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전문 지식은 없지만, 현대의 NBA가 세계적인 인기 리그로 자리 잡은 배경에 대해서 나름대로 제 생각을 정리 해 봤습니다. 3,4회에 걸쳐 연재할 계획이며 현대 NBA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마이클 조던, 나이키를 중점적으로 다룰 예정입니다. 전문 지식이 미천한 것에 대해선 양해의 말씀을 먼저 구합니다.
'NBA 르네상스 시대를 이끈 AIR JORDAN'
NBA 공식지 ‘HOOP' 최신호에 이런 기사가 실렸다. “NBA에서 뛰고 있는 모든 선수들은 개개인 모두가 하나의 브랜드이다.”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쉽사리 수긍하기 힘든면이 있다. 국내 프로 선수들에게서 경제적 부가가치가 창출되는 면은 극히 적다고 본다. 개인 스폰서 계약을 체결 할 수 없는 것이 한국 프로 선수들의 현실이다. 고로 한국에서 프로 선수가 상품가치를 지니는 비중은 극히 적다고 볼 수 있다.
NBA는 다르다. NBA 선수들 개개인은 하나의 브랜드 가치를 지녔다. NBA는 자본주의 초 강대국 미국의 일류 프로 리그 답게 굳건한 스포츠 에이전시 체계가 농구 선수들을 경제적인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대상으로 승화시켰다. 소위 말하는 잘가나는 선수들은 연봉 보다도 광고로 얻는 수익이 더 많은 것은 NBA의 대세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처음부터 NBA의 추세가 지금 같았던 것은 아니다. 적어도 1980년대 초반까지는... 농구 선수들이 공식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던 반경은 코트나 사회 활동(자선 활동)정도가 전부였다. 한때는 길거리 선수가 NBA 제의를 거절했을 만큼 선수들의 평균 연봉도 지금처럼 천문학적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러한 관례를 깨드린 선수가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에어’ 마이클 조던이다.
노스캐롤라이나 대학 3학년을 마치고 1984년 드래프트에서 3순위로 시카고 불스에 지명 된 조던은 신인 시절부터 맹활약을 펼쳤다. 조던은 데뷔 첫 시즌인 84-85시즌, 평균 28점 이상을 기록하며 맹위를 떨쳤다. 하지만 당시 조던은 지금과 같은 농구 황제의 위치에 서지 못했다. 조던 보다도 ‘닥터 J’ 줄리어스 어빙을 비롯 매직 존슨, 래리 버드, 도미니크 윌킨스, 카림 압둘자바, 아이재아 토마스와 같은 선배 선수들의 영향력이 더 컸다.
그러나 스포츠 브랜드 나이키사와의 계약을 체결 하면서 뛰어난 농구 선수 조던은 ‘농구 황제’ 조던으로 승화되기 시작했다. 조던과 처음 계약을 맺을 당시, 나이키는 지금처럼 막강한 시장을 구축하고 있지 못했다. 농구화 시장을 주름 잡고 있던 회사는 컨버스와 리복. 나이키는 그에 대항 할 만한 무기를 개발하는데 힘쓰고 있었는데, 때마침 NBA에 혜성처럼 나타난 인물이 바로 조던이었다고 전해진다.
“마이클 조던을 만들어 내려고 한 사람은 없었다. 1984년에 우리는 무언가를 창조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다. 그저 그렇게 됐을 뿐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창조해 내려 하면 대중은 벌써 그것을 꿰뚫어 보고 진실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 데이비드 포크(조던의 에이전트)
조던과 운명적 만남을 가진 나이키는 1985년부터 ‘에어 조던’이라는 페르소나를 창조하여 광고를 시작했다. 첫 TV 광고의 내용은 대충 이랬다. 농구 코트에서 비행기 엔진 소리가 나면서 마이클 조던이 이륙하여 슬램덩크를 내리 꽃은 뒤 “누가 인간을 날 수 없는 존재라고 했나?”는 코멘트로 광고를 마무리 하는 내용이다. 요즘 관점에서 보자면 당시 광고는 유치하고 단순하다. 하지만 당시 미국인들에게 획기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날아가는 듯한 모습을 형상화 한 ‘에어 조던’의 점프맨 로고는 미국인들에게 깊이 각인되었다. 나이키사의 급성장이 이를 증명했다. ‘에어 조던’ 효과로 불과 1년 만에 1억 3천만달러의 수익을 올린 나이키는 단숨에 스포츠 브랜드 정상의 반열에 우뚝 올라섰다.
