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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학교밑창에서 소주를 마시며
어느 덧 뉘엿뉘엿 해가 저문다. 미처 옷깃을 여미지 못한 랏족의 강이 달랏의 들이 해질녘을 바라보며 붉은 색감을 쏟아낸다. 나는 그만 황홀경에 젖어 눈물이라도 쏟을 판국이다. 산이며 들이며 하루 종일 미미함을 보듬고 쓰다듬고 못 가진 자의 가슴을 어루만지다 이제야 돌아서는 해. 강물에 살포시 말간 얼굴을 헹구자 붉은 빛 한 자락이 금세 은빛으로 출렁인다. 해는 이 세상에 마이더스 존재다. 천혜의 경치를 가진 달랏에서는 해님으로 달님으로 어느 것 하나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다. 아마 이쯤 뚜옌 럼 (Tuyen Lam )호수의 ‘Sunset View Place’는 붉게 타들어가며 울고 있을게다. 참 이국의 노을은 시린 듯 고운 듯 갈피를 못 잡게 한다. 그러다 그리움도 쌓이고 향수병도 생기는가 보다.
우리는 숙소로 돌아왔다. 거기서 오늘의 젊은 가이드와 작별했다. 하루 종일 우리를 위해 시간을 내준 젊은 친구, 저녁을 같이하자고 해도 한사코 싫다한다. 그저 고마울 뿐인 후이 학생. 벤츠기사도 식당에 우리를 내려놓고 떠났다. 맛 나는 저녁시간, 우리가 간 곳은 Tran Quang Khai Street에 위치한 Song May cuisine 레스토랑. 쩐 꽝 카이(Trần Quang Khải:1241 ~ 1294 )는 남딘(Nam định)성(省) 태생으로 쩐(Trần) 왕조 시대의 명장이다. 그는 쩐 왕조의 초대 왕 태종(1225-1258)의 셋째 아들이자 2대 성종(1258-1278)의 친동생으로 몽고군이 침략하였을 때 익히 들어 잘 아는 쩐흥다오와 함께 혁혁한 전공을 세운 인물이다.
이곳은 달랏 시내에서도 제법 떨어진 외곽인데 이곳에서 쩐 왕조의 명장을 만나다니....
건물 전체가 목조로 장식한 클래식한 구조인데 현대식 유리와 콤비를 이루어 밥알을 흘리면 안 될 것 같은 중후함과 정장을 해야 할 것 같은 근사함을 선사하는 곳이다. 바깥쪽에서는 탐 콴 (Tam Quan) 문을 보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꾸며져 있었다. Da Lat에서 가장 독특한 문이라 한다. 틈새의 돌을 흐르는 물줄기가 있는 바위 정원은 마치 우리 고향처럼 아늑한 마을로 향하는 것처럼 친근감이 들었다. 전망이 좋은 곳에 자리한 Song May cuisin는 바라다 보이는 전경이 수려하여 산과 언덕 경관을 감상하며 식사를 할 수 있는 특혜가 또한 있다. 데이트 코스로는 그야말로 안성맞춤인 곳이다. 나는 거기서 바라보는 비닐하우스로 해서 이제 막 켜지는 가로등 불빛 사이로 어느 농촌 마을의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저녁을 살펴보는 듯 낯선 이국의 정취를 제대로 만끽했다.
우리가 먹은 음식은 껌찐또이(마늘로 볶은 밥) 고야스푸(국),새우구이, 가지튀김을 방달랏 포도주와 곁들여 맛있게 먹었다. 제법 음식 값이 나오겠다 싶었는데 석 박사님이 어느 참 식사 값을 내셨다. 그 덕분에 이곳에 와 이렇게 즐겁고 혜택이 이만저만이 아닌데 식사까지 대접을 받으니 황송하기 그지없어 내가 떼를 썼지만 이는 허사가 되고 말았다. 그 바람에 분위기만 괜스레 어색해지고 말았다. 호의와 배려, 그 경계가 모호할 때가 참 많다. 한때 어느 영화 때문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줄 안다.’ 라는 말이 한동안 유행했었다. 호의로 계속 친절을 베풀면 자기가 당연히 받아야할 권리인줄 착각하는 무례하게 구는 사람이 있어서 나온 말인데 갑 질 관련해 우리나라 사람들이라면 두고두고 생각해볼 문제다.
