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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1류의 탈을 쓴, 3류 꼴-서정들은, '정신주의적인 것'이고 '극極-서정적인 것' 들이다
박 남 철
[전략]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질문해볼 수 있다. 아이러니는 주로 긍정적으로 기능하는가, 아니면 부정적으로 기능하는가? 아이러니가 긍정적이고 건설적으로 작용한다는 입장은, 대개 아이러니를 지배적 권위에 대항한 싸움에서 강력한 무기로 여길 수 있을 때 받아들여질 것이다. 반면 부정적인 아이러니는 아이러닉한 공격이 실패로 끝나고 말았을 때 또는 기본적으로 진지하거나 엄숙한 것을 좋아하는 보수적 입장에 선 이들에 의해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아이러니의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정치적 기능들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12) 아이러니의 발화자 혹은 그것의 해석자에 의해, 아이러니에 어떤 역할이 주어지든지 간에, 그것에는 항상 부정적인 관점과 긍정적인 관점이 동시에 존재한다.13) 김수영은 이 부정적인 것을 감내하면서 긍정적인 면모를 활용하고자 했다. 그것이 김수영 시론에서 아이러니의 전략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것을 먼저 살펴볼 수가 있었다. 그렇다면 김수영의 아이러니의 전략이 갖는 부정적인 지점은 무엇인가? 단순히 김수영이 예상한 "침을 뱉는" 행위와 같은 공격성에 지나지 않을 것인가 하는 질문이 제기될 수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이제 박남철의 시를 통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12) Linda Hutcheon, Irony's Edge, Routledge, 1994, p.27.
13) ibid., p.29.
박남철의 시 『하이데거의 「릴케론」아!』는 앞에서 다룬 김수영의 시론 『시여, 침을 뱉어라』를 상정하고 있다. 이 시 텍스트는 김수영의 시론에 나오는 "대지의 은폐"와 "세계의 개진"이라는 개념과 김수영이 그 개념들을 사용하기 위해 참고한 하이데거의 「릴케론」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게다가 패러디의 양상을 띠고 있어서 흥미로운 지점이 많다. 텍스트에는 일종의 이야기가 제시되어 있는데, 그 전반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시적 주체는 김수영을 다룬 자신의 석사 논문을 단행본으로 묶는 과정에서 다시 자신의 논문을 검토해보고자 하지만, 김수영의 시론에 나타난 이 하이데거의 개념을 검토해보는 것이 쉽지는 않다. 왜냐하면 하이데거의 논문 「릴케론」이 한국에 번역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시적 주체는 이 "한국문학의 외국어에 차단된 서글픈 현실"에 대해 개탄한다. 텍스트는 이러한 시적 주체의 현실 인식을 김수영을 중심으로 한 한국문학 전반으로 확장시키며 흥미로운 지점들을 보여주고 있다. 텍스트를 직접 읽어보기로 하자.
