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 만트라는 아라한 찬가
반야심경을 대승경전의 정수라 한다. 반야부경전을 매우 짧게 요역한 경전이 반여심경인데, 마지막 후렴구가 있다. 너무나도 유명한 만트라인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이다. 이를 한문으로 “揭諦 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라고 번역 되어 있다.
반야심경을 번역한 삼장법사는 반야심경의 만트라를 번역하지 않았다. 그 대신 산스크리트어와 비슷하게 음역하였다. 그래서 산스크리트어로 “gate gate pāragate pārasaṃgate bodhi svāhā”라 한다. 우리말로 음역하면 “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가떼 보디 스와하”가 된다.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와 비교하면 전혀 다른 말처럼 느껴진다. 이를 중국어로는 “Jiēdì, jiēdì, bōluó jiēdì, bōluósēng jiēdì, pútí suōpóhē”라고 표기되고, 일본어로는 “Gyatei Gyatei Haragyatei Harasogyatei Boji Sowaka”라고 발음된다. 모두 원음과 동떨어진 말처럼 보인다.
가떼(gate)와 빠라가떼(paragate)
반야심경 만트라인 “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가떼 보디 스와하”는 우리 말로 무슨뜻일까. 미디어붓다에서 정찬주 작가의 글에 따르면 “가신 분이여 가신 분이여 피안에 가신 분이여 피안에 온전히 가신 분이여 깨달음이여 행운이 있으라.”라고 번역하였다.
이 때 가신 분이라는 말이 ‘가떼(gate)’이다. gata는 빠알리어 사전에 따르면 ‘[pp. of gacchati] gone; moved; walked; passed; arrived at; having come to a condition’로 표기 된다. 과거분사형으로 ‘가버린’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가떼(gate)’에 대하여 ‘가신 분이여’라고 번역하였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말이 ‘빠라가떼’이다. 피안으로 가신분이라는 뜻으로 번역된 빠라가떼(paragate)의 경우, 빠알리 사전을 찾아 보면 ‘pāragata: [adj.] one who has gone to the end or the other shore’라고 설명 되어 있다. pāragata 라는 말이 ‘끝에 다다른 자’ 또는 ‘다른 해안’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빠라가떼(paragate) 에 대하여 ‘피안으로 가신 분이여’라고 번역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 언덕과 저 언덕 사이에
저 언덕이 있다면 이 언덕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건너 가기를 염원하는 것이 반야심경 만트라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이 만트라를 독송할 때 벅찬 감동을 받는 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언덕과 저 언덕 사이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에 대하여 반야심경에서는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다. 다른 대승경전에서도 보지 못하였다. 그런데 상윳따니까야 반야심경 만트라의 원형으로 보이는 경에서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먼저 경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이 때에 그 사람이 이와 같이 ‘여기 커다란 물이 있는데 이 언덕은 위험하고 두렵고 저 언덕은 안온하고 두려움이 없지만 이 언덕으로부터 저 언덕으로 가는 나룻배도 없고 다리도 없다. 내가 풀과 나무와 가지와 잎사귀를 모아서 뗏목을 엮어서 그 뗏목에 의지하여 두 손과 두 발로 노력해서 안전하게 저 언덕으로 건너가면 어떨까?’ 라고 생각할 것이다.
(아시위소빠마경-Āsivisopamasutta-독사뱀의 비유에 대한 경, 상윳따니까야 S35:238(4-1), 전재성님역)
Raft
어떤 사람이 맹독을 뿜어 내는 네 마리의 뱀을 두려워 하고 다섯 명의 살인자를 두려워 하여 도망치고 있었다.그런데 여섯 번째 살인자인 가까운 친구가 살인자가 칼을 들고 머리를 밸 듯이 덤벼 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 멀리 도망쳐 나왔는데 앞에는 강이 놓여 있다. 저 언덕으로 건너 가야 안전하지만 건널 수 있는 수단이 없다. 그럴 경우 뗏목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뗏목에 의지해서 건너가면 어떨까?”라고 도망자는 생각한 것이다.
뗏목을 만들어
독사와 살인자에 쫒겨 다니는 이 언덕은 매우 위험한 곳이다.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그래서 공포와 위험으로 가득한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건너 가고자 하는 것이다. 강을 건너 가기만 하면 공포와 위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망자는 강을 건널 뗏목을 만들었다. 풀과 나무와 잎사귀를 모아서 뗏목을 만들어 강물에 띄우고, 그 뗏목에 의지하여 두 손과 두 발로 노력해서 마침내 저 언덕으로 건너 가게 되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수행승들이여, 자, 나는 그 의미를 설명하려고 비유를 들었다. 그 설명은 이와 같다.
