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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비릴리오가 보는 현대예술: 사고의 예술, 예술의 사고
올해 여든이 갓 넘은 프랑스의 ‘에세이스트’(그는 스스로를 좀체 ‘철학자’ 혹은 ‘사상가’라고 부르지 않는다) 폴 비릴리오는
스스로를 ‘테크놀로지의 예술 평론가’라고 부른다.
이 말은 현대 예술을 바라보는 비릴리오의 관점을 잘 보여준다.
요컨대 어느 대담에서 스스로 공공연하게 밝힌 바 있듯이,
비릴리오에게는 우리가 흔히 기대하는 ‘예술 이론’이 존재하지 않으며 그런 이론을 만들 욕망도 없다.
이 점을 간과하면 현대 예술에 대한 비릴리오의 비판을 오해하기 십상이다.
2002년 비릴리오가 발표한 <침묵의 절차>가 현지에서 ‘스캔들’이라고 할 소동을 불러일으킨 것도 이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비릴리오는 현대 예술을 전쟁, 특히 양차 세계대전의 피해자로 묘사했던 것이다.
전쟁과 현대 예술: 피해자학으로서의 예술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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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릴리오는 현대 예술의 팡테옹에 능히 속할 두 인물, 조르주 브라크와 오토 딕스의 ‘기이한’ 만남을 예로 든다.
제1차 세계대전 최악의 전투 중 하나인 솜 전투에서 브라크와 딕스는 적군으로 맞닥뜨렸다.
소모전의 성격이 강한 이 전투에서만 약 1백10만 명이 죽었다. 이 세계대전의 지독한 경험에 근거해 브라크는 입체
주의를, 딕스는 표현주의를 완성했다는 것이 비릴리오의 주장이다.
즉, 현대 예술(혹은 아방가르드)의 주된 두 원천이라고 할 입체주의와 표현주의는 다름 아닌 전쟁의 산물인 셈이다.
총알과 폭탄 세례로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된 주검, 언제 죽을지 모를 두려움을 안은 채 참호 속에 웅크린 병사들의 긴장,
죽음 앞의 고통과 비명……. 비릴리오는 이 모든 잔혹한 경험이 입체주의의 ‘탈-구상’과 표현주의의 ‘불안’・‘공포’의 정서로
화폭에 옮겨졌고, 그 이후의 모든 현대 예술(미래주의의 필립포 토마소 마리네티, 다다의 리하르트 횔젠벡, 초현실주의의
앙드레 브르통, 플럭서스의 요셉 보이스, 빈 행동주의의 오토 뮤엘 등)은 저마다 이 악몽과도 같은 유산에 짓눌려왔다고
주장한다.
비릴리오는 프랑스의 예술사가 자클린 리히텐슈타인이 아우슈비츠 박물관을 갔다 온 뒤 한 말을 인용하며 이 유산이
아직도 청산되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갑자기 나는 내가 현대 예술을 전시해놓은 박물관에 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인상을 받았다.”
실로 리히텐슈타인이 그곳에 본 전시용 케이스, 즉 강제수용소 희생자들의 여행가방, 각종 보철물(틀니, 의치, 안경) 등이
첩첩히 쌓인 설치물은 아르망(<종신 수하물 보관소>[Consigne a vie], 1985), 레베카 호른(<부헨발트를 위한 콘서트>
[Konzert für Buchenwald], 1999), 크리스티앙 볼탕스키(<무인도>[No Man’s Land], 2010) 등의 설치예술과 얼마나 비슷
한가!
따라서 비릴리오는 이렇게 단언한다. 현대 예술을 이해하려면 차라리 피해자학(victimology)이 필요하다고 말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렇게 반문할 수 있다.
탈구상, 즉 형태의 해체(더 나아가서 재현의 소멸, 이와 병행한 예술의 추상화)는 양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가령 인상주의로부터 시작되지 않았는가? 또한 추상표현주의, 액션 페인팅, 팝아트 등의 등장도 전쟁의 산물인가?
도대체 현대 예술의 저 수많은 조류를 전쟁의 외상이라는 단일한 기준으로 모두 설명하는 것이 가당키나 한 것일까?
현대 예술의 실패: 이중의 ‘양들의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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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예술(사)을 당최 모르는 인물”이라며 자신을 비판한 예술 평론가들에게 맞서, 비릴리오는 “예술의 ‘문화’를 모르는 인간들”이라고 응수한다.
