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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백파] ☆ 낙동강 1300리 종주 대장정 (61)
생명의 물길 따라 인간의 길을 생각한다!
☆ [낙동강 종주] * 경상남도 구간 (낙동강 수계) ③ 삼락동→ 낙동강하구둑-다대포
2020년 11월 10일 (월요일) [백파 출행]▶ 독보(獨步)
* [오늘의 여정](3) ▶ 물금역→ 황산육교→ 황산공원→ 강변산책길→ 양산 낙동강교(551번 양산-김해 고속도로)→ 양산천 하구(생태공원)→ 호포교(굴다리)→ 낙동강대교(500번 부산외곽순환고속도로)→ 금곡동→ 화명동→ 대동-화명대교→ 화명동 생태공원→ 구포 낙동강교(남해고속도로)J.C→ 구포역(부산도시철도 3호선)→ 전철교→ 구포대교(낙동북로 14번도로)→ 바이크로드(낙동대로와 강변대로 사이 제방길)→ 삼락동→ 부산-김해 경전철 다리→ 사상(산업단지)→ 서부산낙동강교(남해고속도로 제2지선)→ 강변의 보도→ 낙동강하구둑(기원섭의 카니발, 벗들의 마중)→ 을숙도 문화회관 야외무대→ 부산 다대포→ 몰운대 바닷가
강(江)을 따라 걷는다는 것
2020년 11월 10일 오후 3시 35분, 낙동강 1,300리를 종주하는 대장정(大長征)의 막바지 —. 나는 지금 부산시 사상구의 낙동강 제방의 길을 가고 있다. 저기 낙동강(洛東江)은, 백두대간 태백의 ‘너덜샘’에서 발원한 작은 물줄기가 아래로 아래로 흘러오면서 수많은 지천의 물들을 흔연히 받아들여 깊은 장강(長江)이 되어 흐르고 있다. 참으로 아득하지만 나는 ‘건강한 두 발로’ 낙동강 물길을 따라서 홀로 걸어왔다. 다비드 르 브르통은 걷기 여행자의 필독서인 「걷기 예찬」에서 이런 말을 했다. “자동차는 장소와 역사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풍경을 칼처럼 자르고 지나간다. 자동차 운전자는 망각의 인간이다. (…) 반면에 걷는 사람은 전신의 감각을 열어놓고 몸을 맡긴 채 더듬어가는 행로와 살아 있는 관계를 맺는 가운데 매 순간 발밑에 밟히는 땅을 느낀다.”
뜨거운 8월의 한여름, 태백에서 시작하여 태풍과 홍수 그리고 코로나 팬데믹의 와중에서 초지일관 산하(山河)의 대동맥(大動脈)을 따라 어기차게 걸어왔다. 그런데 지금 나의 발길이 지나는 곳은 어언 가을이 깊어가는 길목이다. 여기 제방 길의 사람들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오고가지만, 내가 걷고 있는 부산의 낙동강 길은, 저 강물이 지니는 무게만큼 인생의 묵직한 배낭을 지고 가는 것이다. 나의 삶이 숙명이라면 낙동강 1,300리, 이 길 또한 숙명적이다.
시(詩)가 있는 길
가을이 깊어가는 바이크로드 길목에 산뜻한 시비(詩碑)들이 도열해 있다. 걸음을 멈추고 시(詩)를 읽는다. 잠시 망중한(忙中閑)의 시간이다. 혼자서 걸어가는 가을의 감상 때문일까. 시 한 편 한 편이 남다른 감회로 다가온다. 조성범의 「강, 바다라는 이름으로」는 낙동강이 바다와 만나는 장면을 표현한 서정시이다. 그리고 문병란의 「꽃씨」, 변종환의 「꽃의 서시(序詩)」, 허영자의 「자수(刺繡)」, 홍희숙의 「황혼이 눈부시다」 등의 작품들이 각각의 시비에 담겨있다. 한 편 한 편이 모두 울림을 준다. 그 중 가을을 노래한 문병란의 「꽃씨」가 내 가슴에 와 박히는 한 알 ‘꽃씨’다.
가을날
빈손으로 받아든 작은 꽃씨 한 알
그 숱한 잎이며 꽃이며
찬란한 빛깔이 사라진 다음
오직 한 알의 작은 꽃씨 속에 모여든 가을
빛나는 여름의 오후
핏빛 꽃들의 몸무림이며
뜨거운 노을의 입김이 여물어
하나의 무게로 만져지는 것일까
비애의 껍질을 모아 불태워 버리면
갑자기 뜰이 넓어가는 가을날
내 마음 어느 깊이에서도
고이 여물어가는 빛나는 외로움
오늘은 한 알 꽃씨를 골라
기인 기다림의 창변에
화려한 어젯날의 대화를 묻는다
꽃씨 한 알은 생(生)의 무게다. 초록의 잎이 피어나면서 아름다운 꽃이 피었다지고 여름의 뜨거운 불화살을 맞으며 긴 기다림 끝에 영근 한 알의 꽃씨, 그것은 가을이 결론을 맺는 내밀한 사랑의 무게, 우주적 생명의 결정(結晶)이다. 가을의 길목을 걸으며 내 마음 속의 꽃씨 한 알을 생각한다. 맑은 햇살이 내리는 길목, 꽃씨 한 알이 나의 명치에 걸려 뜨겁게 숨을 쉬고 있다.
