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시록)버가모에 있는 교회의 천사에게(8)
말씀: 계2:12-17. 2024년 2월 4일 일요일 오전 11시오늘은 주님이 버가모 교회의 천사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버가모 교회는 사도행전이나 바울의 서신이나 다른 사도들의 서신에 한 번도 언급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언급하신 계시록에 처음 나오는 교회인데 지중해의 에게해 연안에서 24Km 내륙에 위치하고 있으며 버가모 교회는 서머나 교회와 직선거리로 약 40마일(64km) 정도 떨어진 북쪽 고지대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버가모는 앗탈루스 왕족의 수도로서 주전 3-2세기에 번성한 문화 도시로 20만 권의 장서가 있는 도서관으로 유명하며(유네미스 2세). 알렉산드리아와 비견할 만한 학문의 고장입니다. 버가모는 상업 도시가 아니라 문화, 종교, 학문의 도시입니다. 이교도들의 신전이 많으며 제우스가 살았던 곳으로 알려짐으로 이곳에는 높이 12m의 거대한 제우스 신전이 있습니다(계2:13). 로마 황제를 경배하는 신전 역시 이곳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제우스 신전, 디오니소스 신전, 아데나 신전, 아스클레피오스 신전(뱀의 형상을 한 약신)과 로마황제 숭배를 위한 3개의 거대한 신당 등 갖가지 우상숭배 신전들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버가모란 도시를 일컬어 “사탄의 자리가 있는 곳”, “사탄이 거하는 곳”(13)이라고 말씀하신 데는 이런 이유가 있습니다.
‘버가모’란 이름이 “숱한 결혼”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사로 볼 때 주후 325년에서 500년까지의 기간으로 봅니다. 이 기간은 “로마 카톨릭 교회”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며 이후로 중세 암흑 세대를 열게 됩니다.
“숱한 결혼”이란 이름이 의미하는 대로 이 교회는 세상과 연합하는 교회, 세상과 결혼한 교회, 각종 이교도들이 교회 내로 들어와 혼합하는 그런 시기입니다. 성경 자체를 볼 때는 니케아 종교 회의 때(A. D. 325) 오리겐이 변개시킨 성경을 공식적으로 교회에서 정경으로 인정하고 받아 들였습니다. 숱한 고통으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뿜었던 서머나 교회와 달리 버가모 교회는 배교한 교회, 주님께서 이혼 증서(마5:31)라고 말씀하신 부패한 성경을 지니고 있었고 수많은 신실한 신자들이 음녀 교회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사탄은 거짓 교회를 사용하여 성경을 불태우고 성경 신자들을 죽이며 가증한 것들을 널리 퍼뜨리기 시작했습니다.
12절입니다. [버가모에 있는 교회의 천사에게 쓰라. 양날 달린 날카로운 검을 가진 자가 이것들을 말하노라.](계2:12). 주님은 요한에게 “버가모에 있는 교회의 천사에게 쓰라”고 말씀하십니다.
버가모에 있는 교회는 거대한 이교도들의 세력들에 둘러싸인 교회입니다. 거대한 이교도들의 신전들이 넘쳐났고 학문을 장려하는 풍습에서 신학과 철학이 발전했습니다. 다양한 문화가 수용되어 융합했습니다. 숱한 결혼이란 이름을 가진 이 도시에서 교회가 순수한 믿음을 지니기 위해서는 철저한 분리 외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12). “양날 달린 날카로운 검을 가진 자가 이것들을 말하노라.”
주님은 자신을 “양날 달린 날카로운 검을 가진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고대 사회에서 칼을 가진 이는 권력자를 말합니다. 생사를 주관하는 자, 절대 권력자를 말합니다. 현대에서는 총이라고 말하지만 예전에는 모두 검이었습니다. 검은 모든 병기의 제왕이라고 불렸고 로마인들에게 검은 곧 권력, 힘, 권세, 권위의 상징이었습니다.
버가모에는 로마의 황제 쥴리어스 씨저(29 B.C)를 신으로 높이는 ‘신전’이 세워진 최초의 도시입니다. 씨저를 대표하는 상징물이 ‘검’이었습니다. 당대 로마는 제국으로써 온 세상의 정복자, 승리자, 최고의 권력으로 땅의 민족들과 백성들, 지역 신들 위에 있는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황제 숭배, 황제의 신격화를 추구했고 황제의 손에 있는 검은 위엄을 드러냈습니다.
