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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7
정복의 완성자 / 박길현 목사
여호수아 13장부터는 여호수아서의 둘째 부분이 시작된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13장에서 21장까지는 가나안 땅을 분배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고 22장에서 24장은 여호수아의 마지막 설교 즉 고별 설교가 나옵니다. 13장은 정복 후 가나안 땅을 분배하는 내용 중에서 가장 첫 부분입니다. 이 중에서도 1-7절까지는 남은 땅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8절부터는 동편 땅을 분배했던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1-7절까지를 생각해 봅시다. 1절에 여호수아는 나이가 많아 늙었다고 했습니다. 이 때 여호수아는 나이가 얼마나 되었을까요? 아마도 최소한 87세 이상은 되었을 것입니다. 출애굽을 할 때에 여호수아의 나이가 40세 정도였으니 광야 40년을 지나고 가나안 전쟁을 7년간 수행했다고 한다면 최소한 87세는 넘었을 것입니다. 젊음을 하나님께 사로잡혀서 모세의 시종으로 봉사하다가 모세가 죽은 후에는 모세를 이어서 이스라엘을 이끌고 가나안 전쟁을 수행했던 사람이 여호수아였습니다. 모세는 목자를 상징하는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일을 했었지만 여호수아는 무인 곧 전사를 상징하는 단창을 잡고 이스라엘을 이끌면서 가나안 정복 전쟁을 수행하였습니다. 이들이 손에 잡았던 지팡이와 단창은 다 하나님의 일하시는 면모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들이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와 함께 하셨던 것과 같이 여호수아에게도 함께 하시면서 놀라운 일을 행하도록 하셨습니다. 31왕을 치고 가나안 땅을 정복하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을 정리하여 모아 놓은 것을 우리는 12장에서 보았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함께 하면서 가나안을 정복하였지만 이제는 늙었습니다. 기력도 떨어졌고 거동도 신통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인생은 시간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도 늙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1절에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으매'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가나안 땅에는 얻어야 할 땅이 남아 있었습니다. 가나안 땅을 대부분 정복하고 지배하게 되었지만 아직도 변두리 지역에는 여호수아가 얻지 못한 땅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 땅에 대하여서는 2-6절까지 말해지고 있습니다. 가나안 땅의 서남쪽 구역인 블레셋 땅과(2-3) 두로와 시돈 땅과(4) 북쪽 지역(5-6)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늙었습니다. 여호수아가 늙었다는 것은 늙어서 더 이상 싸워서 이 땅을 점령할 수 없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너는 나이 많아 늙었고 얻을 땅의 남은 것은 매우 많도다'고 하시는 것은 이런 뜻에서입니다.
그러면 남은 이 땅은 어떻게 될 것입니까? 여호수아가 할 수 없게 되었으니 내어버릴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여호수아가 할 수 없게 되었으니 이제는 하나님이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6절 끝에 '내가 그들을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리니 너는 나의 명한 대로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분배하여 기업이 되게 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하실 것이니 남은 땅도 여전히 이스라엘에게 분배하여 기업으로 삼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한 땅은 하나님 자신이 이스라엘의 기업이 되게 하실 것이니 결단코 기업에서 제외시키지 말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이것은 너무나 강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부분에서 두 구절이 강조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하나님의 강한 의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1절에 '너는 세월이 흘러 늙었(다)'는 말과 6절에 '내가 쫓아내리니'라는 말이 그렇습니다. 두 구절 다 아주 강조되어 있는 구절입니다. 이러한 강조 구문은 '너는 늙어서 못하게 되었지만 여호와 내가 쫓아내겠다'는 뜻이 강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약속의 땅을 얻는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강한 의지를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여호수아가 늙었을 때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신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땅은 아직도 남아 있는데 자기는 늙어 더 이상 땅을 얻는 일을 지휘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 염려하며 근심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고 옛날에 모세에게 하셨듯이 자기의 후계자를 지명하여 주시면 좋겠는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도 아니하셨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이 문제를 가지고 염려를 하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나타나셔서 이 여호수아가 못다 한 것을 자기가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여호수아의 뒤에는 여호와 자신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세의 뒤에 여호수아를 세워 주셨지만 이제 여호수아의 뒤에는 하나님 자신이 직접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일을 하시면서 남은 땅을 얻도록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친히 정복의 완성자로 나서시겠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못다 한 일을 하나님이 친히 이어서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모세와 여호수아를 사용하시면서도 하나님이 친히 일해 오셨지만 이제는 특별한 인간 지도자를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이 친히 정복을 마무리 짓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이 말씀을 통해서 큰 위로를 받았을 것입니다. 이 말씀을 근거로 해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에게 여호와만 섬기라고 설교하면서 세겜에서 언약을 세웠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 내용이 24장에 나옵니다. 이것을 세겜에서 세운 언약이라고 하여서 흔히 세겜 언약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이 사실을 믿고 앞날을 하나님께 의탁해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의탁할 때에 하나님께서 남은 땅도 얻도록 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에 이 남은 땅을 이스라엘이 얻는 것은 다윗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윗 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이스라엘이 이 남은 땅을 얻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취해야 할 태도는 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만이 그들이 그 땅에서 평안을 누리는 길입니다. 하나님이 대적을 다 멸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안식이라고 하고 있습니다(23:1참고). 그러므로 안식이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표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안식을 누릴 때 하나님이 남은 모든 대적들을 물리치고 그 땅을 얻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남은 땅을 얻는 길은 하나님을 믿고 안식하는 것에 있습니다. 자기들이 힘을 내어서 무장을 하고 싸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신뢰할 때 하나님이 남은 땅도 얻도록 해 주실 것입니다. 