 있는 특이한 삼존형식이다.
중앙의 석가여래좌상은 전체높이 120㎝로 얼굴이 넓적하여 사각형에 가까우며, 고개를 약간 앞으로 숙이고 있는 모습이다. 머리는 나발이 촘촘하고 육계는 작은 원통형으로 처리하였으며 머리 중간에 반월형의 계주가 있다. 백호는 작게 처리하여 이마에서 양미간 사이로 내려와 있으며, 눈은 일자형으로 눈꼬리가 약간 올라가 있다. 반원통형에 가까운 코는 콧볼의 상단만 약간 파서 형식적으로 처리하였으며 입은 미소를 머금은 듯하다. 귀는 크고 두툼하며, 짧은 목에는 삼도(三道)를 나타내었다. 양 어깨를 감싼 법의(法衣)는 통견이며 두툼한 질감이 느껴진다.
수인은 항마촉지인을 결하여 오른손은 손바닥을 펴서 자연스럽게 무릎 안쪽에 올려놓았으며, 왼손은 엄지와 중지를 구부려 오른발바닥 위에 놓고 별조하여 손목 속에 끼워 넣었다. 불상의 하면은 목판으로 마무리하였는데 가운데에 가로 19㎝, 세로 10.5㎝ 크기의 장방형 복장공이 뚫려 있다.
쌍봉사부도군
쌍봉사의 입구 서쪽에 따로 마련되어 있는 부도전에는 쌍봉사사적비(雙峯寺寺蹟碑)ㆍ관찰사윤공웅열중수영세불망비(觀察使尹公雄烈重修永世不忘碑)와 함께 조선시대의 부도 5기가 있다.
쌍봉사지장전
근래에 조성된 지장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겹처마에 맞배지붕을 올린 주심포(柱心包) 건물로 건물의 측벽과 후벽에는 지옥세계를 묘사한 외벽화로 장엄되었다. 창호는 빗살창으로 짜아 각 4분합의 문을 달아 놓았고 내부의 바닥은 마루를 깔았으며 천정은 서까래를 노출시킨 연등구조이다.
1933년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조선고적도보』에 수록된 당시 쌍봉사의 전경 사진에는 지금의 명부전 자리에 '호성전'이라는 정자각 형태의 건물이 있었다. 지금의 지장전 건물은 동쪽으로 멀리 떨어진 현재의 논위에 지어져 '오백전'의 현판이 걸려 있다. 이것으로 보아 오백전 건물을 지금의 지장전 자리로 옮겨와 시왕상을 모신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데, 빽빽히 들어선 시왕상에 비해 다소 비좁은 느낌이다.
내부 중앙에는 목조지장보살좌상이 봉안되어 있고 그 좌우로 목조도명입상과 무독귀왕 입상 및 목조시왕상이 봉안되어 있다. 지장전에 봉안된 목조지장보살좌상을 비롯한 목조시왕상은 일괄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253호로 지정되어 있다.
쌍봉사(雙峰寺): 지장전 불단(地藏殿 佛壇)
쌍봉사 지장전에는 주존인 지장보살을 비롯하여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 시왕상(十王像), 판관(判官), 귀왕(鬼王), 동자(童子), 사자(使者) 등 21구의 목조각상이 있다. 지장보살은 팔각대좌에 앉은 모습이고 시왕은 의자에 앉아 있으며 나머지 상들은 모두 입상이다.
지장보살은 높이 104㎝로 민머리이며, 머리ㆍ눈썹ㆍ수염의 모든 털을 녹색으로 처리하였다. 민머리 모양을 제외한 형식은 불상과 같다. 이마에는 백호, 목에는 삼도(三道)가 있으며, 법의(法衣)는 양 어깨를 감싼 통견이고 아미타불의 손모양을 취하고 있다.
쌍봉사 지장시왕상 일괄(보물 제1726호)
전라남도는 ‘화순 쌍봉사 목조 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에 대해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 제1726호로 승격 지정 고시됐다고 2일 밝혔다.
보물 제1726호 ‘화순 쌍봉사 목조 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和順 雙峰寺 木造 地藏菩薩三尊像 및 十王像 一括)’은 조선시대 17세기 중․후반 활발한 조각활동을 펼친 조각승 운혜(雲惠)의 불상 양식 연구와 운혜파 조각승의 조각활동 및 경향을 시기별로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쌍봉사 지장 시왕상 일괄은 ‘조성발원문’과 ‘능주지 사자산 쌍봉사 제전기문집록(綾州地獅子山雙峰寺諸殿記文輯錄)’, ‘쌍봉사사적기(雙峰寺事蹟記)’ 등을 통해 1667년 운혜파 조각승들이 참여해 제작한 불상이다.