그런데 웬 비닐하우스, 겨울도 없는 곳에 굳이 돈 들여 비닐하우스를 장만할 필요가 있을까. 그런데 이는 모르는 말씀, 고산지대이니 이를 활용한 특용작물이 돈이 되는 것이다. 거기서는 흔해빠진 게 열대과일이 아닌가. 베트남 북부의 사파와 산악지역의 계단식 논과 밭은 참으로 정겹고 아름다운 풍경으로 정평이 나 있고 나는 그 언젠가 이를 달력으로도 본 적이 있다. 이곳도 사파처럼 계단식 논과 밭으로 채워졌을 공간인 것을 지금은 계단식 하우스가 자리 잡고 있다. 주로 꽃과 특용작물을 재배한다고 하고 꽃은 한국으로 까지 수출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말이다 내가 안 놀라운 사실, 저 비닐하우스를 개발하고 지도해온 사람이 누구냐 하면 바로 한국 사람이다.
달랏(Da Lat) 사람들은 김진국(金振國·75) 교수를 '파파'라고 부른다. 베트남 명문 달랏대학교의 Le Ba Dung 총장도 "나는 파파가 둘이다. 한 분은 나를 낳아주신 아버지고 다른 한 분은 파파 킴이다"고 말한다. 총장뿐만 아니라 동양학부 교수들도, 대학생들도 그를 보면 "파파"라고 부른다. 대구효성여대에서 화훼장식학을 가르치던 그는 1990년대 초반 '제2의 정착지'를 찾아 동남아 10개국을 2년간 돌다가 1994년 달랏을 찾았다. 현지 관공서와 담판을 지어 산비탈 돌산 개간을 허가받았다. 움막을 짓고 삽과 괭이로 바위를 깨고 돌을 날랐다. 8년 동안 어깨가 으스러지고 손바닥이 까지는 험난한 작업으로 5000평을 계단식 밭으로 개간했다.
첫해 한국에서 가져다 심은 난(蘭)과 장미 2만주는 대부분 도둑맞았지만 그 다음해엔 비닐하우스를 세우고 안개꽃을 심었다. 해발 1500~1700m 고랭지라 품질이 최고였고, 5~11월 우기(雨期)에도 비닐하우스 '비 가림 재배'로 연중 생산하면서 대박을 터뜨렸다. 1년에 한두 번만 수확하던 현지인들은 연간 네 차례나 수확하는 김 교수를 보고 따라 했다. 해가 갈수록 비닐하우스가 달랏의 들판을 채웠고, '비닐하우스 바다'는 달랏의 상징이 됐다. 밤에는 비닐하우스 불빛으로 장관을 이루었다. 전깃불로 꽃들의 개화기를 조절하는 선진 농법이 보급된 것이다.
