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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 있는 사건의 구성과 문학적 가치의 극대화
-<수필시대> 3,4월호를 읽고 -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일반적으로 서사문학은 두 가지의 이야기를 내포한다. 하나는 소재로서의 이야기이며, 다른 하나는 담화로서의 이야기이다. 전자는 작가의 미적 창작의도가 전혀 개입되지 않은 단순한 글감 수준의 이야기라면, 후자는 그 글감에 작가의 창작의도와 문학성을 가미시켜 재구성한 문학적 이야기이다. 전자는 일상적 사건이 승화되지 못한 경우이고, 후자는 문학적 사건이 승화된 것이다. 이러한 문학 텍스트는 플롯에 의해 조직되는 표면구조 surface structure와 그 표면구조 아래 스토리에 의해 추상되는 심층구조 deep structure가 유기적으로 구축한 미적 통일체이다.
작가는 이러한 시퀀스의 조직법을 활용하여 그 사이사이에 문학성을 생성하고 증폭시킬 수 있는 다양한 기법을 삽입한다. 이런 기법의 삽입과정을 거치면서, 이야기의 배열질서는 미적으로 변형되고 보다 예술성이 풍부한 감동적인 이야기로 창조된다. 수필서사에서도 허구적 서사와 동일한 이야기의 조직원리가 동원된다. 수필작가 역시 소재로서의 이야기를 미적으로 배열하는 과정을 통하여 서사적 의미와 가치를 극대화시킨다. 이러한 이야기의 미적 변형과 배열방식에 대한 검증은 스토리와 플롯의 이야기 질서를 대비 연구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이 과정에서 작가의 미적 의도가 구체적으로 해체되어 재구성되면서 해명된다.
따라서 인간의 경험은 의미 있는 사건으로 구성되며, 인간의 서사 행위는 그것에 대한 이해와 해석으로부터 발생한다. 이런 점에서 서사 행위는 그것에 인간 경험을 줄거리로 조직하면서 의미의 세계를 구성하는 활동이기도 하다. 서사는 인간의 사고 구조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어 그것을 어떻게 구성하느냐에 따라 작품의 질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 호모 폴리티쿠스, 호모 이코노미쿠스, 호모 파베르 등 인간의 본성을 규정하려는 수많은 명칭들이 있지만, 작가는 호모 로퀜스, 언어적 인간이다. 자신들이 만들어낸 언어로 끊임없이 ‘이야기’를 하며 오늘도 진실의 문학, 수필이 만들어내는 끊임없는 이야기의 네트워크 속에서 저마다의 이야기를 소비하며 살아가고 있는 수필가 김은숙, 주영길, 홍도숙의 작품을 만나보자.
김은숙의 <해질녘>은 자원봉사 활동을 하면서 알게 된 한 술집여자의 슬픈 이야기가 줄거리를 이루고 있다. ‘이야기 좋아하면 가난해진다’는 말이 있지만, 인간이 죽어서도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이야기뿐이다. 특히 ‘옛날 옛적에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에’로 시작되는 전래동화가 그토록 좋았던 이유는 따뜻한 방바닥에서 할머니 무릎을 베고 옛이야기를 듣는 듯한 ‘친밀감’이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이야기’는 오늘의 고통을 잊게 만드는 ‘망각의 힘’을 지니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 수필이 주는 문학적 성과는 구성의 짜임새와 함께 서두의 암시 기능을 잘 살린 발단부의 효과적 서사 전략에서 엿볼 수 있다. “어느 사이 전화를 했는지 핸드폰에 네 이름이 찍혀있다. 술주정하기엔 이른 시간인데 나는 여행중이였고 토함산에 올랐다. 낯선 곳에서의 밤은 깊어 아침을 기다리지 못하고 해가 뜨는 바다로 떠났다.”는 발단부 첫 석 줄은 앞으로 전개될 많은 이야기의 전개과정을 함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술주정하기엔 이른 시간’이란 어구는 ‘밤 고양이 같은 생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한 여인의 슬픈 인생사’를 암시하며, 셋째 문장의 ‘낯선 곳에서의 밤은 깊어 아침을 기다리지 못하고’는 작가 본인의 이야기이지만 작중 여인의 삶의 행로를 역설적으로 유추하게 해준다. “전화기를 타고 들려오는 컬러링 ‘긴 머리를 자르고 짧은치마를 입고 다른 여자로 태여 날꺼야’ 노래가사가 멜로디를 타고 오래토록 울려왔다.”는 결말부 역시 강한 함축성으로 비극적 엔딩을 암시하며 강한 문학성을 우려내고 있다. 이 작품은 우회적 기법의 정수가 담겨있는 수필이다. 제목 ‘해질녘’의 상징성도 문학적 효과를 극대화하는 데 한 몫 하고 있다.