15년 전에
돈 내지 말고 다니라고 해서 다닌
경희대학교 석사 과정 논문을1)
이제 팔아먹어 보려고
후배인 고석이가
재찬이의 번역서를 내서 성공한
도서 출판 '이레'에서 선인세를
500만원이나 줘서
이제 팔아먹어 보려고
정리를 하다 하다
그만 울어버린다
너무나 억울해서 그만
울면서 이를 부드득 갈기도 한다
진짜로 눈물을 흘린 것은 아니니
오해하지는 마라 잘난 세계야
세계의 개진아
대지의 은폐야
나는 너희들의 전거를 찾으려고
'마르틴 하이데거의 「릴케론」'을
찾으려고 찾으려고
그렇구나 나는 벌써 진짜로 울고 있구나
세계의 개진아
대지의 은폐야
엘리엇의 전통과 개인의 재능,
「전통과 개인의 재능」의 번역본 하나 없는2)
이 한국문학의 외국어에 차단된 서글픈 현실,
이 가엾은 나의 현실,
「Tradition and Individual Talent」를
원문으로 찬찬히 읽어볼 시간도 없는
대충대충 거짓말을 하며 살아온
이 나의 서글픈 현실, 거짓말의 현실,
「풍자냐, 자살이냐」가 그래 과연 시여,
「시여, 침을 뱉어라」를 제대로 뛰어넘은 것인가
아닌가도 찬찬히 토론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이 거짓말들로 가득 찬 현실,
돌아가신 김수영 선생님에 관한 선행 연구는 같은 나이에 돌아가신 김현
선생님의 「자유와 꿈」 하나 제대로 뛰어넘고 있는 글이 없다고 판단,
감히 판단되기도 하는 우리의 이 서글픈 '한국문학'의 현실,
이 현실,
오, 그래, 너 잘난 대지의 은폐야
너 잘난 세계의 개진아
하이데거의 「릴케론」이란 것아 너
나는 너를 모르지만
나는 너를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내가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인지
『시간과 존재』인지를 읽은 척했던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제목의 느낌만으로도
나는 그 무엇을 감히 간파했다고 나는 자부해도
괜찮을 정도로 나는 감도 잡지 못하면서
거짓말을 한 건 아니라는 것도 스스로 용납을 하긴
하지만, 그러나
일본 말이라도 되어 일본 말로라도 서양의 지식의
본질을 핥을 수는 있었을 이상과 김수영, 김수영과 이상 선생님의 그
불행했던 행운에 대하여 나는 너무나 할 말이 많다
나는 너무나 할 말이 많다
나는 너무나 할 말이 많다
나는 너무나 할 말이 많다
그래
너 잘난 세계의 개진아
대지의 은폐야
나는 운다
엉엉엉......
거짓말이 하기 싫어서 나는 운단 말이다, 이 식민지의 것들아!
1) 나의 석사 과정 논문은 한 달만에 '조제남조한 히야까시[ひやかし] 같은 작품이'었다. 이 자리를 빌어서 지도 교수님이셨던, 지금은 고대로 옮기신 최동호 선생님께 감사를 드린다.
2) 「예술가의 양심과 자유」를 쓰신 김우창 선생님께 전화를 드려본 결과, '하이데거의 「릴케론」'이란 일반적으로 「예술 작품의 기원」이란 하이데거의 논문을 일컫는 것이란 조언이 계셨다. 조언에 따라서 문학평론가 이경호 형에게 다시 전화를 해서 보충 조언을 구해보다가, 뜻밖에도 「전통과 개인의 재능」이 황동규 선생님이 엮으시고 '문학과지성사'에서 출판된 엘리엇 관련 서적에 잘 번역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현재 시중에 번역본이 없다"는 말씀을 당신의 번역본에 한정하여 해주신 그 어떤 선생님의 조언을 필자가 확대 해석하여 잘못 들은 결과일 것이다.
---박남철, 『하이데거의 「릴케론」아!』 전문. [시집 『바다 속의 흰머리뫼』(문학과지성사, 2005), 제21면에서 26면 사이.]
이 시 텍스트는 하이데거와 하이데거의 「릴케론」, 김수영과 김수영의 시/시론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면서 김수영을 다룬 시적 주체 자신의 논문을 바라보고 있다. 정리하면, 이 시 텍스트는 이 하이데거/김수영/박남철이라는 세 지점을 동시에 바라보고 있으며, 뒤에 밝혀지겠지만, 이것은 아이러닉한 시선을 통해 서로 뒤엉켜져 있다.