예술 평론가들은 현대 예술의 특정한 작가, 특정한 스타일, 특정한 장르의 전문가일지는 모르나 현대 예술이 등장하던 전
시기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비릴리오는 “나는 형태(figuration)를 파괴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형태를 사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차라리 추상으로 나아갔다”라는 마크 로스코의 말을 인용하며, 사실상 추상 예술이 ‘도피’의 예술임을 지적한다.
무엇으로부터의 도피인가?
현대 예술의 기원에 자리잡은 전쟁의 외상으로부터의 도피이다.
저 외상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기에 차라리 캔버스를 비워버리는 쪽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팝아트도 마찬가지이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추상표현주의는 참혹한 현실의 밖으로 도피하려 했고, 팝아트는 자기 자신
(작가의 내면이 아니라 장르 자체) 혹은 시장 속으로 도피하려 했다는 것?
“죽음은 상당한 돈을 대표[재현]한다. 게다가 당신을 스타로 만들어줄 수도 있다”라고 앤디 워홀은 말했다.
그렇다면 액션 페인팅은? 비릴리오는 잭슨 폴록이 “고도에서 화폭을 포착하기 위해 바닥에 캔버스를 내려놓은 최초의
화가”라고 평한 프랑스의 소설가 마렉 알터의 말로 대답을 대신한다. 요컨대 폴록의 시점은 폭격기의 시점인 셈이다.
언뜻 보면 비릴리오의 이런 반론은 전쟁을 둘러싼 작용・반작용으로 현대 예술의 모든 흐름을 재단하려는 옹고집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히려 비릴리오는 전쟁이라는 ‘사고’의 ‘진실’을 이해하는 데 현대 예술과 그 평론가들이 실패해왔고, 그 이후의
예술(편의상 ‘동시대 예술’이라고 부르자) 역시 이 실패를 인정하는 데 또 다른 방식으로 실패했음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봐야 한다.
우리는 이렇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입체주의에서부터 빈 행동주의에 이르기까지의 현대 예술은 전쟁의 공포를 공포의 예술로 변형시켰을 뿐이다.
요컨대 전쟁의 공포로부터 피해를 입은 자가 자신의 예술로 대중을 공포로 몰아가는 가해자가 된 격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공포를 무한히 반복한다고 해서 공포가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이들은 전쟁이라는 ‘사고’의 ‘진실’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단지 사고의 예술을 낳았을 뿐! 또한 추상표현주의에서부터 팝아트에 이르기까지의 동시대 예술은 아예 선배들의 유산
에서 고개를 돌려버림으로써 선배들이 실패한 진정한 지점을 파악하지 못했다.
그래서 선배들의 실패를 실패라고 인정하지 못했고, 결국 선배들의 실패를 자기 식대로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어떤 경우가 됐든 현대 예술은 전쟁이라는 ‘사고’의 ‘진실’에 침묵한 셈이다.
비릴리오는 이 침묵을 성서에 나오는 ‘양들의 침묵’에 비유했다. 차이가 있다면 전자는 시끄러운 침묵이라는 역설적 형태의 침묵이었고, 후자는 무관심 혹은 방관이라는 형태의 침묵이었다는 점뿐이다.
속도와 가속화와 두 가지의 원초적 사고
호
그렇다면 앞서 말한 전쟁이라는 ‘사고’의 ‘진실’은 무엇인가?
이 점을 이해하려면 비릴리오의 전매특허가 된 ‘질주학’(dromonologie)을 전제해야 한다.
흔히 ‘속도학’이라고도 알려진 질주학의 접두어 ‘드로모스’(dromos)는 “경주, 달리는 행위, 민첩한 움직임” 등을 뜻하는
그리스어이다.
따라서 질주학은 속도 그 자체보다는 속도에 근거한 경주, 혹은 경주를 둘러싼 투기・쟁투를 연구하는 학문인 셈인데,
비릴리오는 이 개념을 통해 인류의 역사를 해석한다.
요컨대 역사란 누가 더 빠른 속도를 선점해 생사의 경주에서 이기느냐, 즉 생사를 관장할 권력을 확보하느냐라는 경쟁에
근거해 발전해왔다는 것이다.
비릴리오에 따르면 이런 경쟁은 인류의 속도를 무한히 가속화했다.
생체속도(달리기 같은 인간의 운동 속도)에서 동물적 속도(말, 코끼리, 연락용 비둘기 등)로, 동물적 속도에서 기계적
속도(비행기, 자동차, 탱크)로, 기계적 속도에서 음성・시각 속도(초음속 비행기)로, 그리고 최근의 실시간 속도(광섬유
인터넷, 원격 통신망 등)로. 물론 이런 가속화를 가능케 한 것은 과학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이다.
