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나라때 조위총의 반란으로 고려의 40여개성을 금나라에 소속시키려 하다 정중부에게 참살 당했다, 급기야 고려후기 최탄,이연령 등이 西京에서 반란을 일으켜 대단히 넓은 서북60여개성 지역을 쿠빌라이에게 바치고 원에서는 이를 동녕부라하였다.
이사건으로 고려의 서경및 고려의 북계는 모두 원에게 소속되고 원-명교체기를 틈타 공민왕은 동녕부를 수복하나 이후 明은 요동도사성(遼陽)을 세우고 원의 동령부를 신속하고 위압적으로 조차해 고려의 영토인 철령 이북은 영원히 회복하지 못하게 된다.
명이 철령을 접수한 후 요동정벌을 하려했던 고려 禑王의 절규가 생생히 들린다.....
국사교과서에서는 고려 西京을 평양이라 기술하고 영토를 반토막으로 그리니 이를 중국에서는 얼씨구나 수용하고 있으니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교과서의 엉터리 서경(평양)과 자비령
중국역사지도(중 사회과학원)
학계에서는 1270년 이후 원과 고려의 경계인 파령(巴嶺=慈悲嶺)을 아직도 밝히지 않고 있으니 안타까운 노릇이다.
고려사 卷七 世家 卷第七 文宗 7年 10월(1053)
丁巳 次慈悲嶺彌勒院, 行香施衣. 行過岊嶺, 道有一婦抱兩孩兒, 王憐之, 賜米.
자비령 미륵원에 행차하다. 향을 사르다. 파령을 넘어가는 길에 두아이를 업고 있는 아녀자를 보고 왕이 측은히 여겨 쌀을 내주었다.
고려사 卷十二 世家 卷第十二 睿宗 2年 11월(1107)
癸酉 駕至慈悲嶺, 置酒.
어가가 자비령에 이르렀다.예로 술을 놓아두고 가다.
고려사 卷二十六 世家 卷第二十六 元宗 11年 2월(1270)
丁丑 崔坦請蒙古兵三千來鎭西京, 帝賜崔坦·李延齡金牌, 玄孝哲·韓愼銀牌 有差. 詔令內屬, 改號東寧府, 畫慈悲嶺爲界.
최탄이 몽골병을 청해 3천을 서경에 주둔시키자 쿠빌라이가 최탄과 이연령 둘에게 금패를 주었다.이를 원땅에 내속시키고 동령부라하였다. 자비령을 그 경계로 하다.
朝鮮賦- 동월(명)
성불(成佛)고개 이름의 웅장한 관문에는 버려진 돌들이 층층이 쌓였는데, 북으로는 자비(慈悲) 고개이름에 접하고, 남으로는 발해(勃海)에 다다랐다. 앞서 원(元) 나라에서는 이곳을 그어 경계로 삼았는데, 국조(國朝 명(明))에 이르러서는 바깥이 없음을 보였다.
성불재는 북으로는 뒤에 산이 있고, 남으로는 뒤에 바다가 있다. 산꼭대기에서 바라보면 구름 속에 높이 솟아 있다. 한 관문 어귀에 옛날 쳤던 추성(甃城)의 방석(方石) 두어 무더기가 있었다. 한 역관에게 물었더니, 그가 말하기를, “그 북쪽은 곧 자비령으로 원나라 때에는 여기를 그어 경계로 삼았으니, 이것이 곧 그 관문의 어귀이다.” 한다. 만일 그렇다면 압록강에서 동으로 평양에 이르기까지가 모두 내지(內地)가 될 것이니, 조선이 통치하는 8도에서 이미 그 한 도 남짓을 버린 것이 된다. 우리 성조(聖祖 명태조)는 그것을 모두 경계로 삼았으니, 공손히 예를 행하는 것이 옛날에 비해서 차이를 두는 것이 당연하다. 그 고개는 황주에 속해 있다.
사학계처럼 철령을 강원도 자비령을 황주인 황해도로 해석하면 곤란하다.
실제는 아래 그림과 같다.
황조일통전도(청)
윗 연산관이 조-명국경으로 보인다.(고려말과 거의 같다)
조선초에 조선을 찾아왔던 동월이 남긴 朝鮮賦에 의미심장한 글을 남겼다.
“그 북쪽은 곧 자비령으로 원나라 때에는 여기를 그어 경계로 삼았으니, 이것이 곧 그 관문의 어귀이다.” 한다. 만일 그렇다면 압록강에서 동으로 평양에 이르기까지가 모두 내지(內地)가 될 것이니, 조선이 통치하는 8도에서 이미 그 한 도 남짓을 버린 것이 된다."
압록강을 조선의 경계를 한다면 한 도를 버린 만큼의 국토를 잃어버린 꼴이 된다는 것이다. 즉,현 압록강이 조선의 북쪽 경계가 아니라는 말이 된다. 그 이북이 고려와 원이 경계했던 곳이 조선의 영토가 된다는것으로 해석 할 수 있다.
고려말 조선초에 인식했던 압록강은 현 요하(遼河-三분河)였던것이다.
(세종실록)
우리 고황제(高皇帝=주원장)는 만리(萬里)를 밝게 보시어 요동의 동쪽 1백 80리의 연산 파절(連山把截)로 경계를 삼으셨으니, 동팔참(東八站)의 땅이 넓고 비옥하여 목축과 수렵에 편리함을 어찌 몰랐겠습니까? 그러나 수백리의 땅을 공지(空地)인 채로 버려둔 것은 두 나라의 영토가 서로 혼동(混同)될 수 없다는 것인데,...
현대중국지도.
조선초 명과의 국경협의 기록과 조선초-고려말 사행록을 보면 (조선)압록강과 고려가 원과 국경으로 접한 요녕의 중간 지역이 소위 명과 완충역할을 하다가 청대에 이르러 이마저도 청에게 빼았긴것으로 보인다.
“烏喇摠管 穆克登, 奉旨査邊, 至此審視, 西爲鴨綠, 東爲土門, 故於分水嶺, 勒石爲記, 康熙 五十一年 五月十五日”
즉 청조말 국경개념이 희박했던 어수룩한 조선관리는 두만강쪽으로 내던진 東爲土門 西爲鴨綠의 뜻을 모르고 청나라의 압력과 속임수에 당한것으로 보인다.
압록은 현 요하였던것이다.
심제 글
참고) 파령(자비령) 정확한 위치는운영자 저서에 포함.
첫댓글 地名의 音價가 岊嶺은 [jiélǐng]이고 岜嶺은 [bālǐng]인데 계속 有效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