주님은 버가모에 있는 그런 배경을 염두에 두시고 “양날 달린 날카로운 검을 가진 자”라고 자신을 소개하시며 온 세상의 통치자, 권세자는 세상의 어떤 왕이 아니라 주님 자신임을 알려 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양날 달린 어떤 검보다 예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권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둘로 나누고, 마음의 생각과 의도를 분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권능이 있으며 양날 달린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둘로 나누기까지 하고 또 마음의 생각과 의도를 분별하는 분이시니](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육신의 목을 자르거나 배를 찌르거나 손, 발을 베는 것이 아닙니다. 혼과 영을 찔러 나누고, 마음의 생각과 의도를 분별합니다. “관절과 골수를 찔러 둘로 나누기까지 하고...”란 말씀은 손으로 하지 않는 그리스도의 할례를 행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분 안에서 그리스도의 할례에 의해 육신의 죄들에 속한 몸을 벗어 버림으로 손으로 하지 않은 할례로 할례를 받았느니라.] (골2:11)
주님께서 진토(몸)에 붙어 있는 우리 혼을 성령의 검, 말씀의 검으로 할례를 행하시는 것입니다.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취하라.](엡6:17).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철로 만들어진 ‘검’이 아니라 주의 입에서 나오는 호흡이요 숨입니다. 이 검은 소멸시키는 불과 같은 ‘화염검(火焰劍)’입니다. 성령의 검은 악한 영, 악한 생각을 찌르고 벨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마귀를 대적하며 악한 영들을 물리칠 때 쓰는 영적인 검입니다.
주님은 리워야단(욥41:1), 베헤못(욥40:15)과 같은 영적 존재들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이들은 사람들의 어떤 무기나 공격에도 무서워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그는 [하나님]의 길들 중에서 으뜸이지만 그를 만든 자가 자신의 칼을 그에게 가까이 댈 수 있느니라.](욥40:19).
이들을 물리칠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이들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자신의 칼”(성령의 검)을 그에게 가까이 댈 수 있다고 하십니다.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영적인 존재들에게 가장 치명적이며 위협적입니다. [그 뒤에 저 사악한 자가 드러날 터인데 [주]께서 자신의 입의 영으로 그를 소멸시키시고 친히 오실 때의 광채로 그를 멸하시리라.](살후2:8).
주님께서 저 사악한 자(적그리스도)를 무엇으로 멸하시는지 보십시오. 자신의 입의 영으로 그를 소멸시키십니다. 주의 입에서 나오는 주의 말씀은 마귀를 소멸시키는 성령의 검입니다. 주의 말씀은 사람들의 마음을 자르는(cut) 날카로운 검입니다. [그들이 그 말을 듣고 마음이 상하여 사도들을 죽이려고 의논하였는데](행5:33). “마음이 상하여”란 표현을 킹 제임스 성경으로 한 번 보십시오. they were cut to the heart(KJV). 그들의 마음은 칼로 잘렸습니다. 사도들이 선포한 주의 말씀은 날카로운 검이었고 듣는 이들의 마음을 잘랐습니다. 말씀을 들은 완악한 유대인들조차 마음이 칼질당하는 체험을 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이것들을 들을 때에 마음이 상하여 그를 향해 이를 갈았으나](행7:54). 스데반의 말씀 선포를 들은 혼들 역시 동일합니다. 그들의 마음은 살아있고 권능이 있는 날카로운 검에 잘렸습니다. [이때에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이 찔려 베드로와 나머지 사도들에게 이르되, 사람들아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까? 하므로](행2:37). they were pricked in their heart(KJV).
하나님의 말씀이 검이란 사실은 성경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성령의 검을 가지고 있습니까? 전쟁터에서 무기를 잃어버린 군인, 무기를 가지고도 사용할 줄 모르는 군인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적들이 우습게 여기며 노략질할 것입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말씀을 가지고도 사용할 줄 모릅니다. 무기의 용도도 모르고 사용법도 모른 채 전쟁터가 아닌 놀이터에서 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주신 강력한 무기를 잃어버린 채 살고 있지 않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성도들의 입에는 [하나님]을 높이 찬양함이 있고 성도들의 손에는 양날 달린 검이 있을지니](시149:6).
