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삼동 양재동 서초동 서리풀이 말죽거리
배우리의 땅이름 기행 211027
양재동 역촌의 말죽거리 ▼
□ 역말, 역촌, 관터, 원터
역(驛)'이라고 하면, 지금은 보통 지하철역이나 철도역을 생각한다. 그러나, 옛날의 역은 여러 마리의 말을 마련해 두고 공문을 전달할 목적으로 다니는 사람에게 말을 제공해 주거나 바꾸어 주던 일을 했던 곳이다.
지금도 전국에는 '역말', '역촌', '역곡' 등 '역(驛)'자가 들어간 땅이름이 무척 많다. 그러한 곳은 대개 옛날에 역이 있던 곳이었다. 서울의 '역촌동'이나 경기도 부천의 '역곡동' 같은 이름도 옛날에 역이 있어서 나온 이름이다. 교통에 큰 구실을 했던 옛날의 역은 이미 오래 전에 없어졌어도 '역'자가 들어간 땅이름은 지금까지도 남아 그 곳이 옛날에 역이 있었던 곳임을 말해 주고 있다.
차가 없었던 옛날에는 말은 중요하게 이용되었던 교통 수단이었다. 옛날 관리들은 나라의 일로 먼 길을 갈 때 말을 주로 이용하게 마련이었는데, 말이 먼 길에 지치는 것을 막기 위하여 길 중간중간에 말을 바꾸어 주는 역을 마련했다.
역에는 역마(驛馬)가 상비되어 있었고, 역졸들이 있어서 말을 교환해 주고 먹여서 보호해 주는 일을 했다.
조선시대엔 역참의 하나로 중요한 도로에 파발을 두어서 선전관의 통행을 편하게 했는데, 이 때 이용된 말이 파발마이다. 이 파발은 원래 선조 38년(1605)에 국토 북쪽이 소란해져 중앙으로의 신속한 연락이 필요해짐에 따라 설치한 것이었다.
□ 양재역 근처의 역촌
지금의 서울 서초구의 '양재동(良才洞)'은 옛날에 양재역이 있어서 나온 땅이름이다.
옛날, 서울에서 충청도나 경상도를 가려면 남대문을 나와 동작나루(동작진.銅雀津)나 한강나루(한강진.漢江津)를 건너 남도길에 올랐다. 당시 동작나루를 건너서 첫번째 만나는 역은 과천역이고, 한강나루를 건너서 첫번째 닿는 역은 양재역이었다.
한강나루는 옛날 두뭇개(두모포.豆毛浦) 근처의 나루로, 지금의 옥수동에서 압구정동 방향으로 건너는 나루였다. 즉, 지금의 동호대교 근처에 있던 나루이다. 그 한강나루를 건너 너른 들을 지나 우면산의 동쪽 기슭을 넘어서면 양재천을 만나게 되는데, 그 냇가에 양재역이 자리잡고 있었다. 옛날의 역들은 주로 말을 먹여야 하므로 냇강에 자리잡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 양재역 근처의 마을이 '역말'로, 한자로는 '역촌(驛村)'이라고 했다.
이 마을에선 말에게 죽을 먹이는 집이 많아서 길손들은 이 곳을 주로 '말죽거리'라고 불렀다. 옛 지도를 보면 한강 남쪽에 '마죽거리(馬竹巨里)' 또는 '마죽거(馬竹巨)'라는 표기로 나온 곳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말죽거리'의 한자식 표기다.
이 근처의 '역삼동(驛三洞)'이란 이름도 말죽거리 때문에 나온 이름이다. 즉, 역 근처에 '역말(말죽거리)'과 '웃방아다리'와 '아랫방아다리'의 세 동네가 있어서 '역(驛)'자와 '삼(三)'자를 붙여 지은 것이다. '방아다리'는 들 가운데 방아가 있어서 나온 이름이다. 한자로는 '방하교(方下橋)'로, '웃방아다리'는 '상방하교(上方下橋), '아랫방아다리'는 '하방하교(下方下橋)'라고 했다.
본래 이 곳은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의 일부였는데, 일제 때인 1914년에 경기도 구역 획정에 따라 역 근처의 세 마을을 합해서 '역삼리'라 하다가 1963년에 서울로 편입되어 '역삼동'으로 되었다. 이 곳이 광주군 관할이기 이전엔 과천 땅에 속해 있었다.
