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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잊지는 말되
감정에 치우치지 말고 사실과
진실을 숨기지 맙시다~~~
▶100년 前
대한제국의 외교 공간으로
쓰였던 덕수궁 돈덕전(惇德殿)이
지난 2023. 9. 25.일
100년만에 개관했다.
돈덕전은
덕수궁 석조전 뒤쪽에 있는
서양식 2층 건물이다.
대한제국 당시
고종(재위 1863∼1907)이
즉위 40주년을 축하하는
기념 행사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1902∼1903년 지었다.
외교를 위한 교류 공간 및
영빈관 등으로 쓰였다.
외관을 유럽풍으로 지었고
내부 접견실은 황제를 상징하는
황금색 커튼과 벽지 등으로
장식했다. 그러나 1920년대
일제에 의해 철거됐다.
문화재청은 덕수궁
복원정비사업의 일환으로
2017년 발굴조사를 시작,
재건공사를 거쳐 2022년 12월
돈덕전이 준공됐다.
전시물 제작 및 최종 인테리어
공사를 마무리하고 2023년
9월25일 일반에 공개됐다.
▼서울 은평구 진광동 진관사에서
발견된 태극기
이 태극기는 2009년 진관사
칠성각을 해체 보수하던 중
발견됐다
일제강점기 시기 이 소중한
태극기를 벽면에 숨겨놓으신 분은
진관사 백초월 스님이다
태극기는 일장기 적색 부분에
청색을 덧칠해 태극 문양을 만들어
당시 민중들의 독립 의지의 뜻과
기개를 만방에 떨친 민족 독립의
큰 유산이다
이 태극기는 2021년 10월 25일
대한민국 국가 보물로 지정이
되었다
▶역사를 잊지 맙시다~~~~
►고종 친정이후 대한제국 멸망까지
▷1863년 고종 즉위와 흥선대원군의 섭정
▷1873년, 22살의 고종 친정을 시작
▷1884년 갑신정변,
1894년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
▷1895년 명성황후 살해사건,
1897년 대한제국 선포
▷1904년 러일전쟁,
1905년 을사늑약과 반대운동
▷1907년 헤이그 특사 파견,
1910년 대한제국 멸망
▶을사조약
1904년 2월 8일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군은 9일 인천에 상륙하고
다음날 서울을 점령하였다.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는
사전에 오오베와 초오미라는
장사꾼을 통해 외부대신
이지용에게는 1만 엔을 주어
매수하고 군부 대신 이근택을
협박하여 일본에 협조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는 한편 일본군
제12사단장 이노우에 히카루는
탁지부 대신 겸 내장원경
이용익을 납치하여 유람을
시킨다며 일본으로 압송하고
육군 참장 이학균, 육군 참령
현상건, 진위대 4연대장 길영수를
서울에서 추방하고 감시하였다.
2월 23일 하야시는 일본군을
이끈 이노우에와 같이 경운궁에
들어와 매수했던 이지용과
일본군의 한반도 내 주둔과
사용을 허가하는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였다.
1904년 8월 22일에는 외부대신
서리 윤치호와 1차 한일협약을
체결해 재정고문인 메가타
다노타로와 외교고문 더럼
스티븐스를 두어 노골적으로
내정에 간섭하기 시작하였다.
일본은 만주에서 계속되던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기를 잡자
대한제국의 주권을 완전히
빼앗기 위해 열강으로부터의
동의를 얻기 시작했다.
1905년 7월 27일 미국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어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허용하는 대신
일본이 대한제국을 지배할 것을
약속하였으며 1905년 8월 12일
제2차 영일동맹을 통해 인도를
공격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1902년 1차 영일동맹에서 약속하였던
대한제국의 독립을 보장한다는
조항을 없애 일본이 대한제국을
지배할 것을 동의받았다.
그리고 1905년 9월 5일 러일전쟁을
끝내면서 맺은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
대한제국 지배의 걸림돌이었던
러시아를 한반도에서 완전히
배제시킨다.
결국 1894년 청일전쟁으로부터
이어진 일본의 한반도 침략 프로젝트는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다.
▶을사늑약
1905년 9월 27일,
일본 각의는 한국을 보호국으로
만들기 위한 구체적인 절차와
계획을 수립했다.