여러분의 손에는 “양날 달린 검”이 있어야 합니다. 구약과 신약은 우리의 손에 있는 양날 달린 검입니다. 당시 버가모에는 20만권이 넘는 도서를 구비한 대형 도서관이 있었습니다. 버가모란 단어는 동물의 가죽으로 만든 종이에 해당하는 Parchment(양피지, 사본)와 같은 어원입니다. 파피루스보다 훨씬 질기고 고급스런 양질의 가죽으로 된 종이입니다.
버가모의 유네미스 2세(주전197-159)는 대형 도서관을 세워 알렉산드리아의 학자들을 이곳으로 오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이곳에 있는 수십만 권의 책들 중에 어떤 것도 우리의 손에 잡아야 할 양날 달린 검은 없습니다. 국회 도선관이나 대학 도서관이나 어느 연구소에서 운영하는 도서관의 책들이라도 그것들은 ‘양날 달린 검’이 아닙니다. 우리 입술에 하나님을 찬양함이 있고 우리 손에는 올바른 성경이 있어야 합니다. 죄를 이기고 마귀를 물리치며 세상을 이기는 양날 달린 검은 주의 말씀뿐입니다.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권능과 오른손과 왼손에 든 의의 병기로 그리하며](고후6:7). 철학, 종교, 과학, 전통 등 사람들이 만든 어떤 것도 우리가 붙잡아야 할 병기가 아닙니다. 우리의 양 손에는 성령의 검, 주의 말씀만으로 충분합니다. 그 외에 어떤 것을 무기로 삼지 마십시오. 자신이 대학에서 배운 학문, 세상에서 배운 경험, 어디서 주워들은 철학, 일반상식들로 자신을 무장하지 마십시오. 주의 말씀으로 자신을 무장하십시오. “양날달린 날카로운 검”을 가진 하나님은 심판자, 죽이시는 분, 악을 멸하시는 분이시오 정복자요 승리자이십니다.
13절입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알며 네가 어디 거하는지 아노니 그곳은 사탄의 자리가 있는 곳이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붙잡고 안디바가 나의 신실한 순교자가 되어 너희 가운데서 곧 사탄이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한 그 당시에도 나의 믿음을 부인하지 아니하였도다.](계2:13).
주님은 버가모 교회의 행위를 알고 어디에 거하는지 아신다고 하십니다. 버가모 교회의 행위는 무엇입니까? 주님의 이름을 굳게 붙잡고 순교자가 되어 죽임을 당한 때에도 믿음을 부인하지 않는 것입니다. 버가모 교회가 있는 버가모에는 이교도들의 거대한 신전들이 즐비하고 황제에게 신격을 부여해서 제물을 바치는 신전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버가모를 “사탄의 자리가 있는 곳”, “사탄이 거하는 곳”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빌론의 신비 종교를 그대로 흡수해서 버가모에서는 고대 바빌론 종교의 의식들이 거행되었습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행하는 여신 숭배(세미라미스, 마리아), 크리스마스(동지 축일), 부활절(담무스의 부활), 묵주, 제사장 체계, 담무스의 동정녀 탄생 등 대부분의 이교도들의 종교 의식이 카톨릭에서 각색되어 개신교회 안으로 유입되었습니다. 그런 중에 버가모 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굳게 붙잡았습니다.
안디바는 신실한 순교자가 되어 죽임을 당했습니다. 버가모 교회의 성도들은 이런 고난과 위기 속에서 붕괴된 것이 아니라 믿음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칭찬하신 버가모 교회의 위대한 점입니다. 버가모 교회는 사탄의 자리에 있던 교회요 사탄이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하는 성도들이었지만 그런 환경에 전혀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성도들의 고난, 수고, 섬김, 눈물, 행위 등을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히6:10). 주님은 각자의 행위대로 갚아 주시고 보상해 주시기에 “내가 네 행위를 아노라.”(13)고 하십니다. 우리는 어둠의 행위를 벗어 버리고(롬13:12), 옛 사람의 행위를 벗어 버리고(골3:9), 사람들의 불법의 행위를 보고 들으며 혼이 고통 받지만(벧후2:8) 선한 행위를 하도록 창조된 자들임을 알고(엡2:10), 선한 행위를 지속하는 것을 배워(딛3:14) 지혜의 온유함으로 선한 생활에서 나오는 자신의 행위를 보여야 합니다(약3:13). 실족하거나 타락했을 때는 “어디로부터 떨어졌는지 기억하고 회개하며” 처음 행위를 하도록 해야 합니다(계2:5).
