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부 경남 의령군 정곡면 석곡리(石谷里) 127번지, 간짓대를 걸쳐도 이산 저산이 맞닿는다는 산골에서 십리 길을 걸어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무명한복 소맷자락에는 콧물과 눈물과 땟물이 절어 빤질빤질했다. 머리를 깎을 때면 바리깡(이발기)이 낡아 머리를 깎는 것이, 아니라 쥐어뜯는 바람에 울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런 산골동네에서 자란 촌놈 아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의 명문 K 중학교에, 응시를 했다. 낙방이다. 내 인생의 첫 번째 실패작. 그러나 막냇동생에 대한 형님들의 과잉사랑이 깃든 꼬리표이기에 부끄럽지가 않다.
중학교 낙방 후에 부모님이 계신 시골로 내려갔다. 보리밭을 메고 풀을 뜯어 소를 먹였다. 여름이면 개울에 나가 자맥질을 하고 겨울이면 손발이 터지도록 앉은뱅이 썰매를 탔다. 하루에 한두 번 먼지를 날리며 마을 앞을 지나가는 완행버스를 보고 무심코 손을 흔들어 준다. 어릴 적 나의, 모습이다.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면 언제나 짠하게 다가오는 그리운 얼굴 나의 어머니 성몽주(成夢周), 고려 말 성리학의 시조 포은 정몽주와 이름도 같지만, 우리 가문의 포은(圃隱) 같은 삶을 살다 가셨다. 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만, 같은 가녀린 몸으로 4남 3녀를 낳으셨다. 나는 칠 남매 중 막내아들로 춘궁기에 태어났다. 가냘픈 몸에다 빈곤과 노산으로 젖이 고갈되어 동네 아주머니들의 젖을 얻어먹고 자랐다. 그래서 ‘동네 아이’라는 별명을 얻는다. 성인이 되어 나에게 귀한 젖꼭지를 내어주신 그분들에게 세배를, 가면 어릴 적에 얻어먹은 젖 값을 달라고 하여 한바탕 웃곤 했던 지난날들이 그립기도 하다. 지금은 모두가 저승에 계신다.
어머니는 산골 동네 여성으로서 보기 드물게 한글을 깨우치셨다. 책을 읽으시고 옛날얘기를 잘하여 나이 불문하고 많은, 사람들이 어머니 곁으로 모여들었다. 집안의 대소사를 슬기롭게 다스렸고 무엇보다 배움의 중요성을 알고 계셨다. 추석날이었다. “너거 막냇동생 저래 놔둘끼가. 학교에 보내야 안 되겠나.” 어머니의 훈계 말씀, 한 마디에 나는 큰형님을 따라 진해로 갔다. 해병대 장교였던 큰 형님은 출근 전에 중학교 일학년 과정, 국어 영어 수학 숙제를 내어주었다. 어느 날 어린 조카들의 재롱에 빠져 그만, 숙제를 놓치고 말았다. 그날 저녁 형님한테 슬리퍼 신발로 된통 얻어맞았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면학(勉學)을 위한 사랑의 매질이었다. 형님의 군대식 훈육이 있었기에 나는 중학교 1년 과정을 건너뛰고 2학년으로 바로 입학할 수가 있었다. 어머니와 형님의 은덕이 아니었으면 나는 한평생 농부의 삶을 면치 못했으리라.
고등학교 일학년 일 학기가 시작될 무렵, 한 장의 전보가 날아들었다. “어머니 위독, 빨리 오너라.” 어머니가 막내아들인 나를 많이 보고 싶어 한다면서 선산을 지키는 셋째 형님이 보낸 전보였다. 야윈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라 눈물이 앞을 가린다. 고향으로 가는 시외버스에 올랐어도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교복을 적신다.
덜컹덜컹 먼지를 날리며 버스가 동네 어귀에 도착했을 때는 어둑어둑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신작로를 건너 보리밭 사잇길로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흐느적거린다. 싸리문을 열고 마당으로 들어가는 순간 눈물이 앞을 가려 그만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우리 막내 왔나.” 어머니의 가냘픈 음성이 나를 일으켜 세운다.
어머니의 손은 파르르 떨고 있었다. 한참 동안 내 얼굴을 쓰다듬으시더니 장롱문을 열고 광목천 한 필을 꺼내 보였다. 내가 커서 장가를 들면 두루마기 해 입으라고 준비해 둔 것이었다고 한다. “니 장가가는 것, 보고 죽어야 할 낀데…….” 광목천 위에 뚝뚝 어머니의 탄식이 얼룩진다.
며칠 동안 어머니의 품속을 파고들며 어리광을 부리고 다시는 못 볼 것 같은 슬픔에 젖어 내가 좋아하는 노래 ‘비내리는 고모령’을 불러 드렸다. 부산으로 돌아오는 날, 영원한 이별을 예감하고 흐느끼며 싸리문을 나서려는데 어머님이 방문을 화들짝 열어 재끼며 “막내야 가나.” 하신다. 그것은 엄마가 내게 들려준 이승의 마지막 음성이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고 사랑했던 나의 어머니는 그렇게 환갑 년에 운명을 달리, 하셨다. 내 나이 열일곱, 위로 여섯 형제는 모두가 결혼을, 하여 가정을 꾸렸으나 나는 고아 같은 서러움에 많이도 울었다. 어머님의 꽃상여가 동구 밖을 나설 적에는 온 동네 사람들이 줄을 지어 통곡을, 했다. 어머니의 명복을 빌어주는 눈물의 합주곡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비 내리는 고모령”은 나의 사모곡이 되었다. 엄마가 보고 싶을 때면 나는 언제나 이 노래를 부르며 그리움을 달랬다.
“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설 때 엔 부엉새도 울었다오, 나도 울었소, 가랑잎이 휘날리는 산마루턱을 넘어오던 그 날 밤이 그리웁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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