그리고 허영자(許英子)의 시 「자수(刺繡)」가 은은히 가슴에 와 닿는다. — ‘마음이 어지러운 날은 / 수(繡)를 놓는다 / 금실 은실 청홍실 / 따라가면 / 가슴속 아우성 절로 갈앉고 // 처음 보는 수풀 / 정갈한 자갈돌의 / 강변에 이른다 // 남향 햇볕 속에서 수를 놓고 앉으면 // 세사 번뇌(煩惱) / 무궁한 사랑의 슬픔을 / 참아 내올 듯 // 머언 / 극락정토(極樂淨土) 가는 길도 / 보일 상 싶다’ —(全文)
오늘 같이 따사로운 햇볕 아래 수(繡)를 놓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수를 놓는다’는 것은 마음을 다스리고, 마음속의 아우성을 다스리고, 사랑의 슬픔까지 다스리는 정갈한 자기정화의 과정이다. 금실은실 청홍실이 만들어내는 싱그러운 숲과 정갈한 자갈돌이 빛나는 강변 풍경, 그것은 또 하나의 극락정토가 아닐까. 시인에게 있어 수를 놓는 것은 일종의 구도의 길이다. … 외람되지만, 내가 걸어온 낙동강의 멀고 먼 여정이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강변길을 걸으면서 처음으로 만나는 싱그러운 숲, 남향받이 햇살이 내리는 강변길을 조용히 걸어온 노정이었다. 길을 걸으며 아우성을 다스리고 인생의 아픔까지 다스리는 시간이었다. 바다로 가는 길, 그것이 정토(淨土) 가는 길이 아니겠는가.
길 위의 도서관
제방의 바이크로드는 직선으로 뻗어있다. 길가에 아담한 철제 박스건물이 있다. ‘숲속도서관’이라고 써 놓았다. 박스 건물 안에는 여러 권의 책이 서가에 꽂혀 있다. 산책 나온 시민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책들을 구비해 놓은 것이다. 사상구 문화관광과에서 관리하는 특별한 콘텐츠 구조물인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지 모르겠지만, ‘책이 있는 산책길’, 신선한 발상이다.
‘부산-김해 경전철’
오후 3시 43분, ‘부산-김해 경전철’ 낙동강 철교 아래를 지났다. ‘부산-김해 경전철’은 이곳 부산도시철도 2호선 사상역-괘법르네시떼역에서 낙동강을 건너 김해국제공항을 경유하여, 구포역에서 낙동강을 건너온 강서구 대저역(부산도시철도 3호선 종점, 환승역)을 지나, 김해의 김해시청, 수로왕릉역, 박물관역, 종점인 김해시 삼계동·가야대 입구역까지 총 21개 역으로 이어지는 지상[高架]의 철도이다. 두 량의 열차가 운행되는데, 총 운행소요시간은 38분이다.
경전철 괘법르네시떼역에서 낙동강을 지나면서 창밖을 보면, 여기 낙동강과 너른 삼각주 삼락생태공원의 전경을 바라볼 수 있다. 그리고 낙동강 건너 경전철이 지나가는 대저동 일대는 김해평야다. 열차를 타고 평야와 강을 볼 수 있는 곳은 드물다. 경전철은 강 수면과 논 지면에 굵은 선 하나를 그리듯 지나간다.
서서히 기울어져 가는 가을해
인생(人生)의 길을 생각한다!
‘부산-김해경전철’ 교각을 지나고 나서도, 길은 여전히 직선(直線)으로 뻗어있다. 남해고속도로 제2지선인 ‘서부산 낙동강대교’까지는 1.2km를 남겨두고 있다. 길목은 지금까지와 같은 가을풍경을 지니고 있다. 오후 4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서쪽으로 기울어진 가을해가 가로수 길에 은은한 햇살을 뿌리고 있다. 다니는 사람도 많지 않은, 참으로 고즈넉한 분위기이다. 혼자서 가는 길, 길 위에서 길을 생각한다. 그 동안 짧지 않은 인생을 살아왔지만, 모두 내 인생(人生)의 길이었다. 아름답고 보람찬 길도 있었지만 곡절도 많았고, 길이 아닌 길에서 방황을 하기도 했다. 지나고 보면 스스로 잘못 선택한 길도 있어 남몰래 가슴앓이를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길 위에서 내 인생의 길을 생각한다. 내 앞에 있는 이 길은, 내가 청산(靑酸)으로 가는 날까지 또 걸어야 할 길이다.
무엇보다 나의 삶이란 ‘가지 않을 수 없는 길’이었다. 그래서 길은 숙명적이다. 처처에 ‘가지 않을 수 있는 고난의 길’은 없었다. 몇 몆 길은 가지 않았어야 했고, 또 어떤 길은 정말 발 디디고 싶지 않았지만 갈 수밖에 없었다. 생애의 보람의 뒤편에 부끄러움도 많았다. 그래서 길 위에서 인생의 참회록을 쓴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그 모든 길은 하나 같이 내 인생의 소중한 길이었다.
한 번쯤은 꼭 다시 걸어보고 싶었던 길도 있었고, 지금처럼 해거름마다 따라와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길도 있었다. 그 길 때문에 눈시울 젖을 때 많았다. 길을 나설 때 남모르게 외롭고, 돌아오는 길에서 쓸쓸한 그늘이 드리워지기도 했지만 내가 가지 않을 수 있는 길은 없었다. 지금의 이 길처럼!
그러나 그 어떤 쓰라린 길도 내게 다시 되물어 오지 않는다. 그 길이 아프고 험한 길이라면 내 앞에 더욱 가슴 아리고. 그것이 내 발길이 걸어온 것이라면 발등을 찍고 싶을 때 있었다. 내 앞에 있던 모든 길들이 나를 통하여, 지금 내 속에서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1300리 낙동강 물길이 말없이 전해주는 말이다! 아, 오늘도 나는 숙명처럼 이렇게 걷고 있다. 가지 않을 수 없는 길이다.
삼락습지공원-감전야생화단지
오른쪽 강안은 ‘삼락습지공원’인데 샛강을 사이에 두고 제방 쪽으로 ‘감전야생화단지’가 시작된다. 위치상 사상구 괘법동에서 감전동으로 넘어온 것이다. 사상구청이 있는 감전동은 그 아래 학장동과 함께 수많은 공장들이 들어서 있는 ‘사상 일반산업단지’가 있다. 활기 넘치는 산업의 현장이다.