'말죽거리'란 땅이름은 이름 그대로 '말에게 죽을 먹이는 거리'라 해서 나온 것이다. 말을 이용하는 행인들이 이 곳에 들르면 대개 말에게 죽을 먹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데, 이 이름 유래와는 달리 '말'과 '죽'과 관련한 사실이 있어 이것이 '말죽거리'라는 이름을 낳게 했다는 이설도 있다. 조선 인조 2년(1624) 2월 8일에 인조(仁祖)가 이괄의 난을 피해 남도로 가는 길에 양재역에 이르러 기갈을 못 이기자, 유생 김이(金怡) 등이 급히 팥죽을 쑤어 임금에게 바치니, 인조가 말 위에서 그 죽을 다 마시고 과천쪽으로 갔다. 그래서 '임금이 말 위에서 죽을 마시다'의 뜻으로 '말죽거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한낱 역사적 사실 하나를 '말죽거리'라는 이름에 결부시킨 것으로 보인다.
말죽거리의 정확한 위치는 서초구 양재동의 양재초등학교 북동쪽, 지금의 극동빌딩 근처가 된다. 이 곳은 남쪽으로 내(양재천)를 끼고 있고, 그 서쪽으로는 우면산의 산줄기가 머리를 숙이고 있는 곳이다. 너른 들이 펼쳐진 곳으로, 옛날에는 군데군데 많은 마을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문헌을 통해 나타나는 이 일대의 옛 마을로는 지금의 양재동에 '말죽거리' 외에 '비석거리', '잔디말'이 있었고, 도곡동엔 '독부리(독구리,독골)', 역삼동엔 '작은말죽거리', '웃방아다리', '아랫방아다리' 등의 마을이 있었다.
그러나, 그 옛날 행인들이 들러 갔던 그 마을, 그 자리엔 고속도로가 지나고 있고, 큰 건물 등이 우뚝우뚝 들어서서 옛날 말 울음이 크게 울려 퍼졌을 그 유서 깊던 곳이 어디인지 정확히 가늠하기조차 어렵게 되었다.
지금은 교통 기관이 발달하여 전국이 1일 생활권 안에 들어서 길 중간에 하룻밤 묵어 갈 여관이나 호텔이 필요 없는 세상이 되었지만, 옛날에는 여행객이나 공무(公務)로 일을 볼 사람이 지방을 갈 때 날이 저물면 묵어 갈 만한 곳을 찾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길 중간중간에 '원(院)'이라는 것을 두어서 여행객의 편의를 돌보아 주었다.
원은 조선시대에 공적인 임무를 띠고 지방에 파견되는 관리나 상인 등 공무 여행자에게 숙식 등의 편의를 제공하던 공공여관이었다. 역과 관련을 가지고 설치되었기 때문에 흔히 역과 함께 사용되기도 해서 '역원(驛院)'이란 말을 쓰기도 한다.
우리 나라에서 원이 언제부터 설치·운영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삼국시대부터 우역(郵驛)을 설치하고, 사신이 왕래하는 곳에 관(館)을 두었던 점으로 보아 이 때부터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교통 사정이 어려운 때에 원은 여행자를 도둑이나 짐승으로부터 보호하는 한편, 사신 접대와 숙식을 제공하였고, 더러는 지방에서 살림이 어려워 끼니를 잇지 못하는 사람들을 구제하는 구실도 하였다.
임진왜란을 겪고 난 조선 후기에는 원이 '주막(酒幕)' 또는 '주점(酒店)'으로 변하기도 하였다. 지금 전국에 많이 있는 '주막거리'라는 땅이름 중에는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 많다.
원은 여행객들이 자주 이용하는 곳이므로, 원이 있던 곳은 그 어느 곳보다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져 그 원의 이름이 그대로 땅이름으로 되기도 하였다. 서울 동대문 밖의 보제원(普濟院), 남대문 밖의 이태원(梨泰院), 서대문 밖의 홍제원(弘濟院) 등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장호원, 조치원, 사리원, 풍수원 등의 '원'도 모두 이 관계의 이름들이다.
글 배우리 (한국땅이름학회 회장). www.travelevent.net
한국땅이름학회 배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