'한국에서 온 미친 노인'은 점점 '달랏의 보배'가 됐다. 김 교수는 회사를 만들어 자신이 생산한 화훼·채소는 물론 이웃이 생산한 농작물도 사들여 대도시에 출하해줬다. 국화와 카네이션의 일본·싱가포르 수출 길도 열었다. 그러는 사이 달랏의 화훼·채소 농가는 부유해졌고, 집들은 그림엽서처럼 예쁘게 변해갔다. 베트남 1인당 GDP가 1000달러 정도지만 달랏의 농가 수입은 4000~5000달러에 이른다. 그의 도움으로 달랏대에는 2005년 농과대학, 2006년 난(蘭)연구센터가 만들어졌다. 2004년엔 한국어학과를 개설해 작년 봄까지 졸업생 220여명을 배출했다. 달랏대는 지금 한국의 26개 대학과 자매결연을 하고 있다. 신문에 적힌 그의 말이 씩씩하고 참으로 달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해요. 지금 한국에 가면 노인 취급을 받겠지만 여기선 내가 필요한 사람들과 할 일이 아직도 많아요." >
그는 제2의 고향 달랏에 뼈를 묻을 생각이라고 했다.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다'는 말이 있지만 평소 이를 도외시하고 막무가내로 산 내 입장에선 그나마 남은 한 가닥 희망은 남들이 나를 보는 뒷모습이다. 떠난 빈자리,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싶은 소망이 내게 있다. 저 붉게 물든 저녁놀처럼. 김교수, 그는 정말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이다. 자신은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으나 우리가 보는 그의 뒷모습은 곱게 물든 저녁놀을 그대로 닮았다. 바삐 살던 그도 이제야 비로소 행복을 제대로 찾았는지도 모를 것이다.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택시를 타고 호텔로 돌아왔다. 바로 헤어진다는 게 못내 아쉬웠다. 지난 번 석교수가 그의 아내와 남은 짐을 챙기러 왔을 때 어떻게 지내느냐는 말에 그가 한 말,
<아침에 일어나 우선 쌀가게를 들르고 반찬집도 들르고 약국에 들러 우유도 사고 그러고 지나다보니 자연 동네 아저씨가 다되어 웃음도 짓고 인사도 하고 그럭저럭 잘 살고 있습니다.>
나는 그 말이 꽤 감칠맛이 났고 우유를 약국서 산다는 그럭저럭 사는 소박한 동네가 왠지 보고 싶었었다. 우리네도 학교 뒷동네는 다 그렇게 옹기종기 살지 않던가. 그 시절 대학원 다닐 때 실험실에 틀어 박혀서는 꼼짝 않다가 쌀이 떨어져 어쩔 수없이 터덜터덜 동네어귀를 배회하던 기억이 새삼 어제같이 정겹게 다가왔었다. 그런 동네는 뭐든지 도심에 비해 가격은 거의 절반 수준이다. 학사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침 오늘 오가다 보니 달랏대학교를 수차례 경유하여 지나갔는데 그때마다 지피는 숯불꼬치구이가 엄청 우리를 유혹했었다. 야! 냄새 좋다. 이 말은 저녁 때 괜찮다면 아니 웬만하면 한 번 들르자는 모종의 암시이며 모략이다. 술꾼들은 개척정신이 유별나다. 이번 여행길에 동참 안 한 분인데 만약 그분이 왔다면 암시고 뭐고 다 소용이 없다. 바로 그곳으로 직행이다. 그가 이번 여행에서는 없지만 그래도 발동 걸 릴 예비주자가 적어도 두 명은 존재한다. 내 경우 지금은 술을 할 처지가 못 되지만 나도 한때 알아주는 술꾼이었다. 그 덕분으로 ‘조선의 꽃 열하일기’ 라는 글 집을 발간할 수 있었다고 나는 말한다. 연암 박지원이 바로 술꾼이고 나는 그를 바로 알아보았기 때문 독파하는데 큰 무리가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술꾼으로 살던 나의 젊을 적 이야기를 하나 소개 한다. 술 한 말은 못 지고 가도 마시고는 간다고 하던가. 그 말이 꼭 맞는 말이다. 나란 사람은 서울에만 가면 문제였다. 끼리끼리 만난다 하더니 그 말대로 내 친구 또한 술꾼이다. 그런 친구들은 내가 서울에라도 행차를 할 것 같으면 우르르 몰려나온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아내에게선 지금도 여전한 눈총인데 알고 보면 참으로 억울한 처사다. 한 말을 다 비우고서야 놓아주는 친구들이니 오히려 그들이 주범인데 말이다. 오히려 나는 친구들 때문 번번이 차를 놓치곤 한다.