수행승들이여, 광채가 치열하고 맹독을 내뿜는 네 마리의 뱀은 네 가지 광대한 존재, 즉 땅의 세계, 물의 세계, 불의 세계, 바람의 세계를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다섯 명의 살인자인 원수는 존재의 집착다발, 즉 물질의 집착다발, 느낌의 집착다발, 지각의 집착다발, 형성의 집착다발, 의식의 집착다발 을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여섯 번째의 칼을 빼든 살인강도는 환락과 탐욕을 말한다.
(아시위소빠마경-Āsivisopamasutta-독사뱀의 비유에 대한 경, 상윳따니까야 S35:238(4-1), 전재성님역)
도망자는 네 마리의 뱀과 다섯명의 살인자와 살인강도에 쫒기고 있었는데,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지수화풍 ‘사대’와 우리와 몸과 마음을 나의 것이라고 여기고 있는 ‘오온’과 갈애를 추구하는 ‘환락-탐욕’ 그리고 텅빈 마을로 표현된 여섯가지 내적 감역, 도둑으로 표현된 여섯가지 외적 감역으로 표현하였다.
그래서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건너 가야 안전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언덕과 저 언덕 사이에는 드 넓은 거센 강물이 흐르고 있다.
피안으로 건너 가신 거룩한 님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수행승들이여,
커다란 넓은 물이라는 것은 네가지의 거센 물결 즉 감각적 쾌락에 대한 거센 흐름, 존재의 거센 흐름, 견해의 거센 흐름, 무명의 거센 흐름 을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두렵고 위험한 이 언덕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개체를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안온하고 평온한 저 언덕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열반을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뗏목이라는 것은 바로 여덟가지의 고귀한 길이다. 그것은 올바른 견해, 올바른 사유, 올바른 언어,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 올바른 정진, 올바른 새김, 올바른 집중이다.
수행승들이여,
두 손과 두 발로 노력한다는 것은 바로 정진과 노력을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건너서 피안으로 가서 땅위에 서 있는 거룩한 님’이라는 것은 아라한을 말한다.
(아시위소빠마경-Āsivisopamasutta-독사뱀의 비유에 대한 경, 상윳따니까야 S35:238(4-1),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강을 건너 갈 때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이를 표로 만들어 보았다.
좋게 봐줘서 아라한 찬가라해도 큰 상관이야 있겠습니까만, 실제적으로 보면 아라한찬가가 아니라 공사상을 깨달은 자를 위한 찬가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반야부경전의 공사상은 부처님의 근본교학을 철저히 부정하므로서 성립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야부경전 중 가장 원시경전이라 할 수 있는 금강경의 대미를 장식하는 공을 여몽환포영로전 으로 정리했지만
반야심경에서는 3가지로 정리하고, 용수의 중송에서는 4가지로 유마경에서는 33가지로 공을 설명하지요.
그 모든 반야부경전에서는 힌두신 관세음이나 유마를 등장시켜 부처님의 근본교학을 철저히 무시하고 사리뿟따존자 아난다존자 마하카사파존자 등 모든 부처님의 제자들을 조롱한 후에 오직 공만 깨달으면 구경열반이고 무상정등각이라고 쾌재를 부르지요.
가테가테는 힌두 공사상을 깨친자를 찬양하는 찬가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반야심경에서 만트라 부분은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보살을 찬탄 하는 주문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피안으로 건너 간 분에 대하여 반야부경전에 말하는 핵심 사상인 반야바라밀에 의하여 저 언덕으로 건너 간 것으로 묘사 한 것이라 보여 집니다. 그러나 빠알리니까야에 따르면 강을 건너 갈 때 뗏목의 비유를 들었고, 그 뗏목이 바로 팔정도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분명히 강을 건너간 이는 아라한이라 하였습니다. 이루 미루어 보아 알 수 있는 것은 반야심경에 있어서 만트라 부위는 초기불교 경전의 해석에 따르면 아라한 찬가임에 틀림 없습니다. 다만 대승에서 피안에 대한 것을 차용하여 보살 찬가로 바꾼 것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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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현님! 언제 함 강좌좀 열어 주십시요... 듣고 싶은 것 만습니다....