11월 초를 목표로 보호조약 체결을
추진하되, 한국이 동의하지 않으면
군사력을 동원해서라도 강제
성사시킨다는 것이 기본 방침이었다.
이를 위한 실무 작업은 주한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가 맡고,
군 지휘는 한국주차군사령관
(韓國駐箚軍司令官)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가 담당하도록
했다. 주차군은 1904년 한일의정서에
근거하여 한국에 주둔하던
일본군을 말한다.
총괄적인 정치 교섭은 중추원
의장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맡았다.
이에 따라 이토 히로부미는
11월 9일 서울에 도착하였고,
이를 전후해 송병준(宋秉畯),
이용구(李容九) 등이 이끄는
친일 단체인 일진회(一進會)를
조종해 보호조약 체결의 필요성을
선전하게 했다.
이어 이토 히로부미는
11월 17일 하야시 곤스케, 하세가와
요시미치와 함께 일본 군대를 이끌고
경운궁 중명당에 들어가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며
을사늑약에 서명할 것을 강요했다.
고종은 끝까지 서명을 거부했으나,
일본은 외부대신 박제순의 직인을
가져와 날인토록 했다. 대신들의
조약 체결 회의에서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 탁지부대신 민영기
(閔泳綺), 법부대신 이하영(李夏榮)은
반대 의사를 표시했다.
그러나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외부대신
박제순,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
농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
다섯 명은 조약 체결에 동의했다.
이들을 을사오적(乙巳五賊)이라고
부른다.
►1907년 헤이그 특사 파견
1910년 대한제국 멸망
▷1907년(고종 44년, 56살) 4월
헤이그 특사 파견
▻1907년 네덜란드 수도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 평화 회의가 개최되자
고종은 이상설을 정사로 하고 이준과
이위종을 부사로 삼아 파견했다.
▻만국평화회의에 참석
1905년 일본과 맺은 보호조약은
한국 황제의 뜻이 아니며 따라서
무효'라고 전세계에 알리기
위함이었다.
▻헤이그에 도착한 이들은
대한 제국의 실정과 국권 회복 문제를
제기하고자 했으나 한·일 협약은
각국 정부가 승인했으므로 외교권이
없는 대한 제국 대표의 참석과
발언은 허용할 수 없다고 거절당해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7월에 이위종이 국제 협회에서
세계 언론인들에게 '한국의 호소'를
연설하여 국제 여론에 한국 문제를
부각시켰으나 회의 참석이 끝내
거부되자 7월 14일 저녁 이준이
헤이그에서 순국하여 그곳
아이큰다우의 공원 묘지에 묻혔다.
▻일제는 이 헤이그 밀사사건을 들어
특사를 위칭했다고 하여 재판에 회부,
궐석 판결로 이상설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이준과 이위종에게는
종신형을 선고하는 한편 선위라는
미명으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켰다
▷1907년(고종 44년, 56살)
7월 19일 : 고종 강제 양위 사건
▻이토 히로부미는 7월, 습합대의
장교들을 대동하고 입궐하여
밀서의 사본을 황제에게 제시하면서
"이와 같은 음흉한 방법으로 일본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하려는 것은
차라리 일본에 대해 당당히
선전포고를 함만 못 하다"고 위협했다.
또 "책임은 전적으로 폐하가 스스로
져야 한다는 것을 선언함과 동시에
그런 행동은 일본에 대해서 공공연히
적대적 의도가 있다는 것을 밝힌
것이므로 협약 위반임을 면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일본은 조선에 대해 전쟁을
선포할 권리를 보완한다는 사실을
총리대신으로 하여금 통고케 하겠다"고
협박했다.
▻이토 히로부미의 지시를 받은 이완용
내각은 7월 6일 내각 회의를 열어
헤이그 밀사 사건의 책임을 고종에게
추궁한다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고
곧바로 입궁하여 어전 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송병준은 "헤이그 밀사
사건은 이제야 정치적으로 중대한
문제가 되었고 일본 정부나 이토
히로부미 통감도 격분하고 있으며
이대로 둔다면 어떠한 중대사가
일어날 지 모르니 폐하께서 사직의
안위를 염려한다면 차제에
자결함으로써 사직의 위기를
구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고
협박했다.