(13).“사탄의 자리.......사탄이 거하는 곳” 버가모에 있는 교회는 “사탄의 자리가 있는 곳”입니다. 사탄의 자리란 사탄을 섬기기 위해 세워진 건물, 장소를 말합니다. 이교도들의 신전으로 제우스 신전, 아테네 신전이 버가모의 대표적인 신전 건물입니다. 언덕 위에 세워진 거대한 이 신전은 365일 내내 불을 피웠고 모든 시민들이 신전에서 솟아오르는 연기를 볼 수 있게 했습니다.
신전 둘레로는 온갖 신들과 고대 거인들의 형상을 조각해놓아서 아직까지 그 작품들이 유물로 남아 있습니다. 고대 바빌론의 신비 종교와 고대 그리스의 신들이 공존하는 도시가 버가모입니다. 사람들은 학문을 숭상하고 문화를 발전시켰습니다. 버가모 교회는 그런 사탄의 자리가 있는 곳에 있었고 이교도들은 자신들의 신을 부정하는 크리스천들을 자신들의 신전에서 죽였습니다.
본문에서 사탄의 자리는 문자 그대로 사탄이 거하는 자리입니다. 사탄의 왕좌, 권세를 말합니다. (계13:2). [내가 본 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의 발은 곰의 발 같으며 그의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 권능과 자기 자리와 큰 권위를 그에게 주었더라.]
(13). “네가 내 이름을 굳게 붙잡고...” 버가모 교회는 주 예수님의 이름을 굳게 붙잡았습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신들의 이름이 있고 영웅들의 이름이 있고 왕들의 이름이 있고 성현(성인)들의 이름이 있고 천사들의 이름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붙들어야 할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입니다. 예수란 이름은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들에서 구원할 것이기 때문이라.”(마1:21)는 뜻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임마누엘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뜻”(마1:23)입니다. 우리는 예수란 이름으로 인해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고(마10:22), 예수란 이름으로 누군가를 대접할 때 그는 보상을 잃지 않습니다(마10:42). 예수란 이름으로 어린아이 하나를 받아들이는 자도 주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마18:5). 두세 사람이 예수란 이름으로 함께 모이면 그곳에 주님이 그들 가운데 계십니다(마18:20).
예수란 이름으로 뭔가를 잃은 사람들, 버린 사람들은 백배를 받고 영존하는 생명을 얻습니다(마19:29). 예수란 이름은 모두가 믿고 신뢰해야 할 이름이며 또한 많은 사람들이 그 이름으로 와서 사람들을 속이기도 합니다(마24:5). 예수란 이름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고통을 받고 죽고 미움을 받습니다(마24:9).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았고 그분의 이름으로 침례를 줍니다(마28:19). 회개와 죄들의 사면이 그분의 이름으로 선포되고(눅24:47), 그분을 받아들인 자들 곧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능을 주셨습니다(요1:12).
예수란 이름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이요 그 이름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이미 정죄를 받았습니다(요3:18).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기에 사람들의 배척을 받았습니다(요5:43).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의 증언을 받았지만 사람들은 믿지 않았습니다(요10:25). 예수란 이름은 주의 이름입니다(요12:13).
예수란 이름은 우리가 무엇을 구하든지 기도할 때 사용하는 이름입니다.
주님은 “요14: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그것을 행하리니...14,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내가 그것을 행하리라.”(요14:13-14)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너무나 엄청난 약속의 말씀입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그분께서 그것을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 함이라.”(요15:16), “......너희가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면 그분께서 그것을 너희에게 주시리라.”(요16:23),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러면 너희가 받으리니 이로써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16:24).
주님은 자신의 이름으로 구하라고 하십니다. 성경의 기록 목적은 예수님의 이름을 믿고 구원 받게 하는데 있습니다(요20:31). 누구든지 그 분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습니다(행2:21). 그분의 이름 외에 다른 누구의 이름, 어떤 이름으로도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행4:12).