봉사단체에서 만났던 너, 그저 간간히 만나는 사람으로 눈인사를 나눌 정도였다. 부모에게 버림 받은 장애아 집에 봉사를 갔을 때, 흘린 침을 손으로 받아 치마에 쓰윽 닦아가며 고개도 가누지 못하는 아이를 품에 안고 달래는 너를 보며 따뜻한 사람임을 알았지. 고아원에 봉사를 가면 유독 정이 많은 너의 눈은 물기로 젖어들곤 했다. 함께 이불빨래를 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직업을 묻자 한참 고개를 숙이고 있더니 술집에서 돈을 번다고 했다. 그 말을 할 때 너의 목소리는 떨렸지. 내 눈치를 살피던 네 모습이 지금 눈에 선하다. 안쓰러웠다. 직업에 귀천이 있느냐며 너스레를 떨자 너는 씁쓸하게 웃었지 아주 씁쓸하게, 우리는 언니와 동생으로 만났다. 농촌에서 자라 가난이라는 탈출구를 찾아 도시에 온 너는 술집마담들의 잔심부름으로 돈을 모아 부모님에게 보내주었고, 그 돈으로 가축들을 기르며 조금씩 가난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했나 첫 발을 잘못 딛었지만 너는 성실했고 수수하고 검소했다. 사회의 편견에 관대 할 줄도 알았고 자신을 지키며 살았다. 언제부터인지 외롭다는 말을 자주하며 남해바다를 보고 싶다고 했다. 에머널드 빛, 바다에 함께 가자고 했다.
수필의 이야기 속으로 마음의 여행을 다녀오고 나면 오늘의 삶을 다시 바라볼 용기를 샘솟게 한다는 차원에서 이 수필은 짜임새 있는 구성 전략에 더하여 삶의 교훈적 가치를 더해 준다. ‘술집 여자’로서 작중 인물, 수필의 이야기 속 그녀는 온갖 산전수전으로 점철된 험난한 삶을 살았다. 만약 이 여인의 인생사를 ‘사실대로’ 듣기만 했다면 기나긴 신세한탄에 불과했을 것이며, 독자들은 한 여인의 삶을 실패로 가득한 고통스런 이야기로 기억하지 않을까. 그렇다. 이야기는 바로 ‘기억’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야기는 바로 우리의 삶이 타인에게 ‘어떻게 기억될 것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그 힘든 밤의 연인으로서 생활하면서도 그녀는 틈이 나는 대로, 자신보다 더 어려운 남을 도우며 살았던 것이다. 이런 그녀의 삶을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한 우리는 각박한 술집 여인의 삶을 살면서도 순수의 영혼을 잃지 않은 그녀를 오히려 존경하게 된다. 그녀의 진정한 유산은 비록 삶을 견디지는 못했지만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영혼의 유산이었다. 이 여인에 얽힌 슬픈 이야기가 수필로 승화되지 못했다면, 이 여인의 삶이 얼마나 팍팍했을까. 단지 ‘객관적 사실’만을 찾아 헤매는 우리들은 비로소 인용된 예문에서 보듯 이 작가의 서사전략에 힘입어 그녀가 홀로 견뎌야 했던 숱한 고독과 방황의 날들을 이해하게 된다. 그 아름다운 이야기의 퍼레이드가 없었다면 그녀의 삶이 얼마나 시시했을까. 이 작가 덕에 그녀의 삶은 생명을 얻게 됐고 그렇게 수필 속에서 영원히 살게 된다. 작가는 삶을 아름답게 가꾸는 이야기꾼이다.
