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살아요?(요6:26-27)
2021.12.26 송년주일, 김상수목사(안흥교회)
오늘은 2021년 송년주일이다. 운동선수나 배나 자동차에만 속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인생의 속도도 중요하다. 그리고 늘 그렀듯이 속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올바른 방향이다. 자동차나 배나 또는 하늘을 향해 힘차게 솟구치는 우주선이 아무리 속도가 빨라도 방향이 어긋나 있으면, 그 속도는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만다. 인생도 마찬가지고 신앙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어렸을 때는 별표시가 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고단한 나그네의 쪽잠 같은 세월이 지나고, 마침내 인생 송년의 날이 되었을 때에 도착하는 지점은 하늘과 땅의 간격보다 크게 된다. 바꿔 말하면 오늘 송년주일 이 시간에 우리들이 믿음으로 예배하는 자리에 있다는 것은 곧 천국행 여객선 안에 지금 내가 있다는 증거이다. 그 여객선의 이름은 안흥성결교회호(號)이고, 선주는 하나님, 선장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며칠 전에 설교준비를 위해 자료를 수집하던 중에 “왜 살아요?”는 동영상을 잠깐 보았다. 어느 유튜브 채널 운영자가 서울 홍대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왜 살아요”라고 질문하고 대답을 듣는 내용이었다. 그 동영상을 보면, 갑자기 질문을 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잘 모르겠습니다”, “먹기 위해서요” 등으로 대답했다. 간혹 “효도하려고요” 또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요”라고 대답하는 청년들도 있었다.
그 장면을 보면서 우리교회 성도님들에게 이와 유사한 질문들을 한다면 뭐라고 대답할지가 궁금했다. 그래서 실제로 몇 분에게 왜 사는지, 사는 목적이 무엇인지를 질문해 보았다. 그랬더니 일반인들과는 상당한 차이가 나는 대답들을 들을 수 있었다. 그 대답들은 대체로 ‘하나님을 영광을 위하여, 영혼구원, 전도하기 위하여, 천국에 가기 위해서, 좀 더 기도를 많이 하려고’ 등 이었다. 아마 지금 이 자리에서 똑같은 질문을 한다면, 비슷한 대답들이 나올 것이라고 보여 진다. 이것은 현재 우리 교회나 성도들의 삶의 방향이 어떠함을 잘 말해주는 것이고, 앞으로도 어떠해야함을 잘 말해주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예전에 서울 어느 미용실에 “머리에 미쳐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 말 자체가 맞고 틀리고를 떠나서 그것을 내 건 미용사의 생각이 무엇이며, 삶의 방향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 수 있는 문구였다. 그로부터 불과 1-2년이 채 안되었을 때, 그 미용실은 넘치는 손님으로 인해 그 근처에 더 넓은 곳을 얻어 이전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세상 것에도 미칠 정도로 목숨을 거니까 어느 정도의 지경이 넓혀진다면, 하물며 우리는 영원하신 하나님을 믿는 일에 목숨을 걸고 있는가?
영국 화가 존 에버렛 밀레이(J.E,Millais,1829-1896)가 그린 “솔웨이의 순교자”라는 미술 작품이 있다. 이 그림은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 솔웨이라는 해안가에서 기둥에 묶인 상태로 밀려오는 바닷물에 잠겨서 순교하면서 기도하는 장면이다. 그림 속의 여성은 17세기 스코틀랜드에 살던 “마거릿 윌슨”이라는 18세 된 소녀이다.
당시에 영국 왕 제임스7세는 영국교회의 수장이 되고자 했다. 이에 대해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를 중심으로 왕의 간섭을 거부하는 운동이 벌어졌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그 누구도 교회의 머리가 될 수 없다고 확신 때문이었다. 마거릿 윌슨도 이에 동참하다가 익사형을 받았다. 당시 사형 집행관들은 마거릿에게 단지 국왕을 교회의 머리로 인정하는 몇 마디 선서만 하면 살 수 있다고 회유했다. 그러나 그녀는 회유를 거부하고 순교자의 길을 택했다. 그녀는 밀려오는 바닷물에 온 몸이 잠기고, 마지막 호흡이 끊어지는 순간까지도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마가릿 윌슨의 최후 모습은 우리들이 진짜 목숨을 걸어야할 올바른 인생의 방향이 무엇인지를 잘 말해준다.
