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D-001]분전 구색(墳典丘索) : 중국 고대의 책을 말하는데 전(轉)하여 고전(古典)을 지칭한다. 분(墳)은 삼분(三墳), 전(典)은 오전(五典), 구(丘)는 구구(九丘), 색(索)은 팔색(八索)인데 공안국(孔安國)의 《상서(尙書)》 서(序)에 “복희(伏羲)ㆍ신농(神農)ㆍ황제(黃帝)의 글을 삼분이라 하고, 소호(少昊)ㆍ전욱(顓頊)ㆍ고신(高辛)ㆍ당요(唐堯)ㆍ우순(虞舜)의 글을 오전이라 한다.” 하였다. 팔색은 팔괘(八卦)에 관한 것 또는 팔왕(八王)의 법이라고 하며, 구구는 구주(九州)의 지리ㆍ풍토ㆍ방물지(方物志)였다고 하나 전하지 않으므로 자세히 알 수 없다. [주D-002]육상(六相) : 황제(黃帝)가 천하를 다스릴 때에 얻었다는 여섯 사람. 《관자(管子)》 오행(五行)에는 육상을 치우(蚩尤)ㆍ대상(大常)ㆍ사룡(奢龍)ㆍ축융(祝融)ㆍ대봉(大封)ㆍ후토(后土)라 하였다. [주D-003]삼황(三皇) : 중국 고대의 천자(天子), 곧 복희(伏羲)ㆍ신농(神農)ㆍ황제(黃帝) 또는 수인(燧人)이라고도 하고, 일설에는 포희(包犧)ㆍ여와(女媧)ㆍ신농(神農)이라고도 하고, 또 천황(天皇)ㆍ지황(地皇)ㆍ인황(人皇)이라고 하는 등 여러 설이 있다. [주D-004]오제(五帝) : 중국 고대 삼황의 뒤를 이었다는 다섯 황제. 즉 소호(小昊)ㆍ전욱(顓頊)ㆍ제곡(帝嚳)ㆍ요(堯)ㆍ순(舜). 《사기》에는 소호 대신 황제(黃帝)로 되어 있다. [주D-005]삼왕(三王) : 하(夏) 나라의 우(禹), 은(殷) 나라의 탕(湯), 주(周) 나라의 문왕(文王)ㆍ무왕(武王)을 말한다. 문왕과 무왕은 부자간이므로 한 임금으로 보았다. [주D-006]오패(五伯) : 춘추 시대 패권을 다투던 다섯 나라의 패자. 진 문공(晉文公)ㆍ제 환공(齊桓公)ㆍ초 장왕(楚莊王)ㆍ월 구천(越句踐)ㆍ오 합려(吳闔閭)를 말하는데 월ㆍ오 대신 진 목공(秦穆公)ㆍ송 양공(宋襄公)을 넣기도 한다. [주D-007]칠국(七國) : 전국 시대(戰國時代)의 대표적인 일곱 나라, 즉 진(秦)ㆍ초(楚)ㆍ연(燕)ㆍ제(齊)ㆍ한(韓)ㆍ위(魏)ㆍ조(趙). 전국 칠웅(戰國七雄). [주D-008]십육국(十六國) : 진(晉) 나라 말엽부터 남북조(南北朝) 시대에 북위(北魏)에 의해 통일되기까지 양자강 북쪽에 명멸(明滅)했던 16개국. 흉노ㆍ갈(羯)ㆍ선비(鮮卑)ㆍ저(氐)ㆍ강(羌)의 이른바 오호(五胡)가 세운 열 세 나라와 한족(漢族)이 세운 세 나라를 통틀어 말하는데, 속칭 오호 십육국이라 한다. 본서(本書) p.28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참조. [주D-009]남조(南朝)의 오대(五代) : 남조는 남북조 시대, 양자강(揚子江) 남쪽에 섰던 다섯 나라, 즉 동진(東晉)ㆍ송(宋)ㆍ제(齊)ㆍ양(梁)ㆍ진(陳)을 말한다. [주D-010]북조(北朝)의 오조(五朝) : 강북의 오호 십육국이 북위(北魏)에 의해 통일되어 수 문제(隋文帝)가 천하 통일을 할 때까지 있었던 다섯 나라, 즉 북위ㆍ동위(東魏)ㆍ서위(西魏)ㆍ북제(北齊)ㆍ북주(北周). [주D-011]후오대(後五代) : 당 나라가 망하고 조송(趙宋)이 천하를 통일할 때까지 강남에 있었던 후량(後粱)ㆍ후당(後唐)ㆍ후진(後晉)ㆍ후한(後漢)ㆍ후주(後周) 즉, 오대(五代). [주D-012]한 무제(漢武帝)가 …… 해까지 : ‘기린을 잡자 붓을 놓았다.’는 기사는 춘추 시대 노 애공(魯哀公) 14년 봄에 “서쪽 지방을 순수하다 기린을 잡았다.”는 기사가 보이고, 공자가 이로써 《춘추》를 절필(絶筆)했다는 데서 연유한 것인데, 서기전 122년 무제가 옹(雍) 땅을 순수하다가 흰 기린을 얻어서 원수(元狩)로 개원(改元)하였다. 사마천은 이 사건을 공자가 《춘추》를 절필한 고사를 본받아 이해에 《사기》를 절필하였다는 것이다. [주D-013]이능(李陵)의 화(禍) : 이능은 한 무제(漢武帝) 때 흉노를 치다가 실수를 하고 자결한 장군 이광(李廣)의 손자. 이능도 무제 때에 자청하여 보병 5천을 거느리고 흉노 땅 깊숙이 쳐들어갔다가 세궁 역진(勢窮力盡)하여 항복하고 포로가 되었다. 사마천이 그러한 이능을 변호하기를 “비록 항장(降將)이지만 그 사람됨이 기회를 얻어 반드시 한조(漢朝)에 보답할 것입니다.”고 상주하였다가 무제의 노여움을 사서 48세 때인 천한(天漢) 3년(서기전 98)에 옥에 갇혀 부형(腐刑)을 받았다. [주D-014]반고는 말하기를 : 이 말은 반고의 말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 반표(班彪)가 사마천의 《사기》를 평한 일부이다. 《後漢書 卷40上 班彪列傳》 [주D-015]황로(黃老)를 …… 뒤로 하였으며 : 《후한서(後漢書) 권40(卷40)》 반표열전(班彪列傳) 주에 “황로는 노자(老子)의 도가(道家)이고, 오경은 유가(儒家)이다. 그 자서(自序)에 말하기를 ‘도가는 사람의 정신을 전일(專一)하게 하여 움직이거나 합하는데 형체가 없어 만물을 넉넉하게 한다.’ 하였는데, 이것은 황로를 높인 것이다. 또 ‘유자(儒者)는 넓게는 하지만 요약하는 데 부족하다.’ 하였으니 이것은 오경을 폄한 것이다.” 하였다. [주D-016]유협(遊俠)을 …… 놓았으며 : 《후한서(後漢書) 卷40上》 반표열전(班彪列傳) 주에 “《사기》 유협전 서에 ‘계차(季次)와 원헌(原憲)은 군자의 덕을 행했으나 의리가 당세에 맞지 않았고, 당시 사람들 역시 비웃었으며 평생토록 가난하게 살았다. 지금의 유협들은 그 행동이 정의(正義)에 꼭 부합하지는 않지만, 그 말은 신의가 있고, 행동은 결단성이 있으며, 약속은 꼭 지키고, 자신은 돌보지 않고 선비들의 횡액을 구한다. 지금 학문에 구애되어 작은 의리를 지키면서 세상과 고립되는 것보다는 천한 의론으로나마 세속을 따라 그 시대와 공존하면서 명예를 취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하였다.” 했다. [주D-017]화식(貨殖)을 …… 여겼으니 : 《(후한서後漢書 卷40上)》반표열전(班彪列傳) 주에 “《사기》 화식전 서에 ‘집안은 가난한데 부모는 늙고 처자는 연약하여 세시(歲時)에 제사지낼 거리도 없이 궁하게 사는 것보다 더 부끄러운 것은 없다. 처사(處士)의 행실도 없으면서 빈천을 좋은 것으로 알고 인의(仁義)만을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하였다.” 했다. [주D-018]무제(武帝)가 …… 풍자(諷刺)한 것 : 문제나 경제(景帝)는 노장학(老莊學)을 숭상한 반면 무제는 서기전 136년에 《시경》ㆍ《서경》ㆍ《역경》ㆍ《예기》ㆍ《춘추좌전》 등 오경(五經)의 박사를 두었는데, 사마천의 《사기》 자서(自序)에서 황로를 앞에 놓고 육경을 뒤에 설명한 것은 문제와 경제를 높이고, 무제를 폄하기 위한 뜻이라는 것이다. [주D-019]주가(朱家)와 …… 것 : 주가는 한 고조 때의 노(魯) 나라 사람으로 의협심이 있어 자기는 검소하게 지내면서 다른 사람의 횡액은 수천 금을 들여서도 구해 주었다. 당시 천하를 통일한 한 고조가 원수를 갚기 위하여 자기를 여러 번 괴롭혔던 항우(項羽)의 부장 계포(季布)를 1천 금으로 현상하자 계포는 할 수 없이 스스로 머리를 깎고 주가에게 팔려갔는데, 주가는 등공(滕公)을 설득하여 고조로 하여금 계포를 사면해 주도록 주선했다. 