서부산 낙동강대교 — 남해고속도로 제2지선
오후 4시 05분, 감전동 낙동강 제방 길에 ‘남해고속도로 제2지선’이 지나는 ‘서부산 낙동강대교’가 있다. 이 고속도로는 김해시의 서쪽 ‘남해고속도로’ 냉정J.C에서 남쪽으로 갈라져 나와, 낙동강(서부산낙동강대교)을 건너 부산의 서면과 부산진역으로 직결되는 도시고속도로이다.
감전교차로
고속도로 교각을 지나고 난 길목에 이정표에 ‘↑낙동강하구둑 6km'를 적시하고 있다. 여기서부터 강변도로 너머엔 ’엄궁습지공원‘이 이어진다. 길은 변함없이 직선의 바이크로드, (도로표지판에) 교각에서 800m 정도 내려가면, ’감전교차로‘이다.
오후 4시 13분, 여기 ‘감전교차로’에는, 우측의 강안을 따라 내려오는 강변도로가 제방 길 좌측으로 넘어와 남쪽 다대포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내가 걷는 제방 길은 우측의 강변도로 횡단보도를 건너 낙동강 강안으로 접어들게 된다. 그래서 제방의 길(바이크로드)은 폭이 넓은 강변도로 횡단보도를 건너야 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제방의 좌측에서 나란히 내려온 낙동대로는 여기 감전교차로에서 남동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엄궁동교차로 쪽으로 갈라져 나간다.
엄궁습지
이제, 제방 길의 우측 낙동강 쪽은 도로가 없어 자동차 왕래가 없다. 제방 아래 샛강 너머 엄궁습지에는 곳곳에 웅덩이와 누렇게 가을 색으로 변한 갈대와 수초들이 가까이 다가와 있다. 습지 가장자리의 나무 위에 기울어진 가을해가 맑은 햇살을 뿌리고 있다. 길의 높이가 같은 좌측의 강변도로와 자전거 길이 나란히 이어지고 있다. 낙동강을 따라가는 강변대로는 왕복 8차로의 간선도로이다. 북구의 구포에서 사상구의 삼락생태공원의 강안을 따라 이어져 온 이 도로는 감전동교차로에서 제방 길과 위치를 바꾸어, 낙동강하구둑이 있는 사하구 하단동에 이어 신평동—장림동—다대포까지 이어진다.
감전교차로 앞에서 약 300m 정도 내려온 지점에서, 낙동강 강안의 바이크로드는 두 갈래로 나누어진다. 좌측에는 그대로 직진하는 2차로의 바이크로드, 여기서 우측의 강안으로 보도(步道)가 따로 조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보도는 점점 높이가 낮아져 도로의 자동차 소음이 줄어든다. 아주 쾌적한 느낌이다. 우측의 강안은 여전히 샛강의 웅덩이와 엄궁습지가 이어진다.
‘↑낙동강하구둑 5km’ — 길에서 만난 사람
오후 4시 18분, 좌측의 바이크로드와 보도 사이에 이정표가 있다. ‘↑낙동강하구둑 5km’를 표시하고 있다. 보도의 좌측에 즐비하게 서 있는 활엽수 나뭇잎이 누렇게 가을 색으로 물들어 있고 보도에는 떨어진 나뭇잎이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 우측은 엄궁의 습지이다. 좌우를 살펴도 계속 같은 풍경이 이어진다. 가을 햇살이 내리는 강안의 길을 혼자서 걷는다. 이런 저런 상념들을 비워버린 마음은, 나름 순정한 상태가 되어 있다. 특히 저 맑은 하늘 아래 충만한 기운이 온몸을 채우고 있는 느낌이다.
오후의 낙동강 보도(步道)에서 가끔 산책하는 사람을 만난다. 가벼운 마음으로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그런데 배낭에 태극기를 꽂고 자못 진중하게 걷는 내 모습이 남달랐는지 ‘어디서 오느냐?’ 묻는 분이 있어 낙동강 종주 이야기 했다. 저 강원도 태백에서 1300리를 혼자서 걸어온 여정을 말해 주면서. 이제 최종 목적지인 부산 낙동강하구둑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고 감격어린 어조로 말했다. 여기 엄궁동에 산다는 그 분은 내 이야기를 듣고 나서 경이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격려해주는 것이었다. “아, 참 대단하십니다!” — 사진 한 컷을 부탁했더니 흔쾌히 찍어주었다. 그래서 낙동강 종주 최종 구간의 인증샷을 얻게 되었다. 태극기를 배낭에 꽂고 혼자서 걸어가는 뒷모습을 찍어달라고 했다.
이상배 대장의 전화 — 태백의 낙동강 출행 동지
오후 4시 28분, ‘↑낙동강하구둑 4km’를 표시한 이정표를 지나고 있을 때, 이상배 대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오늘 서울에서 내려온, 기원섭·이진애·김옥련 대원 등 태백의 낙동강 출발 동지들이 양산에 내려와 이 대장과 함께 점심식사를 한 후, 물금에서 낙동강 강변도로를 따라 내려오는 중이라고 했다. 이 대장의 카니발로 이동하면서 삼락생태공원 부근 등을 탐방하면서 낙동강하구둑으로 내려오는 중이라고 했다. 하구둑 도착시간을 묻길래, 현재 하구둑 4km 남겨 둔 지점이라고 말했다. 고개를 들어보니 하구둑의 주탑과 구조물이 아주 아련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오늘 드디어 낙동강 종주의 목적지에 든다는 것을 알고 있는 대원들이 나를 마중하기 위해, 이른 아침 서울을 출발하여 나를 좇아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고맙고 감사하는 마음에, 순간 가슴이 울컥했다. 바이크로드보다 낮은 아스콘 보도는 쾌적하기 이를 데 없다.