시적 주체는 "세계의 개진"과 "대지의 은폐"의 전거를 찾기 위해 '마르틴 하이데거의 「릴케론」'을 찾는다. 그러나 그것은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한국에 그 번역본이 없는 것이다. 원서를 읽어보려 해도 시간이 없다. 그렇기에 "거짓말을 하며 살아온"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것을 검토해보지 않은 채 김수영에 관한 논문을 썼기 때문이다. 이것은 "서글픈 현실"이다. 또한 이것은 나만의 현실이 아니라 '한국문학' 전체의 현실이다. 김수영의 「시여, 침을 뱉어라」를 뛰어넘는 시론 하나 없는 것이 그러하며, 김수영론 중에서도 김현의 「자유와 꿈」을 뛰어넘은 글 한 편 없는 현실 또한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모두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시적 주체는 김수영과 김현을 제외한 다른 이들의 논의를 모두 자신과 같은 "거짓말들로 가득 찬 현실"에 놓인 존재들로 보고 있다. 그것은 '하이데거의 「릴케론」'이나 '엘리엇의 「전통과 개인의 재능」'과 같은 번역본 하나 없는 한국문학의 현실 때문이며, 그렇기에 "외국어에 차단된" 존재들은 단지 "거짓말"을 하고 있는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이렇듯 시적 주체가 판단한 한국문학의 현실은 "서글픈 현실"이며 "가엾은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외국어에 차단된" 현실에서 벗어나서 그러한 현실을 극복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좀처럼 극복되지 못한다. 시적 주체는 이러한 극복 불가능한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을 반복해서 표출한다. 시적 주체는 "일본 말이라도 되어 일본 말로라도 서양의 지식의/ 본질을 핥을 수 있었을 이상과 김수영"의 "불행했던 행운"에 대해 부러워하면서 "나는 너무나 할 말이 많다"는 진술을 반복한다. 이것은 서글프고 가엾은 한국문학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의 감정을 표출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너무나 할 말이 많다"는 반복된 진술은 정작 그 "할 말"은 하지 않은 채, "엉엉엉......" 우는 것으로 그치고 만다. "할 말"이 놓일 자리에 대신 "엉엉엉......"이라는 울음이 놓임으로써 "나는 너무나 할 말이 많다"는 진술은 곧바로 부정되는 것이다. 마지막에 가서는 이렇게 말하지 않고, 울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거짓말이 하기 싫어서"라고 진술하고 있다. 앞서 살펴본 바대로 시적 주체는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이 해야 할 것 같은 "할 말"을 하더라도 그것은 모조리 "거짓말"이 되어버리고 만다. 즉 시적 주체는 더 이상 "거짓말이 하기 싫"기 때문에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적 주체로 하여금 말할 수 없게 하는 현실적 기제는 무엇일까. 그것은 참과 거짓을 나누는 가치판단의 기준이다. 이 기준점은 바로 "하이데거"나 "엘리엇"의 논의와 같은 서양의 지식과 문화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시적 주체에게 자신의 진술을 "거짓"으로 스스로 판단하게끔 하는 강압기제라고 할 수 있다. 이 가치판단의 기준이 시적 주체로 하여금 진짜 "할 말"을 하기보다는 "나는 너무나 할 말이 많다"는 진술만을 반복하게끔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반복된 진술은 더 이상 축어적 진술로만 볼 수가 없다. 그것은 다시 말해 '나는 할 말이 없다'는 것이 될 수도 있고, 더 나아가서 '나는 할 말이 있더라도 말할 수가 없다'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이것은 시적 주체에게 말할 수 없는 지점, 말해질 수 없는 지점이 분명히 놓여 있다는 것이고, 텍스트는 그 부분을 분명히 겨냥하고 있음을 이 반복된 진술은 드러내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말할 수 없는 그 무언가를 간접적으로 지시하는 아이러닉한 진술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시적 주체는 서양의 지식이라는 가치 기준에 자신이 부합하지 못하기 때문에 참된 진술을 할 수가 없고, 그렇기 때문에 거짓된 진술만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거짓된 진술만은 하기 싫기 때문에 아이러닉한 진술을 행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텍스트에는 표면적으로 단순히 한국문학의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의 감정을 드러낸 것이라 읽기에는 석연치 않은 대목들이 너무나도 많다. 실제로 텍스트의 곳곳에서 이러한 아이러니의 지점들은 산견된다.