예수란 이름은 “그분을 모든 권력과 권능과 강력과 통치와 이 세상뿐만 아니라 오는 세상에서 불리는 모든 이름보다 훨씬 위에” 두셨습니다(엡1:21).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있는 이름을 그분에게 주사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과 땅 아래 있는 것들의 모든 무릎이 예수라는 이름에 굴복하게” 하셨습니다(빌2:9-10). 예수란 이름은 천사들보다 훨씬 더, 더욱 뛰어난 이름(히1:4)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그 날에 수많은 사람들이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했나이다.”(마7:22)라고 하지만 그들은 구원 받지 못한 자들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13). “안디바가 나의 신실한 순교자가 되어...” 버가모 교회는 그 지역에서 경배 받던 수많은 신들이 아닌 주 예수님의 이름을 굳게 붙잡았습니다. 로마 캐톨릭이 마리아의 이름을 굳게 붙잡고 천사들이나 죽은 성인들의 이름을 굳게 붙잡는 것과는 하늘과 땅의 차이, 천국과 지옥의 차이가 있습니다. 안디바는 주님의 신실한 순교자가 되어 죽임을 당했습니다. 자, 어디서 죽었는지 보십시오.
(13) “너희 가운데서 곧 사탄이 거하는 곳에서...”죽임을 당했습니다.
서머나 교회에 사탄의 회당인 자들이 있었듯이 버가모 교회는 “사탄이 거하는 곳”이라 불리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로마 캐톨릭 교회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신실한 순교자들은 캐톨릭 교도들 즉 사탄이 거하는 곳에서 종교 재판을 받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런 일은 유대인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초대 교회의 역사가 그러하듯이 유대인들은 크리스천들을 잡아 죽였는데 그들이 있는 회당, 성전은 ‘사탄이 거하는 곳’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외치는 유대교인들, 주님을 외치는 캐톨릭 교인들 가운데서 신실한 순교자가 되어 죽은 이들은 사실 ‘사탄이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본문을 주목해서 보십시오. “네가 거하는 곳 ...즉 사탄의 자리가 있는 곳”, “너희 가운데서 곧 사탄이 거하는 곳에서...”(계2:13)라고 말합니다. 본래 교회 성도들의 모임,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그들 한 가운데 주님이 계십니다. 그런데 버가모에 있는 교회는 사람들이 모인 자리가 사탄의 자리요, 그들 자체가 사탄이 거하는 곳입니다. 사탄은 유대교도들, 무슬림교도들, 캐톨릭교도들과 같은 종교인들 사이에 거합니다.
서머나 교회에는 스스로 유대인이라 하나 유대인이 아니라 “사탄의 회당인 자들”(계2:9)이 있었고 버가모 교회에는 사탄의 자리, 사탄이 거하는 곳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성도들의 몸은 성령의 거처입니다. 교회는 다니지만 믿지 않는 자들의 몸은 사탄의 자리, 사탄이 거하는 곳입니다. 순수한 하나님의 양 무리들의 모임인 교회가 아니라 이교도 화 된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슬프게도 오늘날 수많은 교회가 버가모 교회의 모습입니다.
14절입니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할 것이 몇 가지 있나니 이는 거기에 발람의 교리를 붙잡는 자들이 네게 있기 때문이라. 그가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게 하고 우상들에게 희생물로 바친 것들을 먹게 하며 또 음행하게 하였느니라.](계2:14). 주님은 버가모 교회를 향해 “내가 너를 책망할 것이 몇 가지 있나니...”(14)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칭찬하실 것은 칭찬하시고 책망하실 것은 책망하십니다. 이 둘을 혼합하거나 어느 한 가지로 다른 한 가지를 덮어 버리지 않으십니다.
“이는 거기에 발람의 교리를 붙잡는 자들이 네게 있기 때문이로다.”(14). 버가모교회는 순수한 주님의 말씀이 아닌 이교도의 교리, 세속화된 풍습, 철학 등이 이미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주님의 말씀보다 사람들의 전통과 계명을 더 따랐듯이 버가모교회는 교회의 전통, 교회법, 교황의 가르침, 사람들이 만든 교리를 주의 말씀인 성경처럼 붙들었습니다.
