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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린고비 이야기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서 자린고비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충북 충주시 신니면 대화리에는 자린고비의 묘가 있고 지금도 후손들이 춘추로 시제를 올리고 있다. 현재도 ‘자린고비 같다’는 말이 자주 쓰일 만큼 인색한 사람의 대명사이지만 그가 충주에 살았던 실존 인물이라는 사실은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충주 지역에는 자린고비의 일화가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어 그 몇 편을 소개해본다.
하루는 자린고비가 새벽 일찍 일어나 마당을 쓸고 있었다. 그때 그 마을에 10년 동안 드나들던 북어장수가 지나가다 자린고비를 보았다. 북어장수는 지금껏 한 번도 자린고비에게 북어를 팔아 본적이 없어 이 일만 생각하면 기가 막히고 속이 상했다.
‘제 아무리 지독한 자린고비라 하지만, 돈을 내고 사먹기 싫어서 그렇지 공짜라면 안 먹을 리가 없다. 일단 자린고비가 북어를 먹기만 하면 그때 들어가서 북어값을 받으면 되겠지.’
북어장수는 나름대로 꾀를 내고는 북어 한 마리를 담 안으로 집어던졌다. 마당을 쓸고 있던 자린고비는 하늘에서 북어 한 마리가 마당으로 떨어지자 깜짝 놀라며 북어를 주어들고 한 동안 생각에 잠겼다.
‘이거 어디서 밥버러지가 떨어졌구나.’
자린고비는 중얼거리면서 북어를 담 밖으로 던져버리는 것이었다. 이것을 본 북어장수는 자기는 도저히 자린고비에게 북어를 팔아먹기는 틀렸다는 것을 깨닫고 혀를 내두르며 떠나갔다.
또 한 번은 자린고비가 시장에 가서 어물가게로 들어갔다. 사람들은 드디어 자린고비가 생선을 사가는구나 하며 신기하게 생각하였다. 그런데 자린고비는 생선을 고르는 척하며 이것저것 주무르면서 값을 묻기만 하고 정작 사지는 않는 것이었다. 그러다 생선 냄새가 손에 배자 값이 비싸다며 그냥 빈손으로 집에 돌아와서 그릇에 물을 받아 손을 씻었다. 결국 자린고비는 그 손 씻은 물을 가지고 장에 넣어 생선 맛을 보았던 것이다.
이렇듯 세상 사람들의 온갖 손가락질을 받아가며 재물을 모았던 자린고비가 삼남지방에 극심한 흉년이 들어 끼니조차 잊지 못하고 정든 고향을 등지는 사람들이 속자, 그토록 절약하며 모은 재산을 이웃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도움을 받은 사람들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지만 자린고비가 나누어 준 곡식으로 굶주림을 면하고, 다시 생활의 터전을 가꿀 수 있었다. 이 소식이 조정에까지 알려지자 정조 대왕은 그의 이행에 감탄하여 ‘자인고비(慈仁考卑)’란 명칭을 주어 위로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자린고비 이야기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한강 생활문화), 2006., 한국콘텐츠진흥원)
조선 인조(仁祖)[1595~1649] 때 태어난 조륵(趙肋)의 묘가 신니면 대화리 화치마을에 있다. 조륵은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음성군에서 출생했다고 하나 전에는 그곳이 충주목에 속해 있어 충주의 자린고비이다. 그는 재물을 절약하여 어진 인심을 베풀었으므로 자인고(資仁考)라 하며, 그의 묘소에는 자인고비(資仁考碑)의 비석이 있다.
조선시대 충주 지역에 검소한 생활을 한 자린고비가 살았는데 그와 관련된 일화가 많다. 그중 한두 가지 이야기를 보면 다음과 같다. 어느 늦은 가을날 문구멍이 떨어져서 종잇조각이 바람에 나풀거리는 것을 보고 그 종잇조각으로 다시 그 구멍을 바르자니 모자라게 마련이다. 자린고비는 종잇조각을 떼어서 그 종이에 편지를 쓴 다음 이웃마을 김생원에게 보내어 답장을 요구한 것이다. 답장이 오면 문구멍을 메우겠다는 계산이었던 것이다. 심부름꾼이 돌아왔는데 답장을 손바닥에 새카맣게 써 보내왔다. 나중에 알아보니 그 종이로는 김생원네 집 문구멍을 발랐다고 한다.
