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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수훈 (강해노트 1-1)
신약의 산이 구약의 산을 부수다
(마태복음 5:1-12)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산상수훈을 공부하면서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보편적인 것이 꼭 정답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산상수훈 강해를 위한 사전 작업으로 어제까지 27권의 논문, 강해서, 주석서들을 샅샅이 읽어봤다. 니머지 3권은 지겨워서 안 읽었다. 그 속에서 산상수훈의 보편적 이해의 흐름을 정리를 할 수가 있었다.
많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산상수훈을 구원받은 자들의 행동강령에 무게를 두어 결론을 내고 있다. 특히 청교도 신앙의 전승자라고 자처하는 잔 노인이나 리차드 벡스터 같은 사람들이 그런 경향을 아주 짙게 담고 있고, 그들은 실제로 그렇게 살았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심지어 헤르만 위더보스를 비롯해서 로이드 존스 목사에게 이르기까지 산상수훈을 구약과 연결해서 명쾌하게 예수로 연결해 내는 데에는 조금 미흡하다는 생각이다. 그게 오늘날 보편적 산상수훈의 이해인데 나는 내 방식대로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이 산상수훈을 강해해볼 작정이다.
산상수훈은 타 종교인들까지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공부할 정도로 인기 있는 보편적 윤리강령이다. 물론 이것은 그들의 평가이다. 팔복강화의 서두 부분에 마치 후렴구처럼 따라 나오는 ‘복(福)’이라는 단어도 매력적이다. 그래서 타 종교인들까지도 광분하면서 이 산상수훈을 열심히 공부하고 연구해서 실천에 옮기려고 한다. 마하트마 간디가 죽는 날까지 제일 열심히 읽었던 책이 바로 이 산상수훈이었다는 것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불교의 법화경에도 이와 아주 비슷한 내용이 있다. 노자의 도덕경에도 거의 흡사한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가 이 산상수훈을 도덕과 윤리, 혹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지켜야 할 행동강령 정도로 이해한다면 성경과 타 종교인들의 경전과 다를 게 없다. 과연 산상수훈과 타 종교인들이 갖고 있는 경전이 목적하는 바가 같을까? 그러면 뭐 하러 성경을 공부해야 하나? 불경을 같이 공부해도 되지 않나? 산상수훈은 인간들의 자존심과 가치와 유익을 챙겨주는 윤리강령의 나열이나, 그러한 윤리강령을 잘 실천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축복의 선언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앞으로 공부해 보면 알겠지만 이 산상수훈은 오히려 그러한 인간들의 자기 ‘의(義) 쌓기’를 부수는 강화이다. 구약의 의(義)가 신약의 새 언약에 의해서 박살 나는 곳이 바로 이 산상수훈의 현장이다. 완전히 반대의 이야기이다. 그래서 오늘 설교의 제목을 “신약의 산이 구약의 산을 부수다”라고 붙인 것이다. 신약의 산은 이 산상수훈이 뿌려지는 산이고, 구약의 산은 율법의 산 시내산을 가리킨다. 성경 전체가 그 이야기를 담고 있는 책이다.
새 언약의 성취자이신 예수께서 어떻게 구약의 율법을 부수고 하나님이 준비하신 하늘의 의로 하나님나라를 완성해 내시는 지를 보여주는 게 성경이다. 이 산상수훈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강화가 어느 에피소드 뒤에 이어지는지를 눈여겨봐야 한다. 산상수훈은 4장 말미의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 부분에 연결되는 내용이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자마자 어떤 오해가 발생했고, 예수님은 그 오해에 대한 답을 제자들에게 던져주는 게 산상수훈이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병자들이 치유되고 귀신 들린 자들이 놓임을 받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으로 화려하게 시작된다. 그건 단순한 기적 행함이 아니라 하나님나라의 본질에 대한 선포였다. 선악과 따먹은 아담 군상들이 배태하고 출산해 놓은 역사의 실체는 병들고 썩어지고 귀신 들리고 왜곡된 상태이다. 그건 모두 사망이라는 것의 가시적 증상들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메시아로 보내셔서 그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심으로 병들고 썩어지고 귀신 들리고 왜곡된 것들을 새롭게 완성해 내시겠다는 완벽한 설계도를 작성하셨다. 그게 바로 창세 전 언약이라는 설계도이다. 그 설계도에 의해서 옛 성전 즉 구약이 무너지고 은혜를 재료로 한 새로운 성전이 지어지는 것이 구원이며 하나님나라 건설이다. 그래서 주님이 당신의 공생애를 사망의 증상들을 몰아내는 것으로 시작하셨던 것이다. ‘내가 이 일 하러 왔다.’를 보여주시는 것이다. 그게 바로 하나님나라의 본질이라는 것을 모형으로 보여주신다. 예수님이 성취하실 하나님나라의 본질 그 부분을 한 번 보고 가겠습니다.