발람의 교리는 성경 말씀에서 나온 교리가 아니라 이교도의 교리입니다. 발람은 이교도의 제사장 겸 대언자로서 점쟁이였습니다(민22:7). 그는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는 모압 왕 발락의 부탁을 받고 그에게 갔습니다. 발락은 발람에게 금은보화는 물론이요 높은 지위를 보장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발람에게 명하여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말을 한 마디도 못하게 하셨고 도리어 축복하도록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그에게 해야 할 말을 주셨습니다. 발람은 직접 이스라엘을 저주할 수 없게 되자 발락을 가르쳐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게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스스로 죄를 범하도록 유혹해서 주 하나님께 저주와 심판을 받도록 하는 것입니다.
발락은 발람의 제안대로 이스라엘을 모압의 신전으로 초청해서 음식과 여자(신전 창녀)를 제공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팀에서 모압의 딸들과 행음하기 시작했고(민25:1), 모압이 자기 신들에게 희생물을 드릴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도 와서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을 했습니다(민25:2). 이 사건으로 주의 분노가 타올랐고 이만 사천 명이 죽었습니다(민25:9).
오늘날 교회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발람의 교리를 붙잡고 있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교회가 세상과의 연합하는 것은 영적 음행입니다. 예언하는 자들을 불러 간증을 시킵니다. 코메디언들을 강단에 세우고 마술하는 자들을 세웁니다. 종교 간의 대화, 일치, 연합은 심각한 영적음행이며 동시에 우상 숭배입니다. 이와 같은 음행은 오늘날 교회 내에서 벌어지는 공공연한 비밀입니다.
발람의 교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스스로 하나님께 죄를 지어 죽게 하는 것입니다. 발람의 교리는 혼합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들의 딸들이 결합하듯(창6) 하나님의 백성과 이교도의 결합은 주의 진노와 심판을 불러일으킵니다. 발람은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걸림돌을 놓게 했습니다(14).
마귀는 성도들의 길에 올무를 놓습니다. 성도들은 마귀의 올무(딤전3:7, 딤후2:26)에 걸리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부유하게 되고자 하는 자들은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시험과 올무에 걸립니다(딤전6:9). 발람은 우상들에게 희생물로 바친 것들을 먹게 했습니다(계2:14).
광야에서 만나를 먹던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압인들이 자기들의 우상 신에게 희생물로 드리는 음식들을 보고 즐거이 먹었습니다. 그들의 하나님은 그들의 배였습니다. 신전에서 제공하는 음식들을 먹으면서 배를 불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신전 창녀들과 연합하여 음행했는데 모두 발람이 발락에게 가르쳐서 행하게 한 것들입니다.
신약 성경에는 발람의 교리, 발람의 길, 발람의 오류(잘못)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발람의 교리는 음행과 우상숭배입니다. 발람의 길은 바른 길을 저버리고 불의의 삯을 따라가는 것입니다(벧후2:15). 발람의 잘못(오류)은 탐욕으로 내려 달려가는 것입니다(유1:11). 탐욕은 우상 숭배입니다.
발람이 가르친 것과 우리 주님의 은혜가 가르치는 것의 차이를 보십시오.
[구원을 가져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 우리를 가르치시되 하나님의 성품에 위배되는 것과 세상에 속한 정욕들을 우리가 거부하고 이 현 세상에서 맑은 정신을 가지고 의롭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며 저 복된 소망과 위대하신 [하나님] 곧 우리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느니라.](딛2:11-13). 주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어떻게 가르치는지 주목하십시오.
15절입니다.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리를 붙잡는 자들이 있는데 내가 그것을 미워하노라.](계2:15). 니골라당의 교리는 성직자 계급, 제사장 계급과 같은 계급 체계를 말합니다. 구약의 유대교에는 대제사장이 있고 레위 지파의 제사장이 있었습니다. 거의 모든 이교도들의 종교에도 동일한 제사장 체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 교회에는 그런 체계가 없습니다. 모든 크리스천들은 서로가 형제요,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지역 교회에는 감독, 장로, 집사, 교사와 같은 직분이 있지만 그것들은 계급이 아니라 성도들을 먹이고 섬기는 직무에 불과합니다.
에베소 교회는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했습니다(계2:6). 주님께서는 “나도 그것을 미워하노라.”(계2:6)고 하셨습니다. 버가모 교회는 “니골라당의 교리를 붙잡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어느덧 개신교회는 성직자 제도를 교회법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교회마다 ‘니골라당의 교리’를 만들어 그것을 붙잡고 있습니다.