그 뒤에 계포가 존귀하게 되었지만 주가는 찾아간 일이 없었다고 한다. 사마천이 주가를 높이 평가한 것은 주가와 같은 의협적인 인물이 있었다면 자기도 구해 주었을 것이란 말이다. 《史記 卷100 遊俠傳》 [주D-020]반표(班彪)가 …… 계승하였는데 : 반표는 재주가 뛰어난 데다가 저술하기를 좋아하였다. 사마천의 《사기》가 무제(武帝) 때까지만 기록되었고, 그 이후의 기록은 비속하고 보잘것이 없다고 생각하여 《사기》에서 빠진 것을 채록, 후전(後傳) 수십 편을 지었다. 《後漢書 卷40上 班彪列傳》 [주D-021]두헌(竇憲)의 …… 연좌되어 : 후한 안제(後漢安帝) 영초(永初) 초기에 대장군(大將軍) 두헌(竇憲)이 흉노를 정벌하기 위하여 출정했을 때 반고는 중호군(中護軍)이 되어 종군(從軍)했다가 두헌이 패하게 되자 같이 책임을 지고 파직되었다. 일찍이 낙양령(洛陽令) 충긍(种兢)이 반고의 종에게 수모를 당한 일이 있었는데, 당시에는 두헌이 두려워 어찌하지 못하다가 두헌이 죄를 당하게 되자 반고를 얽어넣었으므로 반고는 옥중에서 죽으니 나이가 61세였다. 그 후 안제는 반고의 죽음을 애석히 여겨 충긍을 견책(譴責)했다. 《後漢書 卷40下 班彪列傳》 [주D-022]두 정남(杜征南)을 …… 일컫는다 : 두 정남은 진 무제(晉武帝) 때 정남대장군(征南大將軍)에 증직된 두예(杜預)를 말하는데, 두예는 무장이면서 《춘추좌씨경전집해(春秋左氏經傳集解)》와 《춘추장력(春秋長歷)》을 지어 뒷날 《춘추》의 이해에 큰 공헌을 하였으므로 《춘추》의 공신이라고들 일컫는다. 안사고(顔師古)는 당 나라 사람으로 태종(太宗) 때 비서소감(秘書少監)에 제수되어 《한서》 주해(注解)에 공헌이 많았으므로 태자(太子) 승건(承乾)으로부터 “안 비서감(顔秘書監)은 반맹견의 충신이다.”라는 칭찬을 들었다. [주D-023]부사(腐史) : 《사기(史記)》를 말한다. 즉, 부형(腐刑)을 받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란 뜻에서 부사라 일컫는다. [주D-024]영경함소(英莖咸韶) : 고대 중국의 훌륭한 음악, 곧 훌륭한 것이란 뜻. 영(英)은 오영(五英)으로 영(韺)으로도 쓰는데 제곡(帝嚳)의 악, 경(莖)은 오경(五莖)으로 전욱(顓頊)의 악, 함(咸)은 함지(咸池)로 제요(帝堯)의 악, 소는 대소(大韶)로 제순(帝舜)의 악이다. [주D-025]구혁(溝洫) : 주대(周代)의 전지(田地) 사이에 있던 수로(水路). 고제(古制)에 10부(夫)의 전지 사이에 있는 것을 구(溝), 1백 부의 전지 사이에 있는 것을 혁(洫)이라 하였다. [주D-026]봉선(封禪) : 봉(封)은 봉토(封土)를 쌓아 하늘에 제사지내는 것이고, 선(禪)은 땅을 깨끗이 하고 산천(山川)에 제사지내는 일. 《사기(史記)》 봉선서(封禪書) 주에 “태산(泰山)에 올라 단을 쌓고 하늘에 제사지내고, 태산 아래 작은 산을 다듬고 지신(地神)에 제사지냈다.” 하였다. [주D-027]교사(郊祀) : 천자가 교외(郊外)에서 천지에 지내는 제사. 천자가 동지(冬至)에는 남쪽 교외에 나가 하늘에 제사지내고, 하지(夏至)에는 북쪽 교외에 나가 땅에 제사지낸다 한다. [주D-028]평준(平準)을 …… 견주었으니 : 평준법과 균수법(均輸法)은 한 무제(漢武帝) 때의 대농승(大農丞)이던 상홍양(桑弘羊)이 당시 잦은 외정(外征)과 토목 공사로 피폐한 국가 재정을 충당하려고 실시한 경제 정책의 하나인데, 지방에 균수관을, 장안(長安)에 평준관을 두어 가격이 싼 지방의 물자를 비싼 지방에 옮겨 팔고, 값이 쌀 때 물자를 사 두었다가 비쌀 때에 물가를 조절하는 등 국가에서 막대한 이를 취하였다. 이로써 상인은 업을 잃고 백성은 자유판매의 길이 막혀 원망이 많았다. 이 법은 주공(周公)이 백성의 체화(滯貨)를 사서 매매도 하고 국용(國用)에도 쓴 천부법(泉府法)에 근원을 둔 것이나, 전자는 백성의 이(利)를 수탈했고, 후자는 백성의 편의를 위한 것인즉 양자를 같은 것으로 볼 수 없는데 이를 같은 유로 취급한 것은 잘못되었다는 말이다. [주D-029]범엽(范曄)이 …… 복주(伏誅)되자 : 범엽이 송 문제(宋文帝) 원가(元嘉) 9년(432) 팽성태비(彭成太妃)가 죽었을 때 숙직을 하면서 술을 먹고 논 것이 화근이 되어 문제에게 미움을 사서 좌천당하였고, 자기 어머니가 죽었을 때 기생을 데리고 간 것이 화가 되어 계속 뜻을 얻지 못하자 불만을 품고 공희선(孔熙先)과 역모를 꾀하다가 원가 22년(445)에 복주되었다. [주D-030]두무(竇武)와 …… 주멸(誅滅)한 것 : 두무는 환제(桓帝)의 장인이요, 하진(何進)은 영제(靈帝)의 처남으로 국권을 쥐고 있을 때 환관(宦官)의 극성을 꺼려서 이들을 제거하려고 하다가 도리어 패해 죽음을 당했다. 그러나 본서에서는 “중관을 주멸하였다.”고 했으니 “중관을 주멸하려 했다.”로 되어야 옳을 듯하다. 《後漢書 卷69 竇何列傳》 [주D-031]채염(蔡琰) …… 넣었으며 : 채염은 후한 말 채옹(蔡邕)의 딸로 자는 문희(文姬). 박학(博學)하고 재변(才辯)이 있었다. 처음 위중도(衛仲道)에게 시집갔으나 자식이 없이 남편이 일찍 죽어 친정에 돌아와 있던 중 흉노에 붙들려가 거기에서 12년간 살면서 아들 둘을 낳았다.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조조(曹操)가 채옹과의 구의(舊誼)를 생각해서 보화(寶貨)로 속(贖)하여 동사(董祀)에게 개가시켰는데, 그 후 동사가 죄를 얻어 죽게 되자 채염이 직접 조조에게 나아가 청하여 죄를 면하게 하였다. 《後漢書 卷84 烈女傳》 [주D-032]왕교(王喬)의 부석(鳧舃) : 왕교는 후한 명제(後漢明帝) 때의 하동(河東) 사람으로 신술(神術)이 있어 섭(葉) 땅의 영(令)으로 있으면서 매월 삭망(朔望)마다 입궐하여 조회하므로 이를 이상히 여긴 황제가 엿보게 하였더니 “그가 이를 때면 오리 두 마리가 동남쪽으로부터 온다.”는 말을 듣고, 오리가 올 때를 기다려 그들을 쳐서 잡게 했으나 오리는 간 곳 없고 신[舃] 한짝만 걸렸으므로 오리를 타고 온다고 믿었다. 《後漢書 卷82上 方術列傳》 [주D-033]좌자(左慈)의 양명(羊鳴) : 좌자가 양(羊)이 되었다는 말. 좌자는 후한 말 여강(廬江) 사람으로 자는 원방(元放)인데, 젊어서부터 신술이 있어, 대야 물에서 송강(松江)의 농어[鱸魚]를 낚기도 하고, 한 되의 술과 한 근의 안주로 1백여 인을 취하도록 하여, 이를 두려워한 조조(曹操)가 죽이려 하자 양이 되어 양의 무리 속에 들어가서 잡지 못했다고 한다. 《後漢書 卷82下 方術列傳》 [주D-034]진수가 …… 빼버렸고 : 정의(丁儀)는 패군(沛郡) 사람으로 자를 정례(正禮)라고 하는데 위(魏) 나라에서 훌륭하다는 이름이 있었다. 진수가 《삼국지》를 지으면서 정의의 아들에게 “나에게 쌀 1천 곡(斛)을 주면 너의 아버지 전(傳)을 잘 지어주겠다.” 하였다가 거절당하자 전을 만들지 않았다. 《晉書 卷82 陳壽列傳》 [주D-035]원수를 …… 기록한 것 : 일찍이 진수의 아버지가 마속(馬謖)의 참군(參軍)으로 있었는데 마속이 패전의 책임을 지고 제갈량(諸葛亮)에 의해 참수될 때, 진수의 아버지도 연좌되어 머리를 깎였다. 