주영길의 <병든 부정>이란 수필에도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이야기가 있다. 이 수필 속에는 6억 정도 되는 재산을 자식에게 물려주고, 겪는 부자지간의 갈등이 리얼하게 그려져 있다. 물론 아버지의 분노에 찬 반협박성 경고로 문제가 해결은 되었지만 마지못해 항복을 선언한 아들의 입장 변화가 씁쓸함을 안겨준다. 이 분 역시 발단부의 서두 기능을 효과적으로 살려냄으로써 가슴을 움직이게 하는 문학의 힘이 무엇인가를 잘 보여주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황혼의 사랑에 빠진 황씨 노인이다. 아버지가 사랑하는 여인이 새엄마가 될까 노심초사 불안해하는 아들과 자식에게서 받는 한 달에 삼십 만원 정도의 돈으로는 연애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고 부양비를 대폭 올려달라고 조르는 아버지 사이의 딱한 사정이 결국 소송으로까지 간다는 내용이 암시하는 바, 도구적 이성으로 살면서 실용주의에 매몰된 현대인들, 특히 노인들이나 젊은이들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강력하다. 비정한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적나라하게 파헤친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이 수필이 주는 서사 전략은 미적 창작의도로 인해 설득력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아래 발단부에 기술된 황씨 할아버지의 절박한 사정은 죽음을 앞둔 노인의 쓸쓸한 심사를 너무도 절절하게 표현해 내고 있다. 소재로서의 이야기를 미적으로 배열하는 과정을 통하여 서사적 의미와 가치를 극대화시켰다.
“황씨 할아버지는 자신의 생이 얼마 남지 않음을 깨닫는다. 삶이 도통 재미없다. 속이 멍하고 텅 빈 듯 아무것도 손에 잡히질 않는다. 백발은 성성하다. 앞니 하나 빼고는 다 틀니다. 여든 셋, 내 나이 다 먹고 남의 나이 셋이다. 옛날로 치면 덤 인생이다. 바람 같은 인생 이슬 같은 행복 죽으면 한줌 흙. 형광등 꺼지듯 그냥 스위치 내리는 거. 종중 선산에 묫자리도 잡아 놓았다. 온 곳으로 돌아갈 날만 기다린다. '혼자'라는 처절한 외로움 견딜 수 없다. 소싯적 불알친구, 백 명도 다섯 손가락 안이다. 그나마 죄다 병 쭈그랭이뿐. 툇마루에서 고양이 뺨 만한 양볕을 쪼이다가 고생만 되게 시킨 뒷동산 할매 곁으로 가고 싶다. 이제, 아무도 늙어가는 사실에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않는다. 마음으로 먼저 포기하고 나니 몸은 더 빨리 망가진다. 나이로 늙는 것이 아니라 기분으로 늙는다.”
한 줄 한 줄의 문장이 음울하고 스산하다. 할아버지가 무슨 일을 벌일 것 같다는 징조가 어둡고 씁쓸한 분위기에서 진하게 묻어난다. 큰 재산을 물려받은 자식에게 아버지의 ‘황혼사랑’은 결코 달갑지만은 않다. 아들의 불쾌한 기분은 먼저 떠난 어머니에 대한 아버지의 배신이 아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의심하는 계기는 혹시나 물려받은 재산이 아버지가 사귀고 있는 여자에게 조금이라도 갈까 두려워하는 데 있다. 황씨 노인은 사랑에 눈이 멀어 자식보다 뒤늦게 알게 된 여자가 아들보다 우선이다. 이 때문에 작가는 황씨 노인의 아들에 대한 부정은 병들었다고 단언한다. 작가의 입장은 황씨 노인에게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양비론적 입장이다. 전경이 아들에게 부정적이라면, 후경은 황씨 노인에게 부정적이다. 그러나 6억 정도 되는 재산을 물려받고 아버지의 부양 요구를 핑계 대며 회피하고 미루는 아들이 더 문제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여론은 아들을 상대로 재산 양도 무효 소송을 준비하는 황씨 노인 편이다. 이 할아버지의 병든 영혼이 지닌 무늬는 단절과 소외의 현대적 특성뿐만 아니라 인간성의 위기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이 세상 어느 아버지와도 바꿀 수 없는 친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배은망덕한 처신, 그리고 아들을 사랑하는 이 세상 모든 아버지가 아들에게 해서는 안 될 법적 소송, 한 여인에게 눈이 어두워 병든 부정을 전해 주는 세상살이의 고단함, 이 모든 우여곡절이 담긴 수필의 이야기는 약자를 보호하고자 공자님이 창안한 유교의 기반인 가부장제의 유산을 무색케 한다. 이 이야기가 주는 교훈으로 가슴이 움직여진다면, 우리의 삶은 어느새 ‘덜’ 힘들고 ‘덜’ 고독하며 마침내 ‘더’ 잘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되지 않겠는가.