캐톨릭, 성공회, 장로교, 감리교 등은 니골라당의 교리를 붙잡는데 철저합니다. 그들은 지역 교회 건물을 구약의 성전으로, 목사를 하나님이 세우신 레위 제사장과 같은 “성직자”라고 부르며 성도들을 “평신도”라 부릅니다. 목사가 설교하는 강단과 강대상을 지성소라 부르며 평신도들의 접근을 철저히 막기도 합니다.
오늘날의 많은 개신교회가 이런 거짓 교리를 붙잡고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의 장로 혹은 목사를 존경하고 그들의 행실을 눈여겨보고 믿음을 따르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니골라당의 교리에 따르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버가모 교회에도 ‘니골라당의 교리’를 붙잡는 자들이 있으며 주님은 ‘니골라당의 행위’와 ‘니골라당의 교리’를 미워하십니다.
16절입니다.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속히 네게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계2:16). 주님은 버가모 교회를 향해 “회개하라.”고 명하십니다. 회개는 잘못된 것을 버리고 돌아서는 것입니다. 회개는 단지 죄를 슬퍼하고 자신을 애통해 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깨닫고 그 죄를 자백하고 버리고 의로 돌이켜야 합니다. 자신의 죄악을 시인하고 자신을 돌이켜야 합니다. 단지 죄를 알고 인정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회개하라는 명령은 온 인류의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주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침례인 요한은 유대인들을 향해 “회개하라.”고 선포했습니다. 주님과 사도들 역시 온 이스라엘에게 “회개하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주님은 복음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을 향해 “회개하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같이 무지하던 때를 눈감아 주셨으나 이제는 모든 곳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명령하시나니](행17:30).
회개하라. 하늘의 왕국(Kingdom of Heaven)이 가깝기 때문입니다. 회개하라. 하나님의 왕국(Kingdom of God)이 가깝기 때문입니다. 회개하라. 주님은 죄인들을 불러 회개하게 하려고 오셨기 때문입니다(마9:13, 막2:17, 눅5:32).회개하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그와 같이 멸망하기 때문입니다(눅13:3,5).회개하라. 회개하는 한 죄인으로 인하여 하늘에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 사람보다 더 큰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눅15:7).회개하라. 회개하고 죄들의 사면을 얻고 성령님을 선물로 받기 때문입니다(행2:38). [그러므로 너희는 회개하고 회심하라. 그러면 새롭게 하는 때가 [주]의 앞으로부터 올 때에 너희 죄들이 말소될 것이요](행3:19). 이와 같이 우리는 성경에서 회개하라는 명령을 반복해서 듣습니다. 주님은 교회에 보낸 글에서도 죄를 책망하시고 회개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에베소 교회는 회개하지 아니하면 등잔대를 옮기시겠다고 경고하셨습니다. 버가모 교회는 회개하지 아니하면 주님께서 직접 와서 자신의 입의 칼로 싸우시겠다고 하십니다. 본문을 잘 보십시오. 주님께서 누구와 싸우십니까? 마귀들과 싸우시는 것이 아닙니다. 버가모 교회의 회개하지 않는 자들과 싸우십니다.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속히 네게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16).
발람의 교리를 붙잡는 자들, 니골라당의 교리를 붙잡는 자들과 싸우시겠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대적하시고 싸우시겠다는 사람들이라면 그 인생은 이미 끝난 것입니다. 성령은 육신을 대적해서 싸웁니다(갈5:17). 하나님은 교만한 자들을 대적하십니다(약4:6). 하나님은 발람과 니골라당의 교리를 붙잡는 자들과 싸우십니다.
17절입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교회들에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에게는 내가 감추어 둔 만나를 주어 먹게 하고 또 흰 돌을 그에게 줄 터인데 그 돌에는 새 이름이 기록되어 있어 그 돌을 받는 자 외에는 아무도 그 이름을 알지 못하느니라.](계2:17).
주님은 이 글이 단지 버가모 교회에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교회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계시록을 공부하는 이유는 이 말씀들이 성령께서 교회들에게 주는 말씀인 것을 알고 믿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모두 성령께서 주신 말씀이요, 우리가 읽고 듣고 믿고 지켜야 할 말씀들입니다.