비릴리오가 현대 예술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말한 저 양차 세계대전은 바로 과학기술이 가져온 ‘사고’이다.
다시 말해서 양차 세계대전은 과학기술 일반의 ‘원초적 사고’이다.
범선의 원초적 사고가 난파이고, 열차의 원초적 사고가 탈선이고, 비행기의 원초적 사고가 추락이듯이 말이다.
그런데 양차 세계대전이라는 이 원초적 사고는 인간의 지각방식이라는 맥락에서 또 다른 원초적 사고를 낳았다.
‘망막’에서 ‘광학’으로의 이동이 그것이다.
즉, 과학기술은 양차 세계대전이라는 원초적 사고를 낳았고, 양차 세계대전은 광학의 탄생 혹은 완성, 그도 아니라면 ‘시각
기계’(‘기계화된 시각’이 아니라 ‘기계의 시각’)의 등장이라는 원초적 사고를 낳은 것이다. 바로 이것이 현대 예술이 직면한 저 전쟁이라는 ‘사고’의 ‘진실’이며, 비릴리오가 자신을 비판한 예술 평론가들이 간과하고 있다고 말한 (현대) 예술의 ‘문화’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현대 예술이 실패한 결정적 지점은 바로 이 원초적 사고에 대한 성찰이다.
현대 예술은 시각기계의 등장이라는 원초적 사고를 사유하기보다는 그것에 압도당한 채 허둥댄 셈이다.
동시대의 예술은 예술의 사고를 낳을 수 있는가?
호
그럼 동시대 예술이 저 원초적 사건을 사유하기 시작하면 되는 것일까?
상황은 녹록치 않다.
비릴리오는 자신이 ‘피해자학’의 관점이 필요하다고 말한 현대 예술의 경향, 현대 예술의 저 “동정 없는 시기”는 1990년경에 사실상 끝났다고 말한다.
이 말은 곧 1990년 이래로 동시대 예술은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다는 말과도 같다.
실제로 디지털 테크놀로지와 원격 통신망의 급격한 발전은 인간의 시각뿐만 아니라 (픽셀이 전통적인 질료와 다른 것이라고 믿는다면) 예술의 질료 자체를 소멸시키는 지경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예술의 종언’을 고하기에는 아직도 예술이 잃어버려야 할 것이 더 남아 있는 것일까?
비릴리오는 동시대 예술 역시 자신이 말한 ‘예술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이와 동시에 ‘예술의 사고’를 기대하고 있다.
비릴리오가 말하는 예술의 사고란 “세계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을 새롭게 해주는” 사고이다.
비릴리오는 독일의 화가 페터 클라젠(위 사진), 덴마크의 설치미술가 올라퍼 엘리아슨(아래 사진) 등의 작품 속에서 예술의 사고가 됨직한 맹아를 보고 있다.
이 둘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테크놀로지와 지각의 상관관계를 탐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릴리오에게 사고는 위기이자 기회이다.
사고가 기회인 이유는 그것이 없었더라면 인지하지 못했을 중요한 무엇인가가 비로소 돌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고는 ‘계시’(啓示)이기도 하다.
기존의 예술 평론가들처럼 이 ‘테크놀로지의 예술 평론가’를 무시하거나 비웃기는 쉬운 일이다.
그러나 여전히 예술의 가능성을 믿는 사람이라면, 비릴리오가 말한 예술의 이 새로운 사고를 기대하지 않기란 힘든 일이다. 예술의 사고를 꿈꿀 수 있게 해줬다는 것만으로도 비릴리오를 읽을 만하지 않은가? (끝)
거울나라의 비릴리오, 세계의 종말을 논하다
‘서구 지성계의 카산드라’라 불리십니다.
사실 그건 제 친구 장 보드리야르의 별명입니다. 보드리야르는 그 별명을 꽤 좋아했는데 그 친구가 죽으니까 그 별명이
제게 왔네요.
카산드라의 예언은 아무도 믿지 않았는데요?
그래도 결국 트로이는 멸망했죠. 카산드라의 예언대로. 자고로 여자 말을 들으면 자다 가도 떡이 생기는 법인데……. 아무튼 아폴론이 나쁜 놈이죠. 아프로디테나 헬레네만큼 예쁜 카산드라를 꼬시려고 예언 능력을 줬는데, 카산드라에게 채이자 자기가 준 축복에 저주를 걸었으니까.
