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홍준 교수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여러 권을 비롯한 아주 많은 책을 냈다. 그의 저술들을 다 읽지 못했지만, 그를 안 지는 꽤 오래된 것 같다. 우리 둘 다 70이 넘도록 같은 하늘 아래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보다 한두 살 적은 나이를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런 생각이 든다는 말이다. 그는 1949년생이니 올해 78세다. 그를 뒤 따라가고 있는 나는 그에 비하면 아무것도 해 놓은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여러 권 책을 내고, 중앙박물관 관장이기도 한 그에 비하면 나는 인생을 헛 살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이런 책을 통해 서 사람과 세상을 만나고 소회를 적어보고, 다른 사람의 생각에도 다가가 보는 것이 내 인생의 한 단면일지 모른다고 생각해 보면서, 그렇게라도 위안을 삼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나의 인생만사 답사기》라는 이 책은 2년 전인 2024년 연말에 나왔다. 그동안 저자가 직업인으로서 살아오면서 사람을 만나고, 부대끼고 감동한 이야기들을 수필형식으로 적은 것이다. 책 머리말에서도 말했지만, 그는 미술사학가가 되기 전에 글쟁이가 되고 싶었고, 글은 현장에 있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글 쓰는 것을 직업으로 여긴다고 하고, 글쟁이로서 한 시대 문사로서 계속 글쓰기를 해나갈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독자분들의 성원과 지지를 부탁드린다’고 했는데, 어찌 보면 저자의 개인적인 글이기도 한 이 책을 읽고, 요약해 본다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래도 기억하고 싶은 말이나 좌표로 삼아도 좋을 글을 여기에 옮겨볼 생각을 하며, 40도를 오르내리는 8월 염천에 독서라는 것에 빠져볼 생각을 한다.
한국을 대표하는 이미지로는 무엇이 있을까? 이런 질문은 미술사가라면 한 번쯤은 가져보는 것인가 보다. 금관, 청자, 백자, 조선 왕실인 경복궁, 훈민정음, 남대문 등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다. 특히 정자와 도자기는 한중일 동양 3국의 공통된 문화다. 이들은 각각 3국의 특질을 갖고 있다. 정자를 보면 중국은 유럽의 성채처럼 위풍당당하고 권위적이다. 일본은 정원의 다실로 건축적 장식성이 강하다. 반면에 한국은 생활 속 공간으로 자연풍광 속에 무심히 서 있다. 우리 정자는 생김새보다는 자리잡음새가 중요하다. 특히 강변에 세운 정자에 명작이 많다. 남한의 3대 정자는 남강변 촉석루, 밀양의 영남루, 제천 남한강변 한벽루를 꼽는다. 북한에서는 대동강 부벽루와 연광정, 안주 청천강의 백상루, 의주 압록강 통군정이 이름이 높다. 이외에도 죽서루, 광한루, 청간정, 태화루, 영월루, 압구정, 망양루, 망미루 등이 있고 어릴 때 놀러 다닌 함안의 합강정도 있다. 이들이 내가 아는 누정이다.
정자는 누마루가 있는 열린 공간으로 시인묵객과 고관대작들이 여기에 모여 시문을 논하기도 하지만, 여행객 누구나 쉬어갈 수도 있는 공간이다. 그것이 2층이면 누각, 단층이면 정자라고 하는데, 합쳐 樓亭이라 하되 흔히 정자로 통한다. 누정에는 당대 유명 문인들이 남긴 시가 몇 편씩 남아 있기도 한데, 한벽루에는 퇴계 이황, 서애 류성룡, 고산 윤선도, 다산 정약용 등이 다녀가며 시를 남겼다. 이는 죽령을 넘어가자면 남한강 뱃길을 따라 왔다가 청풍명월의 고장인 이곳에서 하룻밤을 묵어가곤 했기 때문이다. 그중에 서애가 임란 중 전쟁이 뜸한 시기 고향 안동으로 가는 길에 남긴 시가 처량하다.
지는 달은 희미하게 먼 마을로 넘어가는데
까마귀 다 날아가고 가을 강만 푸르네
누각에 머무는 나그네 잠못 이루고
밤 서리 바람에 낙엽 소리만 들리네.