가끔 마치 무슨 심오한 철학이라도 깨달은 듯이 고개를 도리도리하면서 쇳소리로 “인생 뭐 있습니까? 짧고 굵게 사는 거죠!”라는 식의 말을 하는 용감한(?)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의 삶은 한 방이 아니라, 한 번이다. 그리고 그 후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 인생의 길이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위해 살았느냐하는 것이다. 살아온 연수와 상관없이 영원한 하나님을 위해 살았다면(또는 살고 있다면), 그 사람은 가장 가치 있는 인생을 산 것이다. 지금 당신이 목숨을 걸고 있는 것은 영원한 것인가, 영원하지 않은 것인가?
2021년도 우리교회 표어는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요6:27)”이었다. 금년 첫 주일에 이 말씀을 본문으로 설교했었다. 그리고 오늘 송년주일에 다시 똑같은 본문으로 설교를 하고 있다.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올해 마지막 주일 설교를 준비하면서 본 설교자도 다른 사람 이전에 나는 어땠는지에 대해서 먼저 스스로를 깊이 돌아보았다. 다 같이 다시 한 번 요한복음 6장 26-27절 말씀을 믿음으로 읽어 보자.
“2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27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요6:26-27)
이 말씀은 오병이어의 기적이 있었던 이튿날 하셨던 말씀이다. 하루 전 날 기적을 체험했던 사람들이 갈릴리호수 건너편에 있는 가버나움에 까지 배를 타고 예수님을 찾아서 몰려왔다. 그런데 주님은 그곳까지 찾아왔던 목적을 지적하시면서, 그들에게(또한 우리들에게) 새로운 인생의 방향을 제시해 주셨다. 그것이 바로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에서처럼 주님은 우리에게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주시는 분이시다. 그렇다면 주님이 주시는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영원한 생명의 떡(양식)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말씀하신 것이다. 요한복음 6장 47-51절 말씀을 다 같이 찾아서 읽어보자.
“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요6:47-51)
또 예수님은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과 삶의 방향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요6:38-39). 이 말씀들처럼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 곧 영생을 얻는 것이며, 또한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먹는 것이다.
“38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6:38-40)
그렇다면 여기서 이 말씀대로(표어) 살기를 힘썼는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한 해의 끝자락에 선 오늘 연초에 묵상했던 말씀을 돌아보면서 반성과 감사를 동시에 하게 된다. 말씀의 저울에 나(우리) 스스로를 달아볼 때 부족한 부분들이 많았던 것에 대해 깊이 반성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향해 방향을 설정했고, 주님의 뜻대로 살고자 노력했던 우리의 중심을 가상히 보시는 하나님의 성품에 감사한다. 이런 때 위와 새로운 결심을 하게 하는 찬송가사가 생각난다. 찬송가 597장 “이전에 주님을 내가 몰라”이다.
“(3절) 천하고 무능한 나에게도 귀중한 직분을 맡기셨다 그 은혜 고맙고 고마워라 이 생명 바쳐서 충성하리
(4절) 나하는 일들이 하도 적어 큰 열매 눈앞에 안 뵈어도 주님께 죽도록 충성하면 생명의 면류관 얻으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지역 주민 여러분들이여, “왜 살아요?”라고 질문할 때(또는 스스로 생각할 때),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언제든지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산다’라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되자. 그러므로 만약 한 해를 돌아보면서 주님의 말씀 앞에서 반성과 감사를 하며, 새해에는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출발과 동시에 전심전력을 다해 달리자. 이렇게 될 수 있도록 성령님께 우리 마음의 중심자리를 내어 드리자. 이것이 우리들이 살아가는 올바른 이유와 목적과 방향이며, 가장 가치 있는 인생을 살아가는 성도의 모습이다. 주님이 우리와 늘 함께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