제갈량의 아들 첨(瞻) 역시 진수를 하찮게 대접했으므로 원한을 품고, 제갈량전을 지으면서 “양(亮)은 장수의 지략(智略)도 없고 재능도 없으며, 첨(瞻)은 글이나 좀 할 뿐 명성이 사실에 지나친다.” 하였다. 《晉書 卷82 陳壽列傳》 [주D-036]조조(曹操)의 …… 보인 것 :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무제기(武帝紀) 주에 “오인(吳人)이 지은 《조만전(曹瞞傳)》과 곽송(郭頌)이 지은 《세어(世語)》에 숭(嵩)은 하후씨(夏侯氏)의 아들로 하후돈(夏侯惇)의 숙부요 태조(太祖) 즉 조조(曹操)는 돈과 사촌 형제가 된다.” 하였다. 《삼국지》 위서(魏書) 9권에는 하씨와 조씨가 같이 들어 있기는 하나 이들 외에도 하안(何晏)ㆍ이승(李勝)ㆍ환범(桓範) 등도 같이 들어 있으니, 진수의 뜻이 조씨가 하후씨에게서 나왔다고 해서 한 권에 넣었는지는 의문이다. [주D-037]고귀향공(高貴鄕公) …… 실은 것 : 고귀향공은 이름이 모(髦), 자는 언사(彦士)로 위 문제(魏文帝)의 손자인데 일찍이 고귀향공에 봉해져 학문을 좋아하고 숙성하다는 명망이 있어 25년 제왕(齊王)이 폐위된 뒤 황제 위에 올랐다. 그러나 당시 국권을 쥐고 있던 사마소(司馬昭)의 시기를 받아 20세에 패려(悖戾)하다는 구실로 죽음을 당했는데, 진수는 이 사실을 바로 쓰지 못하고 사마소의 변명하는 상소문을 같이 실음으로써 시역(弑逆)을 은근히 풍자한 것이다. [주D-038]재기(載記) : 재기란 열국에 관한 기록이란 뜻인데, 《진서(晉書)》에서는 재기라 하여 권말에 강북(江北)에서 명멸(明滅)했던 십육국의 역사를 약술하여 붙였다. [주D-039]전조(前趙) : 흉노족의 유연(劉淵)이 304년에 세운 나라. 처음에는 국호를 한(漢)이라 하다가 그 족손(族孫) 유요(劉曜)에 이르러 전조라고 고쳤다. 319년 후조(後趙)에게 멸망. [주D-040]후조(後趙) : 갈인(羯人) 석늑(石勒)이 전조(前趙)를 멸하고 319년에 세운 나라. 한때는 강북의 대부분을 차지하여 십육국 중 최강성이었으나 손자인 석감(石鑑) 대에 와서 왕은 염민(冉閔)에게 시해되고 국호도 위(魏)로 바뀌었다. 위는 351년 전연(前燕)에게 멸망. [주D-041]전진(前秦) : 351년 저족(氐族)의 포홍(蒲洪)이 세운 나라. 뒤에 성을 부(苻)로 고쳤다. 부견(苻堅) 대에는 강북에서 일대 강국을 이룩했으나 태원(太元) 8년(383) 동진(東晉)을 공략하다 대패한 뒤 약화되어 394년 멸망. [주D-042]후진(後秦) : 강족(羌族)의 요장(姚萇)이 384년 전진왕 부견(苻堅)을 죽이고 장안(長安)에 도읍한 나라. 3대 34년 만에 동진(東晉)에게 멸망. [주D-043]서진(西秦) : 선비족(鮮卑族)의 걸복 국인(乞伏國仁)이 385년 감숙(甘肅) 지방에 세운 나라. 4대 동안 계속하다가 431년 대하(大夏)의 혁련정(赫連定)에게 멸망. [주D-044]전연(前燕) : 선비족 모용황(慕容皝)이 337년 하북(河北) 일대에 세운 나라. 2대를 거쳐 370년 전진의 부견(苻堅)에게 멸망. [주D-045]후연(後燕) : 선비족 모용수(慕容垂)가 전연(前燕)에서 분리되어 384년에 세운 나라. 양자인 고운(高雲) 대에 와서 북연에게 멸망. [주D-046]남연(南燕) : 선비족의 모용덕(慕容德)이 전연에서 독립하여 398년에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일대에 세웠던 나라. 조카인 초(超)가 뒤를 이었으나 2대 13년 만에 동진(東晉) 장수 유유(劉裕)에게 멸망. [주D-047]북연(北燕) : 한족(漢族)의 풍발(馮跋)이 409년 만주 봉천(奉天) 일대에 세운 나라. 436년 북위(北魏)에게 멸망. [주D-048]전량(前涼) : 서진(西晉) 말 양주자사(涼州刺使) 장궤(張軌)가 세력을 기르다가 그 손자 장준(張駿)이 자립하여 314년에 세운 나라. 376년 전진(前秦)에게 멸망될 때까지 8대 63년간 계속. [주D-049]후량(後涼) : 저족(氐族)의 여광(呂光)이 감숙성(甘肅省)을 중심으로 396년에 세운 나라. 2대 18년 만에 후진(後秦)에게 멸망. [주D-050]남량(南涼) : 397년 선비족의 독발 오고(禿髮烏孤)가 지금의 청해(靑海) 지방을 중심으로 세운 나라. 3대 18년 만에 서진(西秦)에게 멸망. [주D-051]서량(西涼) : 400년 한족(漢族)의 이고(李暠)가 돈황(敦煌)에 도읍하여 세운 나라. 2대 22년 만인 421년 북량(北涼)에게 멸망. [주D-052]북량(北涼) : 흉노족의 저거 몽손(沮渠蒙孫)이 397년 지금의 감숙성 북부에 세운 나라. 3대 43년 만에 북위(北魏)에게 멸망. [주D-053]하(夏) : 대하(大夏)라고도 한다. 흉노족의 혁련발발(赫連勃勃)이 후진(後秦)에서 독립하여 407년에 감숙(甘肅)ㆍ섬서(陝西) 일대에 세운 나라. 4대 25년 만인 431년 토곡혼(吐谷渾)에게 멸망. [주D-054]성(成) : 성한(成漢)이라고도 한다. 저족(氐族)의 이웅(李雄)이 302년 촉(蜀)을 중심으로 세운 나라. 처음에는 국호를 성(成)이라 했다가 뒤에 한(漢)으로 고쳤다. 5대 44년 만에 진(晉)의 환온(桓溫)에게 멸망. [주D-055]이주영(爾朱榮)의 …… 보태었으므로 : 《북제서(北齊書)》 위수전(魏收傳)에 “위수는 역사 서술이 불공평하여 이주영은 위(魏)에 대해서는 도적인데도 이주씨(爾朱氏)로부터 고씨(高氏 : 북제〈北齊〉의 국성)가 나왔다고 했으며 이주영의 아들로부터 돈을 받고는 ‘덕의(德義)를 닦은 풍도(風道)가 대팽(大彭)ㆍ시위(豕韋 : 이상은 상〈商〉 나라 때의 패주〈霸主〉)ㆍ이윤(伊尹)ㆍ곽광(霍光)도 거론할 것이 없다.’ 하였다.” 했다. [주D-056]살아서는 …… 졌으니 : 아들이 없어 제자인 인표(仁表)를 후사로 삼았고, 사필이 공평하지 못하므로 여러 사람으로부터 원한을 사서 제(齊) 나라가 망한 뒤에는 그의 무덤이 파헤쳐졌다. 《北齊書 卷37 魏收列傳》 [주D-057]양휴지(陽休之)의 …… 하였으며 : 위수는 양휴지의 도움을 받고는 그의 아버지 양고(陽固)가 위 나라 때 북평 태수(北平太守)가 되어 탐학하다고 중위(中尉) 이평(李平)의 탄핵을 받아 죄에 걸린 기록이 《위서》에 있는데도, 위수의 《위서》에는 “고가 북평 태수가 되어 은혜로운 정사를 했으나 공사(公事)로 면관(免官)되었다.” 하였다. 《北齊書 卷37 魏收列傳》 [주D-058]8서(書) : 남북조 시대 8종의 역사서. 즉 《송서(宋書)》ㆍ《남제서(南齊書)》ㆍ《양서(梁書)》ㆍ《진서(陳書)》ㆍ《후위서(後魏書)》ㆍ《북제서(北齊書)》ㆍ《북주서(北周書)》ㆍ《수서(隋書)》를 말한다. [주D-059]안업(安業) …… 죄 : 안업은 태종(太宗)의 비(妃)인 장손 황후(長孫皇后)의 배다른 오라비로 본래 소행이 나빴으며 황후를 몹시 학대하였다. 뒤에 황후의 친척이라 하여 장군(將軍)에 제수되었으나 다시 이효상(李孝常) 등과 반란을 꾀하다가 붙잡혀 죽게 되었는데 황후는 “만일 죽이면 내가 감정으로 죽였다 할 것이니 황제의 누가 될 것이다.” 하여 감형을 받았다. 《新唐書 文德長孫皇后列傳》 [주D-060]오(吳) : 양행밀(楊行密)이 892년 회남(淮南)ㆍ강동(江東) 지방을 중심으로 세운 나라. 937년 남당(南唐)에게 멸망. [주D-061]남당(南唐) : 이변(李昪) 즉 서지고(徐知誥)가 937년에 오 나라의 선위를 받아 금릉(金陵)에 세운 나라. 