이쯤이면 귀가길 겪는 사연도 참 많다. 막차 시간을 대충 다 외우고 다녔었던 때다. 술 마시는 입장에서 제일 오래 버틸 수 있는 곳은 고속버스라 으레 마지막 순례는 고속버스 터미널 근처인 교대역이나 그 주변이다. 그런데 그곳에서도 막차를 놓치는 경우가 발생한다. 마지막 한 잔이 꼭 문제이다. 일어서려면 그것 마시면 정확히 차 시간이겠다는 통에 마시고나면 아슬아슬 놓치게 되는 것이다. 화들짝 놀라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는데 떠난 차를 어쩌겠는가. 친구들은 이미 갔고 참으로 난감한 노릇이다. 어떤 때는 대전행이 끝이 났으니 진주행을 무작정 올라 탄 적도 있다. 텅텅 빈 칸에 올라타서는 고속도로 한가운데까지 진입 할 때 까지 가만 앉아 있는 거다. 이젠 내려놓을 수도 없다 할 쯤 기사아저씨를 찾아간다.
술은 억수로 취하였다 싶으니 어쩌지 못하고 아저씬 대전 톨게이트 지점에 떨쳐놓고 간다. 그래도 안 되면 또 어떻게 하는가. 터미널 옆에 번개차가 서있었다. 난 번개차란 것을 세 번 타보았다. 한 번은 서울 역에서 타 보았는데 기가 막힌 것이 부산까지 가는 사람이 기차를 놓쳐 탔는데 대전에서 그 기차를 잡아주는 조건으로 번개 차를 탄 것이다. 믿어지지 않았다. 대전까지는 휘어진 도로가 없기에 쫓아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KTX가 나오기 전 이야기다. 결국 그 손님은 약속한대로 대전서 기차역을 향하였다. 그러니 그 상황 그 차 속도에 대해선 상상이 가능하리라. 기차를 타면 술김에 대전 역을 지나쳐 김천까지 간 것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이번 여행에 안 오셨다는 어디서든 술 하면 바로 go를 외치는 그 분은 밀양까지 가셨던 분이다.
우리는 점 찍어둔 바로 꼬치 집으로 향했다. 솔직히 사모님들이랑 같이 있으면 술을 맘 놓고 마시지 못한다. 덩달아 부부동반을 한 분도 사모님을 두고 용수철 튕겨져 나오듯 빠져 나왔다. 나오자마자 화색이 돌고 환해지는 것을 뭐라 해야 하는지 나는 모르겠다. 그런 점에서 용수철을 비유로 쓴 것은 글의 과실은 아니다. 나는 사실 김 이사님이 의아했었다. 다들 맥주를 마시니 마시기는 하는데 이 동네는 얼음을 잔뜩 부어 씨알꼽쟁이 알코올 농도도 안 되니 그로서는 허기져 어찌 견디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역시 내 생각이 맞다. 그는 앉자마자 소주를 시켰다. 소주가 없다 하자 그는 멈추지 않았다. 나가서 기어코 30도 짜리 소주를 사들고 왔다. 참 이번여행에서 이해 안 간 것이 술에 대해서다. 베트남 사람들이 술을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이만 보였다.
내가 아는 상식과는 전혀 달랐다. 사실 그들은 소주를 무척 좋아 한다. 쌀이 풍성한데 술을 싫어할 리 없다. 그간 내가 EBS 고부열전에서든 하노이에서 직접 본 바로는 술꾼이 득실하였다. 술 때문 간이 정상이 아니라는 말도 나오는 베트남사람들이다. 북부지역은 춥기 때문에, 나름대로 축제와 건강을 위한 술들이 소수민족별로 빚어지고 있다. 최근 하노이에는 직접 소수민족들의 음식과 술을 파는 음식점들이 늘어나고 있다. 베트남의 술은 당연히 넓은 벌판에서 풍부하게 생산되는 쌀로 빚는다. 보통 40도 정도. 조금 비싼 술은 50도 근처까지 가고, 조금 낮은 술은 30도. 시골에 가면 결혼이든 상을 당했든 그 독한 술을 빚어내고 마신다. 한국 사위 얻었다고 연일 퍼마시는 장면을 TV로 숫하게 보았었다. 하노이에는 약초라든지 뱀을 넣은 술독 항아리가 제법 많고 이를 또 즐긴다.