엄궁항 — 녹슨 철조망과 경고문
이제 삼락생태공원의 하단부인 엄궁습지 구간도 끝이 났다. 호수 같은 낙동강 강물이 발아래에서 찰랑인다. 오후 4시 37분, 강의 안쪽으로 길게 들어간 낡은 선착장이 보인다. 선착장 중간에 엉성한 철제문을 만들어 놓고 철조망을 설치해 놓았다. 다른 사람들의 출입을 금하는 것이다. 입구의 안내판에 ‘여기는 엄궁항입니다’ 제하의 조목조목 경고문을 적어놓았다.
‘이 구역은 「어촌·어항법」제17조 규정에 따라 지정된 소규모 어항입니다. 어업인들이 공동으로 이용하는 이 어항 구역 안에서는 다음과 같은 행위는 일체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1. 어항시설을 파괴하여 어항기능을 해하는 행위’를 비롯하여 10개 항의 금지사항을 적어놓고, 위반 시에는 어촌·어항법에 따라 형사적인 처벌과 벌금을 부과한다는 경고를 해 놓았다. 지정권자는 부산광역시장, 관리청은 사상구청장이고, 이용단체는 엄궁어촌계이다. —
낙동강 하류(洛東江下流) 철새도래지(渡來地)
엄궁항 옆에 「낙동강 하류(洛東江下流) 철새도래지(渡來地)」안내문이 있다. ‘낙동강 하류(下流)’, 이 지역은 부산광역시 북구에서부터, 사상구와 사하구, 그리고 을숙도와 강 건너 강서구 낙동강 일대를 가리킨다. ‘천연기념물 제179호’로 지정되어 있다.
낙동강이 남해로 흘러드는 낙동강 하구(河口)는 사철 많은 종류의 철새들이 찾아드는 동양최대의 철새도래지로 철새들의 보금자리라고 할 수 있다. 이곳에 철새들이 모여드는 것은 철새들이 살기에 좋은 자연조건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먼저 낙동강은 하구에는, 을숙도를 비롯한 크고 작은 삼각주가 많이 발달해 있다. 삼각주와 강안(江岸)의 곳곳에 우거진 갈대숲은 철새들에게 온전한 서식처를 제공한다. 또 삼각주 주변과 하류에는 바닷물과 강물의 교류가 활발하며, 수심이 얕은 개펄이 넓게 형성되어 각종 플랑크톤과 어류, 조개류, 수서곤충류 등이 번식하고 있어 철새들에게 좋은 먹이가 된다.
또한 낙동강 하구는 한반도 제일 남쪽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바다를 건너 이동하는 철새들에게 출입관문의 역할을 하며 여름철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여 철새들이 월동(越冬)하고 번식(繁殖)하는 곳으로 적합하다. 지금까지 이곳에서는 43과 130여 종의 조류(鳥類)가 파악되고 있어 학술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 곳이다.
가을해가 떨어지는 부산시 강서구(江西區)
엄궁동의 낙동강 건너편은 부산광역시 강서구이다. 낙동강의 동쪽의 강안에는 부산광역시 북구-사상구-사하구(다대포)이고, 낙동강 서쪽 지역이 강서구(江西區)이다. 다시 말하면 강서구는 화명생태공원 건너편 낙동강(강서구 대저수문)에서 갈라져 흐르는 서(西) 낙동강을 포함하고 있는 방대한 지역이다. 낙동강 하구 강서구와 사하구 사이의 삼각주 섬이 을숙도(사하구 하단1동)이다. 부산시 전체 면적의 23.2%를 차지하며 낙남정맥의 산들로 인해 서고동저(西高東低) 지형을 형성하고 있다. 본래 김해에 속했던 지역이나 1989년 부산직할시 북구와 의창군 일부 지역과 통폐합되어 강서구로 신설되었다. 소위 김해평야로 알려진 한국 최대의 삼각주로 벼농사가 활발하였다. 그러나 최근에는 산업단지들이 들어서 곳곳에 공장이 들어서고 도로가 건설되어 있다.
강서구 남쪽에는 부산광역시에서 가장 큰 섬 가덕도(加德島)가 있다. 가덕도에는 동쪽에 연대봉(459.4m)과 응봉산(313.4m)이 솟아 있다. 섬이어서 외부와의 출입은 오랫동안 배편에 의존해 왔으나 부산신항(釜山新港)의 개발로 육지와 통하게 되었다. ‘가덕해저터널’과 ‘가거대교’를 통해 거제도(巨濟島)와 연결되어 있다. 가덕해저터널은 국내 최초로 침매터널(Immersed Tunnel) 방식으로 건설되었다. 강서구에 위치한 김해국제공항은, 부산과 경남지역의 하늘 관문의 역할을 수행해 왔으나, 가덕도신공항 건설 문제가 2021년 ‘4·15 보궐선거’의 정치적인 쟁점이 되어 논란을 거듭하다가 가덕동신공항을 건설하는 것으로 낙착이 되었다. 문제가 많다. 부산-김해 경전철 노선이 김해공항역과 대저역을 지난다.
드디어 시야에 들어오는 낙동강하구둑
엄궁항을 지나고 나니 가을해가 강서구의 하늘에서 내려앉고 있었다. 아, 드디어 오늘 하루해가 저물고 있는 것이다. 호수처럼 고인 검푸른 낙동강 물결이 부드럽게 일렁인다. 저만큼 낙동강하구둑의 주탑 구조물이 더우 가깝게 다가오고, 그 위로 아득히 비행기 한 대가 떠 온다. 바다를 건너온 비행기가 김해국제공항에 착륙하기 위해 서서히 고도를 낮추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곳 낙동강 하구는 세계에서 얼마 남아 있지 않는 철새도래지인데, 낙동강하구둑[河口堰] 공사와 을숙도 개발(開發)로 갈대밭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수많은 철새들이 물을 박차고 날아오르는 군무(群舞)와 무리지어 흩어지는 장관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살아 있는 자연을 계속 보려면 지속적인 생태 보전을 도모하고 모든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야 한다. 자연이 살아야 사람도 산다!