처음에 국호를 제(齊)라 하였다가 당(唐)으로 고쳤는데 역사에서 이를 남당이라 한다. 975년 송(宋) 나라에 멸망. [주D-062]전촉(前蜀) : 당 소종(唐昭宗) 때 촉왕(蜀王)에 봉해졌던 왕건(王建)이 907년에 자립하여 세운 나라. 2대 만인 925년 맹지상(孟知祥)에게 멸망. [주D-063]후촉(後蜀) : 후당 명제(明帝) 때 촉왕에 봉해졌던 맹지상이 사천(四川)ㆍ섬서(陝西) 지방을 중심으로 925년에 세운 나라. 2대 41년 만인 965년 송 나라에 합병되었다. [주D-064]남한(南漢) : 양 태조(梁太祖) 때에 남해왕(南海王)에 봉해졌던 유은(劉隱 : 양제〈襄帝〉로 추존)의 동생 유공(劉龔)이 905년 광동(廣東) 지방에 세운 나라. 5대 67년 만에 송 나라에 멸망. [주D-065]초(楚) : 허주(許州) 사람 마은(馬殷)이 907년 호남(湖南) 지방에 세운 나라. 6대 45년 만에 남당(南唐)에게 멸망. [주D-066]오월(吳越) : 당 나라의 진해 절도사(鎭海節度使) 전유(錢鏐)가 양절(兩浙) 지방을 중심으로 902년에 세운 나라. 5대 77년 만에 조송(趙宋)에게 멸망. [주D-067]민(閩) : 당 나라 말기 민왕(閩王)으로 봉해졌던 왕심(王審)이 복건성(福建省) 지방을 중심으로 892년에 세운 나라. 아들 연정(延政) 대에 와서 국호를 은(殷)으로 고쳤다가 946년 남당에게 멸망. [주D-068]남평(南平) : 형남(荊南)이라고도 한다. 고계흥(高季興)이 후당 장종(後唐莊宗) 때에 남평왕(南平王)으로 봉해졌다가 907년 자립하였다. 5대를 거쳐 963년 송 나라에 멸망. [주D-069]동한(東漢) : 역사에서 북한(北漢)이라 한다. 오대(五代)의 후한이 후주(後周)에게 멸망되자, 그 일족 유숭(劉崇 : 일명 민(旻)이 지금의 산서성(山西省) 일대에 세운 나라. 4대 29년 만에 송 나라에 멸망. [주D-070]마음을 주벌(誅罰)하는 법 : 《춘추》에서는 비록 행위를 한 것은 아니더라도 그 의도를 엿보아 잘못이 있다고 생각했으면 그것을 기록함으로써 필주(筆誅)를 가한 것을 말한다. [주D-071]진(晉)의 …… 나온 것 : 출제(出帝)는 후진(後晉)의 석중귀(石重貴). 그의 아버지는 경유(敬儒)로 고조(高祖)의 형이었는데, 일찍 죽자 고조는 중귀를 아들로 삼았다. 이때 고조에게는 여섯 아들이 있었으나 모두 일찍 죽고 오직 어린 중예(重睿)만이 있었는데, 고조는 임종할 때에 중예를 안고 재상 풍도(馮道)의 품에 안겨주면서 잘 보살펴 줄 것을 당부하였으나 결국 중귀가 후계자로 즉위하였다. 이에 구양수(歐陽脩)는 《신오대사》에서 “출제는 고조의 아들은 될 수 있어도 후계자는 될 수 없다.” 하여 경유를 송왕(宋王)에 봉한 다음 황제의 형이라는 뜻으로 황백(皇伯)이라 하고 중귀를 정왕(鄭王)으로 하였다. 복원(濮園)의 의론이란 송 영종(宋英宗)이 인종(仁宗)의 뒤를 이어 즉위한 다음 그의 생부인 복왕(濮王)에 대한 추존 문제로 일어난 예론(禮論)을 말하는데, 이때 구양수ㆍ사마광(司馬光) 등은 “인종을 황고(皇考)라 하였으니 복왕은 고(考)가 될 수 없으므로 마땅히 황백이라 하여야 한다.” 하였다. [주D-072]한당안(韓瞠眼) : 후주(後周) 한통(韓通)의 별호. 그는 용맹이 뛰어나 요(遼)를 막는 등 많은 공을 세웠으나 성질이 급하고 지혜가 적었으며 몹시 사나워 당안이란 별명을 얻게 되었다. 뒤에 송 태조(宋太祖)인 조광윤(趙匡胤)이 진교(陳橋)에 이르러 반란을 일으켜 임금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대궐에서 급히 돌아오다가 조광윤 일파에게 살해되니 후주는 끝내 멸망하고 말았다. 《宋史 韓通傳》 [주D-073]공(公)이 …… 있었다 : 왕이 적신(賊臣)에게 쫓겨나 직접 나라를 다스리지 못하고 있지만 왕통은 그대로 건재한다는 뜻. 노 소공(魯昭公) 27년 소공이 계씨(季氏)에게 쫓겨나 건후 땅에 머물러 있었는데 《춘추(春秋)》에서는 소공 32년 공이 죽을 때까지 계속 “공이 건후에 있었다.”고 기록함으로써 정통의 소재를 밝혔다. 《春秋左傳 卷23》 [주D-074]양염부(楊廉夫)의 공의(公議) : 염부는 양유정(楊維楨)의 자(字), 그는 산음(山陰) 사람으로 원(元) 나라 태정(泰定) 때에 진사(進士)에 합격하였다. 성품이 정직하고 꿋꿋하여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았는데, 이때 명(明) 나라에서 《송사(宋史)》와 함께 《요사》ㆍ《금사》를 만들자 이에 반대하고 《정통변(正統辨)》을 지어 이의 부당함을 말하였다. 《明史 卷285 楊維楨傳》 [주D-075]영국공(瀛國公) : 도종(度宗)의 적자(嫡子)로 전 황후(全皇后)의 소생이며 이름은 현(㬎)이다. 함순(咸淳) 6년 임안부(臨安府)의 대내(大內)에서 탄생했으며, 9년에는 가국공(嘉國公)에 봉해졌다가 10년에 도종이 붕(崩)하자 유조(遺詔)를 받들어 즉위했으나 2년 만에 원(元)에 항복하였는데, 이해가 경신년(庚申年)이었으므로 경신군(庚申君)이라 호했으며 원 나라에서 영국공을 봉했다. 뒤에 묘호(廟號)를 공제(恭帝)라 하였다. 《宋史 卷47 瀛國公紀》 [주D-076]단종(端宗) : 도종(度宗)의 장자로 숙비(淑妃) 양씨(楊氏)의 소생이고 이름은 하(昰)이며 건국공(建國公)에 봉해졌다. 공제(恭帝) 2년에 원 나라 군대가 대거 쳐들어오자 익왕(益王)에 봉해졌으며, 공제가 끝내 원 나라에 항복하자 진의중(陳宜中) 등에 의하여 복주(福州)에서 즉위하였다가 2년 후 강주(碙州)에서 죽었다. 《宋史 卷47 瀛國公紀》 [주D-077]제병(帝昺) : 도종의 막내아들로 수용(修容) 유씨(兪氏)의 소생이며 이름은 병(昺)인데 영국공(永國公)에 봉해졌다가 다시 위왕(衛王)에 봉해졌다. 뒤에 단종이 죽자 육수부(陸秀夫)ㆍ장세걸(張世傑)에 의하여 즉위했으나 3년 후 다시 원병(元兵)에 쫓겨 바다에 빠져 죽으니, 이에 송(宋)은 끝내 멸망하고 말았다. 《宋史 卷47 瀛國公紀》 [주D-078]《한서(漢書)》 …… 예(例) : 《사기(史記)》에는 항우에 대한 기사를 초원왕세가(楚元王世家)로 하였으며 진섭(陳涉) 역시 세가로 하였으나, 《한서》에는 이들을 함께 묶어 항우ㆍ진섭전으로 한 다음 열전 맨 앞에 두었으므로 한 말이다. [주D-079]왕안석(王安石) : 임천(臨川) 사람으로 자(字)는 개보(介甫)이며 호는 반산(半山). 학식이 풍부하고 문장이 뛰어났다. 신종(神宗) 때 재상이 되어 정치적 개혁을 단행한 바 청묘법(靑苗法) 등 신법(新法)을 만들어 국민들의 원성이 높았으며 대신들의 반대에 부딪쳐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철종(哲宗) 때 형국공(荊國公)에 봉해졌으며 시호를 문공(文公)이라 하였다. 《宋史 卷327 王安石傳》 [주D-080]경남중(耿南仲) : 개봉(開封) 사람으로 원풍(元豐) 때에 진사에 합격하였다. 흠종(欽宗)이 즉위하자 상서좌승(尙書左丞)에 특진되었다. 그는 일찍이 흠종이 동궁(東宮)으로 있을 때에 12년간이나 섬겼으므로 즉위하게 되면 자기가 제일 높은 지위를 차지하리라 했었는데 오민(吳敏)ㆍ이강(李綱)이 오히려 자기보다 지위가 높자 여기에 불만을 품고 그들의 의론이면 무엇이든 배척하고 따르지 않았다. 