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29일 괴산지역 답사
1. 우암 송시열묘
송시열(1607~1689)은 옥천 구룡촌에서 태어났고, 27세에 생원시에 장원 급제 하였다. 묘는 춘북 괴산군 정천면 정천리 산 7-1에 자리하고 있다. 송시열은 기호학파인 이이의 대를 이어 주자학의 대가로 성장하였다. 노론의 영수로서 송자대전, 우암집, 송서습유 등을 집필하였다. 1689년 왕세자가 책봉되자 이를 시기상조라 하여 반대하는 상소를 했다가 제주에 유배되었고, 국문을 받기 위해 서울로 오는 도중 전북 정읍에서 사약을 받았다. 사망 후 시신은 화성시 신동 산39번지 무봉재사의 뒷쪽에 안치되었다. 이후 1757년 괴산으로 이장되었다.
계단 우측에는 수령 370년인 은행나무와 1779년에 세운 송시열의 신도비가 비각이 안에 있다. 송시열의 묘는 예로부터 장군대좌형(將軍對坐形)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묘 앞쪽에 보이는 설문산은 깃대봉으로 보고, 북과 같이 전면에 있는 금성체는 북으로 보았다. 그러나 군사가 없어 후손인 송종수는 청천의 주민들과 의논해 300냥을 기부해 청천시장을 개설했다고 한다.
주산은 탐랑 목성체이며, 기복(起伏)과 위이(逶迤)가 잘 이루어진 형국이다. 그러나 결인속기처의 경사가 심하고 깊다. 이를 산고곡심(山高谷深)이라 한다.
2. 만동묘
만동묘는 화양계곡에 위치하고 있다. 송시열이 죽으면서 수제자인 권상하의 손을 잡고 만동묘를 건설할 것을 간곡히 부탁한다. 권상하는 끗을 같이하던 여러 제자들과 사람들의 힘을 합쳐 화양구곡에 만동묘를 건설한다. 명나라를 섬기는 제후국으로 스스로를 규정한 조선사화는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의종과 임진왜란 때 지원군을 파병한 신종황제의 위패를 목시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만동묘를 건설한다. 만동은 물이 만 구비를 꺽어 흘러도 마지막에는 동해로 들어간다는 말로 존명의식을 표현한 것이다. 만주족인 청은 명을 치기 전에 조선을 침략하며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일으키는데, 만동묘는 명을 치고 조선을 징벌한 청을 사상적으로 부정한다는 의미도 함께 아우르고 있다.(출처 : 박정해, 풍수이야기, 192쪽)
만동묘의 안산은 삼태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물길이 잘 감싸고 있는 금성수의 중앙이다 .용은 좌선룡이며 물은 우선수로 음양교배가 잘 이루어진 형국이다. 높은 곳에 만동묘가 세워진 이유는 안산이 가깝고 높기 때문이다.
3. 정인지묘
정인지묘는 괴산군 불정면 외령로 1길 24에 위치하고 있다.
4. 이세좌묘
이세좌묘는괴산군 불정면 삼방리 168번지에 위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