낙동강변 테크 전망대, 그리고
오후 4시 43분, 낙동강변 테크전망대에 이르렀다. 낙동강 강안의 보도 위에 나무테크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바이크로드와 바로 통하는 너른 전망대의 테크마루를 깔았다. 그리고 마루 위에 두 개의 A자 형 기둥을 세우고 반원의 지붕을 올렸다. 낙동강하구둑 주탑의 구조물이 아득히 바라보이는 지점이다. 전망대는 호수처럼 고인 광활한 낙동강 풍경을 조망하기에 최적의 장소이다. 저녁놀이 내리는 금빛 강물이 아름답다. 지금 해가 기울고 있는 시각, 고요한 낙동강의 저녁 풍경이 고즈넉하다.
전망대에서 조금 내려오니, 엄궁동에서 낙동강에 유입되는 학장천의 테크다리가 있다. 강변도로 건너편에는 ‘엄궁농산물도매시장’의 우뚝한 조형탑이 보인다. 이제 하구둑까지는 3km를 앞두고 있다. 고요한 낙동강 강물위에는 일군(一群)의 오리떼가 유유히 떠가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이제 저 아래쪽 낙동강을 가로지르는 하구둑 주탑의 행렬이 더욱 선명하게 보인다. 조금 내려오니 ‘하구둑 2km’라고 쓴 이정표를 지나자, 강안의 보도 위에 전망대가 있다. 보도 가장자리에 원주(圓柱)의 콘크리트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네모난 테크마루를 깔았는데, 도로 쪽 가장자리에 기둥을 즐비하게 세우고 그 위에 상판을 만든 뒤 등나무 넝쿨을 올렸다.
낙동강의 저녁노을 — 금빛으로 빛나는 호수
오후 5시, 전망대 위에서 바라본 낙동강은, 금빛 저녁노을이 내린 거대한 호수(湖水)였다. 전망대 바로 앞에 낙동강 수면 위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물오리떼가 정겹다. 해가 많이 기울어 강 건너 서쪽의 아파트 위에 내려앉고 있다. 석양을 받은 강물은 온통 금빛으로 물들었다. 낙동강 하구 낙조는 장관이었다. 전망대를 내려와 걷는 사이, 이 대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지금 낙동대로 삼락생태공원 앞이라고 했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만나는 장소를 정했다. 하구둑 입구의 도로변에 서 있겠다고 했다.
오후 5시 15분, 해가 넘어갔다. 서둘러 걸음을 재촉했다. 다리가 무겁고 하체에는 은근히 통증이 있었지만 목적지를 눈앞에 둔 마음은 경쾌했다. 즐비한 하구둑 주탑이 만드는 스카이라인을 바라보며 낙동강의 금빛 노을에 젖어서 걸었다. 하늘이 내린 축복처럼, 아름다운 낙동강의 황홀경이다.
좌측의 바이크로드와 연해 있는 강변도로의 가장자리에 도로표지판이 보인다. ‘을숙도 300m’를 가리킨다. 해는 서쪽 하늘에서 함지(咸池)로 떨어졌지만, 그 여광(餘光)은 은은하게 길을 밝히고, 또 낙동강을 물들이고 있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풍경이다. 땅거미가 내리기 직전에 태양은 마지막 후광(後光)을 지상에 내리고 있는 것이다. 오후 5시 17분, 아직 어둠이 내리지도 않은데 강변도로의 가로등에 불이 들어왔다. 그리고 이내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낙동강하구둑이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다. 하구둑의 주탑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줄 지어 서 있다. 주탑 위에 ‘한·국·수·자·원·공·사’가 씌어있다.
아, 드디어 낙동강하구둑!
— 낙동강 1300리 대장정의 마지막 포인트!
오후 5시 30분, 드디어 ‘낙동강하구둑’ 교량 입구에 도착했다. 낙동강 1300리 종주 대장정! 강원도 태백에서 여기까지 520km, 1300리요, 안동댐을 기점으로 하여 바이크로드는 385km, 940리, 영강이 유입되는 상주의 사벌면 퇴강리에서 ‘낙동강 700리’라 했다.
2020년 8월 3일 오전 10시, 강원도 태백(太白)을 출발하여 이런저런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11월 10일 오후 5시 30분, 드디어 그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다. 아, 여기까지 오기 위해 강(江)은 얼마나 먼 거리를 흘러서 왔는가. 나는 낙동강 1300리 물길을 따라 혼자서 걸어서 왔다. 아래로 아래로 흐르는 강물을 따라, 물처럼 마음을 비우면서 무거운 생(生)의 배낭을 지고서 왔다. “아아, 이제 다 왔다!” — 울컥 눈물이 솟았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는 말이 온몸으로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노을 짙은 하늘과 땅거미가 내리는 낙동강 강물을 바라보며 조용히 감사(感謝)의 기도를 올렸다.
아직 ‘낙동강 동지들’의 카니발이 도착하지 않았다. — 잠시 하구둑 아래쪽이 궁금하여 횡단보도를 건너 제방으로 나아갔다. 강물이 흘러내리는 하구언(河口堰)의 아래를 바라본다. 보(洑)에서 내려오는 하얗게 부서진 강물이 이제 ‘처음으로’ 바다와 몸을 섞는 현장이다. 지형상으로는 원래 여기서부터 8km를 더 내려가야 바다의 영역이다. 바로 거기에 몰운대(沒雲臺) 바다가 있다. 몰운대에 이르러서야 강(江)은 바다와 한 몸이 되어 비로소 망망대해에 드는 것이다. 그러나 하구둑 건설로 인하여 강물의 흐름을 잠시 가두었으니, 남해의 바닷물이 역류하여 올라와, 먼 길을 흘러온 강물을 마중하는 것이리라.