홍도숙의 <백설 무>란 수필도 서사에 의지하여 쓰여진 수필이다. 백설이 난무하는 날, 기차를 탄 작가는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고 느낀 바가 있어 한 편의 수필을 쓴다. 일상적인 사건을 문학적 사건으로 잘 승화시킨 덕분이다. 안색으로 보아 환자인 듯한 승객에게 촌로로 보이는 남자가 계속해서 얘기를 하고, 그 옆에 앉은 중년의 남자가 묵묵히 추임새를 넣듯 고개를 끄덕이며 듣는다는 장면이 발단을 장식한다. 말투로 보아 경상도 출신인 촌로는 몸이 안 좋은 사람을 위로하고자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병 없는 사람이 어디 있소. 내장이 상해삐리든가, 어디 뼈가 뽀사지든가, 씨잘데기 없는 혹이 생긴다든가 해서 사람들 엔간한 병은 다 가지고 사는갑소. 병이 있는 자와 없는 자의 구분도 벨 없는 기지요. 병 없이 살다 어느 날 훌쩍 떠나는 기 소원이지만 택도 없는 일이고... 마지막에 그 누군가가 남루해진 우리를 보쌈 해 짊어지고 가서 기가 맥힌 좋은 곳에 풀어놓을 것 아니겄소. 그라이 보쌈 당하는 날 꺼정은 살아야 안되겄소.” 촌로의 이야기는 녹음기에 의해 진술된 것처럼 정밀하다. 이 수필의 서사에서 중요한 것은 행동 주체는 실제 인물이고 전형성이 아닌 역사성을 띤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수필의 서사는 우연성 위에서 취사선택되었다는 것이다. 열차 안에서 목도한 사건은 논리성이나 인과성에 의하기보다는 우연성에 의해 발생한 경우다. 분명히 이야기의 최고 이상은 이야기가 신뢰감과 설득력을 가지고 청자에게 전달될 수 있을 때 달성된다. 곧 문학적 서사에서 이 문제는 특히 중요하다. 들려지는 내용이 허구라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청자를 수긍시킬 수 없게 될 때 서사의 목적은 파탄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사건들이 실감 있게 제시된 이 수필은 서사 전략에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마치 옆에 있는 사람이 이야기를 하는 듯 실감나게 이야기를 전하면서 신뢰할 수 있게 진술한 것은 작가의 의무인 동시에 유보될 수 없는 능력이다.
여전히 눈은 퍼붓고 시종 얘기를 들으며 끄덕이던 남자는 잠에 떨어졌다. 사투리를 쓰던 남자는 몸을 옆으로 비틀고 앉아 하염없이 창밖을 바라보며. ‘눈이 그만 와야 할낀데 비닐하우스 지붕이 무너지면 볼장 다 보는긴데’ 혼자 중얼거렸다. 농사를 많이 짓느냐고 묻자,
“오이와 토마토 상추같은 푸성귀를 쪼매 합니다. 그런 걸 해서 묵고는 사는데 집안에 우환이 겹처서 사는기 사는 게 아입니다. 안사람과 시집간 딸이 모두 중병입니다.” 한 숨을 내쉬고 그는 또 혼자 말을 하는 것 같았다.
‘나도 저 눈의 춤사위처럼 펄렁펄렁 춤을 출 날이 있을까. 속앓이로 옹이진 퍼런 멍들을 낱낱이 풀어 던지고 저렇게 몽환처럼 춤을 출 수 있을까. 남을 위로 한답시고 그리 말은 했지만 누가 내 누더기 같은 마지막을 보쌈 해 가겄나. 가져가 무엇에 쓸라고. 기가 맥힌 좋은 곳이 있기나 할끼라고.’ 그의 푸념은 눈 발 사이로 새로운 세상을 꿈꾸듯 중얼거렸다.
