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을 결심하는 저녁에는 1 외2편
- 낡은 계단 뒤에 처박힌 마른 부케를 누구에게 받았더라
그걸 왜 받았지
백화점 쇼윈도에 가만히 내려놓고 왔는데 왜 여기 있지
정혜영
나는 오늘 뿔 달린 순록, 모자 속에 감춘 뿔이 자꾸만 삐져나온다
왼발과 오른발이 서로 발길질을 한다
창문 밖에는 흰 눈이 오고
지구가 시작된 어느 때로 슬라이드 필름이 거꾸로 돌아가고
유전자 속에서 인류가 인류를 부르는 소리
돌아와, 돌아갈까
순록의 뿔에서는 막혔던 방언이 쏟아지고 그 방언이 폭설이 되면 눈 속에 갇힌 하얀 말들이 너의 청혼이라고 생각할래
쉿. 이건 내 생에 없던 계획
순록이 지친 날도 백야는 계속되고
아침엔 자고 밤이면 일어나서
여름 내내 북구의 폭설을 배달하지
모자를 벗은 순록이 썰매를 끌고 내 집 앞을 지나가는 동안
공중에서 사라지는 고양이는 생각이 골똘하고 눈 위의 발자국은 담장에 박힌 파란 유리 조각을 생각해
너 없는 연대기가 나에게 무슨 소용이지, 땅이 꺼지면 남극에 닿을까, 북구에도 비가 올까. 비가 오면 그냘처럼 네가 내 앞을 지나갈까
나 하나도 모르겠고 너는 더 모를 것인데, 그럼 안녕!
빨간 벽돌집을 지었다 헐었다 수선화 알뿌리를 갈무리한다 중요한 것은 앞으로 다가올 시간이니까 자꾸만 지나갈 시간이니까
박공지붕 아래 하얀 테이블보를 깔고 목이 긴 와인잔을 기울이며
다시 시작하려고
한 손에는 포크를 한 손에는 스푼을
왼손과 오른손은 상관없어
순록도 수선화도 포크에 돌돌 마는 거야 스파게티를 우리가 놓친 시간이라고 생각해, 뱀 같은 허물과 킬 힐의 실수와 사랑에 대한 관념을, 식탁 위에 쌓인 침묵과 씽크볼 안에 던져 놓은 대화를
좀 어떻게 해봐, 삼켜야 할지 우물거려야 할지, 포크를 사용해서 스푼으로 받치고
오늘도 어김없이 소심한 감각과 섬세한 눈빛은 TV 모니터에 내어 준 채
서문에 집착하는 사람처럼
처음 간 레스토랑 입구에서 나는 왼쪽을 바라보고 너는 오른쪽을 바라본다
너는 긴 머리카락의 소녀를 좋아하고
나는 날씨를 따라 머리카락을 길렀다 잘랐다
너는 활자들 속에서 책벌레가 기어 나오는 강변의 낡은 아파트를 좋아하고
나는 살아서 움직이는 오로라가 되고 싶어 지상에 없는 애인에게 메신저를 보낸다
네가 그렇게 빨리 죽을지 몰랐지,
우린 그때 결혼도 이혼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몰랐지
알래스카로 아프리카로 아시아로
연말이 되고 구세군의 종이 울리기 전에 동방박사들이 따라 간 별 빛을 찾아 어디론가 나서아지
접시에 남은 소스가 아니라 지도에 없는 별을 따라
새들은 공중에서
사막을 건너 멕시코 장벽을 넘으려던 여자의 심장이 멈췄다
맨발은 더 이상 모래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선인장이 가시
를 견디고 있다 독수리들이 그녀의 마지막을 견디고 있다
뒤늦게 도착한 국경수비대가 흩어진 소지품을 챙긴다 발을
떠난 신발이 국경을 바라보며 저만치 엎어져 있다 인적이 드문
밀입국로, 성공하기 제일 어려운 루트, 사막과 더위와 가난과
희망, 어느 것이 더 무모했을까
국경수비대는 흐트러진 몸을 담요로 덮어주고 옷깃을 여민다
경고문이 적힌 소용없는 팻말들, 사람들 사이에서 사라진 말
들, 그녀의 마지막 길에 거수경례를 한다
국경을 넘으려는 자동차들이 줄을 지어 서 있다, 없는 트렁크
속의 마리화나, 없는 고가의 물건들, 국경을 넘으려는 사람들은
지은 죄가 없어도 액자 속에서 얼어버린 파도 소리가 들린다 심
장의 파도 소리가 들린다
새들, 중앙선을 넘고 국경을 넘어 날아간다 공중에서 죽음을
맞는다
국경은 보였다가 안 보였다가
저녁에 박하
흰 커튼으로 무얼 가릴 수 있을까
휘발된 아침이 돌아오면 처음인 듯 들어오는 빛
그날 아침 얼굴은 너무 차가웠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때처럼 나보다 나를 더 간섭하는 것
새 연필, 새 노트,
손대지 않으면서 자꾸만 새것을 사고 있다
우주 공간 어디선가 네 목소리가 낯선 행성을 돌고 있나 보다
창을 열면 박하 향이 공기 중에 머물다 사라진다
날이 밝으면 사라지는 새벽노을, 항상 곁에 있을 것만 같았던 사람들
봄이면 푸른 들판에서 불쑥 손 내미는 감정처럼 환한 대낮에도 그 자리에 있었던 별
뭘까, 몸을 가진다는 것은
이 창백한 별을 스처 지나간다는 것은
스위스라는 나라 알지, 거긴 죽음을 선택할 수 있대, 왜 우린 캄캄해져야 별을 볼 수 있지
그 별은 이미 폭발했거나 거기 없을지도 몰라, 별은 우주 공간을 달려서 지금 막 우리 눈에 닿은 거래 죽은 다음에도 캄캄하게 달려온 거지, 네가 빛을 향해 달려가듯이
◈정혜영
▲2006년 『서정시학』 등단
▲시집 『이혼을 결심하는 저녁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