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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산 제물(로마서12:1)
우리가 지난 주에는 “복음으로 생명사역을 이루어가는 교회”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생명을 살리고 생명을 고치고 생명을 세우는 생명사역은 예수님이 맡겨주신 지상명령입니다. 이러한 생명 사역을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를 묵상하면서 오늘 본문을 생각나게 하셨습니다. 거룩한 산 제물이 되어야 그일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일어나서 내 힘으로 그일을 하려고 한다면 반드시 실패합니다.
요즘 우리가 묵상하는 사무엘상하에서 나오는 많은 사람들, 사울, 아브넬, 이스보셋, 바아나와 레갑 모두 한결같이 자기 힘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하다가 다 실패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10여년의 광야생활을 통해서 자기를 내려놓습니다. 자기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깨닫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주권앞에 자기 모든 것을 다 맡깁니다. 하나님보다 앞서지 않고 하나님의 뜻앞에서 자기를 내려놓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서 통일왕국을 이루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일은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앞에 자기를 다 맡기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의하면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곳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고 그 때부터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무 서두르지 마십시오. 기다리고 인내하고, 하나님의 주권 앞에 맡기고 내게 주어진 일을 하나님앞에서 진실하게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오늘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에서 제일 처음 나오는 단어 "그러므로"라는 말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너무나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말입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1장부터 시작하여 11장에 이르기까지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복음을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자의 확신이 무엇인지, 그 기쁨이 어떠한지, 그 소망이 어느 정도인지에 대해서 가슴이 뜨겁도록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것으로 우리의 구원의 터가 영원한 반석과 같은 예수 그리스도 위에 완전히 닦여진 것입니다. 터를 닦았으면 그 위에 집을 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12장부터 우리가 지어야 할 집이 어떠한 것인가를 말하기 시작합니다. "지금까지 믿음의 터를 닦았으면 이제 집을 지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 바로 이 '그러므로'입니다. 구원은 지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삶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지식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능력이 없습니다. 삶으로 이해하지 않기 때문에 형식에 그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이 '그러므로' 라는 접속사는 1-11장과 12-16장을 연결하는 고리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라는 뜻은 "구원은 하나님의 능력이며 율법이나 우리의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 의롭게 된다고 하는, 이 놀라운 구원의 진리를 깨달았다면"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당신은 구원받은 자로서 이렇게 살수 있습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라는 말에는 '당신이 이런 사실을 깨달았다면'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듣고 구원받았다면 반드시 구원받은 자의 삶이 따라와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과 생활은 하나입니다. 말씀과 삶은 일치해야 합니다. 영혼구원과 삶의 구원은 절대로 나눌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중차대한 진리를 일깨워 주는 말이 바로 '그러므로'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에서 구원과 삶, 신앙과 생활이 하나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에 한번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 자신은 구원과 삶이 분리되어 있는 불행한 그리스도인은 아닌가? 나는 구원받았다고 하면서 구원받은 자의 삶을 충실히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 해보십시오.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말씀을 듣고 배우기는 하지만 그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 영혼은 구원받았는지 모르지만 생활은 아직도 구원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 때문에 교회가 무력해지고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직분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교회 타락의 주범은 바로 이 "그러므로"가 없는 생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로마서 첫장에서부터 11장까지 설명한 그 놀라운 구원의 진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입니까?
그것은 감격없이는 받을 수 없는 너무나 분에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음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 은혜에 대한 적극적인 반응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엄청난 구원을 받았음을 분명히 믿고 감격한다면 거기에 대한 반응이 반드시 나와야 합니다. 그 반응은 구원받은 자답게 하나님을 위해서 살겠다고 하는 결심과 순종으로 표출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러므로'입니다. 입으로 구원받았다고 하면서 '그러므로'의 응답이 희미하다면 그 사람의 구원 자체를 의심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러므로'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진리를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받은 자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1절을 다시보십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이 말씀은 우리가 구원받은 자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단적으로 말해 줍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우리 몸을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원래 마음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겉으로 보이는 몸보다는 우리의 중심을 보기를 좋아하십니다.