하구둑 아래로 쏟아지는 물줄기를 바라보면서 잠시 머릿속은 진공(眞空)처럼 비는 것 같았다.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뿌듯함, 말로 할 수 없는 감격과 기쁨이, 오히려 담담한 마음이 되는 것은 무슨 조화일까. — 문득 삼락공원 앞 시비에서 읽었던 조성범의 시 「강, 바다라는 이름으로」가 떠올랐다.
삶이 속수무책 표류할 때
대지를 횡으로 종으로 달려와
산산이 부서지면 포구에 몸을 섞는
강(江)의 최후를 한 번 보자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해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제 몸의 싱거움을 알고
스스로 요동치는 파도가 되어
곱고 더 푸른 혈을 꿀렁이며
넓은 바다가 되는 최초를 한 번 보자.
지금껏 살아온 평범 따윈 버려라
표류다, 극한의 해류를 깨고
저 먼 대양(大洋)에 이르기까지
그곳이 바다로 거듭난 한 삶의
거대한 완성이다
천 삼백 리 표류에도 멈추지 않는 낙동강
하구언 포말이 잔설처럼 눈부시다
먼 거리를 혼자서 걸어온 나그네의 감상(感傷)이 아니다. 낙동강(洛東江)은 무어라고 가름할 수 없는, 엄청난 삶의 역사를 간직한 장대한 서사시(敍事詩)였다. 나는 저 아득한 낙동강의 세월을 더듬으며 그 세월이 품고 있는 처절한 아픔과 한없는 관용의 여정을 몸으로 느꼈다. 애당초, 낙동강의 물길을 단순히 구경삼아 걸어온 것이 아니었다. 낙동강은 생명의 강이고 아픔의 강이다. 그 강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었고, 낙동강의 생명성은 내 생명의 뿌리였다. 아무리 하찮은 지천(支川)의 물이라도 기꺼이 자신의 몸으로 받아들이는 낙동강, 그 관용의 미덕은 사람이 살아가는 참다운 도리가 아닌가 싶다. 낙동강을 따라오는 동안 나는 낙동강이 되었고 낙동강은 또한 거리낌 없이 나를 안아 주었다.
낙동강이 물음에 답하다 — 상선약수(上善若水)!
당초 8월 3일, 태백에서 「낙동강 종주 대장정」을 시작할 때, 노자(老子)의 ‘上善若水’(상선약수)를 마음의 거울로 삼았다. 그 동안 낙동강 종주를 하면서 몸으로 느꼈던 생각을 상기해 본다. 그리고 이제 그 마음의 거울을 다시 꺼내 본다. 수미상관(首尾相關), 초지일관(初志一貫)이다.
“가장 아름다운 것은 물과 같다. 물은 온갖 것을 이롭게 하면서도 공을 다투지 않고, 모두 싫어하는 낮은 곳에 처하므로, 도(道)에 가깝다. … 낮은 땅에 처하면서도 마음은 깊은 심연으로 향한다. 남과 함께 하면서 늘 한마음이 되고, 말을 하면 (말없이) 미덥다. 다스리면 잘 다스려지고, 일을 하면 큰 능력을 발휘하며, 움직이면 늘 시의(時宜)에 맞는다. 애당초 남과 다투지 않으니 … 허물이 없다.(上善若水。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故幾於道。居善地 心善淵 與善仁 言善信 正善治 事善能 動善時。夫唯不爭 故無尤)” — 노자『도덕경』제8장
☆… 3개월 여, 실제 온몸으로 낙동강을 가슴에 품고 걸으면서 노자의 말씀과 인생(人生)의 길을 생각했다. 역시 ‘물’은 생명(生命) 그 자체이면서 그것이 지니고 있는 물성이, 곧 천지자연의 이치이고 인간이 살아가야 할 도리였다. 나에게 있어서 낙동강은 태생적으로 내 목숨의 근원이요 삶의 터전임을 온몸으로 확인했다. 분명한 것은 물은 생명이요, 강은 생명의 길이었다. 그래서 이번 ‘낙동강 대장정’은 멀고도 힘들었지만 생명의 고향을 찾아가는 여정이었다. 내가 살아왔던 70여 개 성상, 그 인생의 역정을 사유하는 길목이었고, 남은 생애를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다. 한여름 비정한 폭양의 세례를 받으며 … 상선약수(上善若水), 그 대목 대목마다 눈물겨운 물음에 답하는 순례(巡禮)의 길이었다.
기원섭의 카니발 — 동지들의 축하와 따뜻한 격려
사위(四圍)에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모든 가로등이 불빛을 밝힌다. 오후 6시가 가까워서야 기원섭의 카니발이 도착했다. 낙동강 태백산 출발 동지인 이상배 대장, 이진애·김옥련 대원이 차에서 뛰어내려서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태백의 출발(出發)처럼 낙동강 1300리 종주 대장정의 도착지(到着地)에서 우리는 다시 만났다. 출발할 때의 설레는 마음처럼 을숙도 앞에서의 만남은 말할 수 없는 감동(感動)이었다. 대원들은 따뜻한 축하와 정성어린 격려를 해 주었다. 오직 고맙고 감사할 따름이다.
