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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배 안 뜹니다. 그쪽 선착장이 시원치 않아서 이렇게 바람 불면 배를 댈 수 없거든요.”
배 떠날 시각이 다 되어가는데 영목항 여객선 매표소의 문이 굳게 잠겨 있어 난감해하는 우리를 본 구멍가게 아주머니가 안됐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을 건넨다.
2011년 1월 15일. 오전 9시 10분에 떠나기로 되어 있는 안면도 영목항 발 원산도행 여객선은 결항이었다. 안면도에서 선편으로 원산도로 들어가 섬을 일주한 뒤 안면도 남쪽 끝에서부터 태안 쪽으로 훑어 올라가려던 계획은 시작부터 꼬였다.
풍랑주의보가 내려지긴 했지만 안면도 영목항에서 원산도까지는 2km가 채 안 되는, 엎어지면 코가 닿을 거리. 지척의 섬을 갈 수 없게 된 우리는 졸지에 바람 찬 부두에서 길을 잃었다.
허영만 화백의 세 번째 장거리 집단가출 프로젝트인 자전거 해안선 전국일주는 지난해 마무리된 영해 외곽선 요트 일주항해와 맥이 닿아 있다. 2009년 7월, 집단가출호가 서쪽 영해의 끝인 격렬비열도를 거쳐 보령 오천항으로 들어오면서 삽시도를 왼쪽에 끼고 안면도 남단을 돌 때 멀리 원산도가 보였었다. 자전거 전국일주 코스에 굳이 원산도를 넣은 것은 집단가출호 항해 당시 원산도의 모래해변이 무척이나 아름웠기 때문이었다.
배가 끊겼다는 얘길 전해 듣고 나자 비로소 우리가 서 있는 이곳이 무척 춥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온은 영하 14도, 체감온도는 영하 30도. 풍랑주의보를 불러온 북서풍이 세차게 불어 태안반도 남쪽에 즐비한 섬들이 천연 방파제 역할을 해주는 내항임에도 불구하고 바다 가득 백파가 일고 있었다. 맨살이 드러난 얼굴이 따끔따끔하고 자전거 핸들을 쥔 손은 끊어질 듯 시리다.
추위도 피할 겸 아침식사를 하기 위해 선창의 백반집으로 들어가자 주방일을 하는 아주머니들이 어이없다는 표정이다. 하기야 지독한 추위로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관광객이라고는 한 명도 보이지 않는 이곳에 때 아닌 자전거를 끌고 나타난 우리의 행색이 입장을 바꿔놓고 봐도 정상은 아니었다.
- ▲ 1 안면도 꽃지해수욕장 전경. 눈은 그쳤으나 바람이 더욱 거세게 불고 있는 상황으로 사진 왼쪽에 바닷물이 결빙된 것이 보인다. 겨울바다를 찾은 연인들은 바닷가에서 10초도 못 버텼다. 2 안면도 77번지방도로에서 태안을 향해 눈보라를 뚫고 꿋꿋이 달리는 대원들. 혹시나 하고 가져간 스키 고글은 눈보라를 만나며 필수장비가 됐다. 3 풍랑주의보로 안면도 영목항과 원산도를 잇는 여객선이 결항된 가운데 어선을 빌려 원산도로 떠나기 위해 자전거를 배로 옮겨 싣고 있다. 4 ? 꽁꽁 얼다 찾아들어간 식당에서 만난 뜨끈한 살조개 칼국수. 대원들의 얼굴에 즐거움이 가득하다. 왼쪽부터 이진원, 허영만, 송철웅. 예정에 없이 찾아들어갔는데도 운이 좋아 상당한 내공의 칼국수를 맛볼 수 있었다. 5 눈보라에도 아랑곳없이 냉이를 캐는 할머니. 동장군이 기승을 부리고 있지만 냉이의 알싸한 향기처럼 봄은 시나브로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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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깡추위에!” 식당 아주머니도 어이없다는 표정
굴을 듬뿍 넣고 끓인 콩나물국밥을 먹고 있는데 이웃집 아저씨가 식당으로 들어섰다. 아저씨는 원산도로 가려다 발이 묶였다는 얘길 듣더니 해결책을 제시했다. 여객선은 못 가는 상황이라도 추진력이 좋은 소형 어선은 건너갈 수 있다는 것이다. 마침 아는 어부가 통발을 살펴보러 나갈 채비를 하고 있으니 연락해 주겠다며 전화를 하더니 OK 사인을 보낸다.