마음이 담겨있지 않은 재물은 아무리 대단한 것이라도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다는 것을 우리는 상식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몸을 바치라고 말씀하실까요? 이것은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요점입니다. 우선 먼저 그 이유로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몸을 바치라고 하는 것은 우리 몸이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았음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영혼이 구원받았습니까? 그렇다면 몸도 구원받은 것입니다.
이 사실을 바울은 매우 강도높게 여기저기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가장 좋은 예가 고전 6:15,19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15절).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뭇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19절).
우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요, 성령의 전이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우리 몸이 영혼과 함께 구원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몸은 죄로 인해 부패된 것이 사실입니다. 아울러 연약함을 가지고 있으며 죄의 도구로 쓰임받을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몸을 제물로 제단에 올려 놓아야 한다는 것은 영혼과 함께 몸이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았다고 할 때는 영혼만 구원받았다면 완전한 구원이라 할 수 없습니다. 몸이 없는 영혼을 생각할 수가 없고, 영혼없는 몸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완전한 구원은 영혼과 몸이 함께 구원받는 것입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구원은 몸과 영혼의 구원, 즉 전인격적인 구원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11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하나님이 왜 우리 죽을 몸을 살리십니까? 몸은 이 세상에서부터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제단에 올려 놓은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이유를 더 이야기한다면 우리가 세상에 살 동안 몸은 "나"를 보여주는 주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몸이 없는 인격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몸이 '나'입니다. 몸과 나를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몸을 산 제사로 드리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삶 전부를 하나님 바치라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몸이 구원받아 주의 것이 되었다면 그 몸으로 움직이는 모든 생활영역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가 되게 하라는 말입니다.
예배시간만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를 예배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삶의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우리 몸이 행동하는 삶 전체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가 되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우리 몸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내가 기뻐하는 삶이 있습니다. 세상이 기뻐하는 삶이 있습니다. 마귀가 기뻐하는 삶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 주목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생각합니다. 제가 요즘 반복하는 우리의 모든 시선을 주님께 드립니다. 언제 어디서나 주님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주님을 생각합니다. 주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주님의 뜻이 무엇이지? 이런때 주님이라면 어떻게 말씀하셨을까? 주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모가 언제 자녀를 통해서 흐믓해 합니까?
저녀가 부모의 말에 순종할 때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주목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기뻐하는 삶이란 내가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기를 기뻐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 기도하기를 기뻐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에 관심을 갖고 그 뜻을 이루어 드릴 때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시37:4)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하는 삶을 살면 반드시 하나님의 응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우리 몸을 거룩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쓰시려고 구별해 놓은 것은 무엇이나 거룩합니다. 우리 몸은 하나님이 임재하셔서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그저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으로 만족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을 운전하시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삶의 주권자가 되시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거룩해 지는 비결입니다.
(딤전 4: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분명하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비결은 말씀과 기도가 여러분의 삶속에 날마다 있어야 합니다. 날마다 큐티를 하십시오. 말씀을 듣고 그 말씀붙잡고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우리의 몸이 거룩해집니다. 우리 몸을 죄로 더럽히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불의의 병기로 우리 몸을 함부로 내맡겨서는 안됩니다.
아무리 바쁘게 보내는 일과속에서도 "내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에 쓰고 있지 않는가?"하고 수시로 반성해야 합니다. 그래서 잘못된 것이 있으면 즉시 돌아서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몸을 거룩하게 구별하는 방법입니다.
셋째, 우리 몸을 산 제물이 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 몸을 죽은 제물로 드려서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우리 몸을 살아있는 제물, 숨을 쉬는 제물, 생명이 있는 제물이 되도록 가꾸어야 합니다. '산 제물'이란 살아있는 제물입니다. 예배가 살아있고 삶속에 영이 살아있는 진정한 생명의 삶입니다. 우리안에 생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통해서 살아 역사하시는 삶이 바로 산제물입니다.