밤에 찾은 을숙도 — 야외무대 색소폰 연주
사하구 하단1동인 을숙도엔 생태공원과 철새공원이 있고, 큰 길이 나고 아파트가 들어서고, 낙동강하구에코센터, 을숙도문화회관 등이 자리 잡고 있다. 부산의 현대미술관도 이곳에 있다. 밤이 되었으니 본격적인 을숙도 탐방은, 내일 밝은 나로 미룰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 동지들을 태운 이상배 대장의 카니발은 을숙도로 들어갔다. 을숙도문화회관으로 들어가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편안한 마음으로 함께 산책을 했다. 오늘 약 30km를 걸어왔지만 배낭을 벗어놓고 걷는 발걸음은 날아갈 듯 가벼웠다.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된 유쾌함을 함께 나누면서 경내를 걸었다.
어디선가 밤하늘의 정적을 뚫고 악기의 연주소리가 들려왔다. 을숙도 문화회관 안쪽의 조각 공원 광장, 관중도 없는 야외무대에서 두 사람이 색소폰 연주를 하고 있었다. 플랜카드를 바라보니, ‘한마음색소폰앙상블’이 주최하는 「시민과 함께 하는 문화콘서트—레일 위의 음악살롱 in 을숙도」라고 걸어놓았다. 색소폰동호인들의 연습 삼아 연주하는 작은 음악회였다. 비록 단출한 두 사람이지만, 어쩌면 나의 낙동강 종주 대장정을 축하해 주는 음악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두운 밤하늘에 울려 퍼지는 감미로운 색소폰 선율, 우리는 걸음을 멈추고 그들의 연주 음악을 감상했다.
남해의 밤바다 — 다대포 ‘버드나무 횟집’
을숙도를 출발한 우리의 카니발은 낙동강 강안을 따라가는 강변도로를 질주하여 다대포에 도착했다. 이미 해가 진 바닷가로 나아갔다. 캄캄한 어둠 속에 싸인 밤바다는 고요했다. 시커먼 망망대해, 그러나 발아래 물가에는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부서지고 작은 파도가 철석인다. 고개를 들면 해안선을 따라 지어진 즐비한 고층 아파트들이 남해의 어둠 속에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우리는 이상배 대장의 안내로, 우선 다대포 바닷가에 있는 오래된 식당, ‘버드나무횟집’을 찾아 들어갔다. ‘자연산 전문 / 60년 전동의 횟집’이라고 했다. — 오늘은 ‘낙동강 종주 대장정’을 무사히 마친 감격을 함께 나누는 자리이다. 이상배 대장, 기원섭·이진애·김옥련 대원과 함께 식당의 가장자리 긴 탁자 앞에 좌정을 했다. 내가 조용히 일어나서 말했다. ‘오늘 이 저녁자리는 낙동강 종주를 무사히 마친 내가 거하게 한 방 쏘겠다!’고 선언했다. 오늘은 내 스스로 낙동강 대장정을 마친 감격적인 날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벗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충만했다. 오늘 아침, 먼 서울에서 낙동강 을숙도까지 달려와 나를 축하해 주고 격려해 준 대원들이 한없이 고마운 것이다. 그리고 내 스스로 낙동강 1300리 종주의 성공을 자축(自祝)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다대포에서 만난 김수환(金壽煥) 추기경님
자리를 잡고 식당 안을 둘러보니, 식당의 주인이 가톨릭 신자인지, 한 쪽 벽에 2009년에 선종(善終)하신 김수환(金壽煥) 추기경님 사진을 걸려 있고, 다른 한 쪽 벽엔 부산교구 제2대 교구장을 지내 이갑수(李甲秀) 주교님의 친필 ‘敬天愛人’(경천애인) 액자를 걸어놓았다. 인자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추기경님 사진 위에, 추기경님이 이 세상 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이 적혀 있었다. “고맙습니다 / 서로 사랑하세요” — 아, 낙동강의 끝, 부산의 다대포에서 추기경님을 만나다니, 이건 우연이 아닌 것만 같았다. 서울의 명동대성당에서 나에게 영세를 베풀어 주시고, 20년 동안(1979~2009) 같은 성당 구내 근거리에서 모셨던 분, 낙동강을 종주하면서, 군위 위천(낙동강 지천)의 오지(奧地)를 탐방할 때, 처절하게 가난했던 유소년 시절의 추기경님을 만나기도 하고, 삼랑진 김범우 순교자 묘지를 참례하면서, 1980년대 명동대성당에서 민주화운동의 중심이 되셨던 추기경님을 추모하기도 했는데 — 내 오늘 여기 낙동강 종주를 끝낸 남해 바다 다대포에서 다시 그 인자하신 모습을 뵙다니 참으로 놀랍고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진 속에서 추기경께서 “스테파노! 낙동강 1300리. 그 먼 길을 무탈하게 걸어서 뜻을 이루었으니, 축하하네!” 하시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낙동강은 ‘엄청난 은혜’를 받은 여정이었다!
다대포의 저녁만찬
버드나무집 사장 ‘서효상’ 님은 독실한 가톨릭신자이다. 주방에 있는 사장님을 청하여 인사를 나누었다, 나는 스테파노이고 그는 바오로였다. 낙동강 대장정의 성공을 간단히 이야기하고, 오늘 특별히 푸짐하고 싱싱한 회로 식탁을 차려달라고 주문했다. 사장님이 신자(信者)이니 더욱 미덥고 반가웠다. 사장이 주방에서 직접 회를 뜨고 도우미가 이런저런 음식을 내왔다. 식탁에는 금방 전복, 멍게, 해삼, 낙지 등 신선한 해산물을 비롯하여 미역국에 살짝 삶은 문어, 새우 온갖 반찬들이 상을 채웠다. 얼마 후에 사장님의 정성 어린 손길로 빚은 회가 나왔다. 여러 가지 종류의 자연산 바다회는 싱싱하고 푸짐했다. 각자 잔에 맑은 이슬을 채우고 나서, 좌장의 기원섭이 낙동강 종주를 축하하는 따뜻한 건배사를 했다. 그리고 그간에 마음에 담았던 이러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유쾌한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조금 있다가 건장하게 잘 생긴 청년이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기원섭이 일어나서 반갑게 맞이하면서 젊은이를 소개를 했다. 이름은 ‘김준석’인데 기원섭의 중학교 동기이면서 고향의 절친(切親)인, 점촌 김지수의 아들이라고 했다. 김 군은 부산에서 회사에 근무하고 있는데 아버지 친구인 기원섭이 부산 다대포에 와 있다는 전화를 받고 우정 달려온 것이다. 부산의 동쪽 끝에 위치한 해운대에서 서쪽 끝에 있는 몰운대(다대포)까지 먼 거리를 달려온 것이다. 고향 아버지의 절친께서 자기가 근무하는 ‘부산’에 왔다는 사실 하나로 인사를 드리러 온 것이다.