선생님도 세계의 종말을 말하셨습니다.
정확히 말해서 ‘세계’(le monde)의 종말이 아니라 ‘한 세계’(un monde)의 종말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 그 세계, 우리가 살아가는 바로 그 세계, 그러니까 모던 세계의 종말이죠.
포스트모던이든 하이퍼모던이든, 뭐라 부르든 여전히 우리는 모더니티의 세계에 있는 겁니다.
모던 세계, 그러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어때서 종말을 말씀하십니까?
우리는 ‘거울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예?
붉은 여왕이 살고 있는 거울나라 말입니다.
아, 앨리스가 여행한 동화 속 그곳 말입니까?
그래요. 제 생각에 루이스 캐럴은 선견지명이 있는 양반입니다. 붉은 여왕은 느닷없이 앨리스의 손을 잡고 달리기 시작합니다. “자! 어서! 더 빨리! 더 빨리!” 현기증이 찰 만큼 숨이 찬 앨리스가 한참 뒤에 이렇게 묻죠. “모든 게 아까와 똑같아요.
우리나라에서는 오랫동안 빨리 달리면 대개는 어딘가 다른 곳에 도착하게 되는데.” 붉은 여왕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여기서는 같은 자리에 계속 있고 싶으면 힘껏 달려야 해. 다른 곳에 가고 싶다면, 적어도 그 두 배는 빨리 달려야 하지!”
우리의 상황이 바로 이렇습니다. 사실 더 나쁘죠. 두 배, 세 배, 그 이상으로 달려도 계속 그 자리니까요.
흠…….
캐럴이 묘사한 거울나라는 제가 말한 ‘극의 관성’(L’inertie polaire)과 일맥상통합니다.
그러고 보니 선생님도 극의 관성이란 것을 설명하시기 위해 “떠나기도 전에 도착해 있는 여행객,” “고속열차를
타고 여행하기에 전혀 움직일 필요가 없는 승객” 등의 비유를 쓰셨습니다.
뭔가를 하기 위해 한 지점에서 또 다른 지점으로 굳이 이동할 필요가 없게 된 상황이라고……….
예, 극한에 다다른 과학기술의 절대속도 때문에 우리의 운동 능력이 ‘임계점’에 처한 상황입니다. 사실상 운동 자체를 박탈
당한 상황이니 ‘운동의 독재’에 지배당하고 있는 상황이지요.
그런데 그게 나쁜 건가요? 오히려 좋은 것 아닙니까? 힘들게 움직이지 않아도 되니까…….
아니죠. 관성이 극에 달한 상태, 그게 바로 극의 관성입니다. 극에 달한 관성은 곧 ‘마비’이죠.
육체의 마비뿐만 아니라 정신의 마비. 결국 인간은 무한한 공포 속에서 육체적・정신적으로 ‘고갈’ 혹은 ‘소진’되어버립니다. 제가 최근에 말한 ‘공황의 도시’(ville panique)가 이겁니다. 유명한 생쥐의 실험을 아실 겁니다.
출입구가 단 하나인 상자에 생쥐를 한 마리 풀어둡니다.
그 생쥐가 출입구로 향할 때마다 강한 전기자극을 줘서 멈추게 하죠. 이 상황이 수차례 반복되면 출입구를 그냥 열어두고
아무런 전기자극을 가하지 않아도 그 생쥐는 좀체 출입구로 나가려들지 않습니다.
오늘날의 대도시가 바로 이 상자이고, 오늘날의 대도시 거주자가 처한 상황이 바로 이 생쥐의 형국인 셈이죠.
인간은 생쥐가 아닙니다.
상상력이 빈곤한 친구구만. 내 더 쉬운 예를 들어드리리다. 가령 ‘실업’이 그렇죠. 아니면 불안정 노동이나 고용상태를
떠올려보세요. 실업자들・임시직 노동자들이 운동을, 즉 일을 안 합니까?
정규직 노동자들의 두 배, 세 배, 그 이상을 하기도 하죠. 그런데도 상황은 쉽게 호전되지 않습니다.
이들에게 “자! 어서! 더 빨리! 더 빨리!”라고 해보쇼. 귀싸대기에 이단 옆차기 맞을 걸?
그러니까 극의 관성이란 출구 자체가 막힌 상황, 미래가 사라진 상황을 말합니다.
진작 그렇게 말씀하시지……….