이때 금(金)의 침략이 심화되어 화의(和議)가 일었는데, 이강 등이 반대하자 남중은 끝까지 그들을 비방하고 화의를 주장하였다. 이 때문에 전쟁 준비를 전혀 하지 않아 송 나라는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宋史 312 耿南仲傳》 [주D-081]이창령(李昌齡) : 초구(楚丘) 사람으로 자(字)는 천석(天錫), 태평흥국(太平興國) 때에 진사에 합격하여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이르렀으나 뚜렷한 공적이 없었다. 《宋史 卷387 李昌齡傳》 [주D-082]강준(姜遵) : 장산(長山) 사람으로 자는 종식(從式). 인종(仁宗) 때에 급사중(給事中)을 지냈는데, 아전의 일에는 능하였으나 너무 사납고 까다로워 사람을 많이 죽였다. 《宋史 卷288 姜遵傳》 [주D-083]《한서(漢書)》의 …… 예 : 도청(陶靑)ㆍ유사(劉舍)는 모두 경제(景帝) 때의 재상이었으나 특별한 공로가 없었다. 그리하여 《한서》 장승상전(張丞相傳) 뒤에 신도가전(申屠嘉傳)을 부록하였는데, 여기에 “신도가가 죽은 후 경제 때에 개봉후(開封侯) 도청과 도후(桃侯) 유사가 승상이 되었으나 지위만 지켰을 뿐, 당세에 유명한 공로가 없었다.” 하였다. [주D-084]사미원(史彌遠) : 남송(남송) 때 사람으로 자(字)는 동숙(同叔). 당시 재상이었던 한탁주(韓侂冑)가 병권을 휘둘러 금(金)과 사건을 일으키자 그는 창의(倡義)하여 베고는 자기가 자리를 대신한 다음, 양후(楊后)와 결탁하여 권력을 부렸다. 그리하여 대신(大臣)이나 시종(侍從)들이 모두 그의 친지였다. 영종(寧宗) 재위중 17년 동안이나 정승으로 있었으며, 영종이 붕(崩)하자 조서를 위조하여 황태자 굉(竑)을 폐하고 이종(理宗)을 세웠다. 소인 이지효(李知孝)ㆍ양성대(梁成大) 등을 심복으로 삼아 현신(賢臣)들을 몰아내고 오직 간신만을 등용했으나 이종은 자기를 세운 것을 고맙게 여겨 죄주지 않았다. 《宋史 卷414 史彌遠傳》 [주D-085]사숭지(史嵩之) : 근(鄞) 땅 사람으로 자(字)는 자유(子由). 가정(嘉定) 때 진사에 합격하여 재상에 이르렀는데, 사람을 함부로 등용하여 여론을 어겼으며, 부친 상중(喪中)에 기복(起復)으로 우승상 겸추밀사(右丞相兼樞密使)에 이르렀다. 이에 그의 종자(從子)인 경경(璟卿)이 인재 등용과 행정에 대한 실책을 편지로 말하였는데, 그 후 갑자기 죽자 세상에서는 숭지가 독살했다고 하였다. 《宋史 卷414 史嵩之傳》 [주D-086]궁기(窮奇) : 악한 사람이나 또는 악수(惡獸)ㆍ악물(惡物)을 가리킨다. 《좌전(左傳)》문공(文公)에는 “요(堯) 때 사흉(四兇)의 하나로서 공공(共工)이라고도 하는데 온갖 나쁜 짓을 저질렀다.” 하였으며, 《신이서북화경(神異西北荒經)》에는 “괴수로서 착한 사람을 해치고 악한 사람을 도와준다.” 하였다. [주D-087]이지효(李知孝) : 자(字)는 효장(孝章)으로 가정(嘉定) 때 진사에 합격하였다. 명문가의 자손으로 일찍이 우승상(右丞相) 사미원(史彌遠)의 부하가 되어 부끄러운 줄 모르고 문자를 주관하였다. 간사하여 진덕수(眞德秀) 등 명사들을 배척했으며 오직 벼슬길과 뇌물만을 일삼으니 세상에서는 양성대(梁成大)ㆍ막택(莫澤)과 함께 삼흉(三兇)이라 지척하였다. 《宋史 卷422 李知孝傳》 [주D-088]양성대(梁成大) : 복주(福州) 사람으로 자(字)는 겸지(謙之). 개희(開禧) 때 진사에 합격하였는데, 신분이 본래 천하여 부끄러움을 몰랐다. 천성이 사납고 간사하여 충현(忠賢)을 해치는 일이라면 팔을 걷고 나서니 이지효(李知孝) 같은 소인이 차마 하지 못하는 일이라도 거리낌없이 하였다. 사미원(史彌遠)에게 아첨하여 진덕수(眞德秀)를 크게 비방하였으며, 뇌물을 좋아하고 수탈을 일삼았다. 《宋史 卷442 梁成大傳》 [주D-089]응견(鷹犬) : 매와 개를 가리킨다. 사냥할 때 매와 개를 사용하여 짐승을 잡았으므로 이것을 빌려 남의 사주(使嗾)를 받아 사나움을 부리는 것을 말한다. [주D-090]가동(賈同) : 자(字)는 희득(希得)으로 학식이 풍부하고 정직한바, 전연 주희(朱熹)를 공격한 사실이 보이지 않으니 진가(陳賈)가 아닌가 의심된다. 감찰어사(監察御史)였던 진가는 왕회(王淮)에게 붙어 주희를 위학(僞學)이라 몰고 도학을 금지할 것을 청하여 주희의 친지나 문생 등 수많은 선비가 학금(學禁)에 걸려 관직을 박탈당하였다. 동시에 임률(林栗) 역시 도학을 공격하니 이들은 모두 간신 한탁주(韓侂冑)의 당이었다. [주D-091]호굉(胡紘) : 수창(遂昌) 사람으로 자(字)는 응기(應期). 순희(淳熙) 때 진사에 합격하여 감찰어사(監察御史)에 이르렀는데 간신 한탁주(韓侂冑)에게 붙어 명재상 조여우(趙汝愚)를 탄핵하고 주희(朱熹)를 위학(僞學)이라 공박하였다. 《宋史 卷394 胡紘傳》 [주D-092]《신당서(新唐書)》의 예 : 간신전은 구양수(歐陽脩)가 찬(撰)한 《신당서》에 비로소 보이는데 《송사》는 이것을 따라 간신전을 두고 장돈(章惇)ㆍ증포(曾布)ㆍ여혜경(呂惠卿)ㆍ채경(蔡京)ㆍ채변(蔡卞)ㆍ한탁주(韓侂冑) 등을 넣었다. [주D-093]장돈(章惇) : 포성(浦城) 사람으로 자(字)는 자후(子厚). 학식이 풍부하고 문장을 잘하니 왕안석(王安石)이 무척 사랑했다. 상서복야 겸문하시랑(尙書僕射兼門下侍郞)에 있으면서 자기의 당이었던 채경(蔡京)ㆍ채변(蔡卞) 등 소인을 등용하여 신법(新法)을 다시 사용하고 사마광(司馬光) 등 명현들을 배척하였다. 《宋史 卷471 章惇傳》 [주D-094]증포(曾布) : 남풍(南豐) 사람으로 자(字)는 자선(子宣). 희령(熙寧) 초기에 집현전 교리(集賢殿校理)가 되어 여혜경(呂惠卿)과 함께 왕안석을 도와 청묘법(靑苗法) 등 신법(新法)을 만들었으나 뒤에 왕안석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철종(哲宗) 때 지추밀원(知樞密院)으로 당시 재상이던 장돈(章惇)을 적극 도와 등용해 줄 것을 바랐으나 장돈이 시기하자 다시 그를 공격하였다. 휘종(徽宗)이 서자 우복야(右僕射)가 되어 국정을 도맡았는데 그의 당이었던 채경(蔡京)과 사이가 나빠 결국 그의 무함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宋史 卷471 曾布傳》 [주D-095]황사(皇嗣)를 …… 사미원 : 황사는 황태자란 뜻으로 영종(寧宗)의 태자였던 제왕(濟王) 굉(竑)을 가리키는데 주 84)에 자세히 보인다. [주D-096]직신(直臣)을 …… 사숭지 : 직신은 사숭지의 실정(失政)을 비판한 그의 종자(從子) 경경(璟卿)을 가리킨 듯한데 주 85)에 자세히 보인다. [주D-097]호전전(胡銓傳)에만 …… 않았다 : 호전의 자(字)는 방형(邦衡)이며 호는 담암(澹菴)으로, 남다른 충의(忠義)가 있었다. 자정전 학사(資政殿學士)로 있을 적에 재상 진회(秦檜)가 금(金)과 화의(和議)를 주장하자 그는 상소(上疏)하여 당시 금과 내통하던 왕륜(王倫)ㆍ손근(孫近)ㆍ진회 등을 벨 것을 청하였는데, 그 내용에 “어찌 조종(祖宗)이 물려준 천하를 가지고 금로(金虜)의 천하를 만들 수 있으며, 조종이 물려준 천하를 가지고 금로(金虜) 번신(藩臣)의 지위를 만들 수 있겠습니까?” 