우리의 몸에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충만하게 드러날 수 있도록 아니 충만하게 역사하실수 있도록 생명을 느끼고 생명을 살리고 생명을 고치고 생명을 세우는 생명사역입니다. 살려주는 역사에 동참하시기를 바랍니다. 죽은 제물은 냄새가 납니다. 변화가 없습니다. 감동이 없습니다. 기쁨이 없습니다. 감사가 없습니다. 찬송이 없습니다. 의식만 남았습니다. 껍데기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전 여러분이 진정으로 산 제물를 드리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 분이 역사하실 수 있도록 성령님께 의뢰해야 합니다. 성령충만을 위해서 기도하고 성령의 감동하심과 감화하심에 순복해야 합니다. 성령님은 우리 곁에 나의 보혜사로 와 계십니다. 성령님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복하시길 바랍니다. 성령은 우리 곁에 오셔서 세 가지 역사를 이루십니다.
1)깨닫는 역사 2)변화시키는 역사 3)능력을 주시는 역사입니다. 이렇게 하시는 최종적인 목표는 두 가지입니다. 1)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2)생명을 살리는 생명사역입니다. 이 두 가지 외에는 결코 그 어떤 것도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지향하는 생명사역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안에 성령충만을 사모해야 합니다.
사도행전교회는 정말 보이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럴싸한 교회당도 없었습니다. 성도들도 힘없고 연약했습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저들이 그 놀라운 생명사역을 일으켜 큰 부흥을 얻었습니까?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성령을 사모했습니다. 성령을 온전히 인정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기도에 힘썼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떻게 우리가 생명사역에 쓰임받을 수 있습니까?
우리의 힘입니까? 우리의 능력입니까? 우리의 돈입니까? 우리의 지식입니까? 아닙니다. 오직 성령의 능력만이 생명을 살리고 생명을 고치고 생명을 세울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성령충만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난날 하나님께 잘못된 죽은 제사를 드렸다 할지라도 이제부터 산 제사로 드려지는 삶을 살도록 하나님앞에 우리 자신을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충만하게 역사할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하나님앞에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먼저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십시오. 그러면 성령님이 역사하셔서 깨닫게 해주시고 변화시켜주시고 능력을 주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하실 것입니다.
죽은 제물이 아닙니다. 산제물을 드려야 합니다. 적당하게 꾸며서 그냥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을 최상의 삶으로 만드십시오. 그리고 날마다 그것을 주님께 드립시다. 적당하게 보내는 삶, 게으르게 꾸려 가는 삶은 산 것이 아니라 죽은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께 바칠 수는 없습니다. 새삼스럽게 과거를 돌아볼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부터 우리 몸을 던져 하루하루의 삶을 산 제물이 되게 합시다. 우리가 젊었든, 늙었든, 병들었든, 건강하든 간에 날마다 최선을 다할 때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받으시는 산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제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제물입니다.