그러면 문제의 근원인 ‘속도’가 제대로 부각되지 않으니까. 아무튼 인류는 절대속도에 다다랐기 때문에 시공간이 극도로
압축된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더 이상 이 세계의 외부가 없는 셈이죠. ‘진보’라는 개념이 의심받는 이유가 이 때문이에요.
오늘날 이처럼 제한된 세계에서 끝없는 성장이 가능하다고 믿는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미친 사람이거나 경제학자뿐입니다. 아니, 정치인도 있겠군.
그래서 종말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그런데 어쩌다 세상이 이 지경이 됐을까요?
전쟁, 과학기술, 속도. 결국에는 권력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죠.
아, 음, 또 속도가 언급되는군요. 자세히 말씀해주시죠.
자네, 내 책 번역한 친구 맞나? 질문이 저질이군.
선생님이 맘껏 뛰어노실 멍석자리 깔아드리는 겁니다.
흠, 그런가? 좀 쉬운 예를 들어드리죠. 얼마 전 귀스타프 쿠르베의 <세계의 기원>이 다시 화제가 된 적이 있죠? 보……,
아니 여자의 성기를 적나라하게 그린 그 그림의 얼굴 부분을 찾았다나 뭐라나.
아무튼 제 친구인 행위예술가 오를랑이 그 그림을 패러디해 <전쟁의 기원>을 그린 바 있죠. 그 문제의 부분을 자……,
아니 남자의 성기로 대체한 그림입니다. 아, 이런 건 도판을 수록해 보여줘야 되는데…….
(변태 늙은이.)
응?
아, 아닙니다. 그 그림이 어쨌다는 겁니까?
오를랑은 제목을 굳이 ‘전쟁의 기원’으로 바꿀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 ‘물건’이 ‘세계의 기원’이기도 하니까.
그러니까 전쟁이 세계의 기원입니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이렇게 말했죠. “전쟁은 지금까지 사색되지 않은, 말해지지 않은, 엄청난 것을 최초로 초안하고 발전시키는 것이다.” 즉, 전쟁이야말로 세계의 생성이고, 그것이 진정한 역사라고 말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이런 전쟁의 정수(精髓)가 속도입니다.
상대방을 제압하려면 상대방보다 빨라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속도는 과학기술의 힘으로 점점 빨라져 절대속도, 빛의 속도에 다다랐습니다.
저는 절대속도의 상징으로 핵폭탄을 즐겨 말했는데, 더 친숙한 예를 들면 초고속 원격통신망이 있겠습니다.
그런데 왜 인류는 이렇게 과학기술을 사용해 점점 더 빠른 속도를 추구했을까요? 권력 때문입니다.
제 친구인 미셸 푸코는 지식 혹은 앎이 권력의 원천이라고 봤는데, 저는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속도에 대한 지식/앎이 권력의 원천이라고, 아니 그냥 속도가 권력의 원천이라고 말입니다.
결국 더 빠른 속도의 쟁취를 위한 경주, 전쟁이 오늘날과 같은 세계를 만들었다는 거군요?
빙고! 제가 말하는 질주학(dromonologie)은 바로 이런 역사의 궤적을 추적하는 학문입니다.
속도, 더 정확하게는 질주의 계보학이죠. 질주학의 접두어 ‘드로모스’(dromos)는 “경주, 달리는 행위, 민첩한 움직임” 등을
뜻하는 그리스어이니까요.
그래도 여전히 알 듯 모를 듯합니다…….
아놔……. 좋습니다. 다시 ‘거울나라’로 되돌아가보죠. 앞서 캐럴이 선견지명이 있다고 했는데, 그건 극의 관성의 좋은
예를 보여주는 그 나라에 캐럴이 ‘거울나라’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점에서도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거울나라의 대타자(grand Autre)는 ‘대광학’(grande optique)이기 때문입니다.
어휴, 산 넘어 산이네요. 저, 선생님이 말씀하신 ‘시각기계’(Machine de vision) 말인가요?
아니, 시각기계의 최신 버전이 대광학입니다. 마셜 맥루언은 미디어가 인간의 연장(extension)이라고 했죠.
맥루언의 미디어 개념은 테크놀로지까지 포함한 개념입니다.
그래서 책이 눈, 즉 망막의 연장이라고 말했던 거죠. 아무튼 맥루언은 이런 미디어가 인간의 지각을 변화시킨다고 옳게
봤습니다.
하지만 그 변화의 어두운 면에는 신경 쓰지 않았어요. 책이든 안경이든, 애초 망막의 보철물이었던 미디어가 망막 자체를
집어삼키리라는 것을 말이죠.
