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서 봐야 아름답다
장림포구다. 포구를 따라 늘어선 건물과 물 위에 떠 있는 작은 배들이 베네치아를 닮았다고 해서 부산의 베네치아, '부네치아' 라는 별명이 붙은 곳이다. 갈 만한 여행지를 검색하다 우연히 발견한 사진 한 장에 이끌려 지금 장림항에 와 있다. 벽을 이어 일렬로 들어선 상점은 그 모습과 알록달록 칠해진 벽면 색깔로 이색적 분위기를 낸다. 한쪽엔 선박수리 창고와 작은 공장들이 들어서 있기도 하다. 조금 어수선하고, 한편 동심 같은 원형의 아름다움이 느껴지기도 한다.
쌀쌀한 날씨라 포구는 한적하다. 걷는 사람은 서넛이 전부다. 초상화 그려주는 가게, 주인이 손수 커피를 내려주는 카페, 남미 음식을 파는 가게, 차가운 날씨에 가게 앞에 않아서 수채화를 그리는 화가, 꽃집과 공예 품점 등이 열을 지어 있다. 가게를 들락거리는 재미가 쏠쏠하다. 가게 앞을 사열하듯 걷던 나는 주인의 간절한 눈빛과 마주친다. 그이 뒤에선 커피 향이 새어 흐르고 있다. 입김이 하얗게 오르는 겨울 거리에 달콤한 커피 향은 그렇지 않아도 유혹적인데, 나는 빨려들 듯 가게 안으로 들어선다. 라테 한 잔을 주문하고 창가라 할 것도 없는 구석진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는다. 먼지와 습기가 엉겨 붙은 유리창이 희부옇다. 온기와 냉기의 경계, 실내와 바깥의 구분, 안도와 긴장감을 가르는 좁은 길에 낡은 창틀이 놓여 있다. 지저분하다는 느낌보다 어울림으로 새겨지는 조화다.
손님 없는 가계에 주인이 말동무를 자처한다. 여기서 나가셔서 오른쪽으로 차 돌리면 감천동으로 갈 수 있어요. 감천마을 보시고 몰운대도
올라보세요. 구름이 아주 장관입니다. 주인은 이 지역을 훤히 아는 사람이다. 서울내기인 내게 부산 명소를 모두 소개할 듯이 정보를 쏟아낸다. 그이와 노닥노닥 시간을 보내고 찬바람 부는 거리로 다시 나선다.
원색으로 치장한 벽은 보수할 때가 되었는지, 곳곳이 떨어져 나가 잿빛 속살을 드러내고 있다. 사진 속, 내게 환상을 갖게 했던 그 벽이 아니어서 나는 실망한다.
드론 촬영 30분 3만 5천 원이라는 입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찬바람도 피할 겸 호기심을 안고 가게 안으로 머리를 디민다. 드론 촬영은 어떻게 하는 거예요? 드론 기사가 안내하는 장소로 이동 후 약간의 연출을 넣어서 포즈를 취하면 드론이 머리 위에서 나를 촬영한다는 것. 저 너덜너덜한 벽은 보정한 거예요? 사진에서는 몰라보겠네요? 아닙니다. 멀리서 보면 페인트 벗겨진 건 안 보여요. 다른 사람들 사진 한번 보세요. 그러고 보니 좁은 가게 선반에 전시되어 있는 사진들이 눈에 들어온다 사진 속 가게 건물은 뾰족 지붕에 비비드 톤 옷을 입고 푸른 하늘과 바다를 배경으로 미니어처처럼 앙증맞게 늘어서 있다. 흠집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드론 기사가 내 옆에서 재차 권한다. 아주 예쁘게 나오니까 꼭 찍고 가라고 흠, 그런데 제 사진은 이렇게 막 전시하면 안 돼요! 네네. 이분들은 전시해도 좋다고 허락하신 분들입니다. (웃음) 속 좁은 다짐을 두고서야 나는 사진사를 따라나선다. 드론을 향해 손을 흔들기도 하고, 누구를 향한 것인지도 모르는 하트도 공중에 날려 보내며 잠간 동안 수선을 피운다. 촬영 후 차 한 잔을 내준 기사는 곧 사진을 편집해 내 이메일로 보낸다. 사진을 본 나는 감탄을 참을 수 없다. 오. 너무 아름다운데요?
드론 촬영으로 한껏 고무된 나는 가락국수 한 그릇으로 요기를 하고 예술촌 반대편으로 간다. 제방처럼 긴 특이 포구의 이쪽과 저쪽을 있고 있다. 멀리서 바라보는 뾰족 지붕 상가는 가까이서 볼 때보다 오히려 선명하다. 구멍 패인 곳도 흠난 곳도 보이지 않으므로 눈앞엔 하나의 풍경만 오롯하다. 멀어질수록 결점이 희미해진다.... 장림항의 매력은 이색 건물로써가 아니라 보는 이의 거리에 따라 그 아름다움이 다르게 보인다는 데 있는 게 아닌가.
우리의 삶도 가까이서 보면 결코 완벽하지 않다. 우리는 가까이 있는 사람의 결점에 얼마나 예민하게 구는지. 사랑하는 이의 단점으로 얼마나 괴로워하는가 말이다. 가까움은 상대의 결점을 과도하게 드러나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그를 단편적으로 판단하게 한다. 결점이란 독특함이며, 풍성한 인생의 조각임에도. 고슴도치처럼 생긴 호저라는 동물이 있다. 그들은 체온 유지를 위해 모여 있어야 하는데 너무 가까이 가면 서로의 가시에 찔리게 되고 너무 멀어지면 추위를 견디지 못하게 된다. 이들에게 적당한 거리란 생명과 관계된다. 적당한 거리가 호저에게서만 문제일까. 균형 잡힌 삶을 위해서도 아름다운 사랑을 위해서도 한 발 뒤로 물러서 볼 일이다.
이성숙
아포리즘 작가, 소설가 산문집 <고인 물도 일렁인다.> 보라와 탱고를 종교 도서 길 위에 길을 내다.(공저) 그 외 다수 칼럼 essaycien@gmail.com
인생은 폭풍우가 지나가길 기다리는 게 아니라, 비 올 때 춤추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