제물 없는 제사가 있습니까? 구약에 제사를 보면 언제나 제물이 있었습니다. 짐승을 잡아서 그 피를 뿌려서 자신의 죄를 대신하여 제물이 죽은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온 인류를 위한 제물이었습니다.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것입니다. 제물은 말이 없어야 합니다. 원망이 없어야 합니다. "내가 왜 제물이 되느냐?'라고 하면 안됩니다. 제물은 자기 죄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희생을 당합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희생되지 않았더라면 인류의 구원은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을 위한 희생제물입니다. 내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죄를 뒤집어 쓰고 제물이 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이익을 챙기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고 건강해지고, 부자가 되고 축복을 받는 것만이 기독교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참된 모습은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가리켜 '구원받은 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손해를 보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사야53 :7에는 예수님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었도다." 또 이사야 53:5에는 희생 제물이 되신 예수님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
여기서 '그'를 '그리스도인'으로 바꾸어서 읽으면 구원받은 자의 삶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찔림은 세상 사람들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리스도인의 상함은 세상 사람들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리스도인이 징계를 받음으로 세상사람들이 평화를 누리고 그리스도인들이 채찍에 맞음으로 세상 사람들이 나음을 입었도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16:24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이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이것이 원리입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이 세상에 있으면 그 사람을 가리켜 사람들은 '빛' 혹은 '소금'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왜 그리스도인이 목말라 할까요? 헌금도 하고 봉사도 열심히 하는데 뭔가 허전합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제물이 되기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 생활에서 어딘가 외롭고, 어딘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몸을 드려야 합니다. 신앙 생활은 '몸'을 드리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생각이나 이념, 정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고독합니다. 몸의 헌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몸이 없으면 영도 없습니다. 영은 몸이 있기 때문에 있는 것입니다. '영'만큼 중요한 것이 바로 '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영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몸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배요 신앙입니다.
여러분, '몸을 드린다'는 것은 내 시간을 드리는 것입니다. 시간을 드리지 않고 어떻게 몸을 드릴 수 있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고상하게 '정신적 사랑'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정신으로만 사랑할 수 있습니까? 몸으로 사랑해야 하지 않습니까?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나 영적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몸으로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몸을 원하십니다. '몸'은 시간이요 은사입니다.
찬양으로 섬기는 분들은 자신의 몸으로 섬기는 분들입니다. 저는 설교를 함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차량으로 봉사한다든지, 교회 청소를 하든지, 예배 안내를 하든지, 식사를 준비한다든지 우리 몸이 움직일 때 신앙의 실체가 보이는 것입니다. 몸이 움직이지 않으면 관념적이 되거나 이성적이 됩니다. 현실이 없습니다. 몸이 없는 사람은 받을 축복도 없습니다.
참된 예배란 몸을 드리는 것입니다. 몸이 가면 마음이 따라갑니다. 그러면 몸이 건강해집니다 하지만 몸이라고 같은 몸이 아닙니다. 어떤 몸이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부정한 몸을 받지 않으십니다. 제사에서 흠없고 티없는 제물을 받는 것처럼 하나님은 여러분의 깨끗한 몸을 원하십니다. 헌금이라고 같은 헌금이 아닙니다 땀 흘리고, 기도하고, 눈물을 흘리는 헌금이어야 합니다.
먹고 싶은 것을 먹지 않고, 사고 싶은 것을 사지 않고 드리는 돈을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런 돈을 통하여 기적과 역사를 일으켜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바쁘지만 하나님이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그것에다가 우선 순위를 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보, 당신이 내 대신 가서 예배드리고 와." 이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교회에 와서 드리는 것만이 예배가 아니라 삶이 예배입니다. 내가 있는 곳이 선교지입니다.
우리는 그 세계를 변화시키라고 제물로 바쳐진 사람들입니다. 문제는 제물이 안된 사람이 문제입니다. 여러분, 계신 그 곳에서 제물이 되십시오. 희생 양이 되십시오. 그러면 그 조직이 변합니다. 세상이 변합니다.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느끼게 됩니다.
이제 1절의 마지막 부분을 보겠습니다.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여기서 '영적'이라는 말은 '온전하다'는 뜻입니다. 예배는 '봉사(service)' 입니다. 참된 예배란 온전한 헌신과 봉사를 의미합니다. 헌신과 봉사가 없는 사람은 예배가 없는 사람입니다. 물질로도, 마음으로도, 몸으로도 헌신할 때 진정한 신앙, 건강한 신앙이 자라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면 이제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립시다. 내가 온전히 하나님앞에 드려질 때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이 내 삶의 현장에서 역사하심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해에는 실제적으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셔서 신앙과 삶이 하나가 될 때 신앙의 역사가 나타나고 더 신바람나는 삶이 이루어질 것이라 믿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서 하나님이 기뻐받으시는 삶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