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모라노는 1986년 칠레 2부리그 코브레 안티노 팀에서 축구인생을 시작하였고 한때 부진을 겪었지만 1부리그 코브레살에서 훌륭한 활약을 보여 스위스리그의 갈렌클럽으로 진출하였고 여기서도 두각을 나타내 세비야로 둥지를 옮겨 프리메라리가에 발을 들였으며 세비야에서도 꾸준한 활약을 보여 레알 마드리드의 러브콜을 받았다.
레알 마드리드에서 자신의 최전성기를 구가했던 사모라노는 인터 밀란으로 이적하게 된다.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사모라노는 레알 마드리드에서와는 달리 인터밀란에서는 하향세를 그리게 된다.
94-95 시즌에는 라 리가의 우승컵을 따내는데 큰 기여를 했고 또한 38경기 28골을 넣으면서 득점왕까지 따냈던 그였지만 96-97시즌 인터밀란에서는 31경기에 출전해 7골밖에 넣지 못했다.
이 때, 축구에 관심이 적은 사람조차 이름을 알 정도로 유명한 호나우두가 1997년 인터 밀란에 입성하게 된다.
그때당시 호나우두는 1993-94 시즌 브라질 리그의 크루제이루에서 60경기에 출장해서 무려 58골이나 기록했고 대표팀 선배 호마리우의 조언으로 PSV아인트호벤에 입단하여 유럽진출을 하였다.
PSV에서 첫 시즌에 35골을 기록하면서 네덜란드 리그 득점왕에 등극했다.
1996년 그는 프리메라리가의 FC 바르셀로나로 이적했고, FIFA는 호나우두를 올해의 선수로 선정했다.
호나우두는 FC바르셀로나에서도 49경기에 출장해 47골을 넣는 놀라운 활약을 보였다.
그때당시 그야말로 무지막지한 플레이를 보이는 호나우두를 인터 밀란은 눈독을 들이고 있었고 바르셀로나에게 거액을 주고 인터 밀란으로 데려오게 했다.
1997년 9번의 사나이 호나우두는 프리메라리가 득점왕 타이틀과 함께 인터 밀란에 입단하게된다. 호나우두는 에이스의 상징인 10번을 받았지만 이듬해 팀의 용품 업체가 나이키로 변경되었고 나이키와 함께 자신의 이름을 딴 R-9 상품을 출시했다. 나이키는 상품의 광고를 위해 인터 밀란측에 호나우두의 등번호 변경을 요구했고 인터 밀란은 거액의 지원을 받기 위해 등번호 변경을 결정한다.
게다가 이탈리아의 국민적 영웅이자 영원한 10번인 로베르토 바조가 인터 밀란에 입단하게 되면서 바조는 10번 호나우두는 10 =>9번 사모라노는 9 =>18번을 달게 되었다.
여기서 사모라노의 재치가 돋보인다.
사모라노는 등번호를 18번으로 바꾸었는데 1과 8 사이에 + 를 집어넣었다.
1 + 8 = 9
사모라노는 1+8 번을 등번호로 달았으며 자신의 재치로 등번호 9번을 계속해서 달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많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후.. 호나우두(레알마드리드)가 칠레 축구대표팀 간판 스트라이커 이반 사모라노(36)의 은퇴 경기에 출전하기 위해 장거리 비행을 마다않는 우정을 과시했다.
호나우두는 26일(한국시간) 칠레 산티아고 국립경기장에서 열린 사모라노 은퇴 기념 경기에 출전하기 위해 전날 스페인을 출발, 15시간의 비행기 여행을 감행했다.
호나우두는 `사모라노는 이런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다`며 `내 은퇴 경기도 이렇게 멋지게 치러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날 사모라노의 은퇴 경기는 칠레 대표팀과 호나우두를 비롯한 세계적 스타 플레이어들로 구성된 국제연합팀간에 펼쳐졌다.
국제연합팀에는 호나우두 뿐 아니라 아르헨티나의 안드레스 달레산드로, 그리고 이제는 은퇴한 카를로스 발데라마(콜롬비아)와 `골넣은 골키퍼` 호세 루이스 칠라베르트(파라과이) 등이 포함됐다.
그라운드에서 국가의 명예를 걸고 어깨를 맞부딪혔던 `옛 적수`들의 우정 어린 격려 속에 은퇴경기를 마친 사모라노는 칠레 국기를 온 몸에 두른 채 `난 행운아다. 축구를 통해 모든 것을 다 이뤘고 만족한다`며 `모두에게 감사한다`고 말했다.
이날 사모라노의 은퇴경기에서는 사모라노를 아쉬워하는 마음에 양팀의 모든 선수들의
유니폼에는 9번이 새겨져 있었다...
첫댓글 90년대 유럽축구를 이야기 할때 빼놓수 없는 공격수죠 이반 사모라노오늘날 최고의 공격수 중 하나로 평가받는 팔카오가 룰모델 삼은 선수 랍니다
와~~정말 모르는 내용이였는데...글 읽다가 가슴이 뭉클~해지네요
좋은자료~항상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