즉, 시각기계란 단순한 망막의 미디어, 기계화된 시각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기계 자체가 된 시각입니다.
망막이 렌즈가 된 셈이죠. 요컨대 우리는 망막이 아니라 기계의 시선으로 이 세계를 지각하는 겁니다.
망막으로 보든 렌즈 혹은 기계로 보든 큰 차이가 있습니까?
걸어갈 때와 자동차를 탔을 때의 차이를 떠올려보세요. 걸어가면서 보는 주변 경관은 ‘풍경’이지만, 자동차 안에서 보는 주변 경관은 더 이상 풍경이 아닙니다. 고속으로 질주하기 때문에 대상을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소실점이나 원근선이 끊임없이 소멸되죠. 대상이 찰라에 지각됐다가 사라지고, 그 과정이 반복됩니다. 그냥 획- 획- 획- 이죠. 자, 이제 자동차보다 훨씬 더 빠른 것, 가령 초음속 전투기를 탔다고 가정해봅시다. 조종사는 이제 계기판을 보죠. 계기판에서는 주변 대상이 픽셀로 나타납니다. 일종의 점, 도형으로요. 그렇게 되면 지근거리의 구체적인 대상과 망막으로 접촉할 때의 느낌을 잃게 됩니다.
숙련된 전투기 조종사들이 별다른 죄책감 없이 폭탄을 떨어뜨릴 수 있는 게 이 때문이죠.
그들은 인간을 몰살하는 게 아닙니다. 추상화된 점, 도형을 계기판에서 지우는 거지.
좀 섬뜩하군요.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대광학이란 이처럼 공중에서 내려다보는 시각기계의 시선이 정보통신 테크놀로지의 도움으로 전지구화된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원격위상학이라고도 부르는데……. 아, 됐고.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예는 지구 궤도 위에 떠 있는 감시위성입니다.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나 <이글 아이> 같은 영화를 떠올려보세요.
주인공은 어디를 가든 자신을 보는 시선을 느낍니다.
그래서 이 시선을 끊임없이 의식하면서 행동할 수밖에 없죠. 이런 대광학이 등장할 수 있게 된 것이 바로 절대속도 때문입
니다.
순식간에 정보를 실어 나르는 광섬유케이블의 빛과 같은 속도가 없다면 대광학은 작동할 수 없죠. 절대속도는 신입니다.
신의 세 가지 속성, 즉 편재성, 동시성, 즉각성을 모두 갖고 있으니까요.
판옵티콘이라는 개념으로 근대의 ‘대감금’ 상태를 분석한 푸코가 살아 있었더라면 틀림없이 이 새로운 신이 야기한 새로운 대감금 상태를 분석했을 겁니다.
절대속도를 가능케 한 대광학의 시선이 일종의 대감금 상태를 만들었기 때문에 극의 관성이 발생했고,
결국 우리가 사는 곳이 마비와 공포가 일상화된 공황의 도시가 됐다는 거군요!
예. 오늘날 우리의 지각방식이 ‘재현’(représentation)에서 ‘현시’(présentation)로 이동하게 된 것도 대광학의 등장과 관련
있죠.
현대 예술이 좋은 예입니다.
절대속도 아래에서는 대상의 고정성뿐만 아니라 구체성이나 형상, 물질성, 직접적인 접촉성도 모두 소멸됩니다. 그
러니 점점 더 추상화・개념화될 수밖에요.
오늘날 현대 예술의 과제는 이런 상황 자체를 성찰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왜 예술에 이렇게 과중한 과제를 던지십니까?
예술, 특히 시각예술이야말로 근본적으로 인간의 지각을 다루는 분야이니까요.
인상주의는 카메라라는 시각기계가 던진 문제를 성찰했습니다. 그러나 그 뒤의 미래주의부터 추상표현주의 등은 대광학이 되어가던 시각기계에 굴복해버렸습니다.
그 대광학의 야기한 공포를 스스로 되풀이하거나 외면하는 식으로 말이죠.
최근의 비디오・멀티미디어 예술도 위태롭긴 한데 페터 클라젠이나 올라퍼 엘리아슨 등이 분투하고 있어서……. 아무튼 현대 예술이 풀어나가야 할 과제는 구상이냐 비구상이냐, 재현이냐 현시냐 같은 게 아닙니다.
세계를 바라보는 우리의 지각방식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이 과제입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말처럼 말이다.
“예술은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 아니라 깨부수는 망치가 되어야 한다.”
저는 현대 예술이 저 거울을 깨부술 사건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