▻송병준은 고종이 안색을 달리하며
다른 대신들의 의견을 물었으나
누구 한 사람 입을 열지 않자,
송병준이 다시 "폐하, 만일 자결하지
못한다면 도쿄에 가서 일본 천황
폐하에게 사죄하거나 그렇지
못한다면 일전하여 항복한 후
하세가와 대장에게 비는
수밖에 없다"고 거듭 협박하였다.
▻송병준의 협박과 폭언으로
고종이 자리를 뜨자 그 후 내각은
일치하여 왕위를 황태자에게
넘기도록 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그 날 제3차 어전회의
에서 이병무가 칼로 위협하여,
고종은 하는 수 없이 물러날
결심을 하고 수용하게 된다.
▻이완용은 조칙이 내려진 19일
곧바로 황제 대리 의식을 거행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의식을 집행해야 할
궁내부 대신 박영효가 이를 반발해
병을 핑계로 대궐에 나타나지
않음으로서 식을 치룰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이완용은 자신이 스스로 궁내부대신
임시서리가 되어 7월 19일 황제 대리
의식을 강행했다.
▻1907년 7월 20일 덕수궁 중화전에서
고종의 양위식을 강행했다.
▻양위식은 고종 황제와 순종 황제가
직접하지 않고 두 명의 내관들이
대신 하였다. 이후 7월 24일에는
정미 7조약이 체결되었다.
▷1907년(56살) 7월 24일 : 정미7늑약
▻조약안은 일본이 한층 강력한
침략 정책을 수행할 목적으로,
법령권제정·권리임명권·행정구의
위임 및 일본인 관리의 채용 등에
간섭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7개 조목(條目)이다.
▻일본은 이 조약안을 이완용의
매국 내각으로부터 협조를 얻어,
전혀 수정하지 않은 채로 한국측의
전권대신인 이완용이 7월 24일 밤에
통감의 사저에서 이토 히로부미와
조약을 체결하였다.
▻한일신협약에서는 이에 덧붙여
각 조항의 시행에 관해 협정된
비밀조치서가 작성되었는데,
이는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 등의
내용이었다.
▷ 1907년(56살) 8월 1일 :
대한제국 군대 해산
▻1907년 7월 24일 정미 7늑약이
체결되었을 때에 첨부되고 있던
비밀각서에 의거해 이토 히로부미와
하세가와 조선주둔 일본군 사령관은
대한제국군의 화약과 탄약고를
접수하게 한 다음, 7월 31일
순종으로 하여금 군대해산 조칙을
내리게 하였다.
▻일본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버팀목이라 할 군대를 해산시키면서,
허수아비 내각 수반인 이완용의
'조회문'을 통해 추진하는 수법을 썼다.
한국 황실이 자진해서 군대를 해산하는
것처럼 꾸며 반발을 최소화하고자
하였다.
일본은 군대를 해산하면서 이른바
황제의 하사금이라는 것도 나누어
주었다. 하사에게는 80원, 1년 이상
근무한 병졸에게는 50원, 1년 미만
근무한 병졸에게는 25원 씩이
지불되었다
▻1907년 8월 1일 오전 11시에
동대문 훈련원에서, 맨손 훈련을
한다고 병사와 장교를 소집해 놓고
군부협판 한진창이 순종의 군대해산
소칙을 낭독했다. 그 후 즉석에서
한 사람 한 사람씩 계급장을 떼었다.
주위는 이미 일본군 헌병이 중무장
한채 도열, 병사를 포위하고 있었다.
▻군대 해산은 8월 1일 서울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실시되었다.
이 과정에서 시위대 1연대 1대대장
박승환이 자살하여 분노한 시위대
2개 대대가 일본군과 시가전을
벌였으나(남대문 전투) 결국 진압되었다.
►1910년(59살) 8월 1일 :
대한제국 멸망(경술국치)
►1919년(68살) : 고종 사망
▻고종은 1919년 1월 21일
아침 6시경 덕수궁 함녕전에서
68세로 사망했다.