불상 표면에는 과거에 시문된 고색창연한 채색문양이 잘 남아 있다. 회화와 조각이 잘 어우러진 예배상으로 조선 후기 채색불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수조각승 운혜는 17세기 전반을 활약했던 수연(守衍)과 영철(靈哲)의 계보를 잇는 조각승이다. 입체적이고 건장하면서도 중량감넘치는 조각을 구사했으며 쌍봉사 지장시왕상에서도 이런 조각 경향이 잘 나타나 있다. 명계조각(冥界彫刻)이라는 종교적 엄숙성과 이 시기 불교미술의 특징인 대중적 평담미를 가장 잘 표현했다.
쌍봉사호성전
丁’자형을 이루고 있는 호성전은 2000년에 옛 모습을 고증하여 새롭게 복원한 건물이다. 현재는 대웅전 보수로 인해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던 석가삼존상을 옮겨 봉안하고 있다.
[유홍준 교수의 국토박물관 순례] 18. 화순 쌍봉사
-치솟은 삼층목탑, 동양의 신비 쌓은 듯
▶ 쌍봉사는 천 년 고찰로 우리나라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단아하고 품위있는 조용한 산사다. 왼쪽 건물은 최고 명물로 대웅전이라 불리는 삼층목탑이다. [조용철 기자]
근래에 들어와 외국 박물관 관계자들의 한국방문이 부쩍 잦아지고 있다.
올 10월엔 서울에서 국제박물관대회(ICOM)가 열리니 그만큼 우리 문화유산의 위상이 높아졌다는 얘기인데 이들의 방문이 박물관에만 머물지 않고 멀리 답사여행을 다녀오는 스케줄도 갖고 있어 새삼스러운 바가 있다.
이달 하순엔 영국의 대영박물관 회장인 존 보이드 경과 전 관장인 로버트 앤더슨 박사가 한빛문화재단(회장 한광호) 초청으로 일 주일간 우리나라를 방문한다. 이들은 명지대와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강연회를 열 예정이다.
이달 27일 열릴 명지대 강연회에선 보이드 경이 '유럽인의 시각에서 본 한국문화'를, 앤더슨 박사는 '21세기 사회에서 박물관의 역할'을 발표한다.
그리고 이들 일행은 이틀간 고적답사를 갖고자 나에게 그 길라잡이를 요청해왔다.
나는 흔쾌히 응하면서
① 경주의 신라문화,
② 안동 지역의 건축,
③ 백제지역의 고적,
④ 남도의 산사(山寺) 등 4개의 답사코스를 제시하고 그 중 하나를 선택해 달라는 질문서를 보냈다.
앤더슨 박사는 몇 차례 한국을 다녀갔지만 보이드 경은 초행인지라 나는 당연히 경주를 선택할 줄로 알았다. 그런데 두 분 모두 남도의 산사를 답사하고 싶다고 회답해왔다. 그리하여 답사 세부일정표를 짜는데 그날이 공교롭게도 부처님 오신 날이어서 절구경을 제대로 못할 것 같아 큰 걱정이다.
그래도 내게는 믿는 구석이 있으니 그것은 화순 쌍봉사만은 이들을 절대로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다.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쌍봉리, 쌍봉산 깊은 산중에 자리잡고 있는 이 천년 고찰은 우리나라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아늑하고 단아하고 품위있는 조용한 산사다.
우리나라 단일 석조물 중 가장 조각이 섬세하고 아름답다는 평을 받고 있는 철감(澈鑑)선사 부도(국보 57호)와 9세기 비석 중 돌거북의 조각이 가장 생동감있게 표현된 부도비(보물 170호). 이 두 개의 유물이 있는 한 쌍봉사의 미술사적.문화사적 위상은 절대로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또 국가문화재로 아직 지정되지 않았지만 명부전에 모셔져 있는 목각 시왕상(十王像)은 조선후기 목조각의 대표작이라 할 명품 중의 명품이다. 이뿐 아니라 이 절의 극락전은 주변 공간경영이 너무도 현대적이다. 통일신라시대에 쌓은 돌축대의 가지런한 어긋쌓기도 일품이고 극락전으로 오르는 계단이 아주 낮고 비스담한 기울기(slope)를 갖고 있는 것에 눈있는 건축가들은 혀를 내두른다.그런 중 쌍봉사의 최고 명물은 이른바 대웅전이라 불리는 삼층목탑에 있었다. 삼국시대 목탑양식을 가장 충실하게 반영하는 건물로 신라 황룡사 구층목탑의 구조를 상상 복원할 때 그 기준작으로 되고, 일본의 최고 목탑인 호류지(法隆寺) 오중탑(五重塔)의 원조격이 되는 목탑이었다. 그런데 이 건물은 1984년 5월 부처님오신날 며칠 전에 완전히 불타 없어졌다.