30대의 김 군은 크고 당당한 체구에 준수(俊秀)한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말하는 품새가 아주 진중(鎭重)하고 속이 깊었다. 김 군이 좌중에 인사를 올리고 나서, 기원섭이 오래도록 우정을 쌓아온 친구 김지수와 그 부인 정기숙 여사의 이야기까지 하면서 김 군에 대한 곡진한 관심과 사랑을 이야기했다. 김 군의 어머니 정기숙 여사는 지금도 점촌에서 약국을 경영하고 있다. 준석 군에게, 오늘의 우리 모임은, ‘낙동강 종주의 대장성’이 끝나는 낙동강 하구에서 동지들이 함께 만나 저녁 만찬을 하는 자리라고 소개했다. 김 군은 조금도 불편해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분위기에 어울리고, 좌중의 말씀에 응대하였다. 귀한 젊은이가 우리와 함께 자리를 하니 분위기를 더욱 무르익고 화제(話題)도 풍부하여 이런저런 정담이 꽃을 피웠다.
“You complete me!”
특히 기원섭이 준석 군에게 정감이 넘치는 이야기를 하면서, 미혼(未婚)인 그에게 결혼에 대한 이런 저런 덕담(德談)을 나누었다. 그리고 작심한 듯 말을 하기 시작했다. 영화에 나오는 감동적인 대사 “You complete me!”를 화제로 삼았다. 이 말은 톰 크루즈(Tom Cruise)와 르네 젤위거(Renée Zellweger)가 주연한 1996년 미국영화 「제리 맥과이어(Jerry Maguire)」에 나오는 대사인데, — ‘모두가 인정하는 실력자로 출세가도를 달리던 스포츠 매니저인 제리가 갑자기 해고를 당해서 힘들어 졌을 때, 그동안 그에게 너무나 헌신적이었던 여기자 도로시에게 사랑을 고백하면서 한 말’이었다. 우리말로 직역하면 ‘네가 나를 완전하게 만든다.’는 뜻이다.
김성호 전 법무부 장관이 어느 주례사에서, “무릇 사람이란 반쪽이어서, 나머지 반쪽을 찾아 결혼을 해야만 온전한 삶이 완성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그 말을 인용했다고 했다. 기원섭 자신도 ‘1978년 지금의 아내와 결혼함으로써 반쪽 신세를 면하고 새롭고 온전한 인간의 삶을 살았다’고 진지하게 말을 했다. 사랑이 넘치는 마음으로 하는 자연스러운 덕담이었다. 김 군 또한 말씀을 경청하면서 “아버님의 말씀 잘 알아듣겠습니다.” 하며 공손하게 응대했다. 요즘 독신으로 사는 젊은이들이 많고 또 지나치게 늦은 나이게 결혼하는 풍조가 만연한데, 친구의 아들 김준석, ‘그냥 보기에도 아까운 멋진 청년’이 아직 미혼 상태에 있는 것이 안타까워서 하는 사랑의 조언이었다.
몰운대 밤바다 그리고 다대포해변공원의 밤풍경
참으로 유쾌한 만찬이었다. 여기는 다대포 생선회 타운이다. 버드나무집에서 나와, 다대포 밤바다를 배경으로 김준석 군과 함께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김 군을 보냈다. 그리고 우리는 호텔로 가기 전 몰운대 바닷가를 산책했다. 원래 섬이었던 몰운도(沒雲島)가 낙동강에 실려 온 토사(土砂)가 퇴적하여 육지와 연결되어 지금의 몰운대(沒雲臺)가 되었다. 그러므로 낙동정맥 끝 육지에서 떨어져 있던 섬이 낙동정맥의 산줄기로 이어진 것이다. 어둠의 바다, 해조음이 찰싹이는 바닷가의 길을 따라 걸었다. 멀리 송도와 영도의 해안선, 가까이의 다대포 해안선을 따라 지어진 수많은 고층 아파트들이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몰운대 가장자리 길이 끝나는 지점까지 갔다. 낙동정맥이 바다로 내려앉는 곳이다. 길이 끝나는 곳은 바다였다. 망망대해(茫茫大海), 지금은 캄캄한 바다였다.
그리고 ‘沒雲臺 / 몰운대’ 비(碑)가 있는 다대포해변공원 광장으로 나와 산책하면서 서로 담소를 나누었다. 공원의 한 가운데 원형의 너른 광장이 있고, 거기에는 우아한 날개를 하늘로 치켜 올린 백조를 형상화한 조형물이 있다. 백조는 갖가지 색의 조명을 받아 현란하게 변신하고 있었다.
내일은 아침에 몰운대와 다대포해변공원을 탐방하고 난 후, 다대포를 출발하여 낙동강하구둑까지 걸어갈 예정이다. 그리하여 명실공히 낙동강 하구의 마지막 구간을 완전히 종주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 저녁 어둠 속에 차를 타고 가서 잠시 산책하고 왔던 을숙도를 탐방하는 것으로 낙동강 종주의 대장정의 모든 일정을 마무리할 예정이다. 「낙동강 1300리 종주 이야기」는 앞으로 두어 편 더 쓰여질 것이다.…♣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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