자린고비는 신발이 닳을까 봐 신을 들고 다녔다고 한다. 어느 날 아이들이 조기 반찬이 먹고 싶다고 애원하자 조기 한 마리를 사다가 천정에 매달아 놓고 밥 한 숟갈 먹고 한 번 쳐다보라고 하였다. 큰 자식 놈이 밥 한 숟가락을 떠 넣고 두 번 쳐다보았다가 야단을 맞았다. 그런데 이토록 인색한 자린고비는 사실과 달랐다고 한다. 그는 재물을 절약하여 어려운 사람들에게 인심을 베풀었다. 그러므로 그를 자인고(雌仁考)라 하며, 그의 묘소에는 자인고비(資仁考碑)라고 새긴 비석을 세워 놓았다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와전된 자린고비」 [訛傳된 자린고비]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설화유형의 하나. 인색한 사람의 행동을 우스꽝스럽게 과장하여 다룬 이야기. 자린곱이 · 자린꼽쟁이 · 꼬꼽쟁이 · 꼽재기 · 자리꼼쟁이라고도 불린다. 구전자료가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으며, 지역적으로는 청주의 자린고비가 가장 유명하다.
가장 흔한 이야기로는 지독한 구두쇠인 어떤 영감이 며느리에게 지키도록 한 장이 자꾸 줄어드는 것을 이상히 여겨 스스로 지키고 있노라니 파리가 앉았다 날아가는 양을 보고 어느 만큼인가를 좇아가 결국 파리를 잡아 뒷다리에 묻은 장을 빨아먹고 왔다는 내용이 있다. 도망가던 파리가 어정대던 곳이라서 '어정개' , 자린고비 영감이 파리를 놓치고 "아차 이제 놓쳤구나!" 하였다고 해서 '아차지고개'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등의 지명전설과 연결되기도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자린고비설화 (국어국문학자료사전, 1998., 한국사전연구사)
자린고비[玼吝考妣]
충청도 충주 지역에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이 살고 있었다. 이 사람은 재물을 많이 모았지만 인색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었다. 어느 정도 인색하였는가 하면, 자기 부모 제사를 지낼 때 쓰는 지방 종이를 불살라 버리는 것이 아까워 이 지방을 기름에 절여 두고두고 쓸 정도였다. 부모 제사일 경우에는 ‘考妣(고비)’라고 적힌 지방을 쓰게 되는데, 이 지방을 기름에 절였다 하여 ‘절인고비’라고 했으며, 이것이 변하여 ‘자린고비’가 되었다.
‘자린고비’라는 말이 충주 지역에 사는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의 인색한 생활 태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충주 자린고비’, ‘충주 결은 고비’라는 표현이 쓰이고 있는 것을 보면 ‘인색한 것’과 ‘충주’라는 지역이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자린’을 ‘절다’와 관련하여 이해할 수는 없다. ‘충주 결은 고비’라는 표현이 쓰이고, 또 ‘결은’이 얼마든지 ‘자린’으로 변할 수 있어서 ‘자린’은 ‘결은’의 변화형으로 보아야 하지 않나 한다. ‘결은’은 ‘겯-’의 활용형이다. ‘겯-’은 ‘기름 따위가 흠씬 배다’는 뜻이다. 모음으로 시작하는 어미가 오면 ‘결어, 결은, 결으니’ 등으로 불규칙활용을 한다. ‘결은 고비’의 ‘결은’은 ‘결은신(기름을 발라 흠씬 배게 한 가죽신)’에 쓰인 ‘결은’과 같은 것이다.