동해선을 타고 가면 만날 수 있는 곳이 일광과 기장이다. 나는 여기를 좋아한다. 이곳에는 나만의 추억이 있기 때문이다. 첫사랑의 그니와 일광 해안가에 지금도 남아 있는 늘봄의 추억이 아련하고, 김수용 감독의 영화 〈갯마을〉의 조감독이었던 김동경(自名 덴야)과 한참 동안 알고 지내며 오영수 원작 갯마을을 영화로 만들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그는 영화의 인기가 끝나고는 타락하여 넝마로 하루를, 소주 1병과 라면 한 개면 족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안타까웠지만, 그것도 그의 인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그때도 지금도 한다. 성경을 원문으로 읽던 그가 그립다. 기장은 어떤가. 군청 자리에 있던 막사가 아련히 상전벽해 된 지가 오래다. 언양에 가면 오영수 문학관이 있어 한 번 들른적이 있고, 안내인이 차 한잔하고 가라고 하였지만, 사실 나는 오영수를 잘 모른다. 특히 유홍준 선생이 책에서 소개한 그의 아들 오윤은 더욱 모른다.
오윤(1946∼1986)은 부산에서 태어나 서울대 조소과를 나왔는데, 여섯 살 위인 누나 오숙희가 서울대 미대를 나오고 끔찍이 오윤을 챙겼다고 한다. 민중미술이 태동하던 그 무렵 오윤은 누구보다 일찍 민중적 형식을 제시했다고 하는데, 칠흑 같은 어둠의 70년대지만, 저자와 이들은 만나면 말 술을 마시고 세상 이야기에 꽃을 피웠다. 이야기가 궁해지면 홍명희의 『임꺽정』이야기도 했다는데, 나도 그랬지만 오윤은 『임꺽정』의 광신도였다고 한다. 오윤과 그의 패거리들은 산적질만 안 했지 청석골 군상들과 비슷했다. 오윤의 예술은 그런 인간미에서 우러났다. 오윤의 예술은 고통으로 표현한 것도, 날선 투쟁으로 형상화된 것도 아니다. 울음도 없고 슬픔도 없이 때로는 익살로 때로는 신명으로 민중의 삶을 고양시켰다. 오윤의 예술을 높이 평가하고 인간적으로도 진짜 좋아한 선배는 김지하였다고 한다. 그는 오윤의 예술세계를 이렇게 표현했다.
“한과 그늘과 귀곡성에서마저도 흥과 신바람이 터져 나오는 오윤 예술의 정점은 어디일까. ‘봄’이다. 그리고 ‘사랑’이다.
아직 오윤 기념관은 세워지지 않았다. 오영수문학관에 오윤이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조각가답게 떠 놓은 ‘데스마스크’가 있다. 문학관 옆에 오윤의 기념관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시인으로 잘 알려진 김지하는 민족문화 운동의 선구자다. 오윤(미술), 김민기(노래), 이애주(춤), 채희완(탈춤), 임진택(소리) 등 민족 예술가 1세대를 길러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1991년 「죽음의 굿판을 집어치워라」를 발표한 이후에 민주화운동의 변절자로 낙인찍히고 이해할 수 없는 정치적 행보로 그를 존경하고 따르던 사람들이 그의 곁을 떠났다. 이에 대해 유교수는 오랜 세월 가혹한 감옥 생활에서 얻은 골병이 남긴 휴유증이라고 진단했는데, 맞는 말 같기도 틀린 말인 것 같기도 하다. 김지하 본인만 알 것이다. 어쨌든 김지하는 지금 우리 곁을 떠났으나 그가 남진 〈오적〉, 〈타는 목마름으로〉등 한국 민주화운동에서 남긴 흔적은 결코 얇지는 않다고 생각된다.