우리(교회)는 이미 믿는 자로서 이기는 자입니다(요일4:4, 5:4).
(17). “이기는 자에게는....”이 문맥은 신약교회 성도들에게 교리적으로는 맞지 않습니다. 큰 환란 때 성도들은 끝까지 견뎌야 하고 짐승의 표를 받지 않고 그 형상에게 경배하지 않고 이겨야 합니다(계15:2). 주님은 이기는 자에게는 보상을 약속하셨는데 ‘감추어 둔 만나를 먹게 하고 또 흰 돌을 줄 것’이라고 하십니다. 큰 환란 때 광야로 도망간 사람들은 주님께서 하늘에서 [만나]를 주어 먹게 하십니다. 만나는 천사들의 음식입니다(시78:25). 이미 전에 배웠듯이 광야에 있는 피난처는 바위 도시입니다-페트라(시18:1-6, 31:3, 42:9, 71:3).
큰 환난 때 이스라엘의 피난처는 에돔이요, 오늘날 페트라로 알려진 그 장소가 틀림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 남은 자들은 이곳에서 적그리스도를 피하여 환란 가운데 안식을 누릴 것입니다(렘31:2). 이 도피 장소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3년 반 동안(계12:6) 먹이실 것입니다(미7:14). 그러므로 다니엘은 “그가 또한 영화로운 땅으로 들어가며 많은 나라를 뒤엎을 것이나 이들 곧 에돔과 모압 그리고 암몬 자손의 우두머리는 그의 손에서 피하리라.”(단11:41)고 예언했습니다. 페트라에 도피한 유대인들 외에 일부 유대인들은 갈멜, 바산 그리고 길르앗 광야에서 도피 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렘50:19-20, 겔20:35). 이들은 만나를 먹을 것이며(미7:14-15, 시105:40) 마실 물을 공급받게 될 것이고(시78:16), 밭과 포도원에도 접근할 수 있을 것입니다(시107:35-37).
(17). “흰 돌을 그에게 줄 터인데” 주님은 ‘이기는 자’에게 흰 돌을 줄 것입니다. 두 구절을 봅니다. [군대들의 {주}가 말하노라. 내가 여호수아 앞에 놓은 돌을 보라. 한 돌에 일곱 눈이 있으리라. 보라, 내가 거기에 새길 것을 새기며 그 땅의 불법을 하루에 제거하리라.](슥3:9). 주님은 한 돌이라 불리십니다. 주님은 살아 있는 돌이십니다. 주님은 반석, 머릿돌이십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자신을 ‘감추어진 만나, 흰 돌’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주}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한 것과 모세의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아무도 쇠를 대지 아니한 온전한 돌들로 만든 제단이더라. 그들이 {주}께 바치는 번제 헌물을 그 위에 드리고 화평 헌물을 희생물로 바쳤더라. 그가 거기서 돌들 위에 모세의 율법 사본을 기록하되 이스라엘 자손들의 얼굴 앞에서 그것을 기록 하매](수8:31-32). 이스라엘은 주님께 받은 율법을 돌들 위에 기록했습니다.
자, 주의 율법이 기록된 돌들을 한 번 보십시오. [너희가 요르단을 건너 {주} 네 [하나님]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이르는 날에 너는 큰 돌들을 세우고 그것들에 석회를 바를 것이요, 또 건너간 뒤에 이 율법의 모든 말씀들을 그것들 위에 기록할지니라. 그리하여야 {주} 네 조상들의 [하나님]께서 네게 약속하신 대로 {주} 네 [하나님]께서 네게 주시는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네가 들어가리라.](신27:2-3).
석회를 바른 돌들이 ‘흰 돌’입니다. 가나안 땅에서 흰 돌들 위에 율법을 기록했듯이 큰 환란을 통과한 성도들에게 새 이름을 기록한 흰 돌을 주십니다. 크리스천들의 이름이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것 같이 이들의 이름은 흰 돌에 기록되었고 그들에게 주어지는데 그 돌을 받는 자 외에는 아무도 그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성경에는 새 이름이 곧 새 사람입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 야곱이 이스라엘, 사래가 사라로 바뀐 것이 그런 예입니다. 이긴 자들은 주님께서 새 이름을 부여해 주심으로 새 사람임을 입증해 주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