(마태복음 4:23-25)
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24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
25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강 건너편에서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허다한 무리가 예수님을 좇아왔는데 다 물리치시고 제자 12명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가셔서 ‘사실은 하나님나라가 이런 것이다.’라고 다시 설명하신 것이 산상수훈이다.
여기에서 ‘천국 복음’이 중요한 단어이다. 예수님께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병과 약한 것을 고치셨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이 모두 천국 복음에 관한 일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천국 복음을 듣기 위해서 사람들이 몰려든 것이라면 당연히 예수께서 기뻐하셔야 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만 데리고 산으로 올라가셔서 천국 이야기를 다시 꺼내신다. 그게 산상수훈이다. 그건 그때 예수님께 나아온 허다한 무리들이 예수님과 그분이 가져오신 천국의 의미를 오해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주: 초록색 작은 글씨는 동영상에 나오는 부분이다. 이 보충 내용도 문장을 다듬어서 편집한 것이다. // 천국이 왔다고 하는데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나라를 살고 계세요? 십자가 사건에서 하나님나라가 이미 역사 속에 침노해 들어왔다고 한다. 그러면 여러분이 하나님나라를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행복하세요? 평안하세요? 그렇지 않다는 것은 하나님나라가 오해되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여러분은 지금 분명히 하나님나라를 살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나라가 뭔지 모르니까 ‘내가 지금 하나님나라를 살고 있는지? 아닌지? 아마 아닐 거야!’ 이리로 자꾸 가는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님나라를 사는 것인지 묻는다. 하나님나라는 어떻게 해야 사는 거냐고 물어봐서 살 수 있는 곳이 아니다. 하나님나라는 침노해 들어와서 그 사람을 장악해버린 것이 하나님나라를 사는 것이다. 이제 여러분은 하나님나라를 산다는 게 뭔지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천국의 기초와 근간을 다시 설명해 주시고 있다. 그래서 산상수훈의 맨 마지막이 모래 위에 지은 집, 반석 위에 지은 집의 비유, 즉 기초의 문제 설명으로 끝난다. 그 비유를 끝으로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신다. 구약을 기초로 한 집은 창수가 나고 바람이 나면 완전히 무너지니 하나님나라의 기초가 무엇인지 다시 잘 새겨보라는 것이다. 그런데 열두 제자에게만 천국 이야기를 다시 가르쳐주신다. 그 열두 제자들은 요한계시록에서 교회를 상징한다. 그들은 교회의 대표이다.
당시 유대인들의 메시아관이나 천국관은 구약적인 패러다임 속에서 단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다. 구약적 민속 메시아사상 속에서의 그리스도는 힘 있고 강하며, 일상에 유익하게 관계하고, 종말적 낙원까지 한꺼번에 들고 와야 하는 그런 분이었다. (인간들이 원하고 그리는 것은 다 갖고 와야 하는 게 메시아였다.) 구약적 패러다임 속의 천국은 자신들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자신들이 좋아하는 모든 것이 구비되어 있는 그런 곳이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이 원했던 것을 우리가 똑같이 원하고 있다. 그러면서 아니라고 한다.)
심지어 거기에 자기들의 율법적 행위가 큰 영향을 미치는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 구약의 천국관이요 구원관이었다. 구원도 인간들이 그려놓은 그림대로 와야 하고, 천국도 인간들의 설계도대로 만들어져야 한다. (그게 민속 메시아 사상이었다.) 그런데 실제로 어떤 분이 오셔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들을 일으키며 약한 자들의 무릎을 일으켜 세우시는 기적 같은 일을 행하시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런 기적들의 진의를 보지 못하고 자신들의 육적 필요를 채워주는 엄청난 힘을 소유한 예수님에게 엉뚱한 천국을 기대하며 몰려들었다.
(나중에 오병이어의 기적 현장에서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오니까 예수님이 도망가신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유익이 될 만한 것을 힘으로 갖고 있는 사람을 좇게 되어 있다. 그러나 그건 잘못된 메시아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들의 그러한 그릇된 천국관과 메시아관을 바로잡아주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 산상수훈이다. 따라서 산상수훈은 도덕적 윤리적 처세에 관한 이야기도 아니고 복 받는 비결도 더더욱 아니다. 인간들의 행위와 자격에 상관없이 이미 완료된 하나님나라가 어떻게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치고 들어오는지를 상세하게 설명해 주는 것이 산상수훈이다. 산상수훈은 모형과 예표로 하나님나라를 보여줬던 그 구약의 산, 시내 산을 부수는 신약의 산이다. (이것은 내가 추론하는 것이 아니고) 마태복음의 구조와 흐름을 잘 보면 산상수훈이 위치하는 자리가 그 구약의 산과 같은 자리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주: 김성수 목사이기에 이러한 통찰이 가능하다고 본다.)