하여 금로라는 말을 두 번 사용하였는데 ‘.’는 ‘.’와 통하는바 《송사》 호전전에 이 내용이 그대로 실려 있으므로 한 말이다. [주D-098]금궤(金匱)ㆍ석실(石室) : 금으로 궤를 만들고 돌로 집을 지었다는 뜻인데, 고대에 서책을 소중히 여겨 튼튼한 함에 넣어 잘 보관했으므로 장서각(藏書閣)의 이름으로 쓰이게 되었다. [주D-099]진경(陳桱) : 주이준의 《폭서정집(曝書亭集)》에는 구양수도(歐陽守道)로 되어 있으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를 따라 고치지 않았다. [주D-100]성명(聲名)과 …… 못하고 : 원 나라는 몽고족(蒙古族)으로서 이름이나 문화가 중국 본토와 다르므로 한 말이다. [주D-101]선화(宣和)의 자획 : 선화는 휘종(徽宗)의 연호이며 또한 그의 당호로서 휘종체(徽宗體) 서법(書法)을 가리킨다. 휘종은 특히 서화에 취미가 있어 선화전(宣和殿)을 설치한 다음, 여기에서 거처하며 공부하였다. 뒤에 이때의 서화를 모은 것으로 《선화서보(宣和書譜)》ㆍ《선화화보(宣和畫譜)》가 전해진다. [주D-102]덕성(德星)이나 …… 감로(甘露) : 덕성은 별이름으로 경성(景星) 또는 서성(瑞星)이라고도 하는데 천자가 봉선(封禪)을 잘하면 그 보답으로 나타난다 하며, 경운(慶雲)은 상서로운 구름으로 경운(景雲) 또는 경운(卿雲)이라고도 하는데 태평세대가 올 징조로서 오색 구름이 끼는 것을 말하며, 예천(醴泉)은 감미로운 샘물이 땅에서 나오는 것으로 역시 상서로운 징조이며 감로는 꿀처럼 단 이슬로 태평한 세대에 나온다 한다. [주D-103]건문제(乾文帝)가 …… 것 : 건문은 혜종(惠宗)의 연호로서 곧 그를 가리킨다. 혜종은 태조(太祖)의 손자이며 의문태자(懿文太子)의 아들로서 이름은 윤문(允炆), 뒤에 공민제(恭閔帝)라 호하기도 하였다. 태자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홍무(洪武) 25년 황태손(皇太孫)에 책봉되었다가 즉위하여 제태(齊泰)와 황자징(黃子澄)을 크게 등용하고 세력이 너무 지나친 제왕(諸王)들을 제거할 계획으로 제왕숙(齊王橚) 등에게 죄를 씌워 서인으로 만들자, 당시 막강한 세력을 갖고 있던 성조(成祖)는 연왕(燕王)으로 있으면서 북평(北平)에서 반란을 일으켜 쳐들어와 수많은 전쟁을 치른 끝에 마침내 나라를 차지한바, 혜종의 행방이 묘연해지자 혜종이 자기에게 황제의 위(位)를 물려주었다 하여 손국(遜國)이란 구실을 붙였으며 제태ㆍ황자징 등을 간신이라 하여 죽이고는 혁제라 하였다. 《明史 卷4 恭閔帝本紀》 [주D-104]장릉(長陵)이 …… 것 : 장릉은 성조(成祖)의 능호(陵號). 성조는 태조(太祖)의 넷째아들로 이름은 체(棣)이며 연왕(燕王)에 봉해졌다. 조카인 혜종(惠宗)의 왕위 계승에 불만을 품고 있던 중 제왕(諸王)들이 제거당했는데, 이때 연산 호위백호(燕山護衛百戶)로 있던 예량(倪諒)이 반란을 꾸민다고 고발하여 혜종은 기교(旗校) 어량(於諒)을 베고 성조를 심히 꾸짖으며 왕부(王府)의 관료들을 체포해 갔다. 성조는 마침내 반란을 일으키고 북평을 북경(北京)이라 고친 다음 스스로 관속(官屬)을 두고는 반란군의 명칭을 본국의 난을 평정한다는 뜻으로 정난사(靖難師)라 이름하였다. 《明史 卷5 成祖本紀》 [주D-105]유릉(裕陵)이 …… 사건 : 유릉은 영종(英宗)의 능호(陵號). 왕진(王振)이 권력을 휘두르자 여러 적(賊)이 사방에서 일어나니 영종은 아우 성왕 기옥(郕王祈鈺)을 명하여 서울을 지키게 한 다음 친정(親征)을 나갔는데 뒤에 패군하여 파천(播遷)해 있자, 성왕이 즉위하여 연호를 경태(景泰)라 고치니 이가 곧 경제(景帝)이다. 영종을 높여 상황(上皇)이라 하였으며, 황태자 견심(見深)을 폐하고 견제(見濟)를 세웠으나 죽어 후계자가 없었는데, 경태 8년 병이 위독하자 석형(石亨)ㆍ서유정(徐有貞) 등이 군대를 이끌고 남궁(南宮)에 있던 상황을 맞이하여 마침내 영조가 다시 즉위하게 되었다. 이때 담을 헐고 문을 부수고 들어와 촛불 아래서 상황을 높이니 상황은 동화문(東華門)에 이르렀는데 문지기가 막고 못들어가게 하자 “나는 바로 태상황(太上皇)이다.” 하고는 마침내 들어와 봉천문(奉天門)에 이르러 제위(帝位)에 오른 다음 연호를 천순(天順)이라 고치고 탈문공신록(奪門功臣錄)을 기록하였다. 《明史 卷17 英宗本紀》 [주D-106]흥헌왕(興獻王) : 헌종(憲宗)의 넷째아들로 이름은 우원(祐杬) 흥왕(興王)에 봉해졌는데 시서(詩書)를 무척 좋아했다. 시호를 헌(獻)이라 했으므로 합하여 흥헌이라 불렀다. 죽은 후 2년 만에 아들 후덕(厚德)이 무종(武宗)의 뒤를 이으니 이가 곧 세종(世宗)이다. 세종은 즉위한 다음 예관(禮官)을 명하여 추존(追尊)할 것을 의논하게 하였는데, 예관은 전례가 없다하여 크게 높이지 않을 것을 주장하니 세종은 매우 못마땅해 하였다. 이 때문에 3년 동안이나 의론이 분분하던 끝에 결국 추존하여 황고(皇考)라 하고 묘호(廟號)를 예종(睿宗)이라 하자, 여러 신하들이 모여 통곡하면서 강력히 간하다가 감옥에 갇힌 자가 3백 명이나 되니, 이것을 대례의(大禮議) 사건이라 하였다. 《明史 卷115 睿宗興獻皇帝傳》 [주D-107]강방(江防)과 …… 방법 : 방(防)은 방수(防守)ㆍ방어의 뜻으로 강방은 장강(長江)에, 해방(海防)은 연해(沿海)에 군사장비를 설치한 것을 말한다. 명 나라 때에는 산동(山東)ㆍ복건(福建)의 연해에 왜구(倭寇)가 자주 침략하였으므로 이를 막기 위하여 복건의 연해에는 16개의 성을 쌓고 45개소의 순검사(巡檢司)를 증설했으며, 절동(浙東)ㆍ절서(浙西)의 여러 고을에 해방을 정돈하기 위하여 59개소의 성을 쌓는 한편 배를 만들어 각각 배치하였다. 《明史 卷322 日本列傳》 [주D-108]창위(廠衛) …… 정장(廷杖) : 창위는 체포와 감옥을 맡았던 금의위(錦衣衛)와 동창(東廠)ㆍ서창(西廠)을 가리키는데, 원래 금의위만 있던 것을 역모(逆謀) 등을 다스리기 위하여 동창은 성조(成祖) 때에, 서창은 영종(寧宗) 때에 각각 증설하였다. 조옥(詔獄)은 조칙을 받아 범죄자를 다스리는 감옥이며, 정장은 관리로서 과실이 있거나 임금의 뜻에 거슬리면 전폐(殿陛)에서 장책(杖責)하는 것을 말한다. [주D-109]안남(安南)의 군현 : 옛 교지(交阯)의 땅으로 현재의 월남(越南). 홍무(洪武) 원년 안남왕 진일규(陳日煃)가 표문을 올려 입조하였는데, 그 후 국상(國相) 여계리(黎季犛)가 권력을 잡고 왕을 시해한 다음, 명령을 받지 않자, 영락(永樂) 4년 훈신(勳臣) 장보(張輔)와 목성(沐晟)을 보내어 평정하였다. 이때 노인들은 “안남은 본래 중국땅이니 내지(內地)로 귀속시켜 달라.”고 하자 그들의 말을 따라 군현을 설치하여 안남의 이름을 교지라 고친 다음 삼사(三司)를 설치하고 도독첨사(都督僉事) 여의(呂毅)로 도사사(都司事)를 삼아 총독하게 했었는데, 그 후 다시 반란으로 인하여 폐지되었다. 《明史 卷321 安南列傳》 [주D-110]타안(朶顔)의 삼위(三衛) : 태조(太祖)가 설치한 타안ㆍ복여(福餘)ㆍ태령(泰寧)을 말한다. 이곳은 원래 올량합(兀良哈)이 살던 지방으로 현재 열하성(熱河城) 이북의 지역. 