우선 그것은 텍스트에서 자기부정의 형태로 드러난다. 먼저 제5연에서 "그만 울어버린다"라는 진술이 "진짜로 눈물을 흘린 것은 아니니/ 오해하지는 마라"라는 진술에 의해 부정된다. 그러나 9연의 "그렇구나 나는 벌써 진짜로 울고 있구나"라는 진술에서 이러한 부정은 또다시 부정된다. 첫 번째 진술에서의 진실성은 두 번째 진술의 부정을 통해 거짓으로 드러나며, 대신 두 번째 진술이 "진짜로"라는 수식을 통해 '울지 않음'이라는 축어적 위치를 점하게 된다. 그러나 이마저도 세 번째 진술을 통해 또다시 부정된다. 여기서도 "진짜로"라는 수식을 통해 부정되고 있는데,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수식은 이제 그 효력을 상실해버리게 된다. 이제 "진짜로"라는 진실성을 드러내는 수식은 반복된 부정을 통해 그 가치를 상실하고 결국 시적 주체가 정말로 울고 있는지 울고 있지 않은지는 전혀 알 수가 없게 된다. 결국 진실성의 여부를 더 이상 판가름할 수 없게 되고 마는 것이다.
또한 18연에서 "나는 그 무엇을 감히 간파했다고 나는 자부해도/ 괜찮을 정도로"의 자기방어와 "나는 감도 잡지 못하면서"의 자기부정의 연결은 다시 "거짓말을 한 건 아니라는 것도 스스로 용납을 하긴/ 하지만"의 자기방어로 이어진다. 이 진술들은 바로 진실과 거짓의 기준점을 두고 벌이는 자기 판단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앞서 살펴본 방식 그대로 진실에 대해 "간파했다"는 자기 확신적 진술이 "감도 잡지 못하면서"라는 자기부정적 진술에 의해 탈각되지만, 다시 "거짓말을 한 건 아니라는" 진술에 의해 부정되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방어와 자기부정의 행위의 반복 속에서 참과 거짓이라는 가치판단은 여전히 불가능하다. 이것은 참에 대한 기준에 스스로가 부합하지 못하면서도, 자신은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다음 연에서의 "나는 너무나 할 말이 많다"는 아이러닉한 진술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결정적으로 ("결정적인") 자기부정의 면모는 주석 2)번에서 드러난다. 주석 2)번은 시 텍스트 본문에서 "「전통과 개인의 재능」의 번역본 하나 없는/ 이 한국문학의 외국어에 차단된 서글픈 현실"이라는 시적 주체의 개탄 어린 시선을 단번에 무색하게 만든다. 주석 2)번은 차분한 어조로 이 「전통과 개인의 재능」이란 논문이 시중에 잘 번역되어 나와 있다는 사실을 진술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이 시 텍스트 전체의 진술을 ("일순에") 거짓된 진술로 탈바꿈시켜버린다. 이것은 이 시 텍스트가 "한국문학의 외국어에 차단된 서글픈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을 드러내주고 있다고 판단하는 수신자, 즉 참과 거짓의 판단 기준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수신자에게 본문과 주석 사이에서 해석의 길을 잃어버리게 만들고, 결국 이 시 텍스트를 아이러니하게 받아들이게 할 것이다. 이것은 시적 주체의 ("철저하고도") 철저한 자기부정이다. 즉 이 시 텍스트에서 축어적 진술로 드러나는 '참'에 대한 희구와 '거짓'에 대한 안타까움을 스스로 아이러니한 방식으로 부정해버림으로써, 이 시 텍스트가 참과 거짓의 가치판단 너머를 노리고 있음을 드러내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부정과 그것의 반복은 아이러니를 드러내며, 이러한 아이러니의 방법을 통해서 진실과 거짓의 이분법은 붕괴된다. 텍스트는 표면적으로는 이 이분법의 토대 위해서 작동하고 있지만, 이면적으로는 철저한 자기부정을 통해서 그것을 전복시켜버리고 있는 것이다.