예수님은 유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 그리고 헤롯왕의 칼을 피해서 애굽으로 피신하신다. 성경은 그 사건이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라는 구약의 예언의 성취라고 한다. 마태복음 2장에 나오는 그 사건은 예수님께서 출애굽 한 이스라엘의 삶을 그대로 사실 것임을 암시하는 사건임과 동시에 율법주의와 유대주의로 자신들의 힘과 가치를 숭앙하는 이스라엘 자체를 힘의 세상인 애굽으로 선언해버리는 사건이기도 하다.
예수님이 이스라엘에서 애굽으로 가시는데 성경은 정작 그 사건을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러낸’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다. 졸지에 유대주의의 이스라엘이 애굽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그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 베들레헴 지역의 두 살 미만의 남자아이들이 모두 도륙당하는 일이 발생한다.
(마태복음 2:15-18)
15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16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17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말씀하신바
18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이 기사에는 뭔가 이상한 부분이 있다. 분명 하나님은 요셉에게 그 자리를 피하라고 전언 하셨다. 그러면 그때 다른 어린이들에게도 전갈을 보내어 그 자리를 피하게 할 수는 없었을까? 왜 예수님만 구하고 다른 아이들은 다 죽게 놔두셨나? ->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만드신 것이다. 하나님은 성경의 독자들에게 무언가를 교훈하시기 위해 어린아이들을 다 죽여 버리신 것이다. (그래서 그 하늘에 뜬 별이 동방박사들을 일부러 헤롯에게 데려간 것이다. 그 별이 미쳤지! 동방박사들을 바로 예수님 태어나신 구유로 데리고 가면 되었을 일인데 왜 헤롯에게로 데리고 가서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게 해? 그건 죽이라고 하는 것이다.)
여러분은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는 호세아의 예언이 인용된 곳에 라헬의 통곡이라는 예레미야의 예언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주의해서 보아야 한다. 지금 성경은 바리새인으로 대표되는 이스라엘의 율법주의 자체를 힘의 원리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애굽으로 규정해 버리고, 그곳에 사는 모든 자들은 다 죽어야 할 자들임을 어린아이들의 죽음을 통하여 주지시키고 있는 것이다. (주: 김성수 목사의 통찰이 두드러지는 부분이다.) 그래서 두 살 미만의 아이들이 다 죽은 것이다. / 두 살 미만의 아이들은 어떤 선한 일이나 악한 일을 자의에 의해 내어놓기도 전에 죽어야 할 자로 분류된다. 나면서부터 죽어야 할 자로 분류되는 자들이 자라면서는 오죽하겠는가? 그러니 두 살 미만의 아이들이 다 죽었다는 것은 그 속에 사는 이들은 다 죽어야 한다는 뜻이다. 마태는 그걸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예레미야의 예언은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의 멸망과 관계가 있다. 북 이스라엘은 이미 망했고 라마는 남 유다가 바벨론 포로로 끌려갈 때 집결된 곳으로 베냐민 지파의 성읍이었다. (수18:25) / 라마는 라헬의 무덤이 있는 셀사 부근이다. (삼상10:2) /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남 유다 백성들을 바라보면서 마치 라헬이 그 무덤 속에서 자기 자식들이 끌려가는 것을 보고 통곡하는 것으로 묘사한 것이다. / 북 이스라엘은 라헬의 큰아들 요셉의 장자 에브라임으로 대표되었던 나라이고 남 유다는 라헬의 둘째 아들인 베냐민 지파가 속한 나라였다. 그래서 라헬을 이스라엘의 어미라고 불렀다. -> 라헬의 두 아들은 이스라엘 전체를 가리킨다. / 그 두 아들이 다 죽었다는 것은 곧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의 멸망을 뜻한다. 그러한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의 멸망이 마태복음에서 두 살 미만의 아이들이 모두 죽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래서 예수가 오신 것이다.
한 아기가 와서 죽음에 던져져야 할 하나님의 아이들을 선택하여 살려내는 것이다. 그게 구원이다.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데 위로 받기를 거절했다. 자식 잃은 부모에게 유일한 위로는 죽은 자식이 다시 살아오는 것밖에 없다. 예수님은 ‘그 죽은 이들을 살리러 오셨다’는 것을 마태가 설명하고 있다.
예수는 죽어야 할 죄인들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오신 것이지 이 죄악의 세상에서 그들의 일상을 풍요롭게 해주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다. (주: 김성수 목사의 성경신학적 관점은 후자를 무시하는 성향을 보여주고, 인본주의 신학은 둘 다를 버리지 않는, 둘 다 중요하다고 하는 신학이라고 볼 수 있다. 옳고 그름은 각자의 판단 몫이다.)
(마태복음 1:21)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님은 자기 백성(모든 백성이 아님)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오신 분이다. 이 세상살이를 도와주러 오신 분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