결국 아라한은 수승한 현세적 삶에 대한 팔정도의 도이고, 보살은 이생에 공덕의 도로서 래생의 여몽환포영로전인 보살도로군요... 그러니 초불은 자애경이나 대승에서는 천수경으로 중생들이 기원하는 의례가 다를수 밖에...()...
단현님 좀더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어지네요.! 공사상과 부처님의 근본교학에 관하여서......?
근본불교를 조금이라도 공부한 분들이라면 누구나 알듯이, 부처님은 무상 고 무아를 체득하여 탐진치를 완벽히 버린 성자가 되라는 가르침을 주셨지만, 힌두논사들이 점령한 부파의 논사들과 특히 대중부의 논사들은 결국 힌두교의 공사상을 가져와 복잡하고 어려운 근본교학을 내치기 위해 갖은 경전을 출판했는데 그것이 팔만 대장경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반야부경전이지요.
그 반야부경전의 처음과 중간 끝 시종일관 모두 공을 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공 하나만 깨달으면 더이상 깨칠 게 없는데, 소승하는 자들은 갖은 교학을 설한다면서 부처님의 근본교학을 철저히 부정하고 조롱하지요.
반야부경전에서는 힌두신 관세음이나 유마를 등장시켜 부처님의 근본교학을 철저히 무시하고 사리뿟따존자 아난다존자 마하카사파존자 등 부처님의 위대한 직계제자들을 모두 조롱한 후에 오직 공만 깨달으면 구경열반이고 무상정등각이라고 쾌재를 부릅니다.
처음에는 나와 그 대상인 일체법이 꿈 같고 환상 같고 거품 같고 그림자 같은 것(공)이라고 하다가, 아니다 부처님이 중도라고 했으니 공을 중도라고 하자 한 다음부터는, 제법이 空相이니 불생불멸 불후부정 부증불감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역시 조견오온개공만 하면 바로 해탈열반이고도 떠들지요.
게다가 부처님은 아공(무아)만 말했지만 용수는 법공(세상의 모든 물상까지 몽환포영이라는 것)까지 말했으니 용수가 부처님보다 더 위대하다고 이구동성입니다.
또 용수는 중송에서 불생불사 불상불단 불일불이 불래불거 4가지로 공을 설명하더니, 이제 재미가 난 힌두논사들은 유마라는 이름으로 경를 썼는데, 그 속에 불이법문 무생법인이라면서 불생불멸부터 시작해서 33가지로 공을 나열합니다.
물론 맨 마지막에 유마는 함구하는 것으로 공의 지극한 경지라면서 자기 깨달음을 자랑하지요.
그래서 공만 깨달으면 더이상의 교학이 필요 없는 것이기 때문에 금강경에서는 수보리야 내가 설한 것이 있느냐? 세존께서는 하나도 설한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 땟목도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비법(근본교학)이랴, 모든 것은 개시허망하여 제상이 비상(공)임을 본다면 진리(나중 유식에서는 참나)를 본다면서(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세상은 허망한 것이며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미 물 건너 갔다(所謂佛法者 卽非佛法 :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다)고 단정해버리는 것이 금강경인 것입니다.
그 다음 반야심경에서는 부처님 교학의 처음이자 끝인 고집멸도까지 무라고 주장하면서 반야의 지혜인 공을 깨달은 삼세제불이 모두 무상등정각을 얻었다고 가테가테 주문까지 외우지요.
결국 그들은 근본교학인 삼법인 중에서 일체개고마저 빼버리고 공만 깨치면 바로 해탈이기에 그 자리에 열반적정을 넣었지요.
그래서 근본교학의 삼특상(제행무상 일체개고 제법무아)가 아닌 삼법인(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으로 하여 근본불교와 완전히 다른 힌두불교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공사상에는 일체개고가 형성이 되지 않기에 근본불교의 교학은 완전히 무너져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승불교에는 오온 12처 18계 22근 37조도품 4성제 8정도 12연기조차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수행마저 버렸지요.
부처님께서는 무상 고 무아를 깨달은 제자는 끊임없이 수행하여 성인의 경지를 유지하라셨지만, 저들은 공만 깨달으면 더이상 깨닫거나 수행할 필요가 없다며 4념처수행과 사마타 위빠사나를 버렸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끝없이 공을 철학화 해 갑니다.
말장난 불교의 원조가 거기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결국 그를 보다못해 새로운 수행을 주장하는 교단이 나타났는데, 바로 유가행파입니다.
유식이라고 하지요.