텍스트에서의 이러한 자기부정은 다시 말해서 참/거짓이란 가치판단 기준에 순응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부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가치판단 기준은 앞서도 살펴보았었지만, 서양의 지식과 서양의 문화이다. 따라서, 그것에 따라 참된 진술과 거짓된 진술이 나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텍스트는 이러한 서양의 지식에 대해 ("단순히") 순응적인 모습만을 보여주고 있지는 않다. 제6연에서 "오해하지는 마라 잘난 세계야"와 제16연에서 "오, 그래, 너 잘난 대지의 은폐야/ 너 잘난 세계의 개진아"와 21연의 "그래/ 너 잘난 세계의 개진아/ 대지의 은폐야"로 드러나고 있듯이, "잘난"이라는 수식이 이 서양의 지식을 대표하는 대상으로 지목되는 "세계의 개진"과 "대지의 은폐"를 지시할 때마다 그 앞에서 수식되어 불리고 있다. 물론, 이 "잘난"이라는 수식은 정말 잘났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기도 하겠지만, 서양의 지식을 아이러니한 대상으로 여기기 위한 의도적 장치로써 붙여졌다고 충분히 판단해볼 수가 있는 것이다.
또한 제17연에서 "내가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인지/ 『시간과 존재』인지를 읽은 척했던 것이"라는 진술에서 이 서양의 지식을 상징하는 책은 시적 주체에게 ("이제") 그 어떠한 방식으로 불리더라도 상관이 없는 대상이 되고 만다. 우리에게 그 어떤 강압까지 느끼게 한 이 외서의 이름을 ("이젠") 이렇게 불확실성과 불명료함으로써, 즉 그것이 참이든 거짓이든 혹은 거짓이든 참이든 상관이 없다는 식으로 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서양의 지식의/ 본질"의 위치를 ("이 외서가") 더 이상 점거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아이러니한 방식을 통해서 드러내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이제 "나는 너를 모르지만", "단지 그 제목의 느낌만으로도", "간파했다고 나는 자부"할 수 있는 대상이 되고 만 것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참여'와 '모험'을 통해서만 가능할 수 있는 영역이었지만, 그것은 이제 "단지 그 제목의 느낌만으로도" 쉽게 간파해낼 수 있는 ("그 어떤") 대상에 불과해진 것이다. 이러한 진술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그 어떤 가치의 근원 혹은 본질이 이제는 아주 흔한 것이 되어버렸음을, 그 가치와 그 가치의 기준을 나누게 하였던 엄격하고도 제한된 영역으로서의 진실은 이제는 흔해빠진 그 어떤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음을 이 텍스트는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텍스트는, 또한, 이러한 서양의 지식과 문화에 대한 전복을 시도하면서 똑같이 김수영에 대한 전복을 시도한다. 제19연에서 "서양의 지식의/ 본질을 핥을 수는 있었을 이상과 김수영"의 "불행했던 행운"에 대하여 시적 주체는 "너무나 할 말이 많다"고 말한다. 앞선 논의에서 이 "나는 너무나 할 말이 많다"는 진술이 아이러닉한 진술이었음을 상기한다면, 이 진술 앞에 나오는 "불행했던 행운"에 대해서도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그것은 분명한 "행운"이다. 그러나 그것은 "불행했던 행운"이다. 바로 여기에서도 또한 아이러니가 드러난다. "서양의 지식의/ 본질을 핥을 수는 있었"던 그들은 분명 "행운"이었었지만, 또한 "불행했던 행운"이라는 것이다. 그때 당시에는 행운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에 와서는 불행한 것으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맨 마지막 연에서 나오듯, "식민지의 것들"이 행한 모습들이기 때문이다.