서둘러 식사를 마치고 선창으로 나가 기다리고 있던 어선에 자전거를 실었다. 막상 바다에 나와 보니 아무리 내항이라지만 파도와 바람이 대단하다. 뱃전에 부딪힌 파도가 깨지며 갑판으로 쏟아져 자전거가 짠물 세례를 받았다.
원산도 선착장에 도착해 왕복 뱃삯에 해당하는 액수를 주려 하자 “배삯은 왕복하는 값을 받는 경우가 없다”고 한다. 절반으로 깎아주겠다는 얘기가 아니고 바다 상황이 나빠지면 나중에 데리러 올 수 없기 때문에 오는 배삯을 미리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오늘 안에 원산도에서 다시 나올 수 있을지는 현재로선 알 수 없다는 얘기다.
우리를 내려놓고 쏜살같이 멀어지는 어선을 멍하니 쳐다보다 섬 안쪽으로 페달링을 시작했다. 이른 아침인 데다 추위가 맹렬해 섬은 인적이 끊어져 텅 비어 있는 것 같았다.
위성지도로 확인했을 때는 갯바위 구간을 몇 개 지나면 섬을 한 바퀴 돌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으나 밀물시간대인 탓에 불가능해서 마을을 통과해 오봉산해수욕장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구랑들 넘어 오봉산해수욕장은 원산도 남쪽 해안에 있는 3개의 모래해변 중 가장 서쪽에 위치한 곳으로 모래 색이 희고, 입자가 곱기로 유명한 곳이다. 텅빈 겨울 해변은 쓸쓸하고도 아름다웠다. 눈 내린 듯 하얗게 빛나는 백사장에, 강풍 덕분에 파도가 높아 옛날 이발소에 흔히 걸려 있던 그림이 연상되는 전형적인 풍경. 마른 모래에서는 바퀴가 푹푹 빠졌지만 젖은 곳은 얼어붙어 아스팔트처럼 단단해 자전거로 달리기에는 무리가 없었다. 비록 모진 추위 속이었지만 멀리 삽시도를 바라보며 모래해변에 바퀴자국을 내며 달리는 기분은 꽤나 상쾌했다.
해변 길이가 2km를 웃도는 원산해수욕장까지 바퀴자국을 찍고 나자 바람은 더욱 세졌다. 전화로 배를 부른 뒤 선착장으로 돌아가는데 고른쟁이골에서 한두 살 먹었음직한 강아지 한 마리가 낯선 우리의 뒤를 따라붙는다.
몸을 녹이기 위해 스토브를 피워 핫초콜릿을 끓여 먹는 동안에도 녀석은 주변을 뱅뱅 돌았다. 호기심에 적당히 따라오다 돌아가겠거니 했으나 이 녀석, 좀체 돌아갈 생각을 않고 쫄래쫄래 자전거 행렬의 꽁무니를 끈질기게 따라오더니 점촌마을부터는 아예 앞장서서 선착장으로 가는 길을 안내했다. 원산도는 선착장이 몇 개 있고 물때에 따라 사용하는 곳이 달라지는데 강아지는 지금 우리가 갈 선착장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서당개 삼년에 풍월을 읊는다더니, 섬개 삼년이면 물때를 아는 모양.
선장에게 강아지에 관해 물어보니 과연 사연이 있었다. 지난여름 해수욕장에 놀러온 사람이 데리고 온 녀석인데 버려졌는지, 잊고 갔는지 주인은 떠나고 강아지만 섬에 남았다. 그 때 이후 섬에 살고 있는 강아지는 섬 주민들에게는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지만 여행객 차림의 외지인들은 잘 따른다는 것이다.
원산도를 떠나 안면도 영목항으로 돌아오는 길에 순식간에 하늘이 어둑어둑해지며 낮은 구름이 깔린다. 안면도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77번 지방도에 들어서자 기어이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눈이 내리면서 바람은 더욱 거세져 오후 2시쯤에 눈보라는 절정을 이뤘다. 앞이 안 보이는 화이트 아웃 상황. 스키 고글을 가져오지 않은 대원들은 눈보라가 안구에 부딪치는 탓에 눈을 못 뜨고 고전을 면치 못했다.