문제는 ‘고비’다. ‘고비’가 과연 ‘돌아가신 부모’를 뜻하는 ‘考妣(고비)’인지가 분명하지 않은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고비’를 ‘高蜚(고비)’라는 실존 인물로 보기도 하고, ‘옛날 비석’을 뜻하는 ‘古碑(고비)’로 보기도 하나 확인할 수 없는 것들이다. 이들보다는 ‘考妣(고비)’로 보는 것이 훨씬 그럴듯하다. 물론 이 ‘考妣(고비)’ 뒤에는 ‘지방(紙榜)’이라는 말이 생략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보아야만 ‘기름이 배다’라는 뜻의 ‘겯-’과 어울릴 수 있기 때문이다. 기름이 밴다고 할 때 그 대상은 종이인 ‘지방’이다. 이렇게 보면 ‘결은 고비 (지방)’는 ‘기름이 밴 부모 지방’ 정도의 의미가 된다.
‘지방’은 매년 제사 때마다 붓으로 다시 써서 쓰는 것이 보통이다. 제사가 끝난 뒤에는 ‘축문’과 함께 태워 버린다. 불태워 버려야 하는 ‘지방’을 아까워서 다시 쓰는데, 그것도 오래 쓰기 위하여 기름에 결어 쓴다는 것이다. 좋게 보면 절약이지만, 절약이라 하더라도 너무 지나치다. 이로써 ‘결은 고비’가 ‘인색함’을 보여주는 표현임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아울러 ‘결은 고비’는 그와 같은 인색한 마음을 가진 사람을 지시하기도 한다. 그래서 인색한 사람을 뜻하는 대표적 표현을 들라 하면 ‘결은 고비’가 떠오르는 것이다.
그런데 ‘결은 고비’는 ‘충주’라는 지명과 어울려 주로 ‘충주 결은 고비’로 쓰인다. ‘충주 결은 고비’는 그 구성 표현 중의 하나인 ‘결은 고비’가 ‘자린고비’로 변하여 한 단어로 굳어진 뒤에는 ‘충주 자린고비’로 더 많이 쓰인다.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자린고비’는 바로 이 ‘충주 자린고비’에서 ‘충주’가 생략된 말이다. ‘충주’ 고을에는 정말로 인색한 사람들이 많이 살았는지 자못 궁금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자린고비 [-考妣] - ‘자린고비’가 ‘절인 조기’를 쳐다본다?. (그런, 우리말은 없다, 2005. 10. 8., 태학사)
자린고비와 달랑곱재기
옛날에 자린고비는 강 이쪽에 살고 달랑곱재기는 강 저쪽에서 살았다. 두 사람은 어디 가나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구두쇠인데, 한번은 자린고비가 추운 겨울 새벽에 등덜미가 오슬오슬해서 잠을 깨보니 문짝에 발라놓은 창호지에 사발만한 구멍이 나 있는 것이었다. 찬바람이 구멍으로 솔솔 들어오니 추워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날이 밝자마자 동네를 샅샅이 뒤져 쓰다버린 종이 조각을 찾았다. 운이 좋게 찢어진 종이조각을 하나 줍긴 했는데 아주 작아서 구멍을 못 막게 생겼다. 그래서 이 궁리 저 궁리 하다가 강 건너 사는 달랑곱재기한테 편지를 써서 보냈다.
“내 긴히 쓸 일이 있어서 그러니 올해 정월 초하루부터 섣달 그믐날까지 일진을 적어서 보내주게” 일 년 삼백예순날의 일진을 다 쓰자면 못해도 반 폭 종이는 들 것이니 달랑곱재기가 답장을 써주면 문구멍을 바르고도 남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편지를 보내놓고 이제나 저제나 답장이 오기를 기다렸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답장이 오지 않았다.
그만 부아가 치민 자린고비는
“귀한 종이에다 쓴 편지를 받았으면 하다못해 그만한 종이에라도 답장을 보내야지”하면서
달랑곱재기네 집으로 갔다.
“아 이 사람아 편지를 받았으면 답장을 보내야 할 것 아닌가”
“아 미안하네. 나도 답장을 보내고 싶지만 집에 종이가 없어놔서”
“그럼 그 편지라도 돌려주게”
“그 편지 말인가. 우리 집에 문구멍 뚫어진 데가 있어서 발라 놨네. 질긴 것이 문구멍 바르기에 아주 안성맞춤이더군” 그러자 그런 경우 없는 일이 어디 있냐고 자린고비는 길길이 뛰었다.