태조가 천하를 차지하자 요왕(遼王) 아례실리(阿禮失里)와 타안이 귀순해 오므로 이곳에 삼위를 설치하고 이들을 수용한 다음 아들 권(權)을 봉하여 영왕(寧王)을 삼고 이들을 감독하게 했었는데, 그 후 성조(成祖)가 건문제(乾文帝)를 몰아내고 황제가 된 다음 이 땅을 모두 분배하여 공로가 있는 자에게 주었다. 《明史 卷328 朶顔衛傳》 [주D-111]위소(衛所) : 명 나라 때 군대의 편제(編制)였던 위(衛)와 소(所)를 가리킨다. 《명사(明史)》 병지(兵志)에 “명 나라가 무력으로 천하를 통일한 후 옛 제도를 개혁하여 서울에서부터 지방 군현(郡縣)에까지 모두 위ㆍ소를 설치했는데, 요해지로서 1개 군에 관계되는 곳에는 소를, 여러 군에 관계되는 곳에는 위를 설치하되 대략 5천 6백 명이 위, 1천 1백 20명이 천호소(千戶所), 1백 12명이 백호위(百戶衛)였다.” 하였다. [주D-112]토사(土司) : 원(元)ㆍ명(明) 이래로 묘만족(苗蠻族)이 살던 지역을 관할하기 위하여 지방 사람을 세워 세습(世襲)하던 것으로 호남(湖南)ㆍ사천(四川)ㆍ운남(雲南)ㆍ귀주(貴州)ㆍ광서(廣西)의 여러 성(省)에 각각 설치하였다. 《明史 卷310 土司列傳》 [주D-113]위(魏) …… 임회(臨淮) : 위는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진 서 달(徐達), 정(定)은 정국공(定國公) 서증(徐增), 검(黔)은 서평후(西平侯) 목영(沐英)의 아들인 검국공(黔國公) 목성(沐晟), 성(成)은 성국공(成國公) 주능(朱能), 영(英)은 영국공(榮國公) 장옥(張玉)의 아들인 영국공(英國公) 장보(張輔), 임회는 조국공(曹國公) 이문충(李文忠)의 5대손인 임회후(臨淮侯) 이성(李性)이다. [주D-114]연성(衍聖) 한 공(公) : 연성공(衍聖公)은 송(宋) 나라 때부터 공자의 후손에게 내리던 작호(爵號)로서 여기서는 공 희학(孔希學)을 가리킨다. 그는 공자의 56대손으로 자(字)는 사행(士行)이며 대대로 곡부(曲阜)에 거주하였다. 조고 사회(思晦)는 원 나라에서 연성공에 습봉(襲封)되었고 부친 극견(克堅) 역시 습봉되었는데, 명 나라에 들어와 희학이 습봉된 후 8대를 전하여, 음식(蔭植) 때에 이르러 명 나라가 멸망하였다. 《明史 卷284 孔希學傳》 [주D-115]장도릉(張道陵)의 후예 : 장도릉은 동한(東漢) 때의 도사(道士)로 본명은 능(陵). 영평(永平) 때에 강주령(江州令)에 제수되었는데 뒤에 벼슬을 버리고 강서(江西) 용호산(龍虎山)에 들어가 연단(煉丹)ㆍ부주(符呪)의 방법을 터득하니 따라 배우는 자가 많았다. 원 세조(元世祖)는 그의 36대손인 종연(宗演)을 불러 강남 도교(江南道敎)를 주관하게 하는 한편 세습하였는데, 뒤에 42대손인 정상(正常)은 명 태조(明太祖)가 남창(南昌)을 이기자 사신을 보내어 상알(上謁)하였고 두 번이나 입조(入朝)하였으며, 홍무(洪武) 원년에는 즉위식에 축하하려고 왔었다. 《明史 卷299 張正常傳》 [주D-116]금천문(金川門)의 변 : 건문(建文) 2년 6월에 성조(成祖)가 반란군을 이끌고 금천문으로 쳐들어오자 곡왕 혜(谷王橞)와 이경륭(李景隆)이 반하여 연병(燕兵)을 받아들이니, 도성(都城)이 함락되고 궁중이 불길에 휩싸였는데 건문제는 행방불명이 되었으며 황후가 불에 타죽은 사건을 가리킨다. [주D-117]철조(輟朝) : 종친이나 대신이 죽으면 임금이 애도의 뜻을 표하기 위하여 조회를 보지 않는 것을 말한다. [주D-118]봉분(封墳)도 …… 않았다 : 예장(禮葬)하지 않음을 말한다. 중국에서는 사(士) 이상의 신분에게는 무덤에 봉분을 하고 나무를 심는다. [주D-119]도첩(度牒) 세 장 : 도첩은 새로 승려(僧侶)가 된 자에게 주는 일종의 허가증, 세 장에는 응문(應文)ㆍ응능(應能)ㆍ응현(應賢)이라 써 있었다 한다. 그리하여 오왕(吳王)의 교수였던 양응능(楊應能)은 그대로 사용하고 이름이 윤문(允炆)인 건문제는 응문으로, 감찰어사(監察御史) 섭희현(葉希賢)은 응현으로 이름을 고친 다음 모두 승려가 되었다 한다. 《明史紀事本末 建文遜國》 [주D-120]성왕(成王)이 어디 있습니까 : 성조(成祖)는 황제의 자리를 빼앗은 후 태학사였던 방효유를 불러 등극(登極)했다는 조서(詔書)를 초하게 하였는데, 효유는 몹시 슬퍼하여 곡성이 대궐에 진동하였다. 성조는 어탑(御榻)에서 내려와 위로하면서, “선생은 너무 슬퍼하지 마오. 나는 옛날 주공(周公)이 성왕을 보필했던 것을 따르려 하오.” 하자, 효유는 “성왕이 어디 있습니까?” 하였는데, 이 말은 성제가 옛날 무왕(武王)이 죽고 어린 성왕이 즉위하자 숙부인 주공이 성왕을 보필하고 반란을 평정한 일을 빌려 자기의 반란 사실을 합리화하는 말에 대하여, 효유가 건문제가 실종된 사실을 들어 반박한 것이다. [주D-121]《구양하후상서(歐陽夏侯尙書)》 : 구양생(歐陽生)과 하후승(夏侯勝)ㆍ하후건(夏侯建)이 전한 《금문상서(今文尙書)》를 가리킨다. [주D-122]호윤(胡閏) : 자(字)는 송우(松友). 건문제를 위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제태(齊泰)ㆍ황자징(黃子澄)과 함께 성조의 반란군을 막을 계략을 세웠다. 뒤에 성조가 불러 왔으나 끝까지 굽히지 않으니, 성조는 크게 노하여 죽인 다음 가죽을 벗겨 박제(剝製)하였다 한다. 《明史紀事本末 壬午靖難》 [주D-123]모대방(茅大芳) : 이름은 포(誧)인데 자(字)로 행세하였다. 건문제 때에 우부도어사(右副都御史)로 있었는데, 성조가 등극한 후 체포되어 굽히지 않다가 아들 순동(順童)ㆍ도수(道壽)ㆍ문생(文生)과 함께 동시에 기시(棄市)되었으며, 아내는 교방(敎坊)으로 뽑혀 갔었는데 뒤에 병들어 죽었다. 《明史 卷141 茅大芳傳》 [주D-124]경신군(庚申君) : 송(宋) 나라 영국공(瀛國公)으로 주 75) 참조. [주D-125]철현(鐵鉉) : 건문 초년에 산동 참정(山東參政)으로 있었는데 성조가 반란군을 일으키자, 성용(盛庸)과 함께 제남(濟南)을 지키면서 여러 차례 반란군을 무찔렀다. 병부상서(兵部尙書)가 되어 성조가 도성을 함락한 후에까지도 회상(淮上)에서 군대를 주둔하고 있었는데, 뒤에 패전하여 사로잡히자 굽히지 않고 죽임을 당하였다. 《明史 卷142 鐵鉉傳》 [주D-126]하서(河西)의 …… 솥 땜장이 : 모두 건문제의 옛 신하로서, 하서의 품팔이꾼은 장랑(莊浪) 노씨(魯氏)의 집에서 품을 팔면서 겨울에도 언제나 갈포 옷만을 입었다. 한번은 도성의 조관(朝官)이 그를 알아보고 말을 나누려 하자 도망하여 피했는데 뒤에 끝내 장랑에서 세상을 마쳤으며, 사천(四川)의 솥 땜장이는 솥땜으로 생업을 삼았다. 한번은 기주(夔州) 시장에서 한 사람을 만나자 놀라면서 서로 붙들고 통곡하였는데, 그를 보고 ‘풍옹(馮翁.’이라 하였으므로 뒤에 마이자(馬二子), 또는 마공(馬公), 새마선생(塞馬先生)이라 불렀다 한다. 《御批 歷代通鑑輯覽》 [주D-127]동호(東湖)의 …… 중 설암(雪菴) : 이들 역시 건문제의 옛 신하라 한다. 정사(正史)에는 어사(御史)였던 섭희현(葉希賢)은 간당(姦黨)으로 몰려 죽임을 당했으며, 우경선(牛景先)은 도망하다 절에서 피살되었다 하였는데, 야사에는 모두 죽지 않고 희현은 건문제를 따라 중이 된 다음 망명하여 응현(應賢)으로 이름을 고치니 이가 곧 설암화상(雪菴和尙)이라 하며, 경선 역시 망명하여 건문제가 있는 곳을 왕래하였는데 동호초부(東湖樵夫)라 하였다 하였으나, 이는 모두 정사에 없는 기록으로 수많은 이설(異說)이 전해온다. 