서사가 그럴 듯하게 독자에게 비쳐지는 것은 작가의 이 같은 의무가 충실히 이행되고 작가의 이야기하기의 능력이 차질 없이 발휘된 결과이다. 환자인 듯한 남자를 위로하던 그 촌로의 안사람과 시집간 딸도 중병에 걸렸다는 이야기가 반전으로 그리고 수미상관적으로 제시되면서 서사 전략은 문학적 효과를 극대화한다. 사건들이 그럴 듯하게 제시되고 있지 못하다면 독자들의 독서 충동을 자극하거나 지속시키기는 불가능해진다. 따라서 경험이 그럴 듯하게 제시되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문제에 서사의 성패는 결정적으로 좌우된다고 말해도 좋겠다. 경험의 재현이 타당하고 적법한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그럴듯함의 개념은 개연성이라는 말과 무관치 않다. 그러나 행위의 모방은 개연성을 가져야 된다고 말하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개연성은 모방의 대상을 지칭한다. 즉 모방의 이상은 행위 자체를 재현해 내는 데 있지 않고 행위들을 지배하는 보편적 원리를 재현해내는 데 있다. 수필에서 이야기가 그럴 듯해야 된다는 주장은 이야기가 사실이라도 개연성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 수필이 독자를 감동시키는 까닭은 그 수필들이 사실을 바탕으로 하면서 그럴듯하게 씌어졌기 때문이다. 그럴듯함이라는 말은 수필이 진술하는 사건이 현실과 가지는 관련성을 판별하는 개념이 아니고 이야기의 서술이 그것 자체로 자족스러운가 아닌가를 판별하는 개념이다. 덧보태자면 심미적 진실성을 가지는 모든 서사는 그럴 듯한 것이고 그러한 문맥 속에서 그럴듯함의 개념은 이해되어져야 옳다.
이상으로 수필의 예술적 가치를 높이는 데 의미있는 사건의 구성이 중요하다는 것을 밝혔다. 그럼에도 그 동안 한국 수필이 연구자들로부터 외면당해 온 이유 중의 하나는 장르 자체에 대한 왜곡된 인식도 한 몫을 했다. 예컨대, 수필은 심오한 이론이 없는 문학이라든지, 붓 가는 대로 쓰는 여기의 문학이라는 식의 왜곡된 인식이 젊은 학자들의 도전의지를 꺾어 놓은 것이 사실이다. 수필이 소설과 시의 깊이와 문학성을 능가하는 예술작품의 지위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먼저 작가들의 서사이론에 대한 연구가 앞서야 된다. 그러나 희망적인 것은 수필 장르는 아직 개발의 여지가 많은 미개척 분야라는 것이다. 세계문학사 속에서도 인류는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오랜 기간 동안 허구문학의 연구에만 전념해왔고, 비허구문학에 대한 관심은 거의 저조했다. 그 결과 수필 장르는 아직 채굴되지 않은 원석처럼 미래의 새로운 탐색 장르로서의 권위를 누리게 되었다. 게다가, 시와 소설 중심의 세계문학사는 실험의 한계에 봉착한 채,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나서야 할 기로에 서있다.
따라서 전 세기 말부터 불기 시작한 수필에 대한 관심 증가는 그것이 미래의 지배적 장르로 성장할 가능성을 뜻한다. 이러한 변화의 시점에서 수필에 대한 서사 전략의 필요성은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수필문학이 앞으로 지배적 문학 장르로 성장할 가능성은 아직 세계문학사에서 본격적으로 탐구되지 않은 비허구문학의 대표적 장르라는 데 있다. 상상력을 활용한 허구문학은 이제 그 한계에 도달해 있다. 게다가, 허구적 진실은 아무리 사실적인 모방술을 동원해도 가상적인 진실로 남을 수밖에 없음을 현실로 인정하기 시작한 현대문학의 흐름도 이런 주장을 뒷받침한다. 그리고 수필 장르도 소설에 못지않은 깊은 서사 구조를 띠고 있다는 점이다. 수필의 이야기는 개연성 있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따라서 독자에게 믿을 만하다는 신뢰감을 주게 된다. 아직 파헤쳐지지 않은 새로운 미학의 세계, 신비로운 예술의 세계가 수필장르 속에서 발견됨으로써 앞으로 세계문학인들의 관심을 모으기 시작한 것도 이런 반증이다. 수필도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배열하여 문학적 방식으로 제시되면 소설 이상의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본고에서 다룬 작품들이 증명하고 있다. 문학적 장치로서 서사전략은 수필의 잡문성 시비를 해결해주는 하나의 길잡이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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