주석 제1)번에서 텍스트의 주체는 김수영을 다룬 자신의 논문을 '조제남조한 히야까시[ひやかし] 같은 작품이'라고 칭한다. 이것은 자신의 논문에 대한 자기 겸손이다. 자기 겸손이란 ("자신이") 진술되는 것보다 더 대단하고 위대하지만, 그것보다 낮춰 말함으로써 상대에게 위화감을 주지 않겠다는 화법이다. 그러나 이 진술이 김수영이 박인환에게 「공자의 생활난」이란 시를 건네주면서 한 말이라는 사실을 바로 인지할 수 있을 때, 그리하여 이것이 다시 김수영을 패러디한 것이란 사실을 알 수가 있을 때, 그것은 바로 아이러니가 된다. 김수영이 「공자의 생활난」 제3연에서 "국수---이태리어로는 마카로니라고/ 먹기 쉬운 것은 나의 반란성일까"라고 한 진술은 바로 서구 취향에 빠져 있던 박인환을 향한 "히야까시"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텍스트에서의 이러한 패러딕한 진술은 다시금 김수영을 겨냥하고 있다고 판단해볼 수가 있다. 왜냐하면 서양의 지식에 대해 경도되었던 박인환을 희롱한 김수영 역시 시적 주체에게는 서양의 지식에 경도되었던 존재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는 "서양의 지식"을 "핥"았던 사람이다. 그렇기에 이러한 아이러닉한 발화는 김수영이 박인환에게 가했던 희롱을 떠올려주게 하고, 그럼으로써, 그것이 다시금 김수영에게로 되돌아가게 해주는 효과까지도 생기는 것이다.
이렇듯 시적 주체의 아이러니한 시선은 앞선 장에서 "완전한 자유"와 진실을 추구하려는 모험을 떠나던 김수영의 면모까지를 전복시켜버린다. 김수영은 "자유"를 추구했던 것이 아니라 바로 근원적 진리로서의 "하이데거의 「릴케론」"을 추구했던 것이고, 다시 말해서, 서양의 지식과 현실적 가치판단의 근원을 추구하려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김수영은 시적 주체에게는 단지 서양의 지식을 추구한 "식민지의 것들"에 포함될 수밖에 없으며, 그렇기에 더더욱 "불행한 행운"에 놓인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하략]
---주완식, 「한국 현대시의 아이러니의 두 양상 소고: 김수영의 '온몸 시론'과 박남철의 '해체시'를 중심으로」 부분, 『세계한국어문학』[제5집](세계한국어문학회, 2011), 제223면에서 247면 사이.
참고 1): 원래 이 산문편 즉 '해설'은 문학평론가에게 맞겨져야 할 것이었다. 그런데, 편집위원회 측은, 우선은 구두 청탁상으로, 산문편까지도 나에게 한번 써볼 것을 권해왔었다. 나는 선선히 그러마고 승낙을 했었다. 하지만, 막상, 원고청탁서를 받아보니, '박남철이 박남철을 말한다(자작시 해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나는 그만 혼비백산을 다 해버리고 말았었다. 내가 무엇보다도 더욱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것은, 『현대시학』 2011년 6월호를 통해서 읽어볼 수가 있었던 최동호 교수의 「극서정시와 유성검의 시학」인가 하는 '자작시 해설' 형식의 시론에 대한 악몽과도 같은 독서 체험의 기억 때문이었었다. 그리하여 나는 아직은, 죽어도, 알츠하이머의Alzheimer's 환자는 아니어야 한다는 자의식 때문에라도, 이렇게 또 돌아가신 우리 김현 선생님의 말씀처럼 "방법적 인용의 세계"나 다시금 탐색해볼 수밖에는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저 존경하는 우리 편집위원회 제위의 너그러우신 양해를 구할 따름이다.
