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英陽) 석보(石保) 출생. 진사(進士) 시명(時明)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안동장씨(安東張氏)로 흥효(興孝)의 딸이다.
영남학파(嶺南學派)의 거두로 이황(李滉)의 학풍을 계승한 대표적인 산림(山林)으로 꼽힌다.
1646년(인조 24)과 1648년에 걸쳐 두 차례 초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향리에 칩거하여 학문에 전념했다. 1666년(현종 7) 경상도 지방의 사림(士林)을 대표하여 송시열(宋時烈)?허목(許穆)?윤선도(尹善道) 등의 예설(禮說)을 비판하는 『복제소(服制疏)』를 작성하면서 정치적 의견을 개진하기 시작하였다.
1674년 학행으로 영릉참봉(寧陵參奉)에 천거되었고, 이듬해 장악원주부(掌樂院主簿)?공조좌랑(工曹佐郞)?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1677년(숙종 즉위) 공조좌랑(工曹佐郞)을 제수받아 비로소 중앙 정계에 나아가, 이후 1680년 경신환국(庚申換局) 때까지 근기남인(近畿南人)이 주도하는 정국운영에 대체로 소극적인 입장을 견지하였다.
이후 칩거하면서 1688년에 이이(李珥)의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을 비판한 『율곡사단칠정서변(栗谷四端七情書辨)』을 지었다.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이 다시 집권하면서 남인의 정치적 학문적 입지를 확대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는데, 유현(儒賢)으로 천거되어 성균관사업(成均館司業)을 비롯하여 이조참의(吏曹參議)?성균관좨주(成均館祭主)?대사헌(大司憲)?이조판서(吏曹判書) 등을 역임하였으며, 정책 결정 및 관원의 인사에 깊이 관여하였다.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甲戌換局) 때 함경도로 유배되었다가 5년 뒤에 방귀전리(放歸田里)되어, 임하(臨河) 금양(錦陽 : 現 琴韶)에서 원근의 선비들에게 학문을 강설했다.
영해(寧海) 인산서원(仁山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시문집 『갈암집(葛庵集)』과 중형 휘일(徽逸)과 함께 편찬한 『홍범연의(洪範衍義)』등 많은 저서가 전한다.
■참고문헌 : 仁祖 孝宗 肅宗實錄 國朝人物考
갈암금양강도지(葛菴錦陽講道址)
종 목 : 시도기념물 제116호 (안동시)
명 칭 : 갈암금양강도지(葛菴錦陽講道址)
지 정 일 : 1996.12.05
소 재 지 : 경북 안동시 임하면 금소리 502
소 유 자 : 재령이씨문경공파종중
이 건물은 갈암 이현일((葛菴 李玄逸), 1627-1704)선생이 만년에 후학을 위하여 학문을 가르치던 곳으로, 선생이 돌아가신 뒤에 제자들이 뜻을 이어가기 위하여 지은 것으로 전한다.
선생은 퇴계학통(退溪學統)을 신봉(信奉)한 주리론학자(主理論學者)로서 영남학파를 대표하는 성리학자(性理學者)이다. 선생이 68세 되던 해에 갑술환국(甲戌換局)을 당하여 유배되었다가 73세인 숙종(肅宗) 27년(1701)에 풀려난 후 이 곳 금소리에 우거하였다. 선생은 이곳에 금양정사(錦陽精舍)를 세우고 후학들에게 강학하면서 만년을 보내다가 숙종 30년(1704) 78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다. 5년간 선생의 가르침에 참여한 학자를 기록한 금양급문록(錦陽及門錄)에는 657명에 이르는 인물이 기록되어 있는데, 선생의 학문적 역량과 덕망을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