보이는 인간 지도자는 힘이 없고 쇠하여져서 마침내 죽고 없어질 지라도, 보이지는 않지만 하나님이 그의 신으로 그들 중에 계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 그들이 남은 땅을 얻는 길입니다. 사사시대에 사사들의 등장과 그들에게 하나님의 신이 내린 것은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중에 신으로 계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신의 내림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 자신이 함께 있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중요한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여호수아 시대에 하셨던 것과 동일한 말씀을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성령으로 함께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특별히 세운 인간 지도자를 보거나 예수님의 모습을 보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목사가 특별히 세운 지도자가 아니냐고 하겠지만 목사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는 특별한 지도자가 아닙니다. 목사는 이미 여러분의 마음속에 심겨진 말씀을 되새기게 해 주는 심부름꾼에 불과합니다. 목사는 계시를 드러내는 특별한 지도자가 아닙니다. 특별한 지도자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성령으로 여러분 모두와 함께 계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성령으로 함께 계시는 하나님의 지도를 받는 자이지 사람의 지도를 받는 자가 아닙니다. 사도 요한은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안에 거하라"(요일2:27)고 했습니다. 이 말씀대로라면 성령은 주안에 거하는 것을 가르칩니다. 이 성령의 가르침대로 주안에 거하는 것이 성령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 성령의 가르침은 신자들 중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그 가르침 외에 다른 가르침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주안에 거하도록 가르치는 성령의 가르침을 따라서 살면 되는 것입니다. 주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주안에 사는 것 즉 믿고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 가르침을 따라서 살면 되지 다른 지도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성령으로 자기 백성들과 함께 사십니다. 이것이 옛날 여호수아에게 말씀했던 말씀이요 또 오늘날에도 말씀하시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임재가 있기에 우리가 믿는 자로서 살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그 자체가 신자의 신자됨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하나님의 임재를 스스로 알고 있습니다. 지식으로 아는 것도 아니요 논리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신학을 공부하였다고 아는 것도 아니요 머리가 총명하여 아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의 임재를 알고 주님 안에 있음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앎은 하나님이 임재하심으로 발생되는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임재는 믿는 자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임재는 신자를 존재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따라서 지식으로 아는 것은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임재를 아는 것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담대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바울의 담대함을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라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구약까지 가지 않더라도 초대 성도들이 얼마나 대담하게 살았습니까? 가난과 사회적인 냉대와 세상 권세의 핍박 속에서도 얼마나 담대히 살았습니까? 그리고 계시록에서는 세상에 의해서 핍박을 받고 죽음을 당하는 성도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일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임재를 알고 있는 믿음이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론적으로 아는 것은 이렇지 못합니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성령으로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는 신자의 삶을 이끌고 간다는 말입니다. 신자로서 살게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1:6)고 했고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빌3:12)고 했습니다. 바울처럼 신자가 주님을 믿고 주님을 위해서 자신을 바치면서 산다고 하는 것도 그리스도께 잡혔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 잡혔기 때문에 주님을 향해서 살려고 하는 삶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신자의 삶을 있게 합니다. 그래서 신자는 살려고 하고 달려 보려고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런 면모가 모든 신자에 다 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중요한 것은 이런 면모를 추구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면모들은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를 아는 데서 생겨나는 현상입니다. 우리 신자들이 서 있는 곳이 바로 성령 곧 하나님의 임재 안이기 때문에 이런 면모들은 있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육신의 오관으로 확인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성령으로 다스리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성령으로 이 세상을 다스리고 있으며 자기 백성들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오감으로 느끼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으로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는 감각적으로 느끼는 것과 다른 실감이 있습니다. 실감이란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가지는 사실감 즉 실재감을 말합니다. 이것을 저는 신앙에서 오는 실감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에게는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것을 바울은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 것"(고전3:22)이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성도를 섬기는 것이라고 합니다. 심지어 죽음도 성도를 위하며 성도를 섬기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세상에 모든 것이 성령 안에 있는 성도에게 유익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주님이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심으로 세상의 모든 일이 성도에게 유익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믿고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신자에게는 주님이 모든 싸움을 싸우게 하실 것이요 또 이기게 하실 것입니다. 이런 중에서 하나님의 완전한 정복을 보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성도의 생애를 주님이 다스리고 계신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주님은 부활의 생명으로 여러분을 완전하게 정복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세상의 역사를 지금까지 지배하시면서 그 속에서 교회를 만들어 오셨고 또 믿는 자들에게서 부활의 생명으로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 생명으로 완전하게 정복하실 것입니다. 고로 여러분의 믿음의 안전함을 자기가 믿는다는 사실에 두려고 하지 말고 주님의 임재와 다스림에 두십시오. 주님은 임재하시면서 부활 생명 즉 성령으로써 여러분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이 임재와 다스림의 확실함을 믿고 평안을 누리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