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오늘은 그렇더라
너를 만나기 위하여
처음 문밖으로 나섰던 길이
울타리 너머 첫 모퉁이 돌면
쉬 만날 수 있을까
순한 풀밭 같은 마음에
빗장 열고 나섰던 그 길이
오늘은 그렇더라
보일 듯 아니 보일 듯
너는 구불구불
너무 멀리 있었고
불현듯 바람이 불 때마다
내 길이 아닌 듯 싶어
돌아오고 싶더라
울고 싶더라
선운사에서
저쯤
2월의 잔설을 끌고
산길을 내려오는 스님을 보았네
적막을 밀치고 오는 고랑 깊은
맑은 눈빛 속에서
동백이 피는지
동백이 지는지
숲이 후드득 흔들리는데
얼굴 붉어져
외면하는 옆으로
젊은 스님 합장하고 가네
선운사 숲 통째로
고요의 탑을 쌓아 놓고
선운사 꽃 피기도 전
툭툭 꽃 지는 소리로 울리고
어초장*
달이 섬진강
은어 떼를 몰고 오면
강가에서
시의 추를 던지며
별을 낚는다
그 별 손바닥에 올려
心자를 심으면
만장의 문장들이
서정의 잎새로 그늘 쳐 오고
민초들의 노래가 돌고 돌아
뻐꾹새 피울음으로
능선을 타고 넘어오는
지필묵 잃은 어초장
언제쯤 벗어 놓고 갔나
섬돌 위 밑창 닳은 신발 위로
솔바람 타고 온 새들이
한 그림자를 스치며 간다
*송수권 시인의 집필실
수선화
가만히 보면
꽃이 자기들끼리
꽃을 피우고 있는 것이 아니다
새벽 강가에서
꽃을 깨우고 있는 것은 새떼다
새떼가 어둠에 키를 꽂고
햇살을 사방으로 풀어 놓고 있는 거다
수런수런 번지며
새벽을 수선하고 있는 수선화
꽃이 세상을 피우고 있는 거다
동행
무뚝뚝한 아버지의 웃음 끈을
자주 고무줄처럼 늘려 주었던
복돌이가 집을 나갔다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표를 달고
수수께끼 같은 의구심을 쏟아 놓고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마당에 풀들이 귀를 쫑긋이 하고
대문을 오래도록 열어 두는 오후
빈 밥그릇 안으로 잠깐인 듯 꼬리를 살랑이다
햇살 틈 사이로 빠져 나가버린 귀욤이
복돌이 참 고놈이 고놈이
헛기침을 몇 번이고 허공에 부려 놓고는
그해 여름 아버지는
병원에서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바싹 마른 웅얼거림을 자식보다
더 알아들었을
컹컹,
복돌이가 집을 나간 이유를 아무도 몰랐다
끙
어머니 끙, 소리를 자주 내셨다
나는 그 소리가 듣기 편치 않아
타박을 하였다
오뉴월 논밭에서 뒤란까지
허리 펴실 때마다 붙들고 다녔던
끙,
아버지가 장미다방 아가씨 가시 꽃향기로
심장을 꾹꾹 찔러대는 늦은 밤에는 더
끙,
쑤신 팔다리 부여잡고
끙 소리 삼키며 얼마나 많은 밤을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로 들었던가
아내의 무거운 짐
헐거운 무릎으로 받치고 있다가
괜찮타 괜찮타 일어나게 힘이 되어 주었던
지상에서 가장 짧은 지팡이
끙,
그 무게 다 내려놓고 가신
어머니의 하늘에도
끙 허리 펴는 소리
가볍게 들린다
탁경자
2017년 애지 등단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전문가과정 수료
<시마을> 동인
*탁경자 시인의 첫 시집 어초장은 시와 삶, 그리고 사람을 대하는 사랑의 자세를 반듯하게 잘 드러내고 있다. 그의 시작법은 시를 위한 시를 억지로 치장하는 가식이 아닌, “누군가의 그림자에 불과한”(「물집」) 삶과 그리고 “먼바다를 가기 위해/ 그물에 탑을 달고”(「바다의 노인」) 있는 사람에 대한 진지한 접근에서 비롯되고 있어서 시가 가볍거나 추상적이지 않다. 더 나아가서는 서사의 한 축을 서정의 진경으로 확장시켜 시의 의미를 걸러내는 침착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시와 삶, 그리고 사람을 근본적으로 사랑하는 탁경자 시인이 “시의 추를 던지며/ 별을 낚는” 어초장의 시집에서 “새벽을 수선하고 있는 수선화/ 꽃이 세상을 피우고 있는 거다”(「수선화」)와 같은 수준 높은 작품들이 “끙”하고 시의 무게를 내려놓는 것을, 때로는 편하게 때로는 아프게 획득해낸다는 사실을 마주치게 된다.