<내용 일부 발췌>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대한제국의 피눈물 나는 슬픈 역사는
나라의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은 역사적으로 서로 치열한 내부
당파싸움으로 인해 외세 열강들의
침략을 막지 못했다
나라가 멸망한다는 것은 곧 죽음과
다를 바 없다
◈6.25 참전용사들의 태극기~~~
<인터넷에서 발췌>
▲경주 학도병 서명문 태극기
(慶州 學徒兵 書名文 太極旗)
►등록문화재 제391호
►당시 경주에서 자원한 19명의 학도병이 전쟁에
나아가기 전에 각자의 소감을 적은 태극기....
▲건국법정대학 학도병 서명문 태극기
(建國法政大學 學徒兵 書名文 太極旗)
►등록문화재 제392호
►1950년 9월 1일 제3차 학도병 자원 시
부산의 건국법정대학 법률과 학생이
주축이 되어 서명한 태극기,
▲이철희 사변폭발 태극기
(李鐵熙 事變爆發 太極旗)
▶등록문화재 제393호
►한국전쟁 당시 특무상사였던 이철희의 유품으로,
태극을 중심으로 오른쪽은 북한군의 남진경로가,
왼쪽은 국군의 북진경로가 각각 적혀있다
▲유관종 부대원 태극기(劉官鍾 部隊員 太極旗)
▶등록문화재 제390호
►유관종 소위가 1950년 10월 초 호남지구
진격 작전 당시 사용한 태극기
▶장사 상륙작전
►장사 상륙작전(長沙上陸作戰)은
6.25 전쟁 초반 국군이 낙동강 전선으로 밀린
상황이었던 1950년 9월 15일, 인천 상륙작전
실시에 맞추어 북한군을 교란하기 위한
기만작전의 일환으로, 서해안의 인천과 정반대
방향인 동해안 포항 북쪽 약 25㎞ 지점에
위치한 경상북도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 일대
북한군 점령지역에서 전개된 상륙작전이다.
1950년 9월 13일 오후 2시 부산항을
출발한 문산호에는 유격대원 772명과
지원요원 56명이 탑승했다.
당시 작전에 참여한 인원의 대부분은
2주간의 짧은 훈련기간을 거친 14~17세의
어린 학생들 이었다.
그러나 문산호는 태풍으로 인한 파고에
떠밀리면서 상륙지점에 도착하기 전 좌초됐고,
이 과정에서 많은 인원들이 사망했다.
그리고 이어진 상륙 과정에서도 인민군의
공격으로 많은 희생이 뒤따랐다.
특히 당초 작전 계획 기간은 3일이었기 때문에
보급 식량도 매우 적었다.
그러나 배가 난파되면서 이마저도 없었고,
이에 문산호의 요원들은 6일간이나 식량 보급도
없는 상황에서 전투를 치러야 했다.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한 뒤,
9월 19일 유엔군 정찰기에 포착되었고, 해안선을
따라 항행하던 미국 제7함대 태스크 포스 77 소속
USS 헬레나 (CA-75)가 이끄는
포격 임무대(bombardment Task Force)의
엄호를 받으며, LST 조치원을 타고 철수했지만
일부는 남겨졌는데 그들의 생사는 알 수 없다.
이날(9월 19일) 살아남은 아군을 구출하기 위해
수송선 조치원호가 장사해안에 도착하면서
치열한 전투로 139명 사망, 92명 부상, 행방불명
다수라는 비극을 남긴 채 마무리됐다.
이처럼 큰 공헌을 남겼음에도 장사상륙작전은
기밀에 부쳐져 있다가 1997년 장사리 해변에서
작전 중 사용됐던 문산호와 유해가 발견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일부 네이버 발췌>
If you want peace, prepare for war.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
로마의 전략가
플라비우스 베게티우스 레나투스가
말했다는 유명한 말.....
개인적으로
최고의 명언으로 신봉하고 있다...
주변의 이데올로기와 첨예한
대립을 하면서 얻은
결론이기도 하구요~~~
분명한건
대한민국이 세계 최고의 나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자유민주주의 통일한국이
최상의 이상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통일한국을 대비하기
위해서는
If you want peace, prepare for war.
잊어서는 안 될 절대적 단어가
아닐까?? 싶습니다~~~~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
너무 강한 느낌이 든다면
평화를 원하거든
강력한 힘을 길러라~~~~
▶정치적 견해를 달리한다 해도
강력하고 굳건한 대한민국 수호에는
여 야가 따로 없다~~~~
2024. 02. 24. (토) 오후
최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