참고 2): 어쩌면 최영의 선생의 '극진極眞-가라데'까지를 다 연상케 해주기도 하는 '극極-서정시'라는 것이라든지, 저 3류의 중국 무협 소설들을 단숨에 다 뛰어넘어버린, 새로운 국산 무협지적인 '유성검의 시학'이라는 걸 다 창안해놓은 저 최동호 교수의 경우와는 달리, 어쩌면 "선禪의 정신이 곧 해체解體의 정신이다!"라는 우리네 삶의 정곡을 제대로 잘 통찰해주고 있을 것이 명백한, 주완식 님에 대한 소개는 그 표지도 아름다운 학술지 『세계한국어문학』[제5집]의 별표 각주에 의하면, 단지 '교수'가 아닌, '서강대학교'라고만 표기되어 있어서 더더욱 흥미롭기까지도 하다는 것이다.
참고 3): 주완식 님의 논문이 소재한 『세계한국어문학』[제5집]을 한 권 불러서 읽어보는 김에, 그동안 인터넷 상의 제일 포털 사이트인 『네이버NAVER』의 '박남철' 검색어의 '책 본문' 카테고리에서, 꽤나 심각하고도 불쾌하게 남의 영업을 지속적으로 방해해주고 있는, 인하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의 '교수'라는, 김명인이라는 자의 『김수영, 근대를 향한 모험』(소명출판, 2002)이라는 '론문집'도 한 권 더 불러다가, 화장실에 앉아서 똥 냄새를 풀풀 풍겨대면서 대충 한번 훑어보다가, 나는 그만 그놈의 '론문집'에다가 마치 나 자신이 김수영 자신의 분신이기라도 한 것처럼 침을, 바로 그놈의 '론문집'에다가 침을, 그것도 가래침까지도 크아악, 크아악, 해내서 다 뱉아주고 말았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자는 야비하게도, 야비하게도 바로 그 불쌍한 자는, 내가 나의 김수영론에서 맨 처음으로 사용한다고 명백하고도 분명하게 밝혀놓은 바 있는 '현대'라는 용어를, 마치 김지하가 김진석이의 '포월'이라는 용어를 무단으로 마구 사용해대다가 온갖 '개망신'은 다 당해버렸듯이, 그 온 목차에서부터 그 온 본문에 다 이르기까지, 그것이 마치 도둑질은 아니라는 듯이, 살짝살짝, 작은따옴표 하나씩은 꼭꼭 붙여가면서, 그것이 마치, 새앙쥐처럼 작은따옴표 하나씩은 살짝살짝 붙여가면서, 그것이 마치, 이것은 결코 도둑질은 아니라는 듯이, "그 자신만의 '김수영론'이라는 쥐구멍 속을 쉴 새도 없이 들락거려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자의---도대체 이자가 그 얼마나 비논리적인 자일 것인가? 이자는 글쎄 아직도 바로 그, 제 태어난 곳조차도 제대로 표기할 줄을 몰라서, 그 자신의 그 잘난 협잡적 '론문집'의 앞날개에다 '강원도 도계 출생'("'강원도 삼척 출생'이 옳다!")이라고 표기해놓고 있을 정도의, 바로 그러한 자일 뿐이라는 것이다!---마치 이것은 결코 도둑질은 아니라는 듯한 '포우즈'는 바로 이자의 그 간교한 협잡적 '론문집'의 바로 그 제1장, 제1절, 제1)항, 제1)번의 각주에서부터 곧장 바로 시작되고 있었다. 즉, ("우리") 김수영-("행님")께서 당신의 '시와 산문'에다가 '현대'라는 말을 계속해서 사용해주셨으므로, 그러니까, 나 자신도 ("행님의") '용어법'을 따를 필요가 있을 경우에 한해서는, (("언제든지, 용어로서, 혹은 용어로써")) '현대'라는 표기를 사용하도록 하겠다, 라는 바로 그러하신 말씀이었다는 것이었다! 하, 그림자가 없다...... 그래...... 그래, 그래, 그토록, 그렇게, 그렇게, 참으로, 참으로, 마치 '바로 왕'("파라오Pharaoh")처럼 용감하게도 바로 그 제1장, 제1절, 제1)항, 제1)번의 각주에서부터---이자가 그 얼마나 비논리적인 자일 것인가? 