《御批 歷代通鑑輯覽》 [주D-128]양행상(楊行祥)의 …… 양응능(楊應能) : 《명사》에는 한 사람의 승려로 이름을 응능이라 했는데, 영종(英宗) 5년 운남(雲南)에서 광서(廣西)에 이른 다음 스스로 건문제라 칭하므로 체포하여 조사한 결과 허위였음이 밝혀져 금의위(錦衣衛)에 갇혀 죽었다 하였다. 일설에는 건문제를 따라 중이 된 오왕(吳王)의 교수였던 양응능이라고도 하여 전설이 분분한 바, 이 사실에 대한 왕세정(王世貞)의 변설은 참고하지 못했다. [주D-129]여구(黎丘)의 귀신 : 이상한 귀신에 홀린 여구 장인(黎丘丈人)을 가리킨다. 《여씨춘추(呂氏春秋)》의사(疑似)에 “양구(梁丘)의 여구 부락에 자질(子姪)이나 형제의 모습을 흉내내는 이상한 귀신이 있었다. 한번은 이곳에 사는 장인이 시장에서 술에 취하여 집에 돌아오는데 길에서 아들이 붙들고 실랑이를 하였다. 장인은 집에 돌아와 술이 깬 다음 아들을 꾸짖자, 아들은 울면서 ‘전혀 그런 사실이 없습니다.’ 하였다. 장인은 ‘알았다. 이것은 반드시 그 귀신의 짓일 것이다. 나는 일찌기 들었다.’ 하고는 다음날 다시 시장에서 술을 마시며 그 귀신을 만나면 찔러 죽이려고 벼르고 있었는데, 이때 마침 다시 부친이 귀신에게 홀릴 것을 염려한 아들이 마중을 나갔다가 결국 귀신으로 오인되어 진짜 아들을 찔러 죽였다.” 하였다. [주D-130]고황후(高皇后) : 태조(太祖)의 원비(元妃)인 마황후(馬皇后)를 뒤에 효자고황후(孝慈高皇后)라 시호했으므로 고황후라 한 것이다. [주D-131]부예(鳧鷖) : 《시경(詩經)》 대아(大雅) 부예편을 가리킨다. 이 시는 제사지낸 다음날 역제(繹祭)하면서 조상의 신에게 올리는 악장(樂章)이라 한다. [주D-132]숭정(崇禎)의 …… 일 : 숭정은 명 나라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의 연호. 혁세(革世)는 혁명이란 뜻으로 청(淸) 나라가 명 나라의 뒤를 이어 천하를 차지한 것을 말하는데, 이 사실에 있어 《명사》는 청 나라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되도록 명 나라를 깍아내리고 청 나라를 두둔하였다. [주D-133]후예(后羿) : 고대 하(夏) 나라 때 유궁국(有窮國)의 제후였던 예(羿). 그는 특히 활을 잘쏘아 사냥를 좋아했다. 당시 천자였던 태강(太康)이 정사를 돌보지 않자, 태강의 아우 중강(仲康)을 세우고 정권을 마음대로 했으며, 중강이 죽고 아들 상(相)이 서자 그를 쫓아내고 찬탈하였으나 자신은 폐신(嬖臣) 한착 (寒浞)에게 시해(弑害)되니, 이것이 중국 역사상 최초의 찬탈사건이었다. 《十八史略 夏紀》 [주D-134]오삼계(吳三桂) : 요동(遼東) 사람으로 자(字)는 장백(長白). 명 나라 말엽 총병(總兵)으로 산해관(山海關)을 지키고 있었는데, 이자성(李自成)이 도성를 함락하고 그의 애첩 진원원(陳圓圓)을 빼앗자, 마침내 청 나라 군대를 끌어들여 이자성을 파하니 이 때문에 청 나라가 중국을 차지하게 되었다. 청 나라가 중국을 차지한 후 운남(雲南)에 봉해져 사번(四藩)의 하나가 되었는데, 뒤에 번진(藩鎭)을 철폐하려는 계획을 세우자, 군사를 일으켜 반하고 귀주(貴州)ㆍ광서(廣西)의 여러 성(省)을 점령하여 스스로 주제(周帝)라 칭했다. 얼마후 병들어 죽고 그의 손자 세번(世藩) 때에 청 나라에게 멸망되었다. 《淸史 列傳 80》 [주D-135]은괄(檼栝) :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다는 말. 굽은 것을 곧게 하는 것을 은(檼), 뒤틀린 방형(方形)을 바로잡는 것을 괄(栝)이라 한다. [주D-136]본기(本紀)라는 …… 나타낸 것 : 본기는 천자의 역사이고 세가는 제후의 역사를 말하는데, 고려는 중국의 제후국이라는 명분하에 역대 왕의 기록을 세가로 했다는 말이다. [주D-137]고려의 …… 되니 : 고려 태조 2년(919)에 3대의 고비(考妣)를 추존하였다고 했는데, 왕씨(王氏)의 세계(世系)를 논한 김관의(金寬毅)의 《편년통록(編年通錄)》에는 “성골장군(聖骨將軍) 호경(虎景)이 강충(康忠)을 낳고, 강충이 보육(寶育)을 낳으니, 이가 국조 원덕대왕(國祖元德大王)이다. 보육의 딸 진의(辰義)가 태조의 증조모인데 정화왕후(貞和王后)에 봉해졌으며, 진의와 당 나라 귀성(貴姓)이란 사람 사이에서 의조 경강대왕(懿祖景康大王)을 낳고, 의조가 세조 위무대왕(世祖威武大王)을 낳고 세조가 태조를 낳았다.” 하였는데, 이와 같이 된다면 당 나라 귀성이란 사람은 고려 태조의 증조가 되는데도 추존에서 제외되고, 증조모인 진의의 친정 아버지인 보육을 증조로 삼고, 보육의 딸인 진의를 보육의 비로 삼은 것은 잘못되었다는 말이다. 《高麗史》 [주D-138]혹시지후(或時之後) : 이 부분은 문맥이 통하지 않는다. [주D-139]지고(地庫) : 조선 건국 후 고려 시대의 사초(史草)를 개성(開城)으로부터 한양(漢陽)에 옮겨와 비치해 두었던 창고. 이것은 조선 선조(宣祖) 때까지 계속 보존되어 오다가 1592년 임진왜란 때 난민(亂民)들에 의하여 불타 없어졌다. 《星湖僿說 人事門 焚地庫隸籍》 [주D-140]이사원(李嗣源)은 …… 계승하였다. : 이사원은 본래 성이 없었는데, 오대(五代) 후당(後唐) 이극명(李克明 : 뒤에 태조 무제〈太祖武帝〉로 추존)의 양자가 되었다가 이극명의 후사인 장종(莊宗)의 뒤를 이었고, 시세종(柴世宗)은 역시 오대 후주(後周) 시후(柴后)의 친정 조카로 고조(高祖) 곽위(郭威)의 양위를 받았다. [주D-141]백성을 …… 뿐이다 : 군주가 악정을 하게 되면 민심이 이반하여 인망이 있는 사람에게 몰리므로 결과적으로 나라를 잃게 된다는 말. 《맹자(孟子)》이루하(離婁下)에 “깊은 소(沼)로 물고기를 몰아주는 것은 수달이고, 수풀로 새를 몰아주는 것은 새매이며, 탕(湯) 임금과 무왕(武王)을 위해 백성을 몰아 준 자는 걸(桀)과 주(紂)이다.” 하였다. [주D-142]창(昌)을 …… 되어 : 이성계(李成桂) 일파가 왕권을 찬탈하기 위해 고려의 구신들을 타도할 목적으로 확대한 옥사(獄事). 위화도 회군(威化島回軍) 후 우왕(禑王)이 폐출되고 이색(李穡)ㆍ조민수(曹敏修) 등에 의해 우왕의 아들인 창왕이 섰는데, 창왕 1년에 성계 일파는 폐가입진(廢假立眞)이라는 구실을 내세워 창왕을 폐하는 한편, 창왕 옹립에 공이 컸던 이색ㆍ조민수 등에 화를 입혔으며, 우(禑)를 알현한 일이란 창왕 1년 김저(金佇)와 정후덕(鄭厚德)이 유배지에 있던 우왕을 알현하고 이성계를 제거하라는 밀지를 받았으나, 누설되어 일이 실패됨과 동시에 많은 사람이 화를 입은 사건이다. 끝으로 이초(彝初)의 일은, 윤이와 이초 두 사람이 명(明)의 힘을 빌려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고, 고려의 원로 대신들이 보내서 왔다고 하고 명 나라에 들어가 이성계를 무고(誣告)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이들을 사주(使嗾)했다는 이색ㆍ우현보(禹玄寶) 등 10여 명이 화를 입은 것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