고글이 없는 대원들은 고글을 착용한 대원의 등 뒤에 숨어 달렸다. 눈보라 속의 라이딩은 추위도 고통스러웠으나 제일 큰 적은 바람 자체였다. 안면도는 섬 전체가 야산과 구릉으로 이뤄져 있어 고갯길이 많은데 바람이 어찌나 강하게 부는지 내리막길에서도 페달링을 하지 않으면 자전거가 멈출 지경이었다. 횡풍이 불 때면 자전거와 몸이 함께 옆으로 밀려 균형을 잡기가 어려워, 그렇잖아도 눈이 쌓여 미끄러운 길에서 우리는 신경을 곤두세워 밸런스 유지에 집중해야 했다.
게다가 칼바람은 두툼한 스키장갑의 봉제선을 뚫고 들어와 손가락에 감각이 없다. 신발이 부실한 대원들은 발이 얼어 고통을 호소했다. 이러다간 동상에 걸릴 수 있다는 판단에 눈보라도 피할 겸 길 옆에 보이는 첫 식당으로 무조건 들어갔다.
사전에 맛집으로 찾아둔 것도 아니고, 그냥 눈보라를 피해 무작정 찾은 식당이므로 뜨끈하게 몸이나 데우고 가자는 뜻에서 큰 기대 없이 조개칼국수를 주문했다. 그러나 잠시 후 나온 이 집 칼국수는 작품이었다. 보통 해안지역의 조개칼국수는 예외 없이 바지락을 쓰는데 이 집은 살조개를 쓴 것이다.
살조개는 꼬막과 백합을 반반씩 닮은, 바지락보다 좀 더 큰 조개로 서해 중북부해안에서만 나는 특산품이다. 전남 보성, 벌교에서 겨울 꼬막을 최고로 치듯 서산 태안에서는 살조개가 으뜸. 살조개로 국물을 내고 불 위에 얹어 끓이며 먹는 살조개 칼국수에 얼었던 몸이 스르르 풀렸다.
이른 아침부터 원산도 일주 라이딩에, 눈보라 속을 뚫고 달린 몸에 온기가 돌자 몸이 천근만근 무겁다. 이대로 식당 바닥에 누우면 그대로 잠에 곯아떨어질 것 같았다. 하지만 우리는 가야 할 길이 있는 자전거 나그네. 목적지인 안면읍 정당리 소무펜션까지는 약 15km가 더 남았고, 여기서 더 이상 지체하다가는 날이 저물어 눈보라 속에서 야간 라이딩을 하게 될 판이었다. 식당의 뜨끈한 바닥을 박차고 일어나 자전거에 올라타는 데는 그야말로 초인적 의지가 필요했다.
이 매서운 추위에도 할머니가 냉이를 캐는 이유
장곡리 고개를 넘을 때 고갯마루 한켠의 밭에서 호미질을 하고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이 눈보라 속에서 밭이라도 매는 건가? 호기심에 다가가 보니 호미질을 하고 있는 사람은 60대 할머니. 할머니가 캐고 있는 것은 놀랍게도 봄나물의 대표격인 냉이였다.
냉이밭 일부에 비닐을 씌워두면 땅이 얼지 않아 겨울 냉이를 출하할 수 있는데 할머니는 오전 장에 다녀오는 바람에 일이 늦어져 눈보라가 치는 궂은 날이지만 일단 비닐을 벗겨둔 부분은 오늘 안에 다 캐야 한다는 것이었다. 할머니의 호미 끝에 걸려 나오는 냉이는 이 추위 속에서도 잎사귀가 파랗게 살아 있었다.
뿌리를 씹어 보니 알싸한 냉이향이 입 안 가득 싱그럽게 퍼진다. 자연의 섭리란 그런 것인가보다. 겨울이 온통 세상을 지배해 모든 것을 얼어붙게 만들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이렇게 생명을 따뜻하게 품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안면도의 냉이는 자연이 언뜻 매우 잔혹하게 보이지만 압도하되 완전히 짓밟지 않고 살아갈 길을 열어주고, 또 때가 되면 자리를 내주며 순환하는 것임을 담담하게 보여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