그들은 공에 매몰된 힌두대승(중관학파)이 수행도 없으면서 교학조차 없이 오직 공이라는 단어 하나에 매몰되어 끝없는 말장난만 하고 있는 것에 환멸을 느끼고 역시 힌두사상인 참나사상을 넣은 후 힌두교식 요가수행을 합니다.
지금 한국 대승불교가 하는 공사상에 참나를 보탠 다음 참선수행하는 것이 거기서 시작된 것이지요.
이 유식불교가 중국으로 전해진 다음 도교와 습합되어 계속 발전하다가 신수의 후예들이 교학과 참선수행을 중심하는 북종선을 이어갔고, 혜능이라는 이름의 가공의 인물을 내세운 남종선에서는 오직 마음뿐이라는 기치아래 수행도 없는 말장난 같은 화두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공사상에 참나에 도교가 습합된 것이지요.
마음을 들여다보면 참 괜찮은 마음이 들어앉아 있는데, 그게 바로 불성이고 본래면목이고 견성성불이라면서, 그 마음으로 사는 것이 바로 해탈열반이라고 가르쳤지요.
선불교가 그런 지경인데, 부모처자 다 버리고 청운의 꿈을 안고 출가한 혈기 넘치는 신출내기 수행자가 선사 조사님 불성이 뭡니까? 도가 뭡니까? 물으면, 항상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것이 바로 불성이고 도란다 라고 가르쳐 주면 될 것을 괜히 뜰 앞에 잣나무 똥막가지 마삼근 같은 소리를 했지요.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찾아든 제자들에게 평상심이 바로 불성이고 도라고 하면 누가 알아들을 수 있을까? 진실을 말해주면 지극히 실망하지 않을까? 해서 좀 고상하게, 항상 그 자리에 그냥 그렇게 있는 잣나무나 똥바가지 옷감처럼 저런 고요한 가운데 자기주장하지 않고 그냥 그렇게 있는 것이 부처라고 일러준 것을, 멋 모르는 사람들은 그 말 속에 큰 의미나 가르침이나 비밀이 있을 줄 알고 평생을 화두 삼고 수십 안거를 허송하면서 말장난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거 저거 찾아 돌아다니지 말고 니 마음 하나 잘 간수하면 그게 바로 도다 라고 솔찍히 일러주기 뭐하니, 차나 한잔하게... 한 것이지요.
물론 차 한잔 하듯이 꾸밈없고 걸림없는 평상심이 바로 도가들이 말하는 해탈심이 분명한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불교를 그런 것이 아니지요.
사람의 마음은 탐진치로 오염되어 있으면 신구의로 업을 짓게 되는데, 그를 제어하려면 마음의 메카니즘(근본교학)을 정확히 이해해야 하고 그 바탕 위에 사띠하고 위빠사나로 지혜(무상고무아를 여실지견하는 것, 빤야 <대승의 반야지혜는 공>)를 증득하여 탐진치를 떠나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조차 항상 사띠하고 사마따 위빠사나 하시기를 게을리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화두 참선하는 것은 그 어떤 깨달음을 얻으려는 과정이지 수행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부처님의 불교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공사상이 불교냐구요?
글세요???
공사상과 용수의 중도가 부처님의 교학과 부처님의 중도와 어떻게 다른지 알고 싶은 분은 원불사카페 메뉴 중 2)카페소개 3번째 있는 불자필독자료란의 글을 읽으면 됩니다.
원불사의 모든 자료는 가입하지 않아도 누구나 읽을 수 있습니다.
성철스님의 글, 불교 최고 원리는 중도(中道)라는 글에 대한 답변
http://cafe.daum.net/wonbulsatemple/c18q/88
용수는 왜 칼 맞아 죽었는가?
반야심경 금강경에 대한 올바른 이해 / 교학이나 논장, 위빠사나 명상에 심취한 재가불자들에게
상견과 단견, 영혼과 무아
불교에 신이나 영혼, 천국이나 지옥이 있는가? / 논장불교에 대하여
대승경전을 보는 바른 시각 / 반야심경과 금강경에 속을 것인가?
육조단경, 어떻게 볼것인가 (혜능은 실존인물이 아니고 육조단경은 소설이다) - 성본스님(원불사 메뉴 12번 교육교제 4번째 기타불교논문)
고맙습니다 친절한 답변...!큰 도움이 될것 같습니다. 다음에도 또 다른 의문이 일어나면 또 가르쳐 주세요..!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