두말 더 할 필요도 없이, 바로 이렇게 그 제I장, 제1절, 제1항, 제1)번 각주, 정도로 그 항목 설정들을 해주었어야 옳았다는 것이다!---표절적 궤변의 정수를 겁도 없이 바로 내뱉아주고 있었다는 것이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되었을 것인가? (("어쩨서 이런 일이 다 벌어졌을까?")) 도대체가 너무 이상하지를 않은가 말이다, 이 사람아! 어째서 자네가 처음부터 그렇게 '현대'라는 '용어'에 대하여 그토록이나 단도직입적인 집착을 계속해대게 되었을 것인가 바로 그 말이다! 글쎄, 좀이 아니고 너무나 많이 이상하지를 않은가 말이다, 이 사람아! 에라, 이 사람아, 그렇게 학문적 협잡질을 한번 해보려면 좀 제대로나 해볼 것이지, ((("도대체 이게 뭔 보슬아치의 스리 격이거나, 단지 적반하장 격일 뿐인 일")))*일 것인가 바로 그 말이다! 그러니까, 김수영이 언제 '현대'라는 '용어'를 써서 자네에게 "소론문"이라도 한 편 써낸 적이 있는 자네의 '학생'이기라도 하였었다는 바로 그러한 말이라는 것인가? 앙?
그리하여, 또, 그럼, 자네는 왜 또 그토록 굳이 박인환이 경영했었다는 서점의 이름이라는 '용어'에 대하여서는, 서점 좌측의 1층 진열창 상단에 조그맣게 한글로 의장 표기되어 있었던 '마리서사'를---여기서 '마리'는 단지 '茉莉'의 일본어 식 발음 표기였을 뿐인 것이다!---2층 건물이었던 서점 전면의 1층과 2층 사이의 정중앙에다, 횡단으로 끝에서 끝까지 길게, ((("정말 '현대'스럽게도!"))), 설치해둔 본간판의 우측에 크게 의장 표기되어 있었던 '茉莉書肆'("말리서사")는 굳이 무시해버리고서---김수영이 굳이 '書肆'를 '書舍'로 오기해놓은 건, 거의, 무의식적인, 풍자성을 띤 오기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자네의 그 자랑스럴 '론문집' 제56면과 61면 사이에다 무려 5번씩이나 굳이 '마리서사'라고 표기하면서까지 ("자네 행님의") 그 '용어법'을 구태여 따르지 않고 있는 바로 그 이유는 또한 그 무엇일 수가 있을 것이란 말인가? 으앙?
* 김명인, 「제3장 시와 정신의 궤적---'현대'를 위한 투쟁」, 『김수영, 근대를 향한 모험』(소명출판, 2002), 제98면.
[2011.9.25. / 시인, 박남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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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도대체, 이러한 글의 내용을 누가 왜 지웠다는 것입니까? 지운 사람은 어서 나와서 그 이유를 한번 소상히 잘 말씀해보시도록 하세요. '운영자'는 아무나 하는 겁니까? 그 자신이 스스로 자격이 없다 싶으실 때는 바로 그 '운영자'의 직함을 내놓으시고, 저에 대해서는 그 "정신적인 피해 보상"을 어떻게 해줄 것인지, 그 구체적인 방안을 한번 잘 말씀해봐 주시도록 하세요. [시인, 박남철]
흥해의 자랑이신 시인 선배님이 계셨네요 글 잘읽어봅니다 첨엔 좀지루했지만 몇번을 되새기며 읽었습니다 자랑스런 선배님 ~카페에 시인의방을 따로 만들어 올렸으면 하는 제생각입니다 그래야 연결이 될것같기도 해요 좁은소견이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