하노이 전통술집
내가 그간 알아 둔 그들의 사는 얘기를 잠시 펼치면, 알다시피 숟가락과 젓가락을 사용하는 나라는 우리나라와 소수 민족 중에 베트남도 속한다. 베트남인들은 긴 젓가락만 사용해서 밥을 먹는데 한 끼에 보통 성인 남자가 먹는 양이 3~4그릇이다. 젓가락만 사용하다 보니 밥그릇을 들고 먹어야 하며 국물은 퍼 마시는 형상이다. 육류나 기타 음식들은 식사 중에 자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요리 과정에서 잘려지므로 식탁에서 포크는 거의 필요가 없다. 대신 이들은 식탁에서 질그릇과 숟가락 그리고 나무 상아나 은으로 된 젓가락을 사용한다.
베트남인들의 식습관은 공동생활의 특징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그들은 여러 사람이 같이 먹을 수 있도록 음식을 커다란 그릇에 담아 식탁 위에 놓고 공동으로 먹는다. 밥통에서 각자 자신의 조그만 밥그릇에 밥을 퍼 담은 후 밥그릇을 입가에 갖다 대고 젓가락으로 밥을 입 안으로 밀어 넣는다. 따라서 밥그릇은 항상 손바닥위에 올려놓게 된다. 젓가락은 육류 생선 또는 야채를 집어서 밥 위에 올려 놓는 데도 쓰인다. 반면 숟가락은 국을 먹는 데만 쓰인다. 밥을 다 먹으면 젓가락을 밥그릇 위에 가지런히 얹어 놓는다. 밥그릇에 아직 밥이 있을 때 젓가락을 밥에 꽂아 두는 것은 매우 불쾌하게 여긴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불교 신도들이 죽은 사람에게 바치는 공물을 상징하기 때문으로 우리도 제삿날 그렇게 하지 않는가.
가끔 사람들에 따라 자신이 먹던 젓가락으로 음식을 집어서 상대방 밥그릇에 얹어주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상대방에 대한 친절의 표시다. 베트남인들은 찬물을 거의 마시지 않는다. 물론 물이 좋지 않아서 그런 이유도 있지만 전통적으로 뜨거운 차를 마시는 것을 좋아한다. 때문에 집집마다 조그만 찻잔과 찻주전자가 있으며 항상 뜨거운 물에 차를 넣고 빨리 식 지 않도록 잘 보관한다. 차는 조금씩 음미하면서 마셔야지 한꺼번에 벌컥벌컥 마시는 것은 교양이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찻잔이 비게 되면 상대방의 찻잔에 차를 채워주지만 특별한 차도는 없다. 차를 마시는 것이 일상화 되어 있기 때문이다.
술을 마실 때도 이들은 커다란 항아리에서 뜬 것을 각자의 그릇에 나누어 마신다. 많은 사람이 모여서 술을 마실 때는 여덟 사람씩 무리를 짓는다. “술은 네 명 차는 세 명 그리고 아편은 두 명이 마셔라”는 속담이 이런 관습을 잘 드러내 준다. 술을 마실 때 베트남인들은 상대방에게 술잔을 돌리는 법이 없다. 하지만 맥주나 순한 술을 즐기는 베트남인들은 상대방의 잔을 비지 않게 계속 채워주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런데 말이다. 술 아편 소금 하면 베트남은 절절한 아픔이 있다. 우리도 한 때 밀주를 담지 말라 했는데 우리는 쌀이 모자라 그렇다지만 그들은 세금 때문 밀주를 담지 못하게 했었다. 소주를 좋아하는 베트남 사람들인데 밀주를 담지 말라니... 다음에 아무래도 아픈 과거지사 이 이야기를 해야 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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