‘에어 조던’의 상품 가치는 조던의 뛰어난 경기력, NBA의 인기 급상승과 함께 날로 팽창해 갔다. 시그니처 슈즈의 시초가 된 ‘에어 조던’ 농구화는 NBA 팬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 되었고 대중적으로도 깊게 각인되어 농구화에 대한 이미지 자체를 변모 시키는데도 기여했다. 또한 ‘에어 조던’에서 파생 된 ‘에어’라는 개념은 나이키 브랜드 이미지에 큰 영향을 미치며 신발 업계의 혁명을 몰고 왔다. 이를 통해 나이키는 굴지의 스포츠 기업 자리를 굳혀갔다.
나이키가 조던을 상품으로 내걸어 ‘대박’을 터트린 이후 코카콜라, 맥도날드, MCI 장거리 전화, 비잔 향수 등 다양한 기업들은 너도 나도 조던 모시기에 열을 올렸다. 조던을 모델로 내세운 기업들은 한결같이 매출액의 폭팔적 증감을 얻을 수 있었다. 조던은 천문학적인 광고 수익을 올리는 운동 선수가 되었다. 1998년만 하더라도 조던이 1년간 벌어들인 광고 수익은 4500만달러. 당시 연봉이 3400만 달러였던 것을 감안하면, NBA 최고 연봉보다도 광고 수익으로 벌어들인 돈이 더 많았던 셈이다.
광고 모델로써 조던의 대 성공은 다른 NBA 스타 선수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특히 나이키가 조던에게 미친 영향은 NBA 선수들 전체에게로 이어졌다. ‘에어 조던’을 통해 전용 농구화라는 개념을 만든 나이키의 위상이 높아지자, 경쟁사 리복은 1990년대 초반 공룡 센터 샤킬 오닐을 앞세워 ‘샤크’ 시리즈를 히트 시켰다. 때마침 조던이 1993년 부친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은퇴를 선언하자, 오닐을 앞세운 리복은 급속하게 성장하여 조던의 아성을 넘볼 태세였다.
조던이 출연한 광고사에 맞서기 위해 경쟁사들은 오닐을 활용했다. 리복이 나이키에 대항하기 위해 그랬고, 펩시가 코카콜라에 대항하기 위해 그랬다. 오닐의 상품 가치는 대단했다. 7피트 1인치 320 파운드의 거구임에도 어울리지 않게 재치있고 유머스러운 오닐의 모습은 대중에게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 농구 뿐 아니라 랩 앨범 제작과 영화에서도 다양한 재능도 과시하며 큰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오닐은 조던의 파워를 따라잡지 못했다. 조던에게는 오닐과 같은 ‘끼’가 없었지만 누구와도 비견될 수 없을 만한 대중적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1995년 3월, 조던은 코트에 돌아왔다. 조던이 당시 사회에 미친 영향력은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 보다도 컸으며, 월 스트리트 증권가를 뒤흔들 만큼 막강했다. 나이키가 ‘에어 조던’을 통해 만들어 낸 조던의 파워였다. 조던의 복귀 이후 ‘에어 조던’의 힘을 다시 회복한 나이키는 그 동안 스코티 피펜, 페니 하더웨이 등의 다양한 선수들에게 쏠렸던 시선을 다시 조던에게 집중했다. ‘에어 조던’ 시리즈는 다시 한번 농구화계를 지배하며 전설을 써갔다.
‘에어 조던’의 계속 비행됐다. 조던이 은퇴 한 이후에도 말이다. 조던은 2002-03 시즌을 끝으로 은퇴한 이후 나이키 내에 ‘TEAM JORDAN'을 설립하여 ’에어 조던‘ 농구화에 대한 홍보를 이어갔다. ‘TEAM JORDAN'은 조던이 직접 지목한 나이키 계약 선수들에게 ’에어 조던‘ 농구화를 비롯한 다양한 나이키 용품을 지원한다. 조던은 은퇴했지만 카멜로 앤쏘니, 레이 앨런, 제이슨 키드, 게리 페이튼 같은 인지도 높은 선수들이 ‘TEAM JORDAN'의 일원으로써 맹활약 중이다. 농구 선수 뿐 아니라 워렌 쌥, 로이 존스 주니어, 데릭 지터 같은 타종목 선수들도 TEAM JORDAN의 일원으로 등록했다. 조던은 은퇴했지만 ‘에어 조던'의 위력은 여전히 막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