자린고비는 달랑곱재기 문구멍을 발라놓은 편지를 달려들어 떼어내 가지고 나오는데 달랑곱재기가 기겁을 하면서 따라왔다.
“여보게, 자네 편지를 자네가 도로 떼 가는 거야 말릴 일이 아니네만, 그 편지에 붙은 밥알은 떼놓고 가게. 그것 붙이느라 밥알이 자그마치 세 알이나 들었다네”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자린고비와 달랑곱재기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한국설화 인물유형), 2005., 한국콘텐츠진흥원)
옛날 한 부인이 생선을 사러 가서는, 이것저것 만져만 보고 집으로 돌아와 생선 만진 손을 솥에 씻어 국을 끓인다. 이 사실을 알고 마을 사람(남편)이 우물에 가서 씻었으면 온 동네가 다 먹을 걸(혹은 그 국을 두고두고 끓여 먹을 걸) 그랬다며 아까워한다. 또 한 자린고비가 간장을 종지에 조금씩 담아 먹는데 새로 들인 며느리가 종지에 간장을 가득 담아 내 온다. 자린고비는 며느리에게 간장을 아끼지 않는다면서 혼을 낸다.
며느리는 이렇게 간장을 가득 담으면 보기만 해도 짜서 먹지 않게 되어 간장을 아낄 뿐만 아니라 숟가락으로 긁지 않아도 되니 숟가락과 그릇까지 아낄 수 있다고 말한다.
고비(高蜚) 이야기
1) 고비는 충주 사람으로서, 장사를 하여 큰 부자가 되었는데, 인색하여 항상 집안 창고를 자신이 직접 잠그고 다녔다. 하루는 먼 곳을 가게 되어, 돌아올 날짜를 계산한 다음에 그때까지 처첩들이 먹을 양식 몇 되만 남겨 놓고는 나머지는 모두 창고에 넣고 단단히 잠가 놓았다. 그리고 길을 떠나려는데 돌아보니, 밀가루 몇 되가 창고 속에 들어가지 않고 밖에 그대로 있었다. 시간이 촉박하여 할 수 없이 밀가루 표면에 자기 얼굴을 도장 찍듯이 찍어서 무늬가 생기게 해놓고는, 처첩에게 손대지 못하게 단단히 일렀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큰비가 내려 냇물에 갇혀서 며칠을 지체하는 동안, 집에서는 한정된 양식이 다 떨어져서 며칠을 굶었다.처와 첩이 의논하기를, "어차피 죽는 것은 일반이니, 차라리 저 밀가루를 먹고 매를 맞는 편이 굶어 죽는 것보다는 낫다." 하고서, 그 밀가루를 절반만 덜어내어 수제비를 해먹고, 절반은 다시 표면을 곱게 다듬어 높고처의 음부로 도장 찍듯이 찍어 놓았다. 여행에서 돌아온 고비가 맨 먼저 밀가루 그릇을 조사해 보고는 "이상하다. 내 수염이 어찌 이렇게 꼬불꼬불하며, 내 코가 언제 입 속으로 들어갔단 말이냐?"라고 하면서 위조된 것이라고 하여 처첩을 구타했다.
2) 고비가 늙어서 재산 형성의 전문가로 소문이 나니, 마을 사람들이 부자 되는 비결을 배우러 왔다. 고비는 모두들 어느 날 성곽 위로 모이게 하고는, 한 사람은 성곽 위 언덕 밖으로 뻗은 소나무 가지에 한 손으로 매달리게 해 놓고서, "재산 지키기를 저 사람이 소나무 가지 잡고 있는 손과 같이 하라."라고 말하고는 내려가 버렸다.(조선 중기)
첫댓글 절약의 대명사
자린고비 본받아야겠네요
아하하. 파리 다리에 붙은 장을 빨아먹고 왔다네요. 어의 상실입니다.재밌는 글 감사요^^
자린고비보다 달랑곱재가 한 수 위입니다.
그 편지에 밥알 세 알이나 들었으니 떼놓고 가라고 한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