이 불타버린 쌍봉사 삼층목탑에 대해 나는 할 얘기가 너무도 많다. 지금은 모든 사정이 달라져 쌍봉사 가는 길이 너무도 편하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비포장 흙길을 털털거리는 시외버스로 한참을 가야 했고, 쌍봉리 마을부터 쌍봉사까지 십리길은 큰 차가 들어가지 못하는 좁은 농로뿐이어서 한 시간을 걸어가야 했다. 우리나라, 특히 남도의 사찰들에 시주다운 시주가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80년대 말 무렵이다. 84년 당시 쌍봉사에는 비구니스님 두 분이 절을 지키고 있었는데-결례되는 말씀인지 모르지만-당시 쌍봉사는 화순군의 극빈자 지원금을 받고 있었다고 한다. 그날의 화재도 부처님 오신 날 행사준비를 위해 스님들이 시주를 구하러 출타한 중에 일어난 재앙이었다.
나는 이 삼층목탑을 본 적이 없다. 내가 쌍봉사에 처음 간 것은 삼층목탑이 불탄 그 해 가을, 내 친구인 안병욱(가톨릭대) 교수의 아버님 회갑잔치에 갔다 들른 것이었다. 안교수는 이곳 화순군 하고도 이양면 태생으로 이양초등학교를 다녔다. 그는 초등학교 6년 동안 쌍봉사로 소풍다녔다고 하니 그의 유년시절의 추억이 고스란히 여기 서려있다. 그래서 그는 중앙일보에서 기획했던 '내 마음속의 문화유산 셋'에서 무려 그 두 개를 쌍봉사 삼층목탑과 철감국사 부도로 꼽았다.
당시 안교수는 독일에 연수 중이었는데 부친 회갑을 위해 일시 귀국해 곧장 화순으로 내려갔고 나는 겸사겸사 그의 고향집을 방문한 것이었다. 그는 나를 반갑게 맞으며 먼저 안방에 들어가 아버님께 인사드리게 하고 마당으로 나오면서 내게 고맙다는 뜻으로 "어떻게 이렇게 먼 데까지 다 왔어"라고 인사말을 대신했다. 그래서 나는 그가 덜 미안해 하라고 "쌍봉사 삼층목탑이 불타버려서 그것도 볼 겸 왔지"라고 말을 돌렸다.
순간 안교수는 놀라움과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뭐야! 그 대웅전이 불탔단 말야."
"정말이야."
"언제."
그는 독일에 있었기에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엄니! 쌍봉사 대웅전이 불탔다며요."
"왜 그걸 말 안 해줬어요."
"그렇다면 가봐야지."
그리고는 곧장 나와 함께 쌍봉사로 갔다.
아, 그때 그가 허망해 하며 절집 한쪽에 쌓아둔 불탄 기둥더미를 마치 자기 집이 탄 것처럼 매만지던 그 애잔한 모습을 나는 잊지 못한다. 그때부터 나는 문화유산은 그것을 사랑하는 자의 것이다라는 말을 자주하고 있다.
그러나 다행히도 쌍봉사 삼층목탑은 실측설계도면이 있어 이태 만인 86년에 복원되었다. 이후 쌍봉사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돌담도 새로 둘러지고 찻길도 확장되었고 주차장도 넓게 마련되었다. 이른바 대대적인 중창불사가 이루어졌는데 다른 절집 같은 속기나 허장성세가 없고 예스럽고 품위있는 산사의 향기를 간직하고 있다. 그 깔끔하면서도 고담한 멋을 다치지 않은 것은 오직 주지인 관해(觀海)스님의 높은 안목 덕이었다. 몇해 전 부처님오신날 답사객들과 함께 쌍봉사에 갔을 때 대웅전 앞마당에 가지런히 걸려있는 소담한 연등행렬이 얼마나 예뻤는지 모두들 감탄해 마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대영박물관 일행들을 이끌고 쌍봉사로 자신있게 떠날 차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10여년 전, 찻길이 없어 쌍봉리 학포정(學圃亭)부터 십리 길을 걸어갈 때 산굽이 세 개를 돌면 쌍봉산 기슭에 파묻히듯 자리잡은 쌍봉사가 삼층목탑부터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다가오는 반가움과 시원한 눈맛이란 동양 미술사 연구가인 페놀로사가 일본의 야쿠시지(藥師寺) 삼층목탑에 보낸 찬사를 연상케 한다.
"아, 저것은 얼어붙은 한 곡의 소나타다."
대영박물관 일행과 쌍봉사를 갈 때 나는 그 고갯마루에 잠시 차를 세우고 저 '얼어붙은 소나타'를 고요히 감상하게 할 것이다.
유홍준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문화예술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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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쌍봉사 다녀 와야 겠심더~~~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