1987년 7월 9일 故이한열 열사의 장례식 때 흰치마저고리에 머리띠를 동여매고 한 필의 무명을 둘로 가르며 민주열사가 쓰러지면서 외친 민주화를 몸짓으로 , 연세대에서 시청 앞까지 맨발로 운구를 인도했던 춤꾼이 이애주다. 그녀는 1947년 황해도 사리원에서 우체국장의 딸로 태어났다. 다섯 살 때부터 춤을 배워 어린 시절에 전국무용대회 우승을 휩쓸었다. 서울대 사범대 체육과에 입학하여 인간문화재 한영숙 이수자로 전통춤을 익혔고, 국문학과에 편입하면서 김지하 등과 어울렸다. 그때부터 그녀의 춤이 민주화 대행진 출정식 무대를 장식했고, 급기야 이한열 열사 장례식으로 이어진 것이다. 1990년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이애주는 민주화운동의 현장을 떠났다. 이때부터 살풀이춤과 승무의 계승에 매진하여 1996년 제27호로 국가 공인 인간문화재가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몹쓸 병으로 2021년 세상을 떠났다.
‘아침이슬’로 널리 알려진 김민기는 1951년 전라북도 익산에서 10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의사였던 아버지가 전쟁 중 피살되면서 어머니 슬하에서 자랐고, 서울로 이사해 경기중·고를 졸업했다. 중고시절부터 음악에 관심을 보이다가 동해안으로 여름에 야영을 갔다가 친구가 물에 빠져 죽자, 돌아오면서 ‘친구’라는 노래를 만들기도 했다. 1970년 양희은이 부른 ‘아침이슬’은 그가 만든 노래다. 양희은은 이 노래로 데뷔하였고, 한 달 뒤 자신의 앨범에도 이 노래를 실었다. 노래는 1973년에 건전가요로 서울시 문화상을 받기도 했다.
누가 뭐라 해도 유홍준 선생의 출세작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일 것이다. 2024년 답사기 발간 30주년을 맞으면서 이렇듯 장수를 누린 데 대해 스스로 이렇게 말했다. “일정한 형식의 틀에 맞춰 각기 다른 문화유산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대상에 따라 서술방식을 달리했기 때문에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았던 것이 아니겠느냐”면서 ‘남도답사 1번지’는 학생들을 인솔하여 이야기를 전개하고, ‘경주답사’는 소불 선생의 가르침을 따라가고, ‘서산 마애불답사’는 가족여행으로 설정하는 등 다양성을 보여준 것이 장수비결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로 인해 자신의 지식도 풍부해지고 시각과 의식도 성숙해졌으며 다른 글쓰기를 보여주고자 시각을 해외로 돌려 일본답사기와 실크로드 답사기도 쓰게 되었다고도 한다. 이제 그는 『국토 박물관 순례』두 세권을 쓰고 진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는 막을 내릴 것 같다고 겸손해 하기도 한다.
어쨌든 유홍준 교수는 자신의 치부처럼 보이는 것들까지 이 책에서 숨김없이 까밝혔다. 나는 언제나 솔직하고 담백한 그가 존경스럽다. 1990년대 말쯤에 딸애랑 지 엄마랑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경주편을 들고 장사벌리지 개울가를 걷고 있는데, 어떤 남자가 나와 똑같은 책을 들고 지나가는 것을 보고 딸애가 “아빠 같은 사람이 또 있네”하던 말이 지금도 기억이 난다.
저자는 책에서 답사와 관련한 것들을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고, 답사라는 말을 써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부록에서 그가 자신보다 형이자 이미 이름이 알려진 소설가이고 시인이며 고전 묵화에도 일가견이 있었던 황석영이 자신의 글에 대해 평가하고, 독려했던 편지를 소개하고 있는데 그 일부를 보면서 줄일까 한다.
“심약하게 이것저것 마음이 묶여 제풀에 쓰러지는 문사 기질을 던져버리고, 뜨겁게 살고, 건강하게 먹고, 날까롭게 싸우고, 밤새 떠들고, 꽃님 앞에선 다소곳해지고, 순결한 사랑을 품고, 거대한 우주적 진보와 이 설운 땅의 대변혁을 꿈꾸고, 칼을 갈며 야망의 홍소를 터뜨리고, 말술을 마시고…, 그리고 그 기분, 그 울분, 그 애뜻한 마음과 포부와 슬픔을 그냥 써라! 형식으로 하여금 네 뜻을 따라오지 않으면 안 되도록 만드는 당당한 큰길을 택하는 것이 좋다. 그렇게 개방할 때 – 다만 허풍이 아니고 – 자기도 모르는, 자기도 뭐라 논리적